신앙 선조들의 순교 기록에 보이는 ''양근''이라는 지명은 대체로, 초기 한국 천주교회 지도자 권철신(權哲身,암브로시오, 1736-1801),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42-1792) 형제의 고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는 양평군이다. 권일신의 친아들로 권철신의 양자가 되었었고, 순교한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노, 1769-1802)의 고향이기도 하다.
우리측 기록에 보면 권상문이 ''양근 한강포'' 출신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서양 기록에는 권씨들이 ''한감개(Han-Kam-Kai)''에 살았다고 되어 있으므로, 이들은 한강개 즉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 태어나 살았던 것이다. 이 곳에 전국각지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 문하에 모여들 정도로 권철신이 당대 최고의 학자 중의 하나였으므로, 권철신, 권일신 형제의 영향으로 많은 천주교 신자가 배출되었다.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 전라도 완주의 유항검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아울러 이곳은 1801년 신유(辛酉) 박해 때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1760-1795), 윤유오(尹有五, 야고보, ?-1801)와 그들의 사촌 누이 윤점혜(尹點惠, 아가타, ?-1801), 윤운혜(尹雲惠, 마르타, ?-1801) 자매 등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애초에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서 태어났는데, 그리 멀지 않은 양근 한강개로 이사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권철신의 이웃에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웃인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간 윤유일은 학문을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스승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기에 이른다. 영세 후 그는 조선 신자 대표로 북경(北京)을 방문하여 1790년 북당(北堂) 성당에 서 세례를 받았고, 이어서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후 선교사를 맞아들이는 일에 매진하다가 5년 만인 1795년 드디어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려 하다가 그해에 순교를 당하게 된다.
윤유일의 순교 이후에도 신앙 생활을 굳건히 하던 윤유오와 사촌동생 윤점혜, 윤운혜도 결국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다. 특히 언니 윤점혜는 최초의 여회장인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1760~1801)을 도와 여성 신자들의 교육에 힘썼었을 뿐만 아니라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윤운혜는 정광수(鄭光受, 바르나바, ?~1801)와 혼인하여 교리서와 성물을 보급하는 데에 앞장섰던 최초의 양반 부부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1785년 봄에 일어난 명례방 사건으로 신앙 공동체가 와해되고, 교회 지도층에서 다시 재건을 꾀하기 시작한 것은 1786년부터였다. 이때 그들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수립하였고, 이승훈을 비롯하여 다른 10명의 신자들은 신부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788년 무렵에 류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이 그 오류를 지적하여 성사 집전이 중단되고, 이어 북경에서 성직자를 영입해 와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면서 고난의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로 선발된 사람이 바로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이었다.
''인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윤유일(尹有一)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楊根)의 ''한강개''(漢江浦, 지금의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곳은 바로 그의 스승이자 이벽과 정약용, 홍낙민(洪樂敏, 루가), 류항검,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의 스승이기도 하였던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고향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녹암계(鹿庵系) 인물들이 모여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고 토론하던 마을이었으니, 1784년에 이벽이 이승훈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지고 찾아간 곳이 바로 여기였다. 이에 앞서 녹암계 인물들이 권철신, 이벽과 함께 강학(講學)을 하던 곳은 한강개 뒤편에 위치한 앵자봉 자락의 주어사(走魚寺)와 천진암(天眞庵)이었다.
양근 권씨 집안의 제자였던 이존창과 류항검은 이후 자신들의 고향인 ''여사울''(餘村, 현 충남 예산군 신종면 신암리)과 ''초남''(草南, 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을 중심으로 각각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이존창은 내포(內浦)의 사도로, 류항검은 전라도의 사도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한강개 마을에서 비롯된 천주교 신앙이 수표교와 명례방에 이어 여사울과 초남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양근은 주문모 신부님을 모셔오기 위하여 두 차례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바오로)과 그 동생 윤유오(야고보)와 4촌 여동생 윤점혜(아가다), 윤운혜(마르타)와 유한숙, 권상문(세바스티아노), 김일호, 이 아가다, 그리고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 등이 태어나거나 살다가 체포되어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곳이다. 그 중 윤유일, 윤유오, 윤점혜, 윤운혜, 권상문 등은 현재 시복 추진중인 분들이다.
윤유일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밀사였다. 이후 윤유일은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북경을 다녀왔으며, 1789년에는 라자로회 의 북당 선교 단장인 로(Raux, 羅黃祥) 신부에게 조건 세례를 받고, 남당(南堂)에 있던 북경 교구장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를 만나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어 1790년에는 다시 구베아 주교를 만나 성직자 파견을 약속받고 귀국하였다.
또한 성녀 조증이(발바라)는 양근 조동성 집안 출신으로 남이관 성인의 아내, 유방제 신부의 복사로 치도곤 합 150도를 맞고 옥에 갇힌지 6개월 후 11월 14일 순교하였다.
윤점혜 아가다는 윤유일의 4촌 여동생으로 천주교를 신앙하기 위해 처녀의 몸으로 밤에 몰래 서울로 도망쳐와 강완숙의 집에 머물며 동정녀 소공동체를 만들고 동정녀들을 지도하였고, 고향 양근으로 이송되어 참수할 때 목에서 흰피가 나왔다고 한다.
그 동생 윤운혜 마르타는 순교자 정광수와 결혼한뒤 서울로 이사하여 자기 집에 공소를 마련하고 주문모 신부님을 모셔다가 미사를 드리며 성물을 만들어 신자들에게 보급하다가 1801년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권철신의 양아들(권일신의 아들)로 처음 양근 옥에 갇혀 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 당하였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음으로 양근으로 이송되어 1801년 12월 27일 23세로 순교하였다.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는 1801년에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동정 부부(전주 중바위 성지 참조)와 쌍벽을 이루는 분들이다. 이 동정 부부는 모두 양근 출신으로 조숙은 조동성 유스티아노의 친척이고, 권 데레사는 권일신의 딸이다. 이들 두 동정 부부는 1819년 5월 21일 참수로 순교하 였다. 권 데레사의 머리를 찾아다가 성녀 조증이 발바라의 집 대바구니에 담아 두었는데, 그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달레는 전하고 있다.
이처럼 양근 성지는 순교 성인의 탄생지이고, 순교자들의 피로 신앙이 뿌려진 곳이고, 윤점혜 아가다를 통하여 한국 교회의 수도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고, 조숙, 권 데레사 동정 부부를 통하여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의 모습을 본받을 수 있는 곳이다.
2004년 6월 이 곳을 방문하였을 때는 권철신의 방계 후손인 권일수(요셉) 신부가 성지 개발을 전담하고 있었다. 권철신의 생가터인 대감마을과 주어사를 포함한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이면서 순교지인 이곳을 종합 개발하려는 전담신부의 외로운 노력에 많은 교우들의 동참이 절실하게 보였다. [출처 : 양근 성지 홈페이지]
대감마을과 주어사 - 교회의 요람지
양평 읍내에서 한강을 넘어 광주 곤지암으로 가다 보면 세월 초등 학교를 지나 대감마을(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곳에서 좀더 남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 골짜기에 주어말 동네가 있고 그 뒤로 주어사(走魚寺, 여주군 산북면 하품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높은 산자락이 바로 앵자봉이며, 그 너머에는 유명한 천진암(天眞菴)이 자리잡고 있다. 대감마을은 실학자로 유명한 이익(李瀷)의 제자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 살던 곳으로, 초기 교회에서 유명한 이벽(요한), 이승훈(베드로), 정약용(요한)이 모두 권철신의 제자였다.
1779년 겨울, 권철신과 제자들이 주어사를 찾은 이유는 대감마을에서 가까운 이곳에 모여 학문을 토론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때 이벽이 주어사 강학 모임을 찾아가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그 후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고 돌아오도록 했으며, 1784년 가을 무렵에는 이승훈이 전한 교회 서적들을 들고 대감마을로 스승 권철신을 방문하여 교리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런 다음 교회가 창설되자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과 류항검(아우구스티노)이 대감마을에서 권일신에게 세례를 받고 각각 충청도와 전라도로 내려가 복음을 전하게 되었으니, 대감마을과 주어사는 곧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지라고 할 수 있다.
앵자봉 너머의 천진암은 일찍이 이벽과 정약용이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였다. 이곳은 1970년대에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1979년에는 경기도 포천에서 이벽의 유해가 이장되었다. 이어 1981년에는 화성군 반월면에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유해가, 인천 만수동에서 이승훈의 유해가, 대감마을 뒷편의 효자봉 자락에서 권철신, 권일신의 유해가 각각 천진암으로 이장되었으며, 1981년 12월에는 경기도 광주 배알미리(현 하남시)에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인의 유해가 간신히 수습되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반면에 대감마을과 주어사는 점차 교회사에서 잊혀져만 갔다. 또 초기 교회의 인물 중에서는 정약종, 유항검만이 훌륭한 순교자로 남아 있을 뿐, 이벽과 권일신의 신앙 증거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고, 권철신을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용, 이존창 등은 배교자의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영원히 신앙을 버렸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조선 최고의 학자 정약용이 말한 "만리 밖의 성현"은 과연 누구였는지?
슬프구나 우리 나라 사람들, 비유하니 주머니 속에 사는 것과 같네.
성현(聖賢)은 만리 밖에 있으니, 누가 이 몽매함을 열어 줄 것인가?
머리 들어 세상을 바라보니, 뜻을 깨달은 이들이 드므네.
모방하기에만 급급하니, 오묘한 것을 가려낼 겨를이 없구나.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시문집 중에서)
[출처 : 차기진, 사목 244호(1999년 5월), pp.10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