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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홍천 구성포 ‘신내’를 들러보고 ‘풍천리’로 향했다. ‘신내’는 큰 포구였고 ‘홍천강’을 거슬러 오르던 소금배의 마지막 나루였다. 나루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었다. ‘신내주유소’, ‘신내교회’, ‘정미소’로 오르는 길 주변과 ‘전평(돈도루)’로 이어지는 길가에는 주막이며 여인숙이며 마방이며 국밥집 등이 들어섰다. 장꾼들이 많이 모여들기도 했지만 ‘말강구’(곡물 중개인)들도 들끓었다. 이런 장마당 풍경은 소금배가 닿는 포구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신내’를 중심으로 한 주변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풍천천’과 ‘화양강’이 만나는 어귀에 ‘봉상대’라는 봉우리가 깎아지를 듯 서 있고, 강을 끼고 바위벼랑을 돌아가는 길은 계절마다 찾아오는 철쭉이며 단풍이 한 풍경 했고, 길은 겨우 마차한대 지나갈만한 좁은 길이었지만 그 길 아래로 성난 벌력(伐力)의 물결이 휘돌아 흘렀다. 날이 저물고 해거름도 물러났다. 검은 산 위로 달이 뜨고 유리알 같은 천상의 꽃들이 피어나면 은하수를 따라 흘러가듯 물결에 몸을 맡긴 조각배에는 객고의 시름을 덜어내려는 서울 한량들의 풍악소리가 들렸고 또 목상들과 산주들 사이의 거래도 배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풍악을 실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성사되기도 했다. ‘신내’에서 먹거리로 소문났던 집은 ‘신내막국수집’이었다. ‘신내’에 들어서는 순간 만사 제쳐 놓고 막국수로 속을 채운 다음 장을 봤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 신내주유소 아래 쯤이었다 한다. 세월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터이지만 그 삶의 깊은 맛은 첨단의 문명을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 맛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가난이란 삶에서 찾아본다. 가난은 모든 것을 풍족하게 받아들이고 모든 것의 맛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처럼 베풀 수 있는 것은 마음의 넉넉함뿐이었다. 그 넉넉함은 배려(配慮)다. 보릿고개를 넘고 또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그리고 전쟁의 폐허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생의 본능이 아닐까? 그래서 풍요 속에 가난은 슬프고 어두운 생의 뒷면이라 하지 않던가. ‘풍천리’는 삶의 가치를 다시금 알게 해 준 가난의 구비가 깊었던 마을이다. 가난의 넉넉함과 야성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주의 고요를 엿볼 수 있었던 인상 깊은 곳이다. ‘풍천리’는 ‘신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한 길에 ‘신내’라는 부락이 두 곳이다. 똑같이 ‘신내’라고 쓴다. ‘홍천 구성포 신내’와 ‘춘천 동산면 신내’다. ‘풍천리’는 원래 춘성군 동산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덕밭재’, ‘변가터’, ‘새터’, ‘벌대울’, ‘쌍자리골’, ‘장재울’, ‘턱골’을 병합하여 ‘풍천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풍천리’에서 동산면사무소를 가거나 춘성군청을 가려면 고개를 두 개나 넘어야할 만큼 변방이었다. 자그마치 60여리. 아침 일찍 주먹밥을 싸들고 부지런히 걸어갔다가 일을 보고 바로 돌아서서 돌아와도 별을 보고 대문을 넘어야 하는 먼 길이었다. 그 길이 ‘가락재’, ‘느랏재’다. 그래서 동산면사무소나 춘성군청에서도 풍천리에서 왔다고 하면 순서에 관계없이 먼저 일을 봐주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런 불편함은 1973년 7월1일 행정구역 개정에 따라 홍천군 화촌면 풍천리가 되면서 다소 해소되었다. 또한 1972년 군부대의 도움으로 작전도로가 나고 버스가 들어왔지만 제 19회 세계잼버리대회가 고성군 토성면에서 열리면서 풍천리길이 확포장 되면서 ‘풍천리’가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이다. ‘춘천’에서 56번 국도를 따라 ‘구성포 신내’까지 확포장 공사와 함께 ‘느랏재’, ‘가락재’에 터널이 생기고, 56번국도 중간에 주유소며 휴게소도 들어서면서 ‘풍천천’의 아름다움을 맘껏 내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굽이가 심하고 고개가 많아 잼버리대회가 끝나면서 통행량이 많지 않은 국도가 되었다. ‘구성포 신내’에서 ‘춘천시 동면’구간은 산과 계곡과 푸른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이다. 그러나 ‘풍천리’를 풍천답게 하는 것은 ‘잣나무’다. 홍천의 5대명품 브랜드 중 ‘홍천잣’의 본향이다. ‘홍천 풍천리’에 잣나무가 식재된 것은 1935년이다. 당시 일본인 ‘야림유칠’이 조림하였다고 한다. 그는 전국을 누비며 잣나무가 생장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을 찾던 중 ‘풍천리 덕밭재 재상너미골(화촌면 풍천리 42-45 임반)’을 선택한다. 동남향의 완만한 경사를 이룬 이곳은 해발 450m 이상의 지대로 잣나무가 좋아하는 고도에다가 토양과 바람과 햇빛과 강수량이 최적이라고 한다. 현재 이곳에 100년 안 팍의 잣나무가 185ha에 이른다. 이곳에서 생산된 잣은 송이뿐 만아니라 잣 알이 실하고 잣 고유의 향이 진하다. 잣에 얽힌 이야기는 신라시대까지 올라가지만 한의학의서인 ‘본초강목’에는 신라의 잣의 효능에 대해 극찬하고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인삼과 함께 서역에까지 수출되는 최고의 특산품으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그때 생긴 이름이 ‘신라송자(新羅松子)’다. ‘잣나무’는 예로부터 신성한 나무로 전해져 내려와 사찰의 대웅전과 같이 종교적 건물을 짓는 곳에 쓰였다. 잣나무에는 ‘피톤치드’를 비롯해 ‘알파피넨’, ‘비타피넨’ 등 140여 가지의 정유 성분이 들어 있어 향균 및 살균 작용을 한다. 잣나무 숲을 걷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다. 한마디로 잣나무 숲은 녹색 건강 궁전이다. 이를 바탕으로 삼림욕장을 비롯한 숲 체험과 현대인들의 감각에 맞는 레저스포츠와 녹색산소를 마시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나누는 자연건강 프로그램을 개발해 볼 시기라 생각한다. ‘동의보감’에 실려 있는 ‘신침’은 잣나무를 이용한 새로운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신침’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중국의 한 무제가 어느 날 길을 가던 중 밭을 매고 있는 노인을 보았는데 그 노인의 등 뒤에서 흰 빛의 기운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 다가가 물었다. 노인이 말하기를 내 나이 85세 때, 노쇠하여 죽게 되었는데 어느 도사에게 ‘신침’비법을 들어 그대로 실천하였다. 그 후 몸이 차츰 젊어지면서 백발이 검어지고 빠진 이가 다시 나왔으며 하루 300리를 걷고 180세를 넘게 살고 있다고 하였다. ‘신침’을 만들려면 땅의 기운을 최고조로 빨아들이는 단옷날이나 칠월 칠석에 잣나무를 베어 베개를 만들어야한다. 이 신침은 성장호르몬과 기억호르몬이 나와 기도를 정상화시켜 정신을 맑게 해주며 순환기 장애와 뒷목의 뻣뻣함, 두통과 불면 그리고 중풍에 상당한 개선 효과가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신침’의 비법에는 잣나무와 함께 32가지의 방향성 한약재가 들어간다고 한다. ‘잣나무가 죽으면 소나무가 슬퍼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잣나무에서 나오는 성유성분이 송충이를 자라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잣나무’는 ‘Korean Pine’이다. ‘신라송’이라고도 하는데 신라시대부터 높은 산에서만 자생했던 나무로 한국에만 있다. 따라서 잣이 한국의 특산품이 된 것은 당연하다. ‘잣’은 서리를 맞고 난 후에야 제 몫을 다한다고 하여 ‘상강송(霜降松)’이라고 하며 ‘해송자(海松子)’, ‘백자(栢子)’, ‘송자(松子)’, ‘과송(果松)’, ‘송자송(松子松)’, ‘오립송(五粒松)’, ‘유송(油松)’, ‘실백’ 등으로 다양하게 부른다. ‘잣’은 자양강장제 불로장생의 식품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는 콜레스테롤을 감소시키고 피부를 윤택하게 해주는 ‘감마리노렌산’이 들어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이어트와 노화된 피부를 재생시키는 효과 또한 탁월해 잔주름과 주름골을 예방해준다고 한다. ‘덕밭재’는 홍천잣의 본향이다. ‘덕밭재’ 일원의 국유림에서 자라는 잣나무는 1982년 잣종자 채종림으로 지정되었다. 홍천군 `5대 명품(名品)중 하나인 ‘홍천잣’은 전국 잣 생산량 중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전국 제1의 생산지를 자랑하고 있으며, 고지대와 추운 날씨로 인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여느 잣보다 `알이 실하며, 맛과 향이 깊기로 정평이 나있다. 홍천의 5대 명품 홍천잣의 지리적 표시제 등록이 마무리되면 홍천은 국내 최대 잣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할 것이다. 풍천리 ‘영신분교’자리에 자리 잡은 ‘한영농산(대표 이광영)’에서는 ‘홍천 황잣’을 가공 판매하고 있다. 운동장에는 잣이 가득 쌓여있다. 잣은 보통 처서(양력 8월23일경)가 지나면 수확을 하게 되는데, 수확된 송이잣은 현지에서 직접 수매하여 가공공장으로 운반된다. 운반되어 온 잣송이는 햇볕에 며칠간 건조한 후 '탈잣기'에서 잣송이 껍질을 분리하는데 이잣을 ‘피잣’이라 한다. 피잣의 껍질을 벗겨내고 세척 하여 건조과정을 거친 후 잣 선별기에 의해 크기별로 선별한다. 선별된 피잣이 ‘탈각기’를 거친 후 찬물로 세척한 후 건조시키면 황잣이 태어난다. ‘풍천리’에서 생산되는 잣 전량을 수매하여 가락재잣마을 ‘홍천 황잣’이란 브랜드로 판매하고 있다. 잣을 따는 수고로움이 큰 만큼 명품 홍천잣은 정성을 기울여 최첨단의 가공시설을 통하여 만들어진다. 2005년과 2007년에는 청와대에 납품되기도 했다. 임금님께 진상되었다는 홍천잣의 명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풍천리는 잣나무 숲이다. ‘풍천리’에서 ‘상걸리’로 넘는 ‘가락재옛길’로 들어섰다. ‘옻샘계곡’이라는 ‘쌍자리골’이다. 마을에서 ‘옻샘계곡’을 물으니 오히려 내게 되묻는다. 까닭을 물으니 사방댐이 생기면서 ‘옻샘’은 사라졌기 때문에 대신 옛 고을 ‘쌍자리골’이라 부른다. ‘쌍자리골 옻샘계곡’은 휴식년제기간이라 출입을 통제한다. 그런데 골 안에서 화물차가 나온다. 산림관리 하는 차라고 한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으니 '덕밭재'에서 온다고 한다. 임도가 이어져있다고 한다. 휴식년제 기간이지만 잣을 따는 가을에는 작업하는 사람들에게만 출입을 허용한다고 한다. 그래서 ‘옻샘계곡’ 어귀만 통제선이 있을 뿐 ‘장재울’에서 이어지는 임도와 ‘가락재터널’ 어귀의 임도를 따라가면 언제든지 ‘쌍자리골’로 들어갈 수 있고 한다. ‘옻샘계곡’의 큰 골짜기는 ‘큰쌍자리골’과 ‘작은쌍자리골’이다. 골 안으로 들어가면 너른 밭자리가 팔을 편 듯이 떡 벌어져있다 한다. 특히 ‘작은쌍자리골’을 지나 ‘가락재구길’로 들어서면 ‘건넌골’을 지나 구비 구비 능선을 돌아 ‘상걸리’에 닿는다. 또 ‘건넌골’에서 ‘품걸리’, ‘말거리’로 이어지는 고갯길은 ‘사오랑재’다. 이름이 특이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사오랑’이란 일본군이 독립군을 추격하여 이 고개까지 왔으나 독립군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하여 붙여진 고개라 한다. ‘옻샘계곡’은 계곡 어귀에 있었다. 지금은 사방공사를 하여 다 묻혔지만 한여름에도 물이차서 발을 담그지 못했다고 한다. 옻샘이나 옻나무약물 등의 이름을 가진 샘물은 차다. 옻이 올라 속에서 끓는 옻 열을 다스리려면 어지간히 차지 않으면 효험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 ‘옻샘’에서 계곡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작은 폭포를 이루는 ‘메기소’가 있다. 풍천천의 발원을 이루는 ‘큰쌍자리골’은 휴식년제가 풀리면 올라가 보기로 하고 돌아선다. ‘가락재터널’로 들어서는 골은 ‘가락골’이다. ‘가랫골’이라고도 하는데 가래처럼 갈라졌다고 한다. 이 고개를 넘어 ‘상걸리’로 다녔는데 터널은 이 고개를 뚫은 것이다. 터널까지 오르막이 가파르다. 그 어귀에 홍천과 춘천 경계 이정표가 서있다. 터널을 빠져나가면 춘천 ‘상걸리’다. 경계를 무너뜨리고 가는 것은 바람이나 구름뿐만 아니다. 길을 가는 사람은 경계가 없다. 천천히 터널을 돌아 내려오면서 ‘풍천’이란 이름을 생각한다.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계곡은 어딜까, 아니 신나무가 어우러진 길은 어딜까? ‘옻샘계곡’ 어귀 다리 밑에는 뒤늦게 놀러온 사람들이 자리를 펴고 고기를 굽는다. 먹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있을까마는 그 뒷자리는 늘 흉물스럽다. 자연을 찾는 즐거움이 과연 이런 것인지, 자신의 욕심이 너무 크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봐야한다. 다리를 건너 내려오면 ‘큰쇠진골’이다. 어귀에는 사방댐이 있다. 골짜기가 만만치 않음을 말하는 듯하다. ‘작은쇠진골’을 지나면 ‘치락골’이다. 능선과 능선 사이에 끼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하는데 골 어귀의 ‘박충환’씨는 옛날식 방천을 쌓고 있었다. 나무를 베어다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돌을 얹는다. 물은 흘러내리고 토사는 나무에 걸려 자연스럽게 방천이 된다. 이 골짜기로 시집온 누이동생이 참 힘들었겠다. 차도 다니지 않던 그 시절 ‘구성포 신내’에서부터 걷고 걸어도 굽이만 돌고 돌았다는데 그래도 밤늦게까지 관솔불을 밝히고 기다리던 어른들이 너무 고마웠다던 말이 생각난다. ‘가락재휴게소’는 ‘치락골’ 아래에 있다. 넓은 주차장에 대여섯대의 차가 서있다. 그러나 주말이면 ‘가락재휴게소’는 모터싸이클 동호인들로 북적인다. 굉음과 함께 스피드와 스릴을 즐기는 모터싸이클의 묘미는 굽이가 많은 한적한 도로가 제격이다. 이곳에서 모터싸이클링의 다양한 정보나 기술을 전수받는다고 한다. 휴게소 뒤로 개울이 흐르고 개울 건너 '녹진골' 어귀에는 비슷한 모양의 전원주택이 들어서있다. ‘녹진골’로 들어가는 어귀에는 ‘상평길’이란 이정표가 서있는데 이곳부터 ‘옻샘계곡’ 어귀 까지를 ‘웃버덩’이라고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골짜기를 이룬 ‘풍천리’에서 그나마 버덩을 이루어 그렇게 불렀나보다. 이 골짜기에서의 즐거움은 계곡에서 고기 잡으며 천렵하는 일이었다는데 특히 뚝지(동사리)와 깔딱메기(미유기), 탱가리(동자개과), 산버드쟁이(버들치)와 가재가 많았다고 한다. ‘녹진골’은 ‘상걸리’나 ‘덕밭재’로 넘던 길이다. 응달쪽이라 한낮에도 그늘이 깊다. 골막으로 들어가니 무심촌의 오우(五友)라는 설명과 함께 무심촌이라는 문이 있다. 그것도 욕심이 아닐까.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푸른 바람이 나무를 흔들고 간다. ‘장재울’은 ‘덕밭재’로 들어가기 전 왼쪽 어귀에 ‘방커고지’라는 이정표가 서있는 골짜기다. 골 안으로 이어지는 임도는 ‘품걸리’로 이어지는 길이지만 산의 8부 능선으로 이어지는 임도는 환상적이다. ‘장재울’은 부자가 살았다하여 ‘장재울’이라하는데 어디서 무엇을 해 부자가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골짜기를 따라 이어지는 임도는 ‘변가터’로 가던 옛길이다. 지금도 ‘춘천시 품걸리’로 가는 지름길이라 많은 차들이 다닌다. 임도를 따라 이어지는 ‘가리산’과 ‘대룡산’ 능선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오히려 추한 이기주의를 불러오기도 한다. 걸어서 오르던 산행은 자동차여행으로 바뀌고 ‘오프로드(Off Road)’ 매니아들의 이색 취미공간이 되었다. 그로 인하여 고요하던 산은 엔진소리로 가득해진다. 자연과 인간의 교감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본다. ‘장재울’의 터주대감 송인관 화백의 그림 속에는 ‘관유제’에서 바라보는 풍천리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다람쥐가 계단에 떨어진 도토리를 물고 나무둥치로 들어간다. 처서가 지난 팔월 하순 오후, 서늘한 그림자를 끌고 ‘장재울’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글·사진 허 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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