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글을 잘 못쓰는 관계로 긴글이 될듯 합니다. 이해해 주시길..(여러가지 글을 자료로 썼습니다. 메니아의 칼럼부분도 자료로 썼습니다. 겹치는 부분도 있겠지만 양해바랍니다.)
제가 NBA를 보기 시작한때는 1992년부터입니다. 당시에는 제가 국민학생(;;)이었기 때문에 농구에 대한 많은 지식은 물론 없었지만 전 당시가 정말 재미있었다고는 장담할수 있습니다.
그때 드래프트에 관한 잡지를 형이 사왔는데 당시 1순위는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샤킬오닐이었습니다. 당시엔 잡지에 정말 장황하게 설명된 선수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2순위 알론조 모닝만 해도 샤킬오닐이 없었다면 무조건 1순위였다는 말이 많았고, 대학 최고 스타 크리스챤 레이트너에 잘생긴 얼굴의 토드데이, 그리고 JJ, 장래에 덴버를 이끌었던 라폰조 엘리스, 마지막으로 휴스턴의 스몰포워드로 데뷔했던 로버트 오리까지..
하지만 그때는 그런 선수들이 있었구나..하고 생각할뿐이었죠. 하지만 1년후 드래프트는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가 될정도로 뜨거웠던 드래프트로 생각납니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드래프트 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드래프트순위는 뒤에서 역순위로 주어졌기 때문에 꼴등을 하면 다음해 1순위를 확보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런 시스템이니 당연히 시즌 중반이 지나고 플레이오프탈락이 확정된 팀들끼리는 서로 꼴등을 다투는 기이한 현상도 자주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리그에서는 문제점을 느끼고 플레이오프에 떨어진 팀끼리 모여서 추첨을 하는 방식을 채택하였습니다. 이런 시스템이라면 꼴지팀이 1순위를 차지할 가능성은 가장 많지만 플레이오프 탈락팀중에 승률이 가장높은 팀도 1순위를 차지할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방식입니다(지금하고 비슷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다시 드래프트 이야기로 넘어가면, 샤킬오닐이 나왔던 드래프트에서는 다들 아시다시피 올랜드매직이 1순위를 가졌습니다. 당연히 오닐을 뽑았죠. 올랜드 매직은 샤킬오닐의 무지막지한 효과로 아쉽게 플레이오프에 떨어졌지만 플레이오프 탈락팀중 가장 승률이 높은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큰기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1993년 드래프티전에 가장 주목을 받았던 선수는 메이스 에드워드 크리스토퍼 웨버 3세라는 풀내임을 가지고 있는 웨버였습니다. 최근 루키에도 소개된봐 있듯이 FAB FIVE의 일원중 한명인 웨버는 가장 가치있는 선수였습니다. Fablious (경이로운) Five 는 미시간대학이 1학년 모두를 주전으로 내세워 당시 토너먼트에서 열풍을 일으켰던 5명을 말하는 말입니다. 제이런 로즈.주완하워드는 현재도 볼수 있고, 지미킹,레이잭슨도 아직까지 웨버와 연락을 하고 있답니다. 당시 미시간은 수많은 파란속에 당시 최강팀인 그랜트힐, 레이트너가 버티는 듀크대학에 결승에서 무너지지만 정말 대단했습니다. 2학년이 된 이들은 역시 결승까지 안착했고 당시 최강자중 하나였던 노스케롤라이나에게 무너집니다. 그때 그 유명한 타임아웃사건도 터지고요..당시 웨버에 대한 비판은 정말 심했습니다. 한간에는 웨버가 이사건때문에 새가슴이 되었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런 웨버는 충격에 견디지 못하고 일단 드래프트 신청을 냅니다.
웨버와 함께 가장 주목받던 선수는 7-5의 센터 브래들리였습니다.당시 브래들리에 대한 평가는 엄청났죠. 약간의 성격적인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었지만 키가 큰선수에게는 당연히 메리트가 있기때문에 스카우터들은 웨버와 브래들리의 2파전을 예상했습니다.
센터진에 웨버와 브래들리가 있었다면 가드에는 앤퍼니 하더웨이가 있었습니다. 멤피스대학의 슈터 스타이자 6-7의 키로 포인트가드까지 가능한 이 다재다능한 선수를 스카우터들은 벗어날수 없었던거죠.
이렇게 관심을 끄는 상황에서 드래프트는 시작되었습니다. 드래프트는 어이없게도 가장 확률이 낮았던 올랜드 매직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올랜드 매직이 1순위로 뽑혀버린거죠. 올랜드 매직 프론트진은 정말 행복한 고민에 빠져버렸습니다. 웨버와 브래들리를 사이에 두고 깊은 고민에 빠진거죠. 웨버를 뽑아서 샤크와 콤비를 이루게 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것은 좀 아쉽고, 브래들리는 샤크때문에 벤치로 두기엔 또 아깝기 때문이죠. 그리고 올랜드 매직 팀 사정이 당시에는 뛰어난 가드를 필요로 했던것도 큰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샤킬오닐에게 큰돈을 준 올랜드로써는 웨버와 브래들리에게 큰돈을 주기에도 무리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결정을 페니 하더웨이로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페니를 뽑자니 또 아까운것이 웨버나 브래들리에 비해 1순위로 뽑기는 뭔가 허전하다는것이었습니다. 2순위 필라델피아와 3순위 골든스테이트의 스카우팅에도 신경이 곤두서는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드래프트 당시 올랜드는 1순위로 웨버를 선택하기로 합니다. 브래들리보단 실력면에서는 낫다는게 평가였습니다. 2순위 필라델피아는 당연히 브래들리를 선택하였고, 골든스테이트는 페니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드래트프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하는 드래이드가 이루어집니다.
당시 골든스테이트의 감독이었던 돈넬슨은 크리스 웨버에 대해서 극찬하였고, 웨버를 데리고 싶다는 의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올랜드역시 페니를 데려가고 싶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구요. 이런 두 구단은 서로 통하게 되고 1순위와 3순위의 드래프트픽의 차이를 생각해서 트래이드에 조건을 달아 트래이드하기에 이릅니다.
1순위로 올랜도가 웨버를 지명하고.. 만약 식서스가 2순위로 브래들리를 지명할 경우 골든 스테이트는 페니를 지명하고 다음과 같은 딜이 이루어진다.. 웨버와 페니를 트레이드하되 골든 스테이트는 페니에 95년도 97년도 99년도 1라운드 드래프트권까지 얹어서 올랜도에 넘겨준다.. 그러나 만약 2순위에서 식서스가 페니를 지명한다면 딜은 무효화된다..
이런조건의 트래이드 딜은 결국 성사되게 됩니다 (올해도 샬럿과 클리퍼스간의 딜이 이 딜과 유사하다면 유사하다고 할수 있겠네요) 당시 드래프트 1순위의 가치를 생각할때는 정말 획기적인 딜이었습니다. 당시 돈넬슨의 웨버 사랑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었죠.
올랜드 입장에서는 원하던 페니와 3장의 1라운드 픽을 손에 얻었으니 정말 횡재한거나 다름없는 트래이드였구요. 그리고 프로에 와서 일으킨 페니-샤크의 엄청난 센세이션을 생각한다면 정말 성공적인 트래이드라 손꼽을수 있겠습니다. 샤크또한 페니를 매우 반기었습니다. 이들의 반란은 나중에 올라주원과 드렉셀러, 오리, 케니스미스등에 의해 4-0스웹으로 끝나지만 그들의 신나는 행진은 요즘엔 느끼수 없는 뭔가의 카타르 시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죠^^
다른 이야기이지만 지독한 웨버사랑을 보여준 돈넬슨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웨버는 신인으로써는 역대 최초로 1000득점-500리바운드-250어시스트-150불록-75스틸을 기록하면서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리면서 맹활약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돈넬슨과 웨버는 다음시즌부터 불화를 일으키면서 약간의 폭력사건까지 발생했던것을 생각한다면 좀 씁슬하기도 합니다. 결국 웨버는 다른팀으로 갔고요. 지금도 댈러스와 매년 플레이오프에서 만나면서 웨버와 돈넬슨은 자주 얼굴을 마주합니다. 두 사람간의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할만 한것 같습니다.
보고싶은녀석..군대잘갔다 와라..(킹스로..-_-)
첫댓글 좋은글...^^ 아래 사진 정말 부럽네...-_-;;;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