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때로는 상대방의 말을 잘못알아 들을 때가 있지요. 특히 전문분야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사실 성경도 전문분야 중에서 전문분야의 글 입니다. 사실 목사학교를 다닌다고해도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말씀입니다. 이는 지식보다 깨달음이 우선이 되는 부분이지요.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여 자기만의 이론을 발견하여 증명하는 논문을 내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까요?? 사실 믿음을 깨닫지 못하고 지식에만 머물러 있으면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목사도 서리집사도 별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목사가 되는 것이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목사가 안된만 못하기에 염려가 되는 것이죠.
초보자가 가장 오해하기 쉬운 것이 율법입니다.구약은 율법을 지켜라 고 하고 신약은 은혜라고 하니 갈팡질팡 합니다. 더우기 율법주의로 빠져 버린 사람들은 잘못된 복음을 전파하며 살고 있습니다. 말씀제목과 같이 자유를 줄려고 율법을 활용하고자 하는데 이 율법이 전부인 것처럼 곡해해 버립니다. 규칙과 법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율법은 따라하고 배우기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봉사하고 도네션하라고 하면 잘 따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인정받고 천국도 덤으로 얻이니 천화만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율법적인 사고와 생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 입니다. 그래서 다음 말씀들이 길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겠죠. 한 번 차근히 생각해 봅시다. ===
착하게 살겠다고 했으면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도 잘듣고 선한 행위를 하기 위하여 봉사도하고 불우 이웃에게 기부도 합니다. 화도 적게 낼려고 참습니다. 1년을 잘하다가 2년째 다른 사람들이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봉사를 멈추었습니다...
사실 마음 먹은데로 잘 되지 않는 것이 인간만사인데.. 그렇게 1년 했어면 대단한거죠. 그럼 내가 율법을 지킨 것인가요? 아니면 지키지 못한건가요?
“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하게하는 온전한 율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를 깨달은 자는 어떤 자입니까?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의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여 하심이니라”(롬8:3,4)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2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이 율법의 자유는 내가 율법의 행함을 완전히 지킴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이루어 놓으신 은혜의 자유입니다. 야고보는 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다시금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자기의 얼굴을 거울로 보고 와서 금방 그 얼굴의 표정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 얼굴은 자신의 몸과 속마음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앞에 서있는 상대방은 그의 얼굴의 표정을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는 율법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와 같다고 합니다. 왜 그렇까요?
하나님의 율법을 깊이 새겨보고 그 뜻을 깨달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진리의 도는 거냥 듣고 잊어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은 법의 종이되어 얽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케하기 때문입니다.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느니라”
이 법은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어 자유합니다. 이는 종이 아들이 되어 지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법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유가 없으면 말씀을 지킬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불가능성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주인으로 살기 때문에 그가 인도하는 삶입니다. 더 이상 율법이 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가 행하고 인도하는 모든 새 삶이 말씀에 합당한 것이기에 자유합니다.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29-31)
무엇을 행하던지 말씀에 합당한 삶이 되고 맙니다. 무엇을 위하여 먹을 수 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먹는 것이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안먹는 것도 율법의 행함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누구든지 종교적 행위나 말을 통하여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자기의 마음을 바로 알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헛것이 되고 만다.
“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종교적 행위를 통한 하나님 앞에서 경건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경건은 바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과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도움을 받고도 아무른 것도 되돌려 주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베푸면 나를 잃어 버리는 행위입니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깨달음 없이 그냥 고아를 찾아가서 돈을 주면, 이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다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에 고아와 과부를 도와 주는 행사를 준비하죠.
이 처럼 세상의 삶이 율법의 삶입니다. 그 행위로 판단을 받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 행위를 완벽하게 하고 판단을 안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판단을 안 받기 위하여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 앞에서는 거룩하게 살지만 은밀한 곳에서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인간의 한계요, 불가능성을 말합니다. 이를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율법으로 부터 자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 말씀처럼 그 삶은 바로 주님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은 하나도 기억에 없고 주님의 한 일만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