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 왔다 발견한 야식의 별천지
외국을 여행할 때 제일 당혹스러운 것은 상점의 영업시간이다. 게으름을 피우다 조금만 늦게 장을 보러 나가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곳이 아무 데도, 정말 아무 데도 없다.
혹 있다고 하더라도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 그럴 때마다 24시간 불을 밝히고 친절하게 고객을 맞이하는 우리나라의 '시간을 파는' 밤문화가 진심으로 그리워진다. 우리나라에선 돈이 없어 못 사지 시간이 늦어 뭔가를 사지 못한다는 개념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미얀마는 밤이 되면 적막한 어둠의 도시로 변하는 나라다. 지금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집이 아주 많고, 웬만한 번화가의 상점이나 호텔도 전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자체 발전기를 돌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렇다 보니 미얀마에선 늘 전기와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 미얀마에서 야시장이라는 것은 존재 그 자체로 꽤 희귀한 구경거리다.
- ▲ 동대문의 새벽은 최첨단 백화점이다. 한두 시간으로는 도저히 구경하기 어려운 별천지 같은 곳. 하룻밤을 온전히 투자해야 한다. / 조선영상미디어 이경민 기자 kmin@chosun.com
- ▲ 미얀마 제쪼시장의 중고책 가판 풍경 / 황희연씨 제공
시계탑을 중심으로 거리 초입에 접어들면 입이 떡 벌어지는 장관이 펼쳐진다. 휘황찬란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소박해서다. 야시장 제쪼는 야시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밤새 을씨년스러운 어둠에 휩싸여 있다. 상인들은 희미한 건전지 조명을 좌판 앞에 세우고 허름한 물건들을 팔고 있다. 중고 책이나 잡지, 중국산 생활용품, 한국 스타들의 사진이 담긴 팸플릿, 알록달록한 옷, 시장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길거리 음식들이다.
관광객 입장에선 솔직히 제쪼시장에서 사고 싶은 물건이 거의 없다. 어려움을 감수하고라도 트렁크에 담아가고 싶은 품질과 디자인을 갖춘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거리 음식만큼은 여느 시장 음식보다 훨씬 수준급이다. 우리나라 추어탕과 비슷한 미얀마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 모힝가는 제쪼시장에서 맛본 것이 정말 최고였다.
미얀마의 제쪼 야시장에 비하면 동대문 새벽시장은 최첨단 백화점에 가깝다. 늦은 밤 동대문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마련이다. 밀리오레, 두타, 헬로apm, 케레스타 등의 쇼핑몰 입구에선 매일 밤 댄스 공연이 다채롭게 펼쳐지고, 건물 옥상 전광판에선 레이저빔보다 강력한 조명이 밤새 흘러나온다.
특히 장관은 조명 아래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장충동과 청계천로를 사이에 두고 한쪽 거리에선 패션 트렌드를 주도하고픈 젊은이들이 경쾌한 댄스음악을 벗 삼아 삼삼오오 걸어 다니고, 한쪽 거리에선 옷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큰 봉투를 서너 개씩 손에 쥐고 부지런히 물건을 실어 나르고 있다. 동대문 새벽 도매시장의 풍경이다.
동대문시장의 진가는 바로 이곳에서 나온다. 찻길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제일평화시장, 누존 등이 자리 잡고 있는 도매시장은 옷으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의 하루가 시작되는 곳답게 치열한 생활의 열기로 들끓는다. 길거리 좌판에선 지갑·신발·가방 등 갖가지 패션 소품을 파는 사람들이 목청이 쉬어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다. 콘서트장처럼 정신없는 거리 상점을 훑어본 뒤 대낮보다 환한 조명으로 치장한 건물에 들어서면 동대문 새벽시장 관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소매 손님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친 시장 분위기를 이겨내고 미로 같은 상점을 누비며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아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느 정도 구경을 마쳤다면 이제 야식을 섭렵할 차례. 동대문 새벽시장의 대표적인 명물 음식은 비빔국수와 납작만두를 비롯한 각종 길거리 음식들이다. 제일평화시장 구관 지하 매점(게이트 4번으로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은 특히 동대문 최고의 맛집으로 꼽히는 곳. 2.5평 작은 평수에 고작 테이블 3개가 전부지만 하룻밤 손님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다. 예약 후 1~2시간씩 기다리지 않으면 매콤한 비빔국수를 맛보기 어렵다.
제일평화시장 근처 노점에서 파는 음식들도 빼놓을 수 없는 새벽시장의 명물이다. 찹쌀로 얇게 빚어 눌러놓은 만두에 잘게 썬 양배추와 소스를 버무린 납작만두, 각종 야채와 해산물, 고기를 라이스페이퍼에 야물게 싼 월남쌈, 푸짐한 돼지고기에 야채를 잔뜩 얹은 수제 햄버거 등이 피곤에 전 시장 사람들의 배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준다.
동대문 새벽시장은 2010년 3월부터 새벽시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영업시간이 대폭 늘어났다. 덕분에 평일 오전 10시부터 새벽 4시 30분까지, 일요일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 30분까지 동대문 새벽시장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짐작하겠지만 이곳은 한두 시간으로는 도저히 구경하기 어려운 넓은 별천지 같은 곳. 새벽을 모두 헌납하겠다는 각오로 찾아가야 진가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 찾아가는 길
지하철 2, 4, 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하차 후 1번 출구로 나오면 청계천로와 장충동을 사이에 두고 양옆에 복합쇼핑상가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이 중 동대문운동장 방면, 제일평화시장을 중심으로 도매상가를 둘러보자. 지하철 1, 4호선 동대문역 6번 출구에서도 동대문 새벽시장 진입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