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관, 젠킨스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 어조에서 풍겨나오는 분위기는 사뭇 위압적이었다. 카린은 너무 황당한 나머지 뭐라 대꾸도 못하고 벌린 입만 뻐끔거렸다.
"카린, 무슨 일입니까?"
마차 안에서 가만히 정황을 살피고 있던 드라이엔이 밖으로 나오면서 물었다. 에시카도 그 뒤를 이어 마차에서 내렸다. 카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 으음,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날 살인죄로 체포하겠다는데요? 헛, 참. 4명이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이 많이도 죽었네."
"일행 분들이십니까?"
젠킨스가 드라이엔과 에시카를 훑어보며 질문했다. 드라이엔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네, 그렇습니다만."
"여행 중이신 듯 한데, 일정에 차질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분은 저희가 모시고 가야 하겠..."
"누구 마음대로."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허리에 찬 검집을 움켜쥔 에시카가 카린의 앞을 막아 선 채 젠킨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켜 주시죠."
"싫다면?"
"그렇다면 공무집행 방해죄로 동료 분과 함께 연행할 수 밖에요."
"공무집행? 엉뚱한 생사람 싸잡아 살인자로 체포하는 게 당신네들 공무원의 일인가? 월급 받아먹고서 할 일이 어지간히도 없나 보지?"
에시카의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젠킨스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자신의 은빛 안경테를 살짝 치켜 올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적 근거가 없는 일방적인 비방은 무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에시카와 수사관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뭐라고 한 마디 더 비꼬려던 에시카는 갑자기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 뭔가 흐릿한 영상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저도 바쁜 사람입니다. 더 이상의 이런 의미 없는 실랑이로 인한 시간 낭비는 사양하겠습니다. 굳이 하고픈 말씀이 있으시다면 법정에서..."
"알았어. 데리고 가."
"예...?"
"데려 가라고. 체포한다며?"
"......"
에시카는 얘기 다 끝났다는 얼굴로 검집을 쥐고 있던 손을 풀어 팔짱을 끼고 수사관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서 안 데려 가고 뭐하냐, 라는 듯이.
너무 갑작스런 그녀의 태도 변화에 당황한 것은 젠킨스 수사관 만이 아니었다. 에시카가 자신을 변호하는 동안 천군을 얻은 듯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린은 펄쩍 뛰었다.
"대자앙! 날 버릴 셈이야?!"
"네가 마치 나의 뭐라도 되었던 것처럼 얘기하는군."
"읏... 자, 잔인해!"
그가 울상을 짓거나 말거나 에시카는 나 몰라라 하는 표정이었다.
"자, 카린. 어쩔 수 없게 됐군요."
드라이엔이 카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카린은 처절한 배신감을 느끼며 외쳤다.
"드라이엔까지! 난 정말 억울하다고요!"
"네, 물론 카린이 무고하다는 건 우리가 누구보다 잘 알죠. 아마도 무슨 오해가 생긴 모양입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으로 보아 당장 그 오해를 풀기는 어려울 듯 하군요. 그러니 미안하지만 카린, 일단은..."
"...저 사람들 따라가서 유치장에 갇혀 있으라구요?"
불퉁한 얼굴을 하는 카린의 귀에다 대고 드라이엔이 작게 속삭였다.
"조금만 참아 주세요. 아마 곧 풀려나게 될 겁니다. 제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요."
* * *
"그래서, 결과는 어떻습니까?"
"지금 다 알면서 일부러 확인사살 하시는 거죠? 심술궂으시긴."
"하하하,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원래 성격이 이렇게 생겨먹은 걸요. 그리고..."
"유유상종이라고 말씀하시고 싶은 거죠? 굳이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저 괴팍하고 심술궂은 건 이 왕궁 사람들 전체가 다 아는 사실이니까 일일이 상기시켜 주실 필요는 없어요."
중년 사내는 모카 향이 피어오르는 커피잔을 든 채로 유쾌한 듯 껄껄 웃었다. 시녀를 내보내고 직접 화장대에 앉아 파도처럼 굽이치는 자신의 밤색 머리칼을 빗고 있던 아일레니아는 한숨을 포옥 쉬며 말을 이었다.
"결과는 역시나죠, 뭐. 페릭스 성격 아시잖아요? 퇴짜 맞았어요."
"오, 이런. 우리 가련한 왕녀님,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미리 예상했던 바니까 상심이고 뭐고도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고소해하는 표정은 좀 집어치워 주시겠어요? 불쾌해질 것 같으니까."
"하하하하, 네. 알겠사옵니다, 왕녀님."
아일레니아는 두어번 더 빗질을 하다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신경질적으로 빗을 내려놓고 화장대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사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서 말했다.
"나가죠. 날씨도 좋은데 산책하면서 얘기해요."
"으흠, 왕녀님. 이 몸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기력이..."
"엄살 피우지 마세요. 전 지금 이 빌어먹을 코르셋 때문에 숨 쉬기도 힘든 상황이라구요. 누구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평소보다 1인치나 더 졸라 맸다고는 죽어도 말 못해요. 아무 소득도 없는 광대짓이었지만. 제 고충을 직접 한 번 체험해 보실 생각 없으세요? 그럼 그냥 여기 앉아서 얘기할게요."
"하하하... 사양하겠습니다. 으음, 산책을 하는 쪽이 더 나을 것 같군요."
라르카스 레카시엘.
위클리프 왕실 수석 마법사 겸 마학자. 올해로 50대 중반을 넘기게 된 나이지만, 웬만한 젊은이들 이상으로 건장한 그는 겉보기에 40대 초중반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자랑삼아 근사하게 기르고 있는 구레나룻과 수염을 깍아 버린다면 더 젊어 보일 터였다.
그는 왕녀를 정중하게 에스코트하며 화원으로 향했다.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4월. 브리스톨 궁전의 화원에는 그 여왕의 가신인 봄꽃들이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피어나 자신의 충성심을 다투어 뽐내고 있었다.
"고정 관념이란 정말 무서운 거예요."
아일레니아는 손을 뻗어 홍자색 시클라멘(cyclamen) 한 송이를 꺽어 들고서 말했다.
"궁전을 방문해서 이 화원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죠. 이 나라의 왕녀는 원예나 꽃꽂이에 상당히 관심이 많구나, 하고요. 손님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제 앞으로 진귀한 꽃 바구니나 꽃씨, 구근들이 왕창 왕창 선물로 날라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사실 이건 오라버니의 취미이고, 전 꽃 따위엔 아무런 관심도 없는데 말이에요."
"보편적으로 원예나 꽃꽂이는 여성들의 취미이니까요. 국왕 폐하와 같이 예외적인 경우도 있으시지만 말입니다."
"그 보편적, 이라는 게 바로 고정 관념이란 말이에요. 이 꽃만 해도 그래요. 시클라멘, 꽤나 낭만적이고 귀족적인 이름이죠? 실제로 귀족 여성들 중엔 이 꽃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가지고 있는 경우도 꽤 많아요. 아이리스나 릴리, 로즈 같은 이름처럼요. 하지만 시클라멘의 원산지인 세네카 올쟈스 지방에서 이 꽃을 부르는 명칭을 그들이 안다면 아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을 걸요."
"어떤 명칭인데 그러십니까?"
아일레니아는 장난스레 피식 웃으며 말했다.
"Piggy Bread. 돼지의 빵이란 뜻이죠. 편구형의 덩이줄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에요."
"하하하하... 정말 낭만과는 거리가 먼 이름이로군요."
"그렇죠?"
왕녀는 생긋 웃었지만 이내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시클라멘을 바닥에 떨구며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르카스."
"예, 왕녀님."
"...오라버니는 영리한 분이세요."
"예."
"그리고 필요에 따라 무섭도록 냉혹하고 잔인한 분이기도 하죠."
"......"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라면, 설사 그 상대가 여동생인 저라 해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벨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에요."
꽃 향기를 실은 바람이 머리칼을 흩날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뺨을 쓰다듬었다. 아일레니아는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공조팝나무의 작고 하얀 꽃잎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라르카스."
"예."
"전 두려워요."
"무엇이 말입니까."
"...두려워요. 저 자신이......"
왕녀는 섬세하게 어루만지던 공조팝나무 줄기를 별안간 비틀어 꺾어내더니 바닥에 떨어트렸다. 순결한 흰빛의 꽃을 구두로 짓밟는 그녀의 아마빛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
처참하게 으깨진 꽃의 잔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일레니아는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