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들르지 못했던 세종대왕 역사 문화관으로
이곳 세종대왕 역사문화관은 세종대왕면 왕대리 949-12번지에 위치해 있다.
왕대리라는 이름이 심심찮게 많다.
왕대 닉네임을 도용한거 아녀????
▽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 훈민정음이 먼져 반겨준다.
느그들 나 보러 오니라고 고생했다고 함시롱
세계 역사상 글자를 만든 연도와 만든 사람이 명확한 경우는 아마도 한글이 유일할 것이다.
배우기 쉽다고 하여 하룻저녁 글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 한글은 한자문화에 젖은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이게는 참 못마땅한 글자였다.
한글을 배운다는 게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여 그들은 한글을 언문, 언서, 반절 그리고 암클이라는 비하하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사대부가 한글을 쓴다는 것은 체면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절, 사대부 아니 높은 벼슬을 했던 학자들 중 한글로 글을 쓴 사람들이 있었다.
정철, 윤선도 등 등
그들이 남긴 한글은 국문학사에 빛이 나고 있지 아니한가.
훈민정음 내용중 '나랏말싸미 듕귁과 달아'라는 표현이 있다.
훈민정음이 반포될 당시 중국은 중국이라고 표현하지 아니하고 명나라였으며 그 이전에도 중국이라고 국호를 가진 나라가 없었다.
어상(어윤호)의 변에 따르면 여기서 중국이라는 말은 명나라가 아니라 궁중을 가르키는 말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궁중에서 쓰는 말과 서민이 쓰는 말이 다르다는 말인가?
▽ 전시실로
▽ 전시실에서 처음 만난 세종대왕의 생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 역사는 그를 성군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앞에서도 여러번 설명하였기에 중복되는 식상한 내용들은 생략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기록하자.
이 초상화는 김기창 화백이 그린 것으로 만원짜라 지폐에 수록된 얼굴이다.
사실 영정이 태조나 영조처럼 전해 내려오는 게 없는 관계로 화가의 상상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김기창 화백은 가장 미남형이며 인자한 상을 그리느라 고심을 했겠지.
헌데 세종은 운동은 거의 아니하고 고기를 좋아하여 뚱뚱했다는 게 통설이다.
그리고 그는 평생 병마와 싸우며 힘겨운 삶을 살았다고 한다.
눈병에 당뇨에 피부병에 그외 잡다한 병을 달고 살았다고 하니 사실 세상 모든게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자신 몸 하나는 마음대로 하지 못한 어찌보면 참 불행한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한참 나이인 54세에 세상을 뜬다.
하긴 54세이면 단명 집안인 조선왕들의 평균 나이를 넘은 나이이지만 그가 좀더 오래 살고 큰아들 문종도 오래 살았더라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세종대왕의 집안 내력을 한번 열거해보다.
할아버지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위인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역적이다.
아버지는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패륜아(?)이며 그의 아들 수양대군도 조카를 죽이고 임금의 자리를 찬탈한 역적이 아니던가.
▽ 세종의 즉위도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아직 숭하하기전 왕위에 오른다.
22살의 청년 세종
▽ 왕자 시절의 독서는 지독했다는 표현을 쓰는 게 맞을 것이다.
백독백습, 백번 읽고 백번 쓴다는 말이다.
그는 단 한권을 읽더라도 내용을 숙지하지 못하면 안읽은 것과 다를바 없다는 생각으로 독서에 열중했다.
타고 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병을 앓고 있을 때도 책을 눈에서 떼지 않았다고 하니 두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분야도 역사, 과학, 농학, 천문, 수학 등 모든분야를 두루 섭렵하였다는 데 그의 그런 노력의 결과는 왕위에 오른 후 신하들과 학문을 논할 때 그 어떤 신하도 학문면에서 그를 따라오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 대마도 정벌
고려말부터 우리나라는 왜구의 침탈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성계는 황산전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그 위협을 일부 감소시켰으나 불씨는 여전히 남아 해안마을을 위협하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
왜구의 근거지는 바로 대마도였다.
세종 1년 정부는 배 227척에 군사 1만 7,285명과 65일간의 식량을 배에 싣고 대마도 정벌에 나선다,
출정군이 대마도에 다달으자 대마도 주민들은 왜구가 돌아오는 것으로 착각 술과 고기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를 할 수 있는 왜구들은 조선의 해안가를 약탈하고 있었고 대마도에는 전투를 할 수 있는 병력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마도 정벌의 총책임자는 이종무 장군
정벌군은 대마도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대마도에 주둔한 왜구들이 사용할 남은 배 129척 중 20여척을 제외한 남어지 선박은 불태워 없애버리고 114명을 참수하고 21명을 사로잡고 131명을 포로로 획득 한 후 대마도 도주 종의지는 이종무 장군 잎에서 머리를 조이리며 항복한다.
잠깐 적의 우두머리가 항복을 하면 그 땅은 아군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때 대마도를 우리땅으로 만들었더라면 하는 참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사실 대마도는 땅이 척박하며 농사를 지을 땅이 부족했던 쓸모 없는 땅이었다,
대마도 정벌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왜구의 출몰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른 후 쌓은 업적 제1호였다.
헌데 대마도 정벌은 사실 상왕으로 있던 태종의 지휘하에 이루어진 전투였다.
▽ 지음도
세종은 불가사의한 인물이었다.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는 학문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전문가적 위치에 도달해 있었다.
음악의 천재 박연을 발탁하여 궁중음악인 아악을 정리하고 정간보라는 악보까지 만들었다는 사실을 혹 알고 있는가.
하룻밤 사이에 종묘제례악이라는 궁중음악을 작곡했다는 세종
세종은 고려 예종 11년(1116)에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편종과 편경을 우리 실정에 맞도록 보완 발전시키기도 했다.
▽ 어디 그뿐이랴.
서운관이라는 관청을 만들어 천문과 지리 기상을 연구하기도 했다.
사실 서운관은 고려시대부터 운영되던 관청이었으나 일상생활에 깊숙히 파고들어 백성의 생활에 직접적인 혜택을 부여한 것은 세종 때 부터이다.
▽ 잠시 쉬면서 눈 좋은 분들 세종대왕의 업적에 대하여 읽어 보시길.
▽ 주자소
주자소는 활자를 만들어 책자를 발간하는 곳이다.
이 주자소는 태종 4년(1403)에 승정원의 직속기관으로 설치되었는데 세종조에 이르러 활발히 그 임무가 수행되었다.
태종3년에는 최초의 구리 활자 계미자를 만들었고 세종 16년에는 갑인자가 만들어 졌는데 주자소는 세계 최고의 인쇄기술 혁신을 이루어낸 곳이다.
▽ 이만주 정벌도
이만주는 오랑캐인 여진족의 대추장이다.
세종 15년에 최윤덕 , 이순몽으로 하여금 군사 1만 5천여명으로 이만주를 비롯 여진족 400여명을 소탕하고 소와 말 700여마리를 빼앗아 오는 쾌거를 이룬다.
여진족은 그 후 중국 대륙을 통일 청나라를 세우며 막강한 황제국으로 등극한다.
청나라의 선조를 정벌한 세종대왕의 찬란한 업적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