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의 길, 그 지난(至難)한 여정
♣ 소련의 북한 점령과 38선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하지만 우리의 38선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여러 가지 가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난다. 만약에 이랬다면, 만약에 저랬다면, 하면서 원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결국에는 우리 탓이지, 누구를 탓하겠는가마는, 그래도 일본에게 특히 천황에게 억한 감정이 있다.
이승만은 그의 명저 『Japan Inside Out』을 일본의 천황제로부터 시작했다. 천황을 유일신으로 받드는 잘못된 종교가 비정상적인 애국심으로 발전하여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바로 그 천황이 문제였다. 신사 참배를 강요해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혔던 천황제가 민족 분단의 기초가 되는 38선에도 영향을 끼쳤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사망자는 7만 명 정도였다. 일본의 지도층 내부에서는 민족이 멸절되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전부터 제기되었던 항복하자는 주장이 거세졌다.
그 무렵 소련은 일본을 공격할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최대한 참전시간을 늦추는 것이 기본 전략이었다. 일본의 힘이 다 빠진 다음에 쳐들어가서 희생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본래 소련군은 8월 11일에 전쟁을 시작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종전(終戰)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판단에 8월 9일에 공격을 시작했다. 바로 그날, 나가사끼에 한 한 번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일본은 항복을 결정하고 미국에 통보했다.
일본이 항복을 통보한 그날에 곧바로 항복이 선포되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소련이 한반도에 도달하기 전에 전쟁이 끝나버렸다면, 분단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항복을 통보하고 나서 항복이 선포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이때 시간을 끈 문제가 천황제였다. 천황제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의견이 달랐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권위를 최대한 유지하려고 했다. 미국 내에서는 천황은 전쟁 범죄자이므로 사형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많았다. 하지만 지일파(知日派)들은 천황을 제거하면 일본을 점령한 뒤에 통치하기가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천황 한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 때문에 미국과 일본의 협상에 시간이 걸렸다.
결국 미국의 정책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천황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천황제를 놓고 미국과 일본이 줄다리기 하던 시간은, 분단의 비극이 잉태된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소련은 만주로 쳐내려왔고 한반도 북부까지 진군(進軍)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급해진 미국이 한반도를 둘로 나누어 미국과 소련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진행하자고 제의했다. 그 업무 분담선이 북위 38도선이었다.
만약 소련이 예정대로 8월 11일에 참전했다면, 만약 일본이 8월 9일에 항복을 통보한 즉시 종전이 발표되었다면, 우리 역사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소련이 아예 한반도에 발을 붙이지도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소련은 예정보다 일찍 쳐내려왔고, 일본은 예상보다 길게 시간을 끌었다. 소련은 늦추어지고 일본이 앞당기는 편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데, 정반대가 되어버렸다. 역사에서 타이밍이 이렇게 중요하다.
일본이 항복을 통보하고 발표하기까지의 시간은 불과 일주일이다. 사실 길다고만 볼 수는 없는 시간이다. 하지만 수십 년의 비극적인 세월을 잉태한 일주일이었다. 한낱 우상 숭배에 불과한 천황제를 노혹 미국과 일본이 씨름하는 사이에 국토 분단의 씨앗이 뿌려졌다. 우리로서는 두고두고 아쉽고 분한 마음이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붉은 군대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붉은 군대와 연합 군 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
왜놈들이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 사람들을 멸시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모욕한 것을 당신들이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게 창작한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이 성명서를 사실로 간주하여 소련이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군이라고 가르치는 한심스런 책들도 이고 교사들도 있다. 해방 이후 소련과 북한의 행적을 추적함에 있어 기본 전제가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이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산주의의 방법론으로 볼 때, 성명서니 선언이니 하는 것은 그네들의 목적을 위해서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 당시의 소련은 혁명과 숙청, 세계 대전으로 말미암아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형편이었다. 소련군의 식량 보급 조차도 어려웠다. 따라서 붉은 군대의 유지와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약탈이 필요했다. 소련은 세계 대전을 통해 획득한 모든 점령지에서 전쟁 배상금의 명목으로 약탈을 일삼았다. 북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네들의 성명서에는 "붉은 군대 사령부는 조선의 모든 기업소의 재산 보호를 담보하여 ... " 라고 되어 있다. 말은 재산 보호였고 행동은 강탈이었다. 일본인 소유의 재산을 전쟁 배상금의 명목으로 거두어갔다. 풍작이었던 1945년의 양곡을 거두어들였다.
세계적인 규모였던 압록강 수풍 발전소의 독일제 발전기 5대, 흥남 비료 공장의 일부 시설, 대유동 광산의 금석, 철산 광산의 모나즈 광석도 소련으로 실어 날랐다. 심지어 38선 경계를 위해서 세워놓은 초소 비슷한 목제 보호막까지 거두어갔다.
미국과 소련의 합의는 38도선을 경계로 서로의 역할을 분담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슬쩍 38선을 넘어 개성까지 점령했다. 미군이 상륙하자, 개성에서 철수하면서 다량의 인삼과 은행에 보관된 현금을 모두 가져갔다. 해방군이 아니라 은행털이었고 강도였다.
소련군은 곧장 38선 이남과 이북 간의 인적 왕래, 물적 교류, 통신을 모두 차단했다. 8월 24일과 25일 남북 간 연결 철도(경원선과 경의선)를 차단했고, 38선 지역에 경비부대를 배치하여 남북 간 도로통행을 통제했다. 9월 6일에는 38선 이남 지역과의 전화, 전보 통신을 차단하고 우편물의 교환을 금지했다.
소련군은 38선 경계 초소를 지키는 병력을 증강하여 38선을 넘는 남북한 간의 통행 통제를 강화했다. 12월 중순에 이르면 38선은 마치 적대국간의 국경선처럼 되었다. 업무 분담선이었던 38선을 민족 분단선으로 만든 자들이 소련군이었다.
♣ 미군의 남한 진주(進駐)와 하지
38선 이남으로 진주한 미군의 상황에 대해서, 칼 버거 기자의 논평이 적절하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미국 정부의 구체적이고 자세한 준비 없이 태평양 지구의 미군에 의하여 점령된 유일한 주요 지역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준비도 없이 남한을 떠맡은 미국 책임자는 하지(John Reed Hodge) 장군이었다. 그는 태평양 전쟁 동안 17번의 전투에서 앞장섰다. 부하들과 위험과 고난을 함께한 용장(勇壯)이었다. 투철한 군인 정신을 발휘함으로써, 태평양의 패튼(Patton of the Pacific), 군인 중의 군인(Soldier's Soldier)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솔직히 용감한 군인이 복잡하게 얽힌 정치 상황을 풀어나간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가 지휘했던 오키나와 주둔 24군단이 남한 접수의 주력 부대로 선정된 것은 오로지 지리적인 접근성 때문이었다. 하지에게 전달된 명령은 "최대한 빨리" 부대를 이동하라는 것이 전부였다. 본국 정부나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아무런 세부적 지침이 없는 상태에서 하지는 많은 정책들을 스스로, 즉흥적으로 입안해야 했다.
훗날 하지는 한국에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미군정의 최고 책임자로서의 직책은 내가 지금까지 맡았던 직책들 가운데 최악의 직무였다. 만약 내가 정부의 명령을 받지 않는 만간인의 신분이었다면, 1년에 백만 달러를 준다 해도 나는 그 직책을 결코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악의 직무는 그의 포고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실수의 시작이었다.
"조선 인민 제군이여, . . . 여(余)는 오늘 남조선 지역에 있는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 ... 여의 지휘 하에 있는 제군은 연합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하여 장차 발할 여의 명령을 엄숙히 지켜라.
제군은 평화를 유지하며 정직한 행동을 하여라 ... 만약, 명령을 아니 지킨다던지 또는 혼란 상태를 일으킨다면 즉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수단을 취하겠노라. 이미 확정된 항복 조건을 이행함에는 여는 시초에 있어서는 현 행정기구를 사용할 필요가 있노라."
소련 군정의 성명서와 미군정의 성명서를 비교해보면,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소련군은 자유와 행복, 보호를 약속했지만 미군은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준다는 고압적인 자세뿐이다. 소련은 일제를 배척하겠다고 말했지만 미국은 현재의 행정 기구를 그대로 사용하겠다고 선포했다.
하지와 미군정이 얼마나 한국 상황에 무지했고 정치적인 감각이 무디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미군과 소련군의 성명서를 그대로 비교하면서, 미군은 점령군이고 소련군은 해방군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명서에 쓰여진 말과 실제로 벌어진 현실을 구분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이지만, 미군이 그 빌미를 제공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하지에게 덮어씌우는 것은 불공평하다. 그는 본인이 준비한 적도 없고 계획한 바도 없는 엉뚱한 임무를 맡아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을 뿐이다. 문제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었다. 트루만 행정부의 고위 정책 수립가들에게 한국 문제는 여전히 뒷전으로 밀려 마치 의붓자식처럼 취급되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무관심은 여러 면에서 확인된다. 2차 대전 중 적어도 7천명의 미군 병사가 집중적인 일본어 과정을 수료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최초에 한국에 들어왔던 미군 장교 가운데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한국말 하는 사람 하나도 없는 미군정이 우리 민족의 생사여탈권(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일을 당해야 하는 것이 약소국의 운명이다.
남한은 "미국 보급품의 종착점"이라고 불렸다. 로버트 올리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곳 군정 당국자들 전체를 통하여 들리는 말은 '한국은 우선순위 계통의 맨 끝에 붙어있다'는 것이다. 인원 배치, 보급품, 정책 조정 등 모든 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일본인이나 군정 당국자들을 위해 일단 도쿄에서 알매이를 빼고 겨우 남은 찌꺼기나 다른 데서 필요치 않은 것이 한국까지 온다."
일본 주둔 미군에 대한 최악의 징계는 한국 파견이었다. 상관들은 부하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런 말로 위협했다. "근무가 불량하면 한국에 보내버리겠다!"
이처럼 미국에게 한국은 한일합방 때나 해방 때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화가 나지만, 그네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해할 만도 하다. 특별한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도 없었다. 세계에서 제일 가난하고 비참한 나라 중의 하나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그네들에게, 한국이 대단히 중요한 지역임을 설득해서 마침내 한국을 돕고 한국을 위해 싸우게 만드는 일은,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과제였다. 그렇게 힘들고도 중요한 일은 이승만 아니고는 감당할 인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