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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21년 가을호
【김현경의 회고담 12】
김수영 시 읽기 (2)
일시 : 2020년 6월 16일, 2021년 8월 21일
장소 : 경기도 용인 자택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은 1946년 3월 『예술부락』제2집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로 들어서지요. 「묘정의 노래」는 등단작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상황을 좀 들려주세요.
김현경 : 해방된 뒤 김수영 시인과 이종구 두 분이(이하에서는 존칭 생략) 제일 먼저 한 일은 성북동에 영어학원을 차린 것이었어요. 초등학교를 빌려서 했어요. 두 사람이 영어를 잘하니 인기가 있었는데, 얼마 하지 않고 그만두었어요. 김수영은 연희전문학교에 편입했고, 이종구는 서울대학교로 편입했어요. 나는 이화여대로 진학했어요. 김수영은 얼마 안 다니고 학교를 그만두었어요.
그 무렵부터 셋이 이종구의 집에 모여 시 공부를 했어요. 이종구 동생 이진구도 함께하기도 했어요. 일주일에 한 번 내지 열흘에 한 번 정도 만났어요. 이종구는 남산 밑 회현동의 적산가옥에 살고 있었어요. 이층집이었는데, 위층에 방 2개, 아래층에 방 3개였어요. 경기도 광주에서 올라온 이종구의 일가들이 그 집에 살고 있어 일종의 합동숙소 같았어요. 그때 남산에 음악학교가 있었는데, 이종구의 일가가 거기에 다녔어요. 그래서 집에 피아노도 있었어요. 양정고보에 다니는 이도 있었어요. 이종구의 동생 이진구는 서울대학교 불문과에 다녔어요. 공부를 아주 잘했고, 잘생겼고, 점잖았고, 재주가 많았어요. 나중에 이화여대 교수를 지냈지요.
나에게는 김수영과 이종구 모두 문학 하는 아저씨였어요. 우리는 이종구의 집에 모여 공부를 했는데 특별히 시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읽은 책을 이야기하면서 써온 시를 보여주곤 했어요. 시를 읽고 소감을 이야기했어요. 서로 다니는 학교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어요. (웃음)
모두 열심히 썼어요. 책을 서로 빌려보기도 했어요. 이종구의 집에 책이 무척 많았어요. 나는 일본 전위파 시인뿐만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의 시도 많이 읽고 있었어요.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郎, 1883~1956)의 시를 특히 좋아했어요. 그렇게 공부하다가 내가 배인철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중단되었어요. 배인철 사건으로 김수영뿐만 아니라 이종구, 이진구 모두 경찰서에 붙들려가서 조사를 받았거든요.
서로 어울려 공부하던 어느 날, 김수영이 자신의 「묘정의 노래」가 『예술부락』에 실렸다며 잡지를 가져왔어요. 잡지가 얇았어요. 작품을 조지훈 선생한테 가져갔는데, 좀 놀라며 시가 좋다고 칭찬했다고 말했어요. 『예술부락』에 실리는 데 힘을 써주었다고 했어요. 그 잡지는 조연현 문학평론가가 주간을 맡고 있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등단할 때 조지훈 선생님이 추천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지요. 그런데 왜 조지훈 선생님은 추천 평이라든가, 심사평 같은 것을 쓰지 않았을까요? 그러한 기록이 나오지 않으니 조지훈 선생님이 김수영 시인의 작품을 추천했다는 증거가 없는 셈이지요. 따라서 김현경 선생님의 이 증언은 매우 중요한 것이에요. 또한 『김수영 전집』을 비롯하여 지금까지의 연보에는 김수영 시인이 『예술부락』으로 등단을 먼저 하고 뒤에 영어학원을 차린 것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영어학원을 먼저 차렸다고 말씀하셨어요. 정말 그러한지요?
김현경 : 그럼요. 영어학원을 먼저 차리고 등단을 나중에 한 것이에요. 조지훈 선생이 추천 평을 쓰지 않은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그때는 추천 평 같은 게 없었나 봐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등단했다고 『예술부락』을 가져와 내보였을 때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요? 또 이종구의 태도는 어떠했는지요?
김현경 : 김수영의 작품을 인쇄로 된 상태로 보니 좀 놀랐어요. 역시 나에 비하여는 한참 위라는 생각이 들었고, 시인으로서 확고한 자세를 가졌다는 것을 느꼈어요. 출세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종구는 그리 대단하지 않게 여겼어요. 그렇지만 시시하게 여기면서도 약간 질투하는 인상이었어요. 두 사람은 잘 다투기도 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서로 라이벌이었어요. 그러면서도 아주 친했어요. 이종구는 영어나 수학 공부 등에서 월등해 우월감이 있었지만, 김수영은 절대 눌리지 않았어요. 이종구는 보수적이었고, 김수영은 자유주의자여서 세계관에 서로 차이가 있었어요. 두 분 모두 나에게는 아저씨였어요.
이종구는 김수영과 다른 정서의 시를 썼어요. 꽤 난해한 시를 썼어요. 환상적인 느낌도 받았어요. 우리나라의 정서가 아니라 프랑스 시인인 폴 발레리의 시를 흉내 내는 것처럼 보였어요. 시를 방의 벽에 써 놓을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일본어로 썼어요.
맹문재 : 「묘정의 노래」는 2단락 6연으로 된 작품이에요. 앞부분은 다음과 같은데, 왜 이런 시를 썼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남묘(南廟) 문고리 굳은 쇠문고리
기어코 바람이 열고
열사흘 달빛은
이미 과부의 청상(靑裳)이어라
날아가던 주작성(朱雀星)
깃들인 시전(矢箭)
붉은 주초(柱礎)에 꽂혀 있는
반절이 과하도다
―「묘정의 노래」, 1~2연
김현경 : 김수영 시인도 일본어로 쓸 때는 쉬르리얼리즘의 면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우리말로 쓰면서 시 경향이 달라졌어요. 김 시인이 이전에 쓰던 시들과 다르게 쓴 것이 바로 「묘정의 노래」에요. 우리가 해방이 되어 나라를 되찾았잖아요. 우리 민족의 혼을 찾은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김 시인이 그런 전통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생각한 것 같아요. 해방 뒤 미국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매우 우호적이었어요. 아메리카의 것은 모두 좋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김 시인은 그와 같은 분위기와는 다르게 자기 나름대로 시를 썼어요.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흉내도 내지 않았어요. 김수영이나 이종구는 박인환 등 모더니즘 시를 쓰는 시인들을 무시했어요. 학문 수준이 낮다고 잘 만나지도 않았어요. 두 사람의 수준은 그만큼 높았어요.
맹문재 : 세 분이 공부할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으면 좀 들려주세요.
김현경 : 이종구가 집주인이었기 때문에 공부가 끝나면 짜장면을 시켜 먹고 국수를 삶아 먹은 것 같기도 하고…… 한 가지 생각나는 일은 경기도 광주 시골에서 복숭아가 왔다고 이종구가 엽서를 보내 간 적이 있었어요. 내가 직접 하늘색 원피스를 염색까지 해서 만들어 입고 갔어요. 우리집 마당에 노란 달리아꽃 피어 있는 것을 꺾어 들고 전차를 타고 갔어요. 그런데 전차에서부터 나를 계속 쫓아오는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길진섭(吉鎭燮) 화가였어요. 자신이 먼저 길진섭이라고 소개를 했어요. 나는 이름을 들은 적은 있지만 본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그와 같이 이종구의 집에 갔어요. 그와 이종구가 안면이 있었어요. 거기에서 길진섭 화가가 나를 한 번 그리고 싶다고 해 약속을 했어요. 길진섭 화가가 살고 있는 정릉 집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갔어요. 그런데 그의 부인인지, 일본 여자였는데, 눈치가 이상했어요. 서로 다투기도 했어요. 아무튼 한 번 더 오라고 해서 또 갔는데, 아무래도 눈치가 보여 그다음에는 안 갔어요. 나중에 길진섭 화가는 월북했어요. 우리나라의 최고 화가였지요.
맹문재 : 다음 작품은 「공자의 생활난」이에요. 이 작품을 보신 적이 있는지요?
김현경 : 나는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제목이 아주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나요? 이 작품은 이종구에게는 안 보여주고 나에게만 보여주었어요. 종로6가 고모네 집에서 보았어요. 이종구는 그 고모네 집에는 오지 않았어요. 김 시인이 『예술부락』에 등단한 이후 자연스럽게 만남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이종구는 서울고등학교에 영어 교사로 취직을 했고, 김수영은 박일영을 따라 극장 간판을 그리는 등 서로의 생활이 달라진 면도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당시 사회가 아메리카를 좋아하는 분위기였어요. 그것이 앞서가는 것이고 모더니티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김 시인은 오히려 공자를 찾았어요. 김 시인과 같은 자세는 뒤처지는 것이었어요. 그런데도 김 시인은 꿋꿋하게 추구한 것이에요. 나는 이 작품의 제목에 아주 반했어요. 내가 좋아하니까 김 시인도 좋아하셨어요. 정말 의지가 확실한 작품이에요. 문학에 대한 태도가 되어 있어요.
맹문재 :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공자의 생활난」의 끝부분이 더욱 와닿네요.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그런데 김현경 선생님께서도 이 무렵 시를 발표했다고 언젠가 말씀하셨잖아요. 몇 년에 어느 매체에 발표하셨는지요?
김현경 : 1946년인가, 김 시인이 「묘정의 노래」를 발표한 때와 비슷한 시기였어요. 『민성』이란 잡지에 ‘학생 시단’이란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발표했어요. 원고료도 받았어요. 제목이 「시집」인가 그랬어요. 정지용 선생님이 작품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갖다 드렸더니 발표해주셨어요. 정지용 선생님은 내가 건방지다고 야단을 치는 등 나에게 관심이 많았어요.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한 번은 정지용 선생님의 녹번동 집에 가서 식구들과 하룻밤 자기도 했어요. 선생님과 함께 김장철이 지난 논두렁에 앉아 논바닥에 내린 하얀 서리를 보았는데, 그 장면이 눈에 선하네요.
맹문재 : 『민성』에 실린 작품을 김수영과 이종구 두 분께 보여드렸는지요?
김현경 : 보여드렸지요. 김 시인한테는 칭찬을 못 들었어요. 이종구는 무조건 좋다고 했어요. (웃음) 『민성』에 김 시인의 작품이 실리기도 했어요. 그만큼 시인으로 대접을 받은 것이지요. 소설 쓰는 박영준이 『민성』의 주간이었어요. 김 시인과 함께 그 잡지사에 간 적도 있어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이에요. 1949년 11월 『민성』에 발표한 것이에요. 발표하기 전에 보셨는지요?
김현경 : 그럼요. 나하고 같이 살 때 발표했어요. 발표하기 전 종로6가 고모집에서 보여주었어요. 그때 벌써 김 시인이 『애틀랜틱』 등의 미국 잡지를 찾아서 집에 가져와 보더라고요. 그래서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도 미국에 대한 생각을 쓴 것 같아요. 미국인들의 생활문화하고 우리의 생활문화가 거리가 있잖아요. 해방이 되어 우리나라의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미군정청이 들어섰기 때문에 완전하게 해방이 된 것이 아니었어요. 미국의 집을 그냥 옮겨온 셈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그래서 이 작품은 우리가 주의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본분을 다 잊어버릴 수 있다,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때는 정말 애매하고 혼돈이 심했잖아요. 결국 1950년에 6․25전쟁이 나고 말았지요.
맹문재 : 말씀을 듣고 보니 「묘정의 노래」「공자의 생활난」「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 등 초기 작품의 주제며 분위기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현경 : 그만큼 김 시인은 시인으로서 태도가 확고했어요. 벌써 아는 사람들은 김 시인이 앞으로 대단한 시인이 될 거라는 걸 기대하고 있었어요. 그때 우리나라의 문예지가 몇 개 없었잖아요. 그런데도 『민생보』 같은 잡지에서도 청탁이 와 작품을 발표했어요. 팸플릿처럼 얇았어요. 그때는 정지용 시인이 주도하던 『문장』 지가 최고였는데, 김 시인은 거기에 실린 시들이 고리타분하다고 인정하지 않았어요. 김 시인은 그들과 다른 시를 썼어요. 다들 김 시인의 시를 이해하지 못했지요. 그만큼 당시의 시단에서 앞섰던 것이에요.
정지용 시인은 해방된 뒤 시를 쓰지 못했어요. 『백록담』이란 시집을 나에게 주셨어요. 정 선생님은 가톨릭 신자예요. 그래서 크리스천들이 이끄는 이화여대와 갈등이 있었어요.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도 있었어요. 정 선생님은 미군청 쪽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화여대를 그만둔 것이에요.
맹문재 : 정지용 시인이 지식인이었는데도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못 했잖아요. 해방된 뒤 그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어요. 그래서 차마 시를 마음대로 쓸 수 없었어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원 겸 아동문학부 위원장을 맡으며 좀 더 진지하게 작품 방향을 모색했어요.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입장도 취했어요. 남북협상을 성원하는 문화인에 서명했고,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문화언론인 선언문에도 서명했어요. 이와 같은 행동으로 단독정부가 수립된 뒤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빨갱이로 낙인찍혀 탄압을 받게 되었지요. 정지용 시인이 이화여대 교수를 그만둔 것은 이와 같은 정치 상황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김현경 : 그래서 정지용 선생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몰라요.
맹문재 : 정지용 시인은 좌파 출신 전향자들을 가입시켜 갱생의 기회를 준다는 국민보도연맹에 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가입하지요. 그렇지만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이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고 잔인하게 죽였어요. 정지용 시인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지요. 그 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붙들렸는데, 행방을 알 수 없어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에요.
김수영 시인의 다음 작품은 「아메리카 타임 지(誌)」에요. 이 작품은 1948년 12월 25일자 『자유신문』에 발표되어요. 이 작품도 발표되기 전에 보셨는지요? 보셨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요?
김현경 : 봤어요. 그때 김 시인이 노점에서 『타임스』를 구입해서 읽었어요. 미군 부대에서 쓰레기로 나왔기 때문에 비싸지 않았어요. 김 시인은 아메리카에 편향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어요. 그 당시 군국주의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미국 제국주의의 전쟁이며 재벌과 결탁하는 것을 편들었지요. 『타임스』에는 미국의 생활이라든가 정치라든가 그러한 것이 실려 있어 김 시인에게는 공부가 되었어요. 언론 자유도 볼 수 있었지요. 「아메리카 타임 지(誌)」에 나오는 ‘와사’는 가로등을 의미해요.
맹문재 : 아래의 구절은 「아메리카 타임 지(誌)」의 전체 4연 중 3~4연이에요. 저는 다르게 읽고 싶은 면이 있어요.
와사(瓦斯)의 정치가여
너는 활자처럼 고웁다
내가 옛날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
뱃전에 머리 대고 울던 것은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또 활자를 본다
한없이 긴 활자의 연속을 보고
와사의 정치가들을 응시한다
“내가 옛날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뱃전에 머리 대고 울던 것은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다”라는 구절이에요. 실제로 김수영 시인은 미국을 다녀온 적이 없잖아요. 따라서 위의 작품에서 ‘아메리카’라고 한 것은 일본을 비유한 것 같아요. 김수영 시인은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유학을 미국 유학으로 인식할 정도로 열망했지요. 그렇지만 울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그 이유는 한 여인 때문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가난과 고통과 억압 때문이었어요. 그 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따라서 이 작품에서의 “여인”은 김수영 시인이 사랑했던 고인숙 씨로 여겨지네요.
김현경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요. 인연이 맺어질 줄 알고 일본까지 따라갔는데, 그분이 지내는 학교의 기숙사를 몇 번 찾아가도 만나주지를 않았다잖아요. 그래서 고인숙을 마음속에서 지우기에는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맹문재 : 다음으로 살펴볼 작품이 「이[蝨]」에요. 이 작품은 1949년 2월호 『민성』지에 발표되었어요. 『민성』지의 주간이 박영준 소설가라고 하셨는데, 김수영 시인이 신인인데도 불구하고 지면을 많이 마련해주었네요.
김현경 : 『민성』지의 사이즈가 일반 문학지와는 다르게 좀 컸어요. 접어서 제본을 해 두꺼운 신문 같았어요. 그리고 수준이 높았어요. 『아리랑』 같은 오락잡지가 아니라 문화면이 충실한 잡지였어요. 그 정도로 좀 앞섰어요. 고려문화사라는 출판사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김 시인이 한국전쟁 때 의용군에 끌려가는 동안 그 대열에 박영준도 있었대요. 그런데 서로 알은체를 하지 않았대요. 주로 낮에는 자고 밤에 걸었는데 서로 모른 체했대요. 박영준 소설가가 연세대학 출신이에요.
「이[蝨]」는 제목이 징그럽지 않나요? 이런 제목도 시가 되는가 싶었어요. 이 작품은 우리 민족의 얘기를 한 것 같아요. 우리가 당당하게 얼굴을 내밀지 못했잖아요.
맹문재 : “도립(倒立)한 나의 아버지의/얼굴과 나여//나는 한 번도 이[蝨]를/보지 못한 사람이다//어두운 옷 속에서만/이는 사람을 부르고/사람을 울린다//나는 한 번도 아버지의/수염을 바로는 보지/못하였다”(전체 6연 1∼4연). 이 작품에 아버지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작품의 화자는 아버지가 거꾸로 서 있기 때문에 똑바로 바라보지 못해요. 그렇지만 화자는 아버지를 외면하지는 않아요. 김수영 시인의 복잡한 심정을 볼 수 있어요. 김수영 시인의 아버지는 자식이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를 바랐는데, 자식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잖아요. 해방 뒤에도 경제 활동을 별로 하지 않고요. 그래서 아버지는 자식에게 실망하는데, 자식은 그것을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제대로 대면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도 아니에요. 아버지 역시 경제 능력이 없어 자식의 교육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했으니까요. 김수영 시인의 아버지를 직접 뵌 적이 있는지요?
김현경 : 얼굴을 마주 본 적은 없어요. 배인철 사건이 난 다음에 아무도 우리집에 찾아오지 않았는데, 어느 날 김 시인이 왔어요. 그 뒤 둘이 몰래 데이트를 했어요. 그러다가 하루는 김 시인이 나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어요. 충무로에 있는 <유명옥>이란 설렁탕집이었어요. 빈대떡도 구워서 팔았어요. 그 가게의 안방이 굉장하게 컸는데, 아버님이 아랫목 쪽에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것 같았어요. 얼굴은 못 보고 이불자락만 보았어요. 그 당시 아버님의 건강이 좋지 않았어요.
<유명옥>은 장사가 아주 잘 되었어요. 테이블이 대여섯 개였어요. 흙바닥이었어요. 대낮에도 늙수그레한 영감들이 들어왔어요. 바깥쪽에는 유리문으로 되어 있었는데 시어머니가 빈대떡을 부치고 계셨어요. 한복에다가 행주치마를 입고 하셨는데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빈대떡을 부칠 새가 없었어요. 정말 6․25만 안 일어났으면 크게 번창했을 거예요. 도와주는 아들들도 든든했으니까 마냥 부자가 되었겠지요.
시어머니가 무꾸리를 좋아했어요. 무당한테 가서 점 보는 것 말이에요. 어느 날 시어머니가 나한테 어디 좀 가자고 했어요. 초가을인데 모시로 만든 옷을 참으로 이쁘게 차려입으셨어요. 시어머니는 무당한테 우리 수영이가 얘한테 아주 그냥 푹 빠져 있는데 사주를 좀 봐 달라고 했어요. 한 40대 되는 남자였는데 주역을 갖다 놓고 관상을 보았어요. 나를 보더니 외로움이 느껴진다고 그래요. 과부상이라는 것이지요. (웃음)
맹문재 : 다음 살펴볼 작품은 「웃음」이에요. 이 작품은 『신천지』 1950년 1월호에 발표되었어요. 발표되기 전에 작품을 보셨는지요? 이 작품에는 “웃음은 자기 자신이 만든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서러운 것일까”라는 표현이 나와요. 김수영 시인의 시에는 이처럼 서러움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요.
김현경 : 발표 전에 못 보았어요. 이 작품에는 일상의 생활 감정이 배어 있어요. 그 당시 우리에게는 웃음이라는 것이 없었어요. 우리 시대는 웃음이 아니라 우울했어요. 그래서 김 시인의 작품에는 설움이 배어 있어요. 외로웠기 때문이에요. 김 시인은 불행했잖아요. 병에 시달리고, 전쟁에 시달리고, 사랑에 시달리고…… 인간적으로 슬펐을 것이에요. 에고가 심한 사람이었어요. 1953년 12월에 발표한 산문 「낙타 과음」 이후 김 시인의 시들이 밝아졌어요. 나를 만나기 전에는 처참할 정도로 서러움이 깔려있었는데 다행이지요.
맹문재 : 결혼한 뒤에는 어떻게 생활하셨는지요? 김수영 시인이 서울대 의대 부속 간호학교에 영어 강사로 출강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김현경 : 김 시인은 월급을 타면 봉투째 갖다주었어요. 그리고 나한테 용돈을 타서 썼어요. 내가 결혼한 뒤에 동대문 창신동에서 <구왕양장점>을 차렸어요. 벌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시가의 일가 되는 사람이 양복점을 하던 것을 내가 인수했어요. 그런데 한두 달밖에 못 했어요. 6·25가 일어났기 때문이지요. 돈암동에서 전차를 두 번 갈아타야 했고, 아기를 가져 몸도 불편했어요. 그래서 재봉틀을 내다 팔았어요. 아들 준은 전쟁 때문에 바로 출생 신고를 못 하고 좀 있다가 했어요. 신흥인쇄소 소장으로 있던 외삼촌이 해주셨어요. 우리 시어머니의 남동생이에요. 그분이 우리 혼인 신고도 해주셨어요.
맹문재 : 다음의 작품이 「토끼」예요. 다른 작품들도 그러하지만 다소 난해하게 읽히는데, 말씀 좀 해주세요. 『신경향』 1950년 6월호에 발표되었어요. 한국전쟁 직전에 발표된 작품이에요.
김현경 : 어느 날 내 동생 김현옥이 우리 신혼집에 놀러 왔어요. 초등학교 5학년쯤 되었을 거예요. 나이가 어렸지만 문학에 관심이 높아 얘기가 통했어요. 일본어도 놀랄 정도로 잘했어요. 현옥이가 김 시인을 좋아했고, 김 시인도 그랬어요. 그래서 얘기하다가 돈암동 친정집에서 토끼 기른 얘기도 했어요. 마당이 넓어 아버지가 담을 쌓고 토끼를 길렀어요. 내가 토끼띠이기도 하잖아요. 그렇게 얘기하다가 저녁을 먹고 전차 타는 데까지 데려다주었어요. 동생을 바래주고 <돈암서점>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김 시인이 좀 써야겠다고 종이를 달라고 했어요. 종이를 주니 아랫목에서 엎드려 썼어요. 다 쓴 뒤 원고지에 내가 정서했는데 시가 정말 좋았어요. 내용은 자기 사상, 시대 사상을 담았어요. 우리가 토끼에 대해 재미있게 이야기한 것을 자기 나름대로 이미지화한 것이에요. 시의 끝부분이 ““저기 저 하아얀 것이 무엇입니까”/“불이다 산화(山火)다””라고 되어 있는데, 하얀색을 민주주의로, 붉은색을 공산주의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맹문재 : 셋째 동생 이야기는 처음으로 듣는데요?
김현경 : 경기고녀에 다녔어요. 아주 공부도 잘하고 똑똑했어요. 고3 때 6·25가 났는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어요. 내가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어요. 우리 외삼촌인 박한식은 소설가였어요. 카프에서 활동했어요. 외삼촌의 아들인 박훈이 하와이에서 소아과병원을 차렸는데 대단히 성공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동생과 함께 현대아파트에 살 때 두 번인가 찾아오기도 했어요. 동생네 조카가 서울대 공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학생운동을 했어요. 나중에 미국 유학해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어머니가 손자의 뒷바라지를 위해 간직했던 금을 팔았어요. 이러한 일들이 얽혀 있어요. 다들 잘살고 있어요.
맹문재 : <돈암서점>에 자주 다니셨나 봐요. 서점 소개를 들을 수 있을까요?
김현경 : 돈암동에 있는 <돈암서점>은 꽤 컸고, 수준이 아주 높았어요. 대중 잡지는 없고 철학서나 세계 문학 전집 등을 취급했어요. 원남동에 있던 <원남서점>도 그랬어요. <돈암서점>의 여자 주인이 책방을 참 잘 운영했어요. 얼마나 이쁘고 발랄한지. 그리고 친절했어요. 내가 그 서점에서 책을 빌려와 일본 문학 전집을 다 읽었어요.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책도 많이 샀어요.
맹문재 : 「아버지의 사진」은 앞에서 살펴본「이[蝨]」와 같이 아버지를 담고 있습니다. 김수영 시인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쓴 것으로 보이네요. 작품의 말씀을 들어볼게요.
아버지의 사진을 보지 않아도
비참은 일찍이 있었던 것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에는
안경이 걸려 있고
내가 떳떳이 내다볼 수 없는 현실처럼
그의 눈은 깊이 파지어서
그래도 그것은
돌아가신 그날의 푸른 눈은 아니오
나의 기아처럼 그는 서서 나를 보고
나는 모―든 사람을 또한
나의 처를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것이오
영탄이 아닌 그의 키와
저주가 아닌 나의 얼굴에서
오― 나는 그의 얼굴을 따라
왜 이리 조바심하는 것이오
조바심도 습관이 되고
그의 얼굴도 습관이 되며
나의 무리(無理)하는 생에서
그의 사진도 무리가 아닐 수 없이
그의 사진은 이 맑고 넓은 아침에서
또 하나 나의 팔이 될 수 없는 비참이오
행길에 얼어붙은 유리창들같이
시계의 열두 시같이
재차는 다시 보지 않을 편력의 역사……
나는 모든 사람을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버릇이 있소
―「아버지의 사진」 전문
김현경 : 김 시인의 아버님께서는 1949년 1월에 돌아가셨어요. 집안에 상청(喪廳)을 마련해 놓고, 초하루와 보름에 상식을 올렸어요. 6·25가 날 때까지 했어요. 시어머님은 물론 김 시인의 둘째 동생과 셋째 동생이 정성을 다했어요. 상 아래 기름진 것이 많아 바퀴벌레가 있어 내가 치우고 소다를 뿌린 일도 있어요.
김 시인은 아버님과 친하지 않았어요. 아버님은 기관지가 나빠 고생했어요. 그래서 경제 활동을 제대로 못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정 때 가계가 기울어진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구멍가게를 내서 물건들을 팔았지만, 일제 시대에 살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장사가 잘 되겠어요. 시대적인 영향이 컸다고 봐요.
그해 11월에 김 시인과 살림을 차렸는데, 같이 살기 전에 시어머님이 운영하는 충무로 <유명옥>에 가서 일을 거들어 드렸어요. 한 식구로 모두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한 번은 대충 간을 맞춰 깍두기를 담았는데, 시어머님이 칭찬을 하셨어요. 손님들이 깍두기가 맛있다고 야단들이라고 했어요. 또 한 날은 송자 동생을 데리고 필동 빨래터에 가서 툇마루에 쌓여 있던 시동생들의 옷을 빨기도 했어요. 시어머님이며 시동생들은 내가 연루된 배인철 사건을 다 알고 있었는데도, 어느 한 사람도 언급하지 않았어요.
김 시인이 치질을 앓고 있을 때 내가 간병을 했어요. 시어머님은 <유명옥> 일이 워낙 바쁘니 돌볼 새가 없었어요. 김 시인이 종로6가의 고모님 집에 있으니 그곳에서 내가 고모님 식사도 마련해드렸어요. 고모님은 신장이 나빠 기저귀를 찼어요. 허리도 굽었어요. 그래서 내가 고모님 집의 살림도 한 셈이었어요. 언젠가 우리 어머니가 민어를 사가지고 오신 적이 있어요. 그 민어를 가지고 잔치를 했어요. 고모님은 1970년대에 돌아가셨어요. 김 시인보다 오래 사셨어요. 김 시인이 세상을 떴을 때 굉장히 슬퍼했어요. 고모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잘해주셨어요. 우리가 마포에 살 때 고모님 생신날 만두를 빚어서 간 적이 있어요. 생고기 대신 햄을 이겨서 숙주와 두부를 넣어 만들었는데, 아주 좋아하셨어요. 그때 김 시인이 어렸을 때 <계명서당>에 다니며 공부하던 『천자문』을 간직하고 계시다가 주셨어요. 수성 시동생이 고모님 양자로 들어간 적이 있어요. 고모님은 아들이 없고 딸만 둘 있었어요. 우리가 살림을 차려 나가자 그 집에 세를 주고 살아가셨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살펴볼 작품이 「아침의 유혹」이에요. 이 작품에는 많은 얘기들이 들어 있어요. 조만간 뵙고 자세하게 듣도록 할게요. 귀한 말씀을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 김현경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나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초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김수영 시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에세이집 『김수영의 연인』 『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공저)가 있다.
■ 맹문재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지식인 시의 대상애』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시의 대문자』 『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가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