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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東夷)족 제갈공명과 만두 탄생
■ 만두(饅頭)의 기원과 제갈공명(諸葛孔明) 이야기
밀(wheat)의 발상지인 서아시아 지방의 우즈베키스탄과 터키 등에서 만두(饅頭)를 부르는 단어가 ‘만트’(манты, manti)이다. 밀을 키우는 국가라면, 어디서든 만두를 개발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래서, 만두의 기원은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이루어졌을 것이다. 만두는 세계 곳곳에 퍼져 있어 국가별로 다양한 요리가 등장한다. 딤섬(중국), 사모사(인도), 차죠(베트남), 라비올리(이탈리아), 뽀삐아 사보이(태국) 등이 대표적인 만두(饅頭) 요리이다. 좋은 음식은 하늘과 조상께 먼저 바치고 먹는 것이 기본이다. 만두는 귀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새해 제사에 올리는 음식이었다. 음양이 교차하는 계절은 바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때로 새해가 시작되는 음력 정월 초하루를 뜻하니, 바로 설날이다. 설날에 만두를 빚어 하늘에 바치고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며 한 해 동안 풍요롭고 건강하게 지내기를 소원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만두로 가장 유명했던 지역은 황해도 개성이다. 개성에서는 설날에 만두를 먹었고, 서울에서는 떡국을 먹었다. 서울 이북 지방에서는 만두가 명절 음식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만두의 기원에 관한 역사 기록은 중국 서진(西秦)의 진수가 280년에 지은 ‘삼국지’(三國志)에 적혀있다. "225년 가을, 촉한(蜀漢)의 제갈공명(諸葛孔明)은 남만(南蠻)의 왕(王) 맹획(孟獲)을 7번을 사로잡고 다시 7번을 풀어줘 마음으로 복종시켜서 남만(南蠻) 정벌에 성공했다. 남만(南蠻)은 '남쪽 오랑캐'라는 뜻이며, 중국의 남녘 운남성(雲南省) 일대를 말한다. 남만(南蠻) 정벌에 성공한 후, 촉(蜀)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남만(南蠻) 북부에 있는 려수(瀘水)라는 강가에서 심한 파도와 바람으로 인해 발이 묶이고 말았다.
갑자기 일진광풍(一陣狂風)이 일더니, 군사와 말 그리고 수레까지 날아갔다. 려수(瀘水)에 갑자기 홍수가 나면서 물이 불어나 수많은 군마(軍馬)가 떠내려갔다. 제갈량은 도저히 군사를 이끌고 노수를 건너 회군할 수 없었다. 법사(法師)를 불러 방법을 알아보았다. 그곳 현지인이 말하기를 "려수(瀘水)에는 황신(黃神)이라는 신(神)이 사는데, 그 신(神)이 노한 것이다. 그리고, 남만(南蠻)에는 하늘의 노여움을 풀기위해서 49명 사람을 죽여 그 머리를 제물로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다.'라고 했다.
그런데, 억울한 생명 49명의 사람 목을 베어 강에 바쳐서 제사(祭祀)를 지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제갈량은 밀가루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소, 양, 돼지 고기 등을 다져 넣어 황신(黃神)에게 제물로 바쳤다. 얼마 후, 려수(瀘水)는 잠잠해졌다. 남만(南蠻)인들은 제갈량이 바친 음식 때문에 잠잠해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 후, ‘기만하기 위한 머리’라는 뜻으로 ‘만두(饅頭)’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그런데, 만두를 진짜 제갈 공명이 만들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이 아니다. ‘삼국지’ 책이 나오기 200년 전, 송(宋)나라 때 ‘사물기원’(事物紀原)이라는 책에 만두는 남쪽 오랑캐의 머리를 대신해 만들었다고 한 이야기를 각색해서 소설 속에 슬쩍 끼워 넣었다.
■ 제갈공명은 동이족(東夷族) 즉 한(韓)민족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촉(蜀)나라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원래 산동성(山東省) 사람으로 동이족(東夷族)이다. 즉 한(韓)민족이다. 제갈(諸葛)은 우리 민족이 중국의 하남, 산동, 중국 북부지방, 요서 지역, 하북, 양자강 이남 등에 살던 동이족(東夷族)의 성(性)씨이다. 공명(孔明)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존경한 뜻이다.
제갈(諸葛)씨의 유래는 제(諸)씨와 갈(葛)씨가 합쳐져서 됐다하는데. 갈(葛)씨의 조상은 갈천씨(葛天氏)라고 불리는 중국에서 동이족(東夷族) 추장의 후손이며, 동이족의 성씨인 풍(風)씨의 한 갈래이다. (보삼황본기補三皇本記 참조). 풍(風)씨의 조상은 태호(太昊) 복희(伏羲)이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이 태어난 곳은 산동성(山東省) 낭야군 양도현으로 동이족(東夷族)들이 사는 땅이며, 옛 고조선(古朝鮮. B.C2,333-238) 시대에는 단군 왕검의 아들인 부루 태자가 이 곳에 와서 동이족들의 추장들을 만나서 중원(中原)의 일에 관해서 의논하기도 했던 곳이다. 제갈공명은 기문둔갑(奇門遁甲)이란 점법(占法)에 능하고 천문(天文)을 보는데 능했으며, 목우류마(木牛流馬)나 연노(連弩) 등 기계를 발명하는데도 능하여 천하에 그 이름을 떨쳤다.
제갈공명(181-234년)이 죽은 후 촉(蜀)나라가 망하자 제갈(諸葛) 부족(部族)하고 제갈공명의 제자인 강유(姜維. 202-264년)의 후손들은 만주(滿洲). 한반도로 피신하였다. 강유의 후손인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高句麗)에서 수(隋) 나라 대군을 무찌르며 이름을 떨쳤다.
■ 인류 최초 성(性)씨 시조(始祖)인 태호(太昊) 복희(伏羲)
원래, 인류 역사상 가장 처음으로 생겨난 성(性)씨는 풍(風)씨이다. 풍(風)씨의 처음 시작은 5,500년 전, “주역”의 팔괘(八卦)를 처음으로 그려서 주역(周易)의 역철학을 체계화한 태호(太昊) 복희(伏羲)씨이다. 복희(伏羲. ~B.C3,413)는 풍산(風山)에서 출생하여 풍(風)씨라고 하였다. 복희(伏羲)는 배달국(倍達, B.C3,897-2,333) 사람으로 동이(東夷)족 사람이다.
복희(伏羲)는 배달(倍達, B.C3,897-2,333)의 5대 태우의(太虞儀. B.C3,512년 즉위) 환웅의 12번째 아들이며, 우사(雨師) 직책을 수행했다. 음양오행(陰陽五行)과 태극기의 팔괘(八卦)를 처음 그려내어 주역(周易)을 창시했으며, 혼인(婚姻) 제도를 처음 만들었고, 배달국의 녹도(鹿圖) 문자(文字)를 개량하여 새로운 문자(文字)인 용서(龍書)를 제정했으며, 침구를 처음 시작해 침을 만들었고, 양잠을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태호(太昊) 복희(伏羲)는 결혼을 할 때 부채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부채 역시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로 무당들이 굿을 할 때에도 부채를 사용한다. 풍(風)씨의 후손들은 15대 만에 자손이 끊어지는 바람에 결국 풍(風)씨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이를 안타까워한 후세의 사람들은 "풍채 좋다. 풍신 좋다. 풍골 좋다"라는 표현을 남김으로써, 풍(風)씨를 기리고자 했다.
■ 공자. 맹자. 묵자. 강태공도 동이족(東夷族)이었다.
공자. 맹자. 묵자. 강태공 등이 우리의 조상인 동이(東夷)족이라면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분명한 역사적 진실이다. 중국에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공자(孔子)는 스스로 동이족(東夷族) 계열의 은(殷) 나라 후손이라 말하곤 했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上)을 보면, "나(공자)는 은(殷)나라 사람이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은(殷)나라는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나라이다. 공자가 태어난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지역에서 살던 흰옷을 입고 백색을 숭상했던 은족(殷族)은 전형적인 동방 조선족 계열의 동이족(東夷族)이라는 사실은 대만 대학의 서량지(徐亮之)나 홍콩 대학의 임혜상 교수가 인정하고 있다.
사고전서(四庫全書) 경부 ‘사서석지(四書釋地)3’ 속(續) 하(下)권에는 “맹자(孟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추(鄒)나라는 춘추(春秋)시대에 주(周)나라였고, 주(周)나라는 본래 동이족(東夷族) 국가였으니, 그렇다면 맹자 또한 동이족(東夷族) 사람이 아니겠는가?” 라는 내용도 나온다.
사고전서(四庫全書) 자부 ‘명현씨족언행유편(名賢氏族言行類編)’ 52권에는 “전국(戰國)시대 송(宋)나라 사람으로 ‘묵자(墨子)’의 저자인 묵적(墨翟)이 본래 고죽군(孤竹君)의 후예”라는 내용이 나온다. 고죽국(孤竹國)은 원래 동이족(東夷族) 국가였다. 묵자(墨子) 또한 동이족(東夷族)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고전서(四庫全書) 자부 ‘여씨춘추(呂氏春秋)’ 14권에는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동이지사(東夷之士)’라는 내용이 나온다. 강태공(姜太公)이 동이족(東夷族)이라는 근거이다. 지금까지 중국인으로만 알았던 공자, 맹자, 묵자. 강태공 등이 동이족(東夷族)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대주의(事大主義)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사고전서(四庫全書)는 중국 청(淸)나라 때 편찬된 책으로 진(秦. BC771-206년)에서 청(淸. 1636-1912년)에 이르는 중국의 역대 주요 서적과 문헌을 집대성해 7만 9,000여권으로 만든 총서이다. 현재, 중국에서 그들의 역사 연구와 기초 자료로 통하는 역사 총서이다. 1772년 전국에 각종 도서를 수집한다는 조서를 내리고 사고 전서관을 짓는 것을 시작으로 1787년 편찬 작업이 마무리 되기까지 15년의 시간이 걸렸다. 기록에 참가한 문신. 학자. 기록관이 무려 4,000여 명에 달했다.
■ 우리 배달(倍達) 민족의 역사는 9,200년이다.
★ 우리 배달 민족의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문화는 중국의 요(堯. 재위BC 2,357-2,258), 순(舜. 재위BC 2,255-2,208), 하(夏, BC 2,205-1,766), 은(殷, BC 1,600-1,046), 주(周, BC 1,046-771)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배달(倍達) 민족 문화가 중국 문화의 뿌리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가 환국(桓國, BC 7,199-3,897), 배달국(倍達, BC 3,897-2,333),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 부여.옥저.동예.낙랑국. 마한.변한.진한. 고구려.백제.신라로 이어져서 무려 9,200년이나 된다.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장자국(長子國)이 배달국(倍達國)이었고,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장자국(長子國)이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이었음을 비추어 볼 때, 우리 배달(倍達)민족과 한국이 세계 4대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민족이며 나라임을 알 수 있다.
★ '신시(神市) 개천경(開天經)' 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환웅(桓雄)이 있었다. 그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동방 땅 백두산(白頭山)에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 BC 3,897-2,333)을 건설하였다. 배달국(倍達, BC 3,897-2,333년)은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과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대-18대 환웅] 시대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BC 3,897-2,333) 환웅(桓雄)의 '홍산(紅山) 문화'라고 한다.
★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홍산(紅山) 문화는 1920년대 프랑스 에밀 리쌍(Emile Licent)이 요서 지방 츠펑 (적봉赤峰) 지역에서 처음 발굴 시작하여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하였고, 요서 지방 홍산(紅山)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는 최고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유적은 '인류 최고(最古) 신석기 문화'로 규정되고 있다. 1930년대 중국 철학자 양계초의 아들 양사영이 홍산(紅山) 유적지를 조사한 이래, 많은 학자들이 연구에 뛰어 들었다. 그 후, 중국 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하였는데, 1980년대에 홍산(紅山) 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우하량 유적이 발굴되어 전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 곳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년) 보다 2-3천년 앞 서 있었고, 유적과 유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지역의 문명은 이미 국가 단계의 구비 조건을 모두 갖춘 제5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의 홍산(紅山) 문화의 유적과 유물들은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꼽히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 보다 훨씬 앞 선 문명 형태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홍산 문화의 소하서 지역 유적들은 무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결론적으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유적지 발굴은 세계 문명사를 다시 쓰게 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최근에도 중국은 동북(東北) 공정의 일환으로 이 곳을 계속 발굴하고 있다. 지중해 문명 (이집트 문명, 에게 문명, 그리스 로마 문명)이 서양 문명에 자양분을 공급했듯이, 동이족(東夷族)이 발해 연안에서 창조한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 홍산(紅山) 문화는 중국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주었다.
★ 현재, 중국은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년) 홍산(紅山) 문화를 ‘요하(遼河) 문명’이라고 하여 자기네 역사 유적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그 유적지의 위치와 문명 양식 등을 보면, 동이족(東夷族) 배달(倍達)의 문화 양식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중국이 만주의 홍산(紅山) 유적지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것은 마치 송곳을 주머니 속에 넣고 감추는 것과 같다. 결국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배달국(倍達國, BC 3,897-2,333년)은 신시 배달(神市 백두산, 1-13대 환웅)과 청구 배달(靑丘 산동성.태산(泰山), 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진다.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북만주와 대진국(발해) 연안의 땅에 뛰어난 석공예와 질공예를 남겼는데, 이것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의 '홍산(紅山) 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 환국(桓國, BC 7,199-3,897)의 신교(神敎) 문화는 고대 문화의 원형이고, 그 후, 배달국(倍達國)으로 이어졌으며, 환국과 배달국의 문화는 세계 4대 문명의 뿌리가 되었다. 환국(桓國)의 12개 나라 가운데, 수밀이국과 우루국은 그동안 서양에서 최초의 문명족으로 알려져 있던 나라 이름이고, BC 3,500년 전의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최근, 120여 년 동안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3,500년 경에 오늘의 서양 문명의 뿌리인 수메르(Sumer) 문명이 있었고, 이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 민족은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메르 문명은 다시 이집트 문명에게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대 희랍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 제국을 거쳐 오늘날 서양 문명이 나온 것이다. 인더스 문명 또한 북방 문명에서 기원했다고 하며, 배달국(倍達國)의 문화가 유입되어 인더스강 유역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 근래에 만주에서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요하(遼河) 문명’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데, 요하(遼河) 문명은 배달(倍達) 문명의 일부이다. '황하 문명' 보다 앞선 유적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중국의 황하 문명(BC 3,000-2,500년)은 황하강 유역에서 발생했는데, 이것은 북만주와 산동 반도 유역의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 문명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이다. 배달(倍達 BC 3,898-2,333)의 홍산 문화는 메소포타미아 문명(BC 3,500-2,600년). 황하 문명(BC 3,000-2,500년). 인더스 문명(BC 2,500년경). 이집트 문명(BC 3,100년경) 보다 앞선 것이며, 세계 4대 문명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는 증거와 유적들이 최근 속속 발굴되고 있다. 한민족의 배달(倍達) 문명이 중국 민족의 황하 문명 보다 빨랐고, 중국의 황하 문명은 한민족 배달(倍達) 문명을 받아서 생긴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 우리나라 배달(倍達) 민족이 천제(天祭) 및 제사(祭祀) 풍습을 중국 한족(漢族)에게 전해줬다. 배달국(倍達國) 말엽 및 고조선(古朝鮮) 초기에 중국에서 나라를 창업한 사람들 중에서, 우(禹) 임금(하夏나라의 시조). 탕(湯) 임금(은殷나라의 시조). 문왕(주周나라의 시조). 무왕(주周왕조 개창). 강태공(병법의 시조, 제齊나라)도 역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또한, 중국의 건국(建國) 시조(始祖)인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전부 우리 동이족(東夷族)이었다. 삼황(三皇)은 태호 복희(太昊伏羲).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 헌원(黃帝軒轅)을 말하고, 오제(五帝)는 소호 금천. 전욱 고양. 제곡 고신. 요(堯) 임금. 순(舜) 임금을 말한다. 그들 모두 배달(倍達)민족이었다. 중국의 건국 시조의 8명 중에 우리 민족이 8명으로 전부를 차지한다.
★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청구(靑丘)라고 했는데, 배달국(倍達國, BC 3,898-2,333)의 청구 배달(靑丘, 14대-18대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청구 배달의 문화가 '홍산(紅山) 문화'이다. 그 다음 나라에 이르러, 고조선(古朝鮮, BC 2,333-238)의 '단군(檀君) 신화' 중에는 호랑이와 곰이 나오는데, 실제는 호족(虎.호랑이)과 웅족(熊.곰)을 배달(倍達) 동이족(東夷族)이 교화해서 건국한 것을 신화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