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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스크랩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5권, 6장 겉사람과 속사람~ 9장 죄의 본성과 우리의 새 지위
강대식 추천 0 조회 83 12.07.16 13: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 6 장 겉사람과 속사람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0-11)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로되” - ‘몸’이란 말은 ’육신‘(flesh)이 아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몸‘(body)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살과 피, 뼈, 뇌의 기능을 포함한 몸을 말한다. 그것은 사망의 씨앗이 우리 몸에 있다는 의미이다. 몸은 사망의 처소이다. 우리 모든 사람들의 몸에는 사망과 부패의 본질이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 살아가기 시작하는 순간에 우리는 역시 죽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타락의 결과 사람의 위치는 그러하다. 사람의 몸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할 때는 생명과 탄력으로 충만한 몸이었다. 타락하고 나서부터 우리는 질병과 연약과 부패와 죽음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들에게 해당되는 이 모든 진리뿐만 아니라 몸은 도덕적인 의미에서 역시 죽어있다. 몸은 죄가 가장 용이하게 사용하는 도구이다. 몸은 죄와 싸우는 전장이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신자에게 고통의 중요 원인이 된다. 죄가 피고자이다.

 

바울은 죽음과 대조하여 우리에게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사람의 몸은 죽었으나 반면에 그의 영은 살았다“고 하는 것이다. 몸의 대조로 영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살게 될 것이다“가 아닌 ”살아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의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죽었다’는 말이 ‘죽음의 씨앗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듯이 ‘산다’는 말은 ‘생명의 씨앗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그의 영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아 거듭났다는 것이다. 사람의 영은 타락의 결과로 죽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속에서 그 영은 다시 생명을 얻었다. ‘옛 사람’은 죽었고 ‘새 사람’은 살아있다.(롬6:11)

 

더 나아가 로마서 6:23에서는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속에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이미 영생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롬6: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5:24)

 

그는 영생을 소유하였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영이 살아있기 때문에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몸은 육신적으로 죽을 것이나 영은 두 번째 사망을 당하지 않는다.(계20:6) 그의 영은 그리스도의 의를 인해서 살았다. ‘의’는 그 사람에게 주어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이다.

 

바울이 여기 8:10에서 말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의 현재 내 몸은 여전히 ‘죄로 인하여 죽어 있다’ 나는 내 몸 속에 있는 죄와 관계를 끊지 못했다. 몸이 여전히 죄의 처소이며 죄가 몸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여러분의 죽을 몸에서 왕 노릇 하려고 애쓰고 있다. 죄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여러분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기’ 때문이며 죄에 대하여 관계를 끊었으며 이제 다른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죽기까지 그 몸속에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죄가 몸속에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하라. 몸도 구속될 날이 올 것이다.

 

고린도후서 4:7-18 말씀은 로마서 8:10에 대한 가장 훌륭한 주석이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리스도인이 ‘깨어 기도해야 되는 것은’ 바로 이 진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자신은 구원받았다. 그러나 그 몸속에 죄가 기회를 노리며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에 대한 싸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는 육체를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죄가 그리스도인을 다시 사망의 영역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절망적일 필요는 없다. 그는 자기가 영으로는 살아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충만한 확신과 자신감으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구원을 받은 반면에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이 싸움을 감당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싸움이 끝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현재 위치는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영은 의를 인하여 사는 것이다” 자기 영이 살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 로마서 7:24은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이것은 성령의 작용으로 인하여 죄책감에 빠져있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해놓으신 일이 무엇인지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위치는 ’몸은 죄로 인하여 죽었으되 영은 의를 인하여 살았다는 것이다‘ 곧 나는 죄로 인하여 죽을 몸을 입고 살고 있지만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다‘는 것이다.

 

 

   

제 7 장 영화로운 몸의 본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많은 사람들이 그 구절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첫째, 사람들은 사도가 여기서 일종의 ‘새 생명에 대한 도덕적 부활’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저 위대한 칼빈마저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바울의 논증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행하신 것을 우리 자신에게 행하실 것이라는 점이다. 주님의 경우에 있어서는 도덕적 죽음이란 도무지 없었기 때문에 ‘도덕적 부활’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일종의 ‘도덕적 부활’을 가르키는 것일 수가 없다.

 

둘째, 또 다른 그들은 이 구절이 ‘신유’의 완벽한 진술이라고 믿는다. 너희의 연약한 몸을 치료할 것이고 완전한 건강을 되찾게 해줄 것이라는 말씀으로 그 구절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 진술은 실제적으로 우리 주님에게 일어난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을 ‘몸을 치료하는’ 구절로 해석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모든 것을 부여 받았고 그러나 몸에 있어서는 이 지상에서 완벽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질병을 가질 뿐 아니라 여전히 죽는 것이다.

 

이 진술은 우리 몸의 부활과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첫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에 관한 바로 그 구절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도가 마치 우리가 그 말씀을 오해할 수 없도록 확실히 할 양으로 두 번 그 사실을 진술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이중적 진술이다.

 

둘째,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관한 두 문구들이 우리 육체적 몸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 몸에 내주하고 계신다. 우리 몸에 일어날 어떤 일이다.

 

셋째, 부활은 사도가 하나의 최고 결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오직 유일한 해석이다. 사도는 우리들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영으로는 구원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역시 몸의 영역에서 구원받을 것이다.

 

이 진술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다시 한번 복되신 삼위일체 교리를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기서 이 일을 행하실 분이 성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마지막 문구에 그 일을 성령에 의해서 되어 질 것임을 말하고 있다. 성자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성령께서도 우리를 살리신다.(요6:40) 우리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론 자들임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한다. 그 삼위일체 교리로부터 성삼위의 각위가 우리와 우리 구원에 관련되어 있음을 연역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성부께서 그 모든 것을 계획하셨고 성자께서 그것을 집행하기 위해서 오셨으며 성령께서 그것을 적용시키신다.

 

내가 죽을 몸의 부활과 궁극적인 영화를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인 내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첫째,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는 성령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구속을 보증한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구원과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를 염두에 두고 우리에게 보내신 보증이다.(엡1:13)

 

둘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실제로 나아가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중도에 그만두실 리가 없다.(빌1:6)

 

셋째, 성령께서 실제적으로 우리의 죽을 몸에 거하고 계신다.

 

넷째,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인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영과 같은 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와 함께 죽었고 또한 그와 함께 부활할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다섯째, 몸의 부활을 떠나서는 죄와 타락과 그 모든 귀추들로부터의 완벽한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총체적으로 영과 혼과 몸이 완전히 타락하였다. 우리의 몸이 ‘죽을’ 몸인 것은 타락 때문인 것이다. 나는 내 몸이 구원받기까지는 완전히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그 일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일어날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그 몸이 영화롭게 될 것이다’ 내 몸이 부활할 것이고 내 몸이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기이한 진리는 우리 몸이 그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기업이다.

어떻게 우리가 낙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을 지나면서 비참한 비 그리스도인들처럼 탄식할 수 있겠는가?

 

다소 사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것에 대한 희미한 영상을 보았다. 내 영은 자유롭다(롬6:18) 그러나 몸도 역시 죄로부터 연약과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 몸은 그 속에 있는 신적 생명에 합당하게 그리고 영에 합당하게 영광스러워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죽을 연약한 몸에 그의 영을 두신 것이다. 그 사실로 인해서 나는 내가 부활하여 변화되고 새롭게 되리라고 하는 것이다.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완전한 구원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같은 몸이나 영화롭게 된 몸을 입고 영원을 살게 될 것이다.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게 될 것이다.

 

 

  제 8 장 성화의 실제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2-13)

 

사도는 언제나 먼저 교리를 설정해 놓고 ‘그러므로’라는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적용해 나간다. 이 진술은 중요한 두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첫째, 사도의 실제적 교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의 논증을 따라갈 수 있게 하고 그것을 적용하게 한다. 단순히 지적이고 이론적인 관심만을 가지고 기독교 진리를 소유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 우리는 ‘그러므로’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

둘째, 이 두절 말씀은 신약적인 성화교리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성격과 지위를 알아보았는데 이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거룩하게 되는가를 듣게 된다. 특별히 죄가 그리스도인에게 와서 그의 몸을 통하여 그를 넘어뜨리려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성화에 대한 인기 있는 오류이론들이 있다.

첫째, ‘완전주의자’ - 만일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면’ 죄가 완전히 제거되고 곧 몸과 영과 혼에 완전히 죄가 떠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체험으로 가질 수 있고 추구하기만 하면 ‘믿음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롬 8:2이 바로 ‘제2 의 체험’, ‘성령세례’ 라는 것이다. 이 잘못된 교훈은 ‘두 번째 축복’을 받은 사람들만이 ‘영광중에 있는 성도의 기업’을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그 기업을 누리게 하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성화가 아니라 칭의이다.

둘째, ‘반작용의 원리’ - 죄가 우리에게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바른 방법과 그 안에서 ‘거하는’ 법을 배우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승리를 얻게 할 것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관점은 발람에 대한 설교에서 취해진 것이요, 두 번째 관점은 ‘귀신들린’ 여인에 관한 기적적인 역사를 기초하고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두 교훈들은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사도가 어느 방식으로든지 우리에게 ‘항복하라’고 권면하지 않음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내 맡긴다’는 말이 없다. 사도는 6:11-13에서 말한 것을 여기에서 더 실제적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1-13)

 

사도의 방식은 첫째로 반복과 논증과 추론이다. 그는 우리에게 해방을 주기 위한 새로운 교리를 소개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일차적으로 사람의 의지에 호소하는 것도 아니다. 잘못된 교훈은 언제나 사람의 의지를 향하게 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있다고 단정해 버린다.

그 다음 둘째로 이러한 이해를 기초한 우리 측의 행동에 대한 요구가 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진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 그것을 넘겨주기만 하면’ 우리를 위해서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도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라. 계속적이고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어떤 행동을 지시한다. 우리는 몸의 행실을 계속해서 죽이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늘 하고 있어야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라는 말로 비추어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나에게 해당되는 진리, 곧 내 몸이 ‘죄로 인해 죽은’ 채로 있으나 나의 영이 의를 인해서 산 것임을 깨닫는 것이고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사도는 ‘우리는 육신에 빚진 자가 아니요, 더 이상 육신에 대하여 어떠한 의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육신은 모든 우리의 고통의 원인이다. 육신은 우리로 죄짓게 하였고 비참하게 하였고 사망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사도가 우리에게 강권하는 것은 우리가 육신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육신이 우리에게 해놓았던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은 그것에 대해 채무가 없으니 육신에게 충성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복종하지도 말라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나는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섬겨 왔다. 나의 빚과 채무와 의무는 다른 곳에 있다. 나는 내 빚을 갚아야 한다. 그 은혜를 갚으며 나의 채무를 자랑한다”고 하라.

 

사도가 이 위대한 성화교리를 일반적으로 소개하는 방식은 이미 우리에게 해당되는 진리로부터 추론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추구해야 할 어떤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계속해서 행해야 되는 어떤 것이다. “은혜와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되는 것이다. 사도는 두 절 말씀 속에서 이 결정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실천적 교훈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제 9 장 죄의 본성과 우리의 새 지위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2-13)

 

사도의 교훈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가 육신에 빚진 자들이 아니요 따라서 육신을 따라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신약이 언제나 성화에 관하여 이런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생소한 체험을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해와 논리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영역에서 벗어나 성령의 영역으로 옮겨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에 합당하게 살라는 것이다.

둘째, 더 이상 ‘육신’이 우리에게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죄 아래’ 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으며 은혜의 왕노릇 아래 있다. 사도는 우리가 어두움의 나라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고 말함으로써 이 근본적인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골1:13)

셋째,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보좌에 앉힌 바 되었다. 그것이 너희의 현재 위치이다. 다만 죄가 너희 ‘죽을 몸’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몸을 위해 살지 말라. 육신을 위해서 살지 말라.

넷째, ‘육신’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너희가 다시 사망의 영역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고 스스로 모순을 범하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우리는 주어진 이유들 때문에 ‘육신을 따라서’ 살지 말아야 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 관한 기본적인 진리는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의가 ‘분토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인식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중생한 사람이요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이요 새 본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가정에 양자가 되었고 새 나라로 옮겨진 것이다. 그는 은혜의 새 영역에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그가 죽을 때, 영광중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을 것임을 믿는다. 이것에 대한 증거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 ‘성령’을 두신 것이다. 그는 거룩하고 흠이 없이 의롭고 영화로운 몸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안다. 그리스도인이 믿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바울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 만일 너희가 이러한 일들을 믿는다면 어떻게 육신을 따라 살 수 있겠느냐?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고통과 번민과 상실과 영원한 위험으로 너희를 끌고 간다. 너희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살아나가려 하는가? 너희가 참으로 믿는다면 여전히 여러분 몸에 남아 있는 그 요소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사는 잠깐 동안에 여러분의 삶의 방식을 통제하도록 내버려두겠는가?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오히려 나는 이 어리석고 모순되는 일을 끝내려한다. 나는 지금 이 몸의 행실을 죽이려한다. 그것을 쳐서 복종시키려 한다. 나는 ‘이 죽을 몸’이 나를 주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이치를 따지는 논증으로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성화에 관한 사도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사도는 분명하게 성화의 방식은 그리스도인들인 우리 자신에 관한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실제화하는 방식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계속되어야 하는 우리 측에서의 의지의 행동을 유발하는 하나의 논증이요 추론이다. 이것은 여기서만 아니고 바울의 모든 서신들 가운데 나타나는 교훈이기도 하다. 그는 보통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여 이치적으로 논증하고 권면 호소함으로 서신 전반부에 말했던 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게 한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고린도 전서 9:26-27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

고린도후서 6:14, 7:1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

에베소서 4:1, 17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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