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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를 통한 깨달음의 길
[전문] 각묵 스님/실상사 화엄학림 강사
1. 불교의 목적: 행복의 실현[離苦得樂]
2. 어떻게 깨달음을 실현할 것인가
3.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 온․처․계․근․제․연과 37보리분법
4. 어떻게 깨달음을 실현할 것인가
5. 깨달음의 핵심 ― 해체해서 보기
1. 불교의 목적: 행복의 실현(이고득락, 離苦得樂)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경제행위, 정치행위, 문화행위, 철학행위, 의술행위, 종교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불교도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예부터 스님들은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표현하였다.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것을 간추려보면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구경의 행복이 된다.
① 금생의 행복
부처님께서는 금생에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기술(sippa, vijjā)을 익혀야한다고 하셨다. 자기 소질에 맞는 기술을 익혀서 그것으로 세상에 기여를 하고 급여를 받거나 이윤을 창출하여 금생에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중요한 행복이다.
그러나 기술만으로 금생의 행복은 얻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그 사람이 전문직종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나쁜 인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사회와 자신을 망가지게 한다. 바른 인성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이웃에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각각 지계와 보시로 강조하셨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에게 맞는 기술을 익히고,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므로 해서 금생의 행복을 얻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셨다.
그래서『숫따니빠따』「마하망갈라경」(Sn2:4)에서도 많이 배움(bahusacca), 기술(sippa), 규율[律, vinaya], 잘 공부지음(susikkhita), 보시(dāna), 공덕을 쌓음(kata- puññatā) 등을 금생의 행복의 조건으로 나열하고 있다. 이를 정리하면 보시, 지계, 학문, 기술이 된다.
② 내생의 행복
인간이 짓는 종교행위는 기본적으로 내생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금생에 종교행위를 함으로 해서 사후에 천상이나 극락세계에 태어나거나 천당에 가게 된다고 각 종교마다 이론은 다르지만 이구동성으로 사후세계의 행복을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짓는 의도적 행위(업)가 원인이 되어, 해로운 업[不善業]을 많이 지은 자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에 태어나게 되고 유익한 업[善業]을 많이 지은 자는 인간과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고 가르친다.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는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방법으로 보시와 지계를 말씀하셨다. 한역 아함경에서는 이를 시․계․생천(施․戒․生天)이라고 옮겼다. 금생에 이웃에 봉사하고 승가에 보시하며, 도덕적으로 건전한 삶을 살면 내생에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는 말씀이다.
특히『디가 니까야』「삼십이상경」(D30)에서는 세존께서 32상(相)의 각각을 갖춘 것은 아주 이전 생에서부터 보시를 하고 계를 호지하고 십선업(十善業)을 짓고 포살일을 준수하는 등을 통해서 천상에 태어나 큰 행복을 누리 신 뒤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러한 대인상(大人相)을 얻으셨다고 강조하고 있다.
물론 불․법․승․계에 대한 믿음도 강조되고 있는데, 불․법․승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를 지님의 넷은 예류과를 얻은 자들이 갖추고 있는 구성요소로 여러 경들에서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앙굿따라 니까야』의 많은 경들에서도 천상에 태어나는 방법으로 이러한 보시와 계의 구족과 믿음이 강조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를 들면「공덕이 넘쳐흐름 경」1(A4:51)과「견해 경」(A4:212) 이하의 여러 경들을 들 수 있다. 특히『앙굿따라 니까야』「합리적인 행위 경」(A4:61)에서 세존께서는 급고독 장자에게 “믿음을 구족하고 계를 구족하고 보시에 대해 관대함을 구족하고 통찰지를 구족하면”, “금생에 법답게 재물을 얻고, 친척들과 스승들과 더불어 명성을 얻고, 오래 살고 긴 수명을 가진 뒤, 죽어서 몸이 무너진 다음에는 좋은 곳[善處], 천상 세계에 태어난다.”고 가르치고 계신다.
그러므로 특히 재가자들은 이처럼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과 보시와 지계를 닦아서 금생에도 행복하고 내생에도 행복할 토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③ 궁극적 행복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 번째 행복은 궁극적인 행복(parama-sukha, 至福)이며 이것은 열반이요 깨달음이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 해탈, 열반, 성불은 세상의 어떤 가치체계나 신념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이 제시하는 고귀한 가르침이다. 스님들은 이러한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서 출가하여 수행을 하며, 재가 신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의 가치체계와 신념체계로 받아들이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아무튼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은 주로 재가자들에게 가르치셨으며 궁극적 행복은 출가자들에게 주로 가르치셨다. 물론 역량이 되는 재가자들에게도 궁극적 행복을 도처에서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상윳따 니까야』제1권「알라와까 경」(S10:12)에 해당하는 주석서는 “재가자는 바른 직업을 가지고 삼귀의를 하고 보시와 공양을 하고 계를 구족하고 포살을 실천하는 재가의 도닦음을 실천한다. 출가자는 이를 넘어서서 후회하지 않음을 행하는 계행을 갖추고[戒] 마음을 청정하게 함 등으로 구분되는 출가자의 도닦음을 닦아서[定] 통찰지를 갖추어서[慧] 삶을 영위한다.” (SA.i.330)고 적고 있다.
궁극적인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념적인 존재[施設, 名言]를 해체해서 법(法, dhamma)으로 환원해서 보아야 하는데,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온․처․계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철견(徹見), 사성제의 통찰, 팔정도의 완성, 12연기의 역관(逆觀) 등으로 말씀하셨다. 초기불전에서 보자면 이러한 세 가지 행복을 바르게 추구하는 방법은 37보리분법이며 이것은 팔정도로 귀결이 된다. 이렇게 하여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과 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불자이다.
2. 어떻게 깨달음을 실현할 것인가
이처럼 초기불교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열반(涅槃, nibbāna)의 실현이요 깨달음의 성취이다. 그리고 이 둘은 “염오, 이욕, 소멸, 고요함, 최상의 지혜, 바른 깨달음, 열반”(「염오 경」(S46:20) §3 등)이라는 문맥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열반이야말로 불교의 진리인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가운데 세 번째인 저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며 사성제를 철견하는 것이 바로 바른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궁극적 행복이요 그 궁극적 행복은 바로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성스러운 경지요 이러한 것을 철견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러면 깨달음은 어떻게 해서 실현되는가? 만일 그 방법이 없이도 문득 깨달음이 실현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행심의 논리, 저 로또 복권의 논리이다.
깨달음은 당연히 수행을 통해서 실현된다. 수행을 초기불전에서는 바와나(bhāvanā, 修)라는 술어로 총칭하고 있는데 초기불전의 도처에 나타나는 바와나(수행)는 팔정도를 근간으로 하는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37보리분법, 조도품)’로 정리된다.
그렇다면 무조건 팔정도를 위시한 37보리분법만 닦으면 깨달음을 실현하게 되는가? 그렇지는 않다고 해야 한다. 37보리분법을 닦기 위해서는 나와 세상과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緣起]와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이해는 37보리분법의 근간이 되는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의 내용이기도 하고, 칠각지의 택법각지이며, 오근․오력의 혜근․혜력(통찰지의 기능과 힘)이기도 하다. 나와 세상과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도는 더 이상 도가 아니며 그런 수행은 더 이상 수행이 아니어서, 산에 가서 물고기를 찾는 형국이 되고 말거나 단지 용만 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해가 없이 37보리분법을 실천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나와 세상과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緣起], 진리에 대한 바르고도 완전한 이해가 바로 깨달음의 내용이기도 하다.
나와 세상과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와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르치고 있는 부처님 말씀을 우리는 부처님의 교학 혹은 교법이라 부르며 이런 체계를 법(法, dhamma)이라 부른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는 ‘오온(五蘊, panca-kkhandha)’이라 말씀하셨다. 나라는 존재는 물질(몸뚱이, 色), 느낌[受], 인식[想], 심리현상들[行], 알음알이[識]의 다섯 가지 무더기[蘊]의 적집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12처(혹은 6내처와 6외처)로 말씀하셨다. 나와 세상은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조물주니 절대자니 신이니 하는 어떤 힘센 존재가 만들어낸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나와 세상은 조건발생이요 여러 조건[緣, paccaya]들이 얽히고설키어서 많은 종류의 괴로움을 일으킨다. 이러한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구명(究明)하여 그 괴로움을 없애야 저 깨달음과 해탈․열반은 실현된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나와 세상에서 진행되는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철저하게 밝히시는데 이것이 바로 연기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나와 세상과 여기에 존재하는 괴로움의 발생구조과 소멸구조에 대한 연기적 관찰은 궁극적으로 진리[諦, sacca]라는 이름으로 체계화 되는데 그것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저 사성제라 부른다.
이처럼 교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37보리분법의 수행이 있어야 깨달음은 실현되는 것이다.
3.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 온․처․계․근․제․연과 37보리분법
이처럼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은 온․처․연․제 혹은 온․처․계․근․제․연과 37보리분법으로 정리된다. 그래서 상좌부 불교의 근간이 되며 주석서 문헌들의 중심에 놓여 있는『청정도론』XIV.32에서 붓다고사 스님은 “여기서 무더기[蘊, khandha], 감각장소[處, āyatana], 요소[界, dhātu], 기능[根, indriya], 진리[諦, sacca],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 등으로 구분되는 법들이 이 통찰지의 토양(paññā-bhūmi)이다.” (Vis.XIV.32)라고 정의하여 불교교학의 근간을 온․처․계․근․제․연의 여섯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국불교에서 조석으로 독송되는『반야심경』에도 기본교학은 온․처․계․제․연의 다섯으로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초기불교의 수행은 초기불전의 도처에, 특히『상윳따 니까야』에 주제별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있는 37보리분법이다. 이 37보리분법은『상윳따 니까야』빠알리 원본 제5권의 S45부터 S51까지에서 도, 각지, 염처, 기능, 바른 노력, 힘, 성취수단의 일곱 상윳따로 나타나는데, 이들은 각각 팔정도, 칠각지, 4념처, 5근, 4정근, 5력, 4여의족의 7가지 주제이며 이것이 바로 37보리분법이다. 초기불교의 수행은 바로 이 37보리분법으로 정리된다.
이처럼 초기불교의 교학은 온․처․계․근․제․연 줄여서 온․처․제․연으로 정리가 되고, 초기불교의 수행은 37보리분법으로 집약이 된다.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교학으로서의 법
온(蘊, 무더기, khandha): 5온 = 물질[色, rūpa], 느낌[受, vedanā], 인식[想, saññā], 심리현상들[行, saṅkhārā], 알음알이[識, viññāṇa]의 다섯 가지 무더기이다.
처(處, 감각장소, āyatana): 12처 =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內處]와 형색․소리․냄세․맛․감촉․마음(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대상[六外處]인 12가지 감각장소이다.
계(界, 요소, dhātu): 12처의 마음(마노)에서 여섯 가지 알음알이를 독립시켜서 모두 18가지가 된다. 즉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와 형색․소리․냄세․맛․감촉․마음(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와 눈의 알음알이[眼識], 귀의 알음알이, 코의 알음알이, 혀의 알음알이, 몸의 알음알이,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의 여섯을 합하여 18가지가 된다.
근(根, 기능, indriya): 22근 = ⑴ 눈의 기능[眼根] ⑵ 귀의 기능[耳根] ⑶ 코의 기능[鼻根] ⑷ 혀의 기능[舌根] ⑸ 몸의 기능[身根] ⑹ 여자의 기능[女根] ⑺ 남자의 기능[男根] ⑻ 생명기능[命根] ⑼ 마노의 기능[意根] ⑽ 즐거움의 기능[樂根] ⑾ 괴로움의 기능[苦根] ⑿ 기쁨의 기능[喜根] ⒀ 불만족의 기능[憂根] ⒁ 평온의 기능[捨根] ⒂ 믿음의 기능[信根] (16) 정진의 기능[精進根] (17) 마음챙김의 기능[念根] (18) 삼매의 기능[定根] (19) 통찰지의 기능[慧根] (20) 구경의 지혜를 가지려는 기능[未知當知根] (21) 구경의 지혜의 기능[已知根] (22) 구경의 지혜를 구족한 기능[具知根]
제(諦, 진리, sacca): 4성제(四聖諦)=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고성제),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집성제),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멸성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도성제)의 네 가지 진리이다.
연(緣, 조건발생, paccaya, paticcasamuppāda): 12연기를 말한다.
② 수행으로서의 법: 37보리분법(菩提分法, 助道品, bodhipakkhiya-dhammā)
4념처(마음챙김의 확립), 4정근(바른 노력), 4여의족(성취수단), 5근(기능), 5력(힘), 7각지(깨달음의 구성요소), 8정도의 일곱 가지로 분류되며 법수로는 모두 37가지가 된다. 이 법수들에 대해서는 모두 해당 강의 자료들을 참조할 것.
4념처(念處, 마음챙김의 확립):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에 대한 마음챙김[念, sati]
4정근(正勤, 精進): 여기 비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지속시키고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고 충만하게 하고 닦아서 성취하기 위해서 열의를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쓴다.
4여의족(如意足, 성취수단): 열의(chanda), 정진(viriya), 마음(citta), 검증(vīmaṁsa)의 성취수단
5근(根, 기능): 믿음의 기능[信根], 정진의 기능[精進根], 마음챙김의 기능[念根], 삼매의 기능[定根], 통찰지의 기능[慧根]
5력(力, 힘): 5근과 같음.
7각지(覺支, 깨달음의 구성오소): 마음챙김, 법의 간택, 정진, 희열, 고요함, 삼매, 평온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각지]
8정도(八正道):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 =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
4. 어떻게 깨달음을 실현할 것인가
초기불전, 그 가운데서도 특히『상윳따 니까야』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궁극적인 행복인 깨달음과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 깨달음의 증득 혹은 궁극적 행복의 실현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특히『상윳따 니까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제별로 모으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깨달음을 실현하는가에 대한 분명하고도 명쾌한 가르침들을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는 상윳따들에서 지속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이제『상윳따 니까야』를 위시한 니까야에 나타나는 깨달음을 실현하는 방법을 몇 가지로 분류해서 살펴보자.
① 무상․고․무아의 통찰과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통해서
『상윳따 니까야』뿐만 아니라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깨달음을 실현하는 방법 가운데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무상․고․무아의 통찰을 통한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 혹은 염오-이욕-소멸의 정형구이다. 『상윳따 니까야』에는 적어도 400개 이상의 경들이 무상․고․무아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런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염오-이욕-소멸이나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로 연결된다. 주석서들은 한결같이 염오를 강한 위빳사나로, 이욕은 도(예류도부터 아라한도까지)로, 해탈은 과(예류과부터 아라한과까지)로, 구경해탈지는 반조의 지혜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다시 풀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존재나 세상이라는 존재 등의 존재일반을 법(dhamma)이라는 기준으로 해체해서 설하신다. 그것은 본 니까야의 도처에 나타나며,『청정도론』에서 정리하고 있는 오온, 12처, 18계, 12연기 등이다.
둘째, 이렇게 존재일반을 법들로 해체해서 보면 드디어 무상이 보이고 괴로움이 보이고 무아가 보인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셋째는 이렇게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봄으로 해서 존재일반에 염오하게 되고, 존재일반에 대한 탐욕이 빛바래게 되고, 그래서 해탈하게 되고, 해탈하게 되면 태어남은 다했다는 해탈의 지혜가 생긴다. 혹은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면 소멸로 정의되는 열반을 실현하게 된다.
이것이 초기경의 도처 특히『상윳따 니까야』에서 중점적으로 설해지고 있는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세 가지 교학적인 단계이다.
경들에서는 염오-이욕-소멸로 나타나기도 하고,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해탈은 과의 실현을 뜻한다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SA.ii.268) 그러므로 해탈과 소멸은 과의 증득이라는 같은 현상을 나타내는 술어이다. 그리고「인연 상윳따」에서는 12연기 각지의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으로 이욕과 소멸이 나타나고 있다.(아래 ②를 참조할 것)
② 연기의 이욕-소멸을 통해서
연기의 가르침은『상윳따 니까야』제2권「인연 상윳따」(S12)의 주제이다. 여기에 포함된 93개의 경들은 모두 2지 연기부터 12지 연기까지의 다양한 연기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인연 상윳따」(S12)의「도닦음 경」(S12:3)은 이렇게 설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바른 도닦음인가?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 의도적 행위들[行]이 소멸하고, 의도적 행위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알음알이가 소멸하고,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바른 도닦음이라 한다.”(「도닦음 경」(S12:3) §4)
여기서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기 때문에’로 옮긴 것은 asesa-virāga-
nirodhā를 직역한 것이다. 여기서 ‘빛바래어’으로 옮긴 virāga는 염오-이욕-소멸의 정형구에 나타나는 이욕(탐욕의 빛바램)과 같은 단어이다. 문맥에 따라 여기서는 ‘탐욕의’를 빼고 그냥 ‘빛바래어’로 옮긴 것일 뿐이다. 소멸로 옮긴 nirodha는 당연히 염오-이욕-소멸의 소멸과 같은 단어이다. 이처럼 위 ①에서 깨달음의 실현방법으로 강조되어 나타났던 염오-이욕-소멸 혹은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의 정형구는 연기의 가르침에서도 염오가 빠졌지만 이욕-소멸의 정형구로 꼭 같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소멸(nirodha)은 바로 사성제의 세 번째 진리인 소멸의 진리(멸성제, nirodha-sacca) 즉 열반을 뜻한다. 그러므로 온․처․계의 가르침과 사성제와 12연기와 팔정도(팔정도의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이므로)는 모두 궁극적으로는 소멸(nirodha = 열반)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③ 사성제의 통찰을 통해서
『상윳따 니까야』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진리 상윳따」(S56)는 사성제의 가르침을 모아서 강조하고 있는 곳이다. 삼매를 닦고 홀로 앉는 수행을 하는 이유는 사성제를 꿰뚫기 위해서이며(S56:1~2), 출가자가 되는 이유도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관통하기 위해서라고 경들은 밝히고 있다.(S56:3~4) 그뿐만 아니라 사색을 할 때도 말을 할 때도 항상 사성제를 사색하고 사성제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S56:5~6) 이처럼「진리 상윳따」의 모든 경들은 사성제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사성제를 완전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여래․아라한․정등각자라 부르며(S56:23) 아라한이라 부르며(S56:24) 사성제를 알고 보기 때문에 번뇌가 멸진한다(S56:25)고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깨달음은 사성제를 꿰뚫고 관통하고 알고 보아서 실현되는 것이라고「진리 상윳따」의 경들은 강조하고 있다.
한편 다른 니까야에서는 육신통 가운데 맨 마지막이며 깨달음을 실현하는 정형구로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의 정형구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 누진통의 정형구의 내용은 사성제의 통찰이다. 경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런 나는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하고, 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였다.
나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나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慾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존재의 번뇌[有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무명의 번뇌[無明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이처럼 누진통의 정형구는 사성제의 통찰을 통한 해탈-구경해탈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오온․12처에 대한 염오-이욕-소멸이나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의 정형구와, 12연기에 대한 이욕-소멸의 정형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결국은 소멸 혹은 해탈-구경해탈지로 귀결이 되기 때문이다.
④ 팔정도의 실현을 통해서
『상윳따 니까야』제6권「초전법륜경」(S56:11)에서 세존께서는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다고 천명하고 계신다. 경을 인용한다.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로 된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이다.”(S56:11 §§3~4)
⑤ 37보리분법을 닦아서
교학의 토대가 되는 온․처․연․제의 가르침이 깨달음과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가르침이듯이, 37보리분법으로 정리되어『상윳따 니까야』제5권에 나타나는 수행의 가르침은 말할 필요도 없이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37보리분법은 이미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보았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처럼 초기불전에서는 불교의 인간관인 오온과 세계관인 12처의 무상․고․무아를 통한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설하고 있고, 연기관인 12연기의 이욕-소멸도 역설하고 있으며, 진리관인 사성제를 관통할 것도 역설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수행․실천관이요 중도인 팔정도와 37보리분법의 실천을 통한 깨달음의 실현도 강조하고 있다.
5. 깨달음의 핵심 ― 해체해서 보기
초기불전에서 설하는 깨달음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해보라면 주저 없이 ‘해체해서 보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해체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경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데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영감이 가장 뛰어난 분으로 칭송되며 시작(詩作)에 능했던 왕기사 존자는『상윳따 니까야』「천 명이 넘음 경」(S8:8) {742}번 게송에서 부처님을 “부분들로 해체해서(bhāgaso pavib
hajjaṁ) 설하시는 분”이라고 찬탄하고 있다. 그리고 주석서는 “마음챙김의 확립 등의 부분(koṭṭhāsa)으로 법을 해체하는 것(dhammaṁvibhajantaṁ)이라는 말이다.”(SA.i.279)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해체는 pavibhajja/vibh
ajja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위밧자(vibhajja)라는 술어는 빠알리 삼장을 2600년 동안 고스란히 전승해온 상좌부 불교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분석과 해체의 궁극적 지향점은 개념[施設, paññatti]의 해체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명칭이나 말 즉 개념에 속게 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의 도처에서 강조하신다.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온․처․계․연 등으로 설해지는 모든 존재들[諸法, 有爲法, sabbe dhammā]의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함으로 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그래서 해탈․열반․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경전의 도처에서 강조되고 있다. 특히『상윳따 니까야』의「무더기 상윳따」(S22)나「감각장소 상윳따」(S35)나「인연 상윳따」(S12) 등의 많은 경들은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땅에 떨어진 머리칼을 보고 아무도 아름답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머리라는 특정한 곳에서 특정한 색깔과 특정한 형태로 여인이라는 전체상(全體相, nimitta)과 얼굴이라는 부분상[細相, anubyañjana]에 묶여 있을 때 머리칼을 아름답다하고 그것에서 애욕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머리칼을 ‘단지 머리칼’로만 보면 그것은 애욕의 대상이 아니다. 이영애의 눈과 코와 입술이 아무리 예쁘다할지라도 그것은 전체상을 이루고 있을 때 이야기다. 눈을 빼고 코를 분리하고 입술을 도려내어 알코올에 담가두었다면 아무도 그것에서 애욕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애욕을 일으킨다면 그야말로 성도착증환자이거나 속된 말로 돌아이일 것이다. 그리고 머리칼, 눈, 코, 입술 등은 땅, 물, 불, 바람이라는 네 가지 근본물질들의 조합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이들을 아름답다 여기는 것은 우리가 관념적으로 취하는 전체상과 부분상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처럼 해체해서 보면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개념적 존재나 명칭이나 말에 속지 않고 이런 것들은 단지 오온이고 12처이고 18계이고 조건발생(연기)일 뿐임에 사무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온․처․계․연으로 해체해서 보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그래서『디가니까야』「대념처경」(D22) 등의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수행 방법의 핵심도 나라는 존재를 몸․느낌․마음․심리현상들(신․수․심․법)로 해체해서 그 중의 하나에 집중(삼매, 사마타)하거나 그 중의 하나의 무상․고․무아를 해체해서 보는 것(통찰, 위빳사나)이다.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그는 불교적 수행을 하는 자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왜? 그는 불교적 인생관, 불교적 세계관, 불교적 신념을 가진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처럼 분석을 강조하던, 반야․중관처럼 직관을 강조하던, 화엄처럼 종합을 강조하던, 그것은 불교적 방법론인 해체에 토대해야하기 때문이다. 나와 존재와 세상과 생사문제를 이처럼 온․처․계․연으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염오-이욕-소멸을 통해서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어느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다.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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