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호세아 1:10-2:1 (한영신대 정석규교수님)
지난주에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서부터 9주 동안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하나씩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 가운데 저와 여러분 모든 분들의 삶 가운데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맺혀지기를 소망합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가운데 중 첫 번째 열매는 사랑입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은 헬라어에 보면 ‘아가페’입니다. 이 용어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말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하나이지만, 헬라어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로 구분하여 사용됩니다. 에로스는 이성간의 사랑이고, 필레오는 친구 사이의 사랑이며, 아가페는 하나님의 그의 자녀를 향한, 또는 부모의 자녀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면 열매가 열리는데 그 첫 번째 열매는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왜 성경은 성령의 열매를 말하면서, 처음으로 사랑을 말했을까요? 이것을 묵상하면서 사랑이 없는 다른 성령의 열매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랑 없이 희락을 추구하면 어떻게 될까요? 상대방에 대한 사랑 없이 자신의 희락만을 추구하다보면, 다른 사람의 기쁨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기쁨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기쁨이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의 대가로 얻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화평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남에 대한 사랑 없이 자신의 삶의 평화를 추구하다 보면 남의 평화를 깨뜨리기 쉽습니다. 사랑 없는 오래 참음과 절제는 너그럽게 상대방을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악발과 독기만 남는 참음과 절제가 됩니다. 사랑 없는 자비와 양선과 온유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비와 양선과 온유가 아니라, 가식적이며 형식적인 친절함에 불과합니다. 사랑 없는 충성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 열심을 다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만을 주게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다른 성령의 열매를 바른 열매되게 하는 모든 열매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며, 또한 가장 중요한 열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기독교의 기본이 되는 믿음, 소망, 사랑을 말하면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성령의 첫 번째 열매입니다.
중세의 성자인 Bernar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과,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이 계신다. 그는 바로 성령이시다. 성부의 사랑이요, 성자의 사랑이신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만드신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사랑의 신이기에, 성령을 품은 사람, 성령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사랑이 열매로 맺혀집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가 쓴 요한 1, 2, 3서의 내용을 읽어보면,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사도였던 요한의 일화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밧모 섬에 귀양 갔다가 풀려 나왔습니다. 그때 나이가 거의 90을 넘어선 상태였습니다. 그는 남은여생을 에베소라는 도시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요한은 육신이 연약해진 말년에도 제자들의 부축을 받아 가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어김없이 꼭 같은 설교를 되풀이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오늘은 새로운 설교가 없습니까?”
그러자 요한이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새로운 설교를 전하노니 서로 사랑하라.”
저도 요한과 같은 사도가 되고 싶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사랑을 외치며 사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이 천국이기에, 사랑을 외치다 저 천국에 갈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사랑 안에서 천국을 맛보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신약에서 사랑의 사도를 요한이라고 한다면, 구약에서 사랑의 예언자는 호세아를 들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외친 북이스라엘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사랑을 외친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였습니다.
오늘 본문 이전의 말씀인 호세아 1:2-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인 고멜을 아내로 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창녀인 고멜을 그의 아내로 취합니다. 그리고 3명의 자녀인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를 낳습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3자녀를 낳은 후에 호세아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도망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다시 그 여인을 용서하고 아내로 맞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호세아의 결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씀해 주고 있는 예언자의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던 창녀 이스라엘과 결혼하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더욱 죄를 짓고, 결국 다른 신들을 섬기는 간음을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시지만, 그러나 다시 사랑으로 그들을 용납하십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무조건 사랑이 얼마나 큰사랑인지 깊게 깨달았습니다. 저 같으면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취하지 못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음란한 여인과 같은 우리들을 자신의 아내로 삼아주셨습니다. 정말 힘겹게 한번 음란했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여인이 또 나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간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끝이 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하여 그녀를 다시 받아들이도록 하셨습니다. 그것도 그저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돈을 지불하시고 그녀를 사서 아내로 받아들이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은 고멜이 결혼한 후에 한번 호세아를 버리고 간음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하나님과 우리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남편으로 모신 후에도 수없이 마음을 다른 곳으로 빼앗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영적인 간음을 하는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우상을 섬기더라도 참아 주시고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한번 잘못해도 용서해 주시지만, 그 후에 또 같은 잘못을 해도, 대가를 지불하시면서 까지 용서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호세아의 말씀을 통하여 저는 하나님의 사랑의 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결단이라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들의 이름이 하나는 로루하마요 다른 하나는 로암미입니다(1:6-9).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한 감정을 표현하는 이름들입니다. ‘로루하마’는 ‘더 이상 긍휼함이 없다’는 뜻이고 ‘로암미’는 ‘더 이상 나의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범죄함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을 나의 백성으로 삼지 않고, 더 이상 그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호 2:1)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암미’란 ‘나의 백성’이라는 뜻이고, ‘루하마’는 ‘긍휼함을 베푼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감정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긍휼함도 없고 더 이상 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의지적으로 결단하여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베풀어주고, 그들을 다시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의지적인 사랑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하여 저의 사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사랑할 마음이 생기는 사람은 잘 사랑하지만, 그리고 저의 상태가 좋을 때는 남을 잘 사랑하지만, 감정이 내키지 않는 사람이나, 또는 제가 상태가 좋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잘 사랑하지 못합니다. 저의 사랑은 의지적이라기보다는 저의 상태와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고, 감정에 따라 기복이 심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한 저의 모습을 보면서,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저의 사랑처럼 감정에 따라 기복이 심하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감정적이라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우리 모두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지금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니, 하나님의 사랑이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의지적이라는 것을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명령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일 줄 알리라.”
만약 사랑이 감정이라면 명령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의지적인 결단이요 노력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군에서 부하는 상사의 명령이 합리적인지 이성적인지 따지지 않고 그냥 복종합니다. 명령이란 그런 것입니다. 사랑은 명령입니다. 나의 마음과 감정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했으면 합니다. 자신의 마음과 감정에 따라 변화되는 사랑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속에도 변함없는 그런 사랑을 하여, 사람들이 우리들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인정하는 그러한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명령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거저 명령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을 보여주시고, 우리들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 때문에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의 감정과 상태에 관계없이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돌아가신 성녀 마더 테레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옆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보다 전 세계인류를 사랑하는 것이 쉽다.”
정말 그렇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일수록 사랑하기가 더욱 힘든 법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이 직장에, 우리가 속한 교회에 사랑의 수고가 넘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사랑하도록 힘쓰는 주의 자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