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원(天原)이 고향.
1869년 2월17일 태어나시고 1940년 3월13일 돌아가셨다
이래 중요한 말씀을 듣는다.
"지금부터 우리나라는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이 탄생하는 엄숙한 순간입니다. 제국의 신민이 아니고 민주공화국의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의 주인은 우리 국민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꼭 광복합시다.”
1919년4월11일 오전 중국 상하이 김신부로(金神父路) 22호 건물 3층.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알리는 임시의정원 의장인 석오 이동녕(石吾 李東寧)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한민국 법통성의 뿌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 출범했음을 공포하는 순간, 군주제의 청산과 아울러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민주국가가 탄생되었음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1885년 17세 때 일가가 상경하여 서울 종로 봉익동(鳳翼洞)에 정착하였다. 1892년 24세때 국가시험인 응제진사(應製進士)시험에 합격하였다.
25세때(1893) 아버지를 따라 원산(元山)으로 가 육영사업(광명학교로 개칭)에 조력하였다. 28세때(1896) 독립협회에 가담, 개화민권의 기수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다음해 독립협회의 주최로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官民共同會)가 열렸을 때 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임금께 상소하는 등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 결국 이로 인하여 이준(李寯)·이승만(李承晩)과 함께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30세때(1898) 7개월간 옥중 생활을 끝내고 출옥, 이후 더욱 민권운동과 개화운동에 앞장서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헌신한 것을 결심했다. 이종일(李鐘一)이 창간 경영하는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 이종일의 가르침을 받고 본격적인 민족의식과 그 사상정립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수련하였다.
34세때(1902) 이상재(李商在)·전덕기(全德基) 목사 등 종교인과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그가 36세때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그는 서울 상동(尙洞) 교회에서 전덕기·양기탁(梁起鐸)·신채호·조성환(曺成煥)등과 같이 독립운동 단체인 청년회(靑年會)를 조직한 뒤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김구(金九)·이회영(李會榮)등 지사와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다음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동지들과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하고 이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대한문(大漢文)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여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선언하다가 체포되어 2개월간 투옥 생활을 감수하였다.
풀려 나온 그는, 1906년 만주 북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망명,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등과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사립학교인 서전의숙(瑞甸義熟)을 설립, 한국동포의 그 2세의 민족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뒷날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이 때 동지 이상설(李相卨)이 2명의 특사와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가자 한때 귀국하여 안창호·전덕기·양기탁·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등 동지들을 모아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그는 안창호·이회영과 협력하고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 공립협회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조직과 발행을 지원하였다.
한편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함에 있어서도 크게 조력하였고, 상동학교(尙洞學校)의 교사로 재직한 일도 있었다. 삼원보(三源堡)에 망명하여 이석영(李石榮)·이철영(李哲榮)·이회영·이시영(李始榮)형제 및 이상룡(李相龍)등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 뒤에 서로군정서)를 설립, 운영하고 교포들의 신분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이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군사교육을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 후일 독립군(獨立軍)의 초석이 되어었음은 물론이었다. 그후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가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활동하는 등 광복운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는 이상설의 알선으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총독 보스타빈이 약속한 한국군관 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 3개월간 투옥 생활로 고초를 겪었다.
1915년 그의 나이 47세때 이상설·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의 사업기관으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 대동신문(大東新聞)과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행 보급하였다
그가 49세되던 1917년에는 노령 니콜라에프스크에서 나철(羅喆)이 창시한 대종교 포교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독립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성(吉林省)에서 대종교 김교헌(金敎獻) 외에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玩九)·김좌진(金佐鎭)·여준 등과 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하였다.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해(上海)로 건너가 종부조직을 모색하였다. 마침내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임되었다. 동년 4월 13일 동지들과 임정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이승만이 부임치 않자 국무총리로 취임, 임정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그해 9월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자 그는 내무총장이 되었다. 1920년 이동휘가 사임하자 그는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임정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등 임정 불신이 표면에 나타나자 그는 안창호·여운형·조소앙·이시영·차이석(車利錫)·홍진(洪震)·노백린(盧伯麟)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1925년 그는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하였고 군무총장도 겸임하였으며, 이승만의 장기 궐석으로 대통령 직권을 대행하였다. 이때 조선총독이 한국인을 시켜 그에게 귀화를 권유하였으나 즉석에서 일축, 이로 인해 그 부친이 투옥된 일도 있었다.
1925년에 두 번째로 의정원의장(11대)이 되었고, 1926년에는 국무령이 되었다. 이때 58세인 그는 법무총장도 겸임 2차 개헌에 따른 국무령 지도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다음해 그는 임정의 주석(主席)이 되어 약화된 임정을 튼튼한 반석위에 올려 놓았다.
1928년에는 김구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 그 이사장에 추대되었으며, 당 기관지 한보(韓報)·한성(韓聲)을 발행하였다. 1929년 10월 세 번째로 의정원의장(13대)이 되어 임정의 존폐위기를 겨우 극복하고, 두 번째의 임정 주석(1930∼1932)이 됨으로써 중책을 짊어졌다.
1932년에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김구·이유필 등과 지도, 쾌거를 이루었다. 이로인해 민필호 등의 주선에 따라 임정 요인과 같이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 수륜사창(秀綸紗廠)으로 피신하였다.
1935년에 세번째로 임정의 주석이(1935∼1939)되었으며, 이때 양우조(楊宇朝)·엄항섭(嚴恒燮)·이시영·조성환·차이석·송병조(宋秉祚)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되었다. 1937년에는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광복진선(大韓光復陣線)을 구축하고 그 진로를 모색하였다.
1939년 그는 임정의 네 번째 주석(1939∼1940)이 됨으로써 김구와 합심하여 전시 내각을 구성, 서안(西安)에 대한국사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1940년 3월 13일 27세때 사천성기강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임시정부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석오 이동녕의 이름은 500년 조선역사에 허물어질대로 허물어져 버린 비극적 요소를 고치고 다시 나라를 튼튼하게 세우고자 한 상징이며, 구태의연한 왕조비호세력들과 간악한 일본의 제국주의 집단에 의하여 조선이 일본에게 빼앗긴 이후 36년을 거치는 동안에도 자나깨나 조극의 광복을 위한 일념으로 살아 오신 분으로 역사에 길이 남은 이름이다
그 사상과 이념으로 드디어 이 나라를 다시 찾는 데 줏대를 잡아 주시고 기백을 심어 주시며 많은 인재와 후학을 길러 주신 분이시다.
이분이 같은 연안이씨 후손인 긍지감에서 공감하는 이관희가 정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