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창작 천불동 만불산千佛洞 萬佛山*김웅 작가님의 불교소설.6

[어질이]

천불동 만불산千佛洞 萬佛山
김웅




1

그날은 온종일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일 년 가야 눈 내리는 날이 너댓새나 될까 말까하는 이곳에선 드문 일이었다.
이도성(李道成) 처사는 그 눈 속에서 튕겨나오기라도 한 듯 불쑥 내게로 다가왔다. 머리와 옷에는 하얀 눈이 온통 덮여 있었고, 얼굴에는 눈이 녹아내린 눈물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ꡒ안녕하십니까? 스님.ꡓ
그가 합장한 채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ꡒ네, 어서 오십시요.ꡓ
ꡒ눈 구경을 하고 계시나부죠?ꡓ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치면서 그가 물었다.
ꡒ아미타불! 추운데, 안으로 좀 들어가십시다.ꡓ
나는, 이 분을 내가 어디서 만났더라? 속으로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평소에 나는 사람을 보는 눈이 어둡다. 그 사람이 그 사람만 같고…… 상대가 여자일 경우에는 더욱 심하다.
ꡒ큰스님 계시죠?ꡓ
뒤따라오면서 그가 물었다.
ꡒ네, 계십니다.ꡓ
큰스님이란 이 성불사(成佛寺)의 주지스님이시며 나의 은사스님이신 일각선사(一覺禪師)님을 높여 부르는 호칭이었다.
ꡒ아아, 다행입니다. 급히 출발하느라 전화도 드리지 못해서 안계시면 어쩌나? 줄곧 걱정하던 참이었는데…….ꡓ
그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비로소 그가 누구인가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ꡒ미처 몰라뵈었습니다만, 백 사장님과 전에…….ꡓ
ꡒ맞습니다. 기획실에 근무하는 이도성 처사입니다.ꡓ
그렇구나! 나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얼마 전에 백금출(白金出)사장과 함께 왔을 때 큰스님의 소개로 인사한 적이 있는…… 내가 허겁지겁 주지실을 향해 발걸음을 떼어놓으면서 말했다.
ꡒ날씨가 차갑습니다. 어서 올라가시죠?ꡓ
ꡒ네.ꡓ
우리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각선사님께서 기거하시는 선당(禪堂)으로 향했다.
ꡒ문안드립니다.ꡓ
ꡒ청광(淸光)인가?ꡓ
ꡒ네, 이도성 처사님께서…….ꡓ
ꡒ아이구, 이거 날씨도 차가운데…… 어서 오세요.ꡓ
일각선사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반기셨다.
ꡒ인사드리겠습니다, 스님!ꡓ
이도성 처사가 큰스님께 세 번 절했다. 가부좌를 튼 채로 합장하고 앉아 절을 받고난 일각선사가,
ꡒ춥습니다. 아랫목으로 내려와 앉으세요.ꡓ
이도성 처사에게 말씀하셨다.
ꡒ아니, 됐습니다. 여기도 따뜻한 걸요.ꡓ
ꡒ백 사장님께서도 안녕하시죠?ꡓ
ꡒ네, 사실은 사장님과 함께 올 계획이었습니다만, 회사에 피치못할 일이 한 가지 생겨서…… 급한 대로 제가 청사진만 가져왔습니다.ꡓ
ꡒ관세음보살!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어디 한 번 볼까요?ꡓ
ꡒ네.ꡓ
ꡒ청사진이라면 전에 말씀하신 <천불동 만불산>건립 불사에 관한?……ꡓ
내가 일각선사님께 물었다.
ꡒ그렇다네. 어디 보자아…….ꡓ
펼쳐놓은 설계도로 눈을 돌리면서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ꡒ제가 대강 설명을 해 드릴까요?ꡓ
이도성 처사가 물었다.
ꡒ그래주시겠습니까?ꡓ
ꡒ네…… 이곳이 성불사(成佛寺)인데, 이 뒷편, 말하자면 세불천(洗佛川)의 주류와 지류가 감싸고 있는 이 일대가 천불동이 되고, 만불산은 이 천불동을 감싸고 흐르는 세불천의 주류와 지류 양편의 산록에 조성될 계획으로 있습니다.ꡓ
ꡒ가만…… 소승이 원체 아둔해놔서…… 그러니까 천불동이라는 건 부처님 천불을 모시는 동네라는 뜻일 테고, 만불산이란 부처님 만불이 조성되어 있는 산이라 해석해도 되는 거지요?ꡓ
백금출 사장님과는 이미 몇 차례 얘기를 나눈 바도 있었기 때문에 대체적인 윤곽이야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도성 처사와는 첫 대면이기도 해서, 그의 실력도 한번 가늠해볼 겸사겸사로 내가 시침 뚝 따고 짐짓 끼어들었다.
ꡒ그냥 발음하기 좋게시리 천불동에 만불산이라 했지만서두, 더 분명하게 말씀드리자면 천불천탑동이라거나 만불만탑산이란 이름이 더욱 적합할지도 모르겠구만요.ꡓ
이도성 처사가 설명했다.
ꡒ천불천탑동에 만불만탑산이라? 많이 들어본 지명 같은데?……ꡓ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ꡒ운주사의 그 천불천탑을 두고 하시는 말씀 아니신가?ꡓ
큰스님께서 넌즈시 내 기억을 환기시켰다.
ꡒ옳습니다. 그 만산계곡에 흩어져 있다던 천불천탑…….ꡓ
ꡒ청광수자도 그 부처님들을 친견했지 싶었는데?ꡓ
ꡒ예,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다가 대충…… 그렇지만 한번만으로는 도저히 그 천불천탑이 세워진 깊은 뜻을 다 알지 못하겠더군요.ꡓ
내가 얼버무렸다.
ꡒ그렇다면 언제 시간을 내어 한번 더 댕겨오시게나.ꡓ
ꡒ감사합니다. 말미만 주신다면 언제고……ꡓ
ꡒ처사님께선 더 하실 말씀이?……ꡓ
이도성 처사에게로 눈길을 돌리면서 큰스님께서 물으셨다.
ꡒ아까 대충 말씀은 다 드린 셈이고…… 조감도가 다 그려지면 한눈에 알아보실 수가 있겠습니다만, 어쨌거나 이 불사가 완성되는 날이면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불국정토(佛國淨土)가 이 성불산 계곡에 재현되는 건 확실합니다.ꡓ
이도성 처사가 침을 튀겨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청사진을 짚어보이는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대로 시선을 따라 옮기면서 큰스님은,
ꡒ아미타불!ꡓ 또는 ꡒ관세음보살!ꡓ
하는 염불로 감탄사를 대신하면서 연방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ꡒ수고하셨습니다. 공사는 언제부터 착수하실 예정입니까?ꡓ
큰스님이 물으셨다.
ꡒ해동하는대로 곧바로 시작하면 어떨까요?ꡓ
이도성 처사가 되물었다.
ꡒ허가가 그 때까지 나오게 될지 모르겠군요?ꡓ
ꡒ그 문제는 염려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백 사장님께서 늦어도 다음주까지는 제반 허가문제를 마무리 짓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ꡓ
ꡒ관세음보살! 애들 많이 쓰십니다.ꡓ
ꡒ부처님 일인 걸요. 애 쓰고 말고가 어딨습니까?ꡓ
ꡒ모두들 그리 생각해주시니까 더욱 고맙지요.ꡓ
ꡒ헌데, 이번 불사에서 큰스님을 보필하실 스님이…?ꡓ
ꡒ여기 있는 청광(淸光)수자입니다. 앞으로는 제반사를 이 청광수자와 의논해서 하세요.ꡓ
큰스님이 턱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ꡒ아이구, 몰라뵈었습니다. 앞으로 잘 좀 이끌어주세요, 청광스님!ꡓ
그가 나를 향해 합장하면서 깍듯이 예를 다해 말했다.
ꡒ제가 뭘 알아야 말씀입죠. 오히려 소승이…….ꡓ
사실이 그랬다. 나는 나의 사형인 도암(道庵)스님께서 공부를 핑계로 한사코 산사에 남아버렸기 때문에 이 불사에서는 부득히 내가 일각 큰스님을 대신하여 사무적인 제반사를 모두 수행해야만 할 수밖에 없었지만, 실상 나도 이런 일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처지였다.
ꡒ절집 일이야 우리 청광수자가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하니까 이쪽을 맡고, 바깥 일은 이 처사님께서 관장하십시요. 백금출 사장님께서도 그렇게 하실 요량으로 이 처사님을 초빙해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ꡓ
큰스님이 말씀하셨다.
ꡒ그렇습니다. 제가 전에 개척교회를 몇 신설한 경험도 있고해서……ꡓ
ꡒ개척교회라뇨?ꡓ
내가 물었다.
ꡒ그런 게 있습니다. 큰 빌딩이라든가 주택가의 목 좋은 건물로 100여 평 쯤을 전세나 월세로 얻어가지고 교회를 새로 꾸미는 거지요. 그런 다음 부흥회도 하고 해서 신도를 모아가지고 큰 교회를 새로 짓는다거나, 그도 저도 여의치 않으면 적당한 값에 팔아치워 버리고 다시 개척교회 세울 곳을 물색한다거나…….ꡓ
ꡒ그러고보니 이 처사님께선 기독교도시군요?ꡓ
내가 짐짓 물었다.
ꡒ전에야 물론 그랬습죠. 유능한 전도사라는 평판도 얻을 만큼 미쳐 있었더랬으니까요.ꡓ
ꡒ그 뒤에 이 처사님께선 백금출 사장님과 인연이 닿아 곧바로 개종하셨다네.ꡓ
일각선사님이 덧붙여 말씀하셨다.
ꡒ우리 사장님도 사장님이시만, 큰스님을 뵙고나서 마음을 굳힌 셈입니다.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달까요? 제가 믿고 의지할 종교란 바로 불교였구나! 하는 사실 말씀입니다.ꡓ
이도성 처사의 말은 문자 그대로 청산유수였다.
ꡒ그것 참 쉽게 들리는군요. 천학비재(淺學非才)인 저로서는 개종이라는 게 쉽지 아니한 사건이라고 알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가령 어릴 적부터 뿌리박힌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으로부터 벗어나서, 범신론 내지는 무신론자로서의 사고의 전환을 이끌어낸다는 게 가히 혁명적인 대사거든요. 반대로 애시당초 신에 대한 관념이 투철하지 못했다면 개종하는 일따윈 대수로운 게 못될 거구요?ꡓ
ꡒ이거 오늘 제가 청광수자님께 된통 걸려든 느낌인데요.ꡓ
ꡒ오해 마십시요. 저는 다만…….ꡓ
ꡒ압니다. 면접받는다 셈치고 말씀드립죠.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유일신 어쩌고 하는 것과는 애시당초 거리가 멉니다. 요즘이야 높은 데서 내려다볼라치면, 이 나라가 온통 교회로 꽉 들어찬 느낌이지만 우리 어릴 때야 어디 이랬나요? 일요일날이면 먼 데서 들리는 종소리로나 겨우 교회를 실감할 정도였지요. 기독교가 보편화된 서양과는 달리 우리들 대다수는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세례의식부터 치뤄야 하는 기독교도가 아니었다는 말씀이죠. 부모, 조부모, 증조, 고조……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지요. 대다수의 한국사람들은 이른바 <삼신할미>가 점지해준 덕택에 사내 또는 여자로 태어났고, <조상님네의 음덕>으로 삼시 세끼 배곯지 않게 살아가고 있으며, <조왕님네의 가호>를 입어 무병하게 지내는 것이지요. 가끔씩은 <무당할미>의 힘을 빌릴 때도 있구요. 그 점에 있어서는 저도 마찬가집니다. 다시 말하면 제 정신적인 바탕이라는 게 유일신을 섬기기 이전부터 이미 범신론적인 것이었고, 모든 사물이 다 신이라는 말은 모든 사물이 다 신이 아니라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가 있듯이 저의 사고라는 게 애시당초 무속 내지는 불교적인 것이더라, 이 말씀입죠.ꡓ
ꡒ그 참, 처사님께선 아주 합리적인 생각을 갖고 계시는군요?ꡓ
내가 비아냥거렸다.
ꡒ과찬이십니다. 허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아직 보릿고개가 어떻다는 걸 알고 있는 세대라는 사실…… 긴긴 봄날 멀건 나물죽 한 그릇으로 허기를 채우던 때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거든요.ꡓ
ꡒ…….ꡓ
나는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질 아니했다. 큰스님 앞에서 이런 일로 그와 티격태격한다는 것도 그러려니와, 내 주장이 그의 달변을 감당해낼 수가 없을 것 같기도 해서였다.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 했던가, 나는 그의 달변이 오히려 귀에 거슬렸다. 우리들 수행자, 그 중에서도 참선수행을 주로 하는 수도승들 사이엔 가급적이면 말을 적게하는 것을 수행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겨울안거[冬安居] 같은 때는 실제로 묵언(黙言)을 하면서 정진하는 수도승이 많다. 일각선사님을 비롯하여 그 분의 상좌들인 나와 나의 사형 사제 모두가 그 부류에 속한다. 내가 말 많은 이도성처사에게 뭔가 거부감 같은 걸 느낀 건 따지고 보면 그런 데서 연유했지 싶었다.
그날 이도성 처사와 나는 마치 오랜 지기라도 되는 듯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와 사귀면 사귈수록 왠지 자꾸만 거리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산중 촌놈인 나와는 달리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세파에 닳고 닳은 인상을 진하게 풍겼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ꡒ아직도 눈이 내리는데, 괜찮겠습니까?ꡓ
큰스님께 하직인사를 하고 댓돌로 내려서는 이도성 처사의 등뒤에서 내가 물었다.
ꡒ내리자마자 녹아버리니까 도로 사정이야 괜찮겠지요?ꡓ
그럴싸했다. 윗날이 따뜻한 탓인지 눈은 내리는 족족 녹아버렸고, 나무와 숲에만 희끗희끗 아직 눈이 녹지않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보다는 눈발도 훨씬 가늘어져 있었다.
ꡒ차는 어디?……ꡓ
내가 물었다.
ꡒ요 아래, 산문 입구에 세워뒀습니다.ꡓ
ꡒ손수 운전하셔야겠네요?ꡓ
ꡒ아뇨. 출퇴근 때와는 달리 궂은 날씨에다 도로사정도 그렇고…… 회사의 운수과 소속 기사와 함께 왔습니다.ꡓ
ꡒ아미타불! 그럼, 조심해 가십시요.ꡓ
ꡒ네, 안녕히…….ꡓ
일주문(一柱門) 앞에서 나는 이도성 처사와 헤어졌다. 그가 일주문을 막 벗어나려다 말고 급히 돌아서면서,
ꡒ아 참, 깜박 잊을 뻔했네. 청광스님! 잠깐만요.ꡓ
그가 나를 불러세웠다.
ꡒ뭘 빠뜨렸습니까?ꡓ
ꡒ빠뜨린 게 아니구…….ꡓ
ꡒ뭣하시면 되돌아가서 큰스님을 뵙고 말씀드리시죠?ꡓ
ꡒ굳이 그럴 것까진 없구요, 그보다 요즘 이 성불사에 뭔가 좀 달라져보이는 게 없으시던가요? 절집 분위기랄까, 뭐 그 비슷한…….ꡓ
ꡒ글쎄요…….ꡓ
ꡒ가령 전에 못보시던 신도들이 무더기로 절을 찾는달지…….ꡓ
ꡒ큰스님께서 이 성불사에 주석(住錫)하시고부터는 절을 찾는 남녀 신도분들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마는 그걸 가지고 새삼스럽게 절집 분위기 운운하기에는…….ꡓ
ꡒ이상하다. 지금쯤은 붐이 조성되었을 법하기도 한데…….ꡓ
이도성 처사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ꡒ뭐가 이상하시다는 겁니까? 그리고 붐을 조성한다는 건 또 웬 말씀이시구요?ꡓ
나의 추궁에 그답쟎게 얼굴까지 붉히면서 이도성 처사가 세차게 도리질했다.
ꡒ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중에 말씀드립죠.ꡓ
ꡒ……?ꡓ
그가 허겁지겁 일주문을 벗어났다. 왠지 마음이 개운칠 못했다. 무슨 음모랄 것까지야 없겠지만, 그의 몸짓이나 얼굴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큰스님이나 나에게 드러내어놓고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나는 내친김에 선당으로 되돌아가서 큰스님께 말씀드렸다.
ꡒ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스님?ꡓ
ꡒ뭘 말인가?ꡓ
일각선사님이 짐짓 반문하셨다.
ꡒ여기 불사 말씀입니다. 방금 다녀간 그 이도성 처사라는 분의 인간 됨됨이가 왠지 믿어지지 않아보이구…… 백금출 사장님의 불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올습니다마는, 저 사람들이 행여 딴 맘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서요.ꡓ
지레짐작으로 아뢰는 말씀이 아니었다. 따로 지피는 게 있어서 드리는 말씀이었다. 무엇보다 이도성 그의 사람 됨됨이부터도 선뜻 신뢰할 수가 없어 보였다. 제딴에는 그와 내가 승(僧), 속(俗)간에 이 불사를 이끌어나갈 실무 대표자라는 생각에서였던지 큰스님께서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하여 속엣말까지 거침없이 다 털어놓고 말던 것이었다.
예컨데,
ꡒ자본주의 논리로 말씀드리자면 말입니다, 스님! 한 마디로 우리나라는 종교인의 천국이랄 수 있는 데니까, 벗어부치고 돈벌이 하자면 종교장사만큼 이문 크고 잘되는 장사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어느 도시에 가보세요.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도처에 크고 웅장한 교회당건물이 즐비하잖아요? 거짓말 좀 보태자면 발에 걸리는 게 교회건물이랄까요? 본고장인 서구에도 이렇게 교회가 많진 않아요. 문제는 많다, 크다, 웅장하다…… 따위가 아니라, 그런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날 수 있다는 우리의 토양 그 자체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토양이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종교장사만큼 돈벌이가 잘 되는 것도 없다, 이 말씀이예요. 생각 좀 해보세요. 밑천 안들지요, 세금 없지요…… 통계로만 본다면 우리 국민의 육할 내지 칠할이 불교 또는 그와 유사한 종교를 믿는다잖습니까? 따라서, 눈만 크게 뜬다면야 도처에 널려있는 게 돈인데 스님들께서 원체 물욕이 없다보니까 변변한 불사 하나 제대로 못하셨지요……. 정말이지, 우리 백금출 사장님과 일각 큰스님께서 손을 잡으신 건 피차 큰 인연이랄 수 있을 것입니다. 행운이기도 하구요. 두고 보시지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ꡓ
이런 식이었다.
ꡒ딴 맘을 먹다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구?ꡓ
일각선사님께서 정색을 하고 물으셨다.
ꡒ그 뭐냐? 이를테면 큰스님의 명성을 등에 업고시리 세간에서 흔히 쓰는 말로다가 부처님을 팔아서 사리사욕을 취할 목적으로, 이 <천불동 만불산 건립 불사>를 추진하고 있지나 않나 하는 의심이 들어서 그만…….ꡓ
ꡒ아미타불! 구업(口業)이로세. 의업(意業)이로다. 불법을 닦는 승려가 그토록 의심이 많아선 못써요! 당장 참회하시게나?ꡓ
일각선사님이 노기 어린 목소리로 잘라 말씀하셨다. 뜻밖이었다. 이만한 일 가지고 이러실 분이 아니신데…… 나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짐짓 참회했다.
ꡒ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러한 업(業)을 짓지 않겠습니다!ꡓ
ꡒ이런 불사를 아무나 하는 게 아닐세. 사재를 털어서 이 성불사를 창건한 것만도 장한 일인데, 그 위에 <천불동 만불산>을 조성하여 이 일대를 문자 그대로 불국정토(佛國淨土)로 꾸며서 교계에 헌납하겠다는 백 처사의 갸륵한 뜻을 곡해하면 벌 받아요.ꡓ
ꡒ명심하겠습니다.ꡓ
나는 백배 사죄하고 큰스님 앞을 물러 나왔다.


2

나의 은사이신 일각선사께서 이 <천불동 만불산>의 건립불사에 적극 동참하여 명목상으로나마 앞장서기까지는 얘기가 많았다.
수도승인 나의 은사스님과 사업가인 백금출사장님의 만남부터가 따지고보면 그랬다. 말은 큰스님을 뵙자마자 불심이 절로 솟아나서 예의 <천불동 만불산>을 건립하여 큰스님께 헌납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백금출 사장님께선 큰스님과 인연을 맺기 10수년 전부터 이 성불산 일대를 사들인다, 100만여 평이 넘는 주변의 국유림을 장기임차하여 조림한다……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왔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보면, 백금출 사장님이 자신의 사업구상에 걸맞는 스님을 찾아다니던 끝에 우리 큰스님과 인연이 닿았다고 볼 수도 있을 터였다. 물론, 이런 얘기야 큰스님 앞에선 입도 뻥긋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고, 다만 우리들 큰스님 상좌들끼리 구석에 모여 귀엣말로만 속닥거렸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 <천불동 만불산> 건립불사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도 불과 이태 전이었다.
지난 해부터는 하안거(夏安居), 동안거(冬安居)가 해제되기 무섭게 온 절이 그 불사 얘기로 떠들썩했었다. 삼삼오오, 모여 앉으면 모두 그 얘기였다.
ꡒ요즘은 개인주의랄까, 이기심이랄까, 세상이 그런 쪽으로만 자꾸 치닫다 보니까 뭐든 <내 것>이라는 딱지가 붙어야만 직성들이 풀리는 모양일세. 말하자면 <우리>가 <내>로 바뀌어 간달까? 내 절, 내 스님, 내 부처님…… 하는 식으로 말일세.ꡓ
백금출 사장과도 함께 한 자리에서 일각선사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ꡒ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동안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서구문명탓이예요. 게다가 핵가족 어쩌고 하는 바람에 아이들을 <오냐, 오냐> 해가면서만 키우느라 가부장의 권위마저 왜소해졌구요.ꡓ
나의 사형인 도암(道庵)스님이 말했다.
ꡒ우리의 전통적인 가족공동체 의식이 점차 엷어지는 걸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그게 우리 현실인 걸 어떡합니까?ꡓ
백금출 사장님도 우리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도 한마디 했다.
ꡒ헌데, 말씀이예요. 우리 사회가 물질적인 여유가 조금 있다보니까 자꾸만 서구의 선진사회를 닮아가고 있는 게 현실인데, 머잖아 그 파급이 종교에 미치지 말라는 법이 없잖습니까?ꡓ
ꡒ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 건지 당최…….ꡓ
ꡒ선진사회로 갈수록 사람들이 종교에서 멀어진다는 얘기죠. 어느 나라에서는 신자가 교회를 찾질 않아서 교회가 아파트 같은 거주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신부나 목사 지망생이 부족하여 종교 의식마저 진행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글을 읽은 적도 있고 해서…….ꡓ
ꡒ그 점은 염려마십시요. 우리 한국인은 예로부터 종교를 갖지않고는 살 수가 없는 민족이었고, 그 믿음 또한 광적이었으니깐요. 자고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으뜸가는 신흥종교 또는 유사종교나 사이비종교의 천국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질 않습니까?ꡓ
백금출 사장님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 말에는 나도 공감했다. 그렇지만 나의 은사스님이신 일각선사님께선 내키지 아니한 목소리로 마지못해 맞장구만 치고 계셨다.
ꡒ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ꡓ
ꡒ큰스님 면전에서 이런 말씀드리긴 뭣합니다만, 큰스님의 법력이시라면 막말로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교주가 되신다거나, 종파를 창종하여 종정에 취임하신다 해도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걸요.ꡓ
ꡒ구업이로다. 아무리 백 사장님이시라지만 그런 말씀 함부로 하시는게 아닙니다.ꡓ
ꡒ죄송합니다. 비유가 지나쳐서 그만……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참회합니다. 용서하십시요.ꡓ
백금출 사장이 큰스님 앞에 넙죽 엎드려 절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 모습이 철부지 같아서 절로 웃음까지 나왔다.
ꡒ내 절, 내 부처님…… 하는 것까진 그렇다 치더라도 말씀이예요.ꡓ
방안의 분위기도 누그러뜨릴 겸사겸사해서 내가 화제를 바꾸었다.
ꡒ그렇습죠. 내 절 내 부처님…….ꡓ
백금출 사장이 자세를 바로하면서 내 말을 따라했다.
ꡒ네, 그 정도야 괜찮다 치더라두, 내 스님 어쩌고 하는 건 좀…….ꡓ
청정비구로 젊은 시절을 다보낸 우리 일각 큰스님 주변을 줄곧 맴도는 젊고 예쁜 보살님들을 두고 짐짓 해보는 말이었다. 백금출사장이 내 말을 받았다.
ꡒ청광수자께서 하신 말씀의 뜻이 뭔지는 대강 알만합니다만, 아까 큰스님께서 내 절 내 부처님 내 스님 운운하신 말씀은, 뭐랄까, 시쳇말로다가 불확실성이라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원체 불확실하다보니까 뭐든 자기 것으로 아예 못박아두고자 하는 풍조…… 말하자면 우리 불제자들도 이젠 거기에 대처할 준비를 갖춰야만 할 거라는 말씀…… 그렇습지요, 스님?ꡓ
ꡒ아미타불! 옳으신 말씀입니다.ꡓ
일각선사님께서 두 손을 올려 가볍게 합장하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ꡒ대처할 준비라면 어떤……?ꡓ
내가 물었다.
ꡒ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최소한 내 절, 내 부처님…… 하는 확실한 믿음을 심어준다는 관점에서만 방법론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말씀이예요.ꡓ
백금출 사장이 대답했다.
ꡒ쉽게 말하자면.ꡓ
일각선사님께서 말씀하셨다.
ꡒ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이름으로 원하는 내 부처님 한 분씩을 조성해다가 내 절에다 모신다는 얘길세.ꡓ
ꡒ그런 거라면야 요즘 각 사암에서 경쟁적으로 해대는 천불봉안불사다, 삼천불봉안불사다 하는 것들과 다를 게 없겠네요, 뭘?ꡓ
ꡒ그렇게 볼 수도 있을 법하지만, 백 처사님께서 계획하신 천불동 만불산 건립불사는 그 성격부터가 다르다네. 그 점을 백 처사님께서 구체적으로 더 좀 상세하게 말씀해 주셔야만 이 청광수자가 알아들을 것 같습니다.ꡓ
ꡒ궁극적인 목표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불국정토 안에서!> 입니다만, 우선 그러기에 앞서 <천불동 만불산>을 조성하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세불천 양켠으로 많은 기암괴석과 암벽에다가 곧바로 부처님을 조각한다거나 딴곳에서 모셔온다거나 해서 만불산을 조성하고, 세불천을 따라가며 골짝 골짜기마다 작게는 부처님 한분에서 많으면 10여 분의 부처님을 모시는 집을 지어설라무네 천불동을 건설하려는 겁니다. 크고 작은 탑들도 요소 요소에 조성할 거구요. 불사만 끝나면 이 천불동 만불산이야말로 한국 제일의 관광명소가 될 겝니다. 천불동은 말하자면 콘도미니엄과 같은 숙박시설로 활용하는 거지요. 다행히 성불사가 우리나라 최대의 항구도시인 부산과 최대의 공업도시인 울산의 중간 쯤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입지적인 조건으로도 그만입니다…….ꡓ
백금출 사장이 길게 설명했다.
ꡒ백 사장님께서 말씀하신대로라면 개발비용만도 엄청날텐데, 그 자금을 어디서 다 조달하실 계획이십니까?ꡓ
나의 사형 도암스님이 물었다.
ꡒ큰스님께는 이미 상세히 말씀드렸습니다만, 기반 조성공사 비용까진 제 회사에서 감당할거구요, 뭐랄까, 나머진 스님들 몫이 되는 셈입니다. 허허허…….ꡓ
ꡒ저희가 어떻게 그 많은 돈을……?ꡓ
ꡒ모연(募緣)을 해얍죠. 만불동에다 <내 부처님> 한 분 모시는데 얼마씩…… 천불동은 콘도처럼 돈 많은 신도들께 분양하는 방법도 있을 거구요. 문제는 그 모든 것들이 큰스님께서 성불사에 계셔주는 것만으로 다 해결될 수 있다, 이 말씀입니다.ꡓ
ꡒ아미타불!ꡓ
일각선사님이 눈을 지긋이 감으면서 중얼거리셨다.
재물따위 털끝만큼도 탐하지 않으시고 평생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참선수도에만 정진하고 계시는 우리들의 큰스님…… 사판승(事判僧)과는 애시당초 거리가 먼 일각선사님께서 이토록 많은 돈이 소요되는 큰 불사를 어찌 감당하시려구?…… 생각하면 할수록 눈앞이 캄캄할 따름이었다.
ꡒ자그마치 일만불상을 조성하는 공사인데, 우리 생각처럼 신도들이 쉽게 모아지겠습니까?ꡓ
내가 백금출 사장께 따져물었다.
ꡒ무슨 실례의 말씀을…… 백 처사님의 사업수완이야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인데, 이쯤 감당 못하시겠나?ꡓ
일각선사님의 꾸중이셨다.
ꡒ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구 소승은 다만…….ꡓ
내가 우물쭈물 변명하자,
ꡒ청광수자님께서 성불사의 입지적인 잇점을 몰라서 하신 말씀인데요, 뭘. 저는 오히려 큰스님께서 제 역성만 드시는 것 같아서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ꡓ
백금출 사장님이 너스레를 떨어대면서 웃었다.
ꡒ아미타불! 소승의 상좌녀석이 백 처사님의 큰 뜻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만 같아서 그만…….ꡓ
ꡒ그거야 제 잘못이 큽지요.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미리 이 두 분 수자님들께 상세히 말씀드렸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렇지만, 염려들 마십시요. 이 불사는 반드시 성사됩니다. 아암! 되다마다요. 부산이 어떤 뎁니까? 서울보다야 못하겠지만 돈 많은 곳입니다. 울산은 또 어떻구요? 한 마디로 공업입국을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상징적인 공업도시 아닙니까? 그러한 공업도시답게 매일매일 일어나는 산업재해 또한 엄청납니다. 근로자는 근로자대로 사용자는 사용자대로 불안한 거죠. 외상(外傷)이야 성업중인 외과병원이나 성형외과병원에서 고친다지만, 불안한 마음이야 의사들도 어쩔 수 없잖아요? 그들 중에는 기계만 봐도 사지가 부들부들 떨린다는 사람들도 부지기수거든요. 게다가, 세계 굴지의 자동차회사가 있는 도시답게 차가 좀 많습니까? 사고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운전자들의 마음도 근로자나 사용자들 못지않게 불안한 거죠. 이들의 마음을 만불산으로 끌어들이는 겁니다. 사용자들은 천불동으로 끌어들이구요. 아무 걱정마세요. 스님들께선 절에 가만히 앉아계시면서 참선과 염불만 하시면 모든 게 다 잘 되게끔 되어 있으니깐요.ꡓ
백금출 사장의 말은 그 한마디 한마디가 확신에 꽉 차 있었다.
ꡒ아미타불! 백 사장님 말씀을 듣고보니 제 생각이 기우였다는 사실을 알겠군요?ꡓ
나는 큰스님의 면전이라 말만은 그렇게 했으나 속으로는 ꡐ말 같이 잘 될까?ꡑ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왕 말이 난김이어서 한 마디 당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ꡒ다만 하나, 부탁드릴 말씀은…….ꡓ
내가 머뭇머뭇 뜸을 들이고 있자,
ꡒ뭡니까? 어서 말씀해보세요. 청광수자님!ꡓ
참다못해 백금출 사장이 재촉했다.
ꡒ요즘은 마치 유행처럼 이곳 저곳에서 천불전이다 뭐다 해대면서 석고나 나무토막으로 개떡 주무르듯 해서 마구잡이로 부처님같지도 아니한 부처님을 조성하고들 있는데 말씀이예요, 만불산에 조성하는 부처님만은 제발 그런 식이 아니기를…….ꡓ
ꡒ그야 이를 말씀인가? 우리 백 처사님께서 계획하시는 불사는 천대 만대 후손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줄 예정으로 추진중이시니까 그점만은 염려 안해도 될걸세.ꡓ
큰스님께서 내 말을 중동무이하셨다.
ꡒ큰스님께서 과찬이시구요. 제 생각은 청광수자와 조금 달리 하고 있습니다.ꡓ
백금출 사장이 토를 달았다.
ꡒ어떤?……ꡓ
내가 의아해하자,
ꡒ만불산에 조성될 부처님은 그 모두가 돌부처라는 건 청광수자님께서도 아시고 계시지요?ꡓ
그가 짐짓 되물었다.
ꡒ그거야……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ꡓ
ꡒ그럼 된 거지요. 돌부처야 석굴암이나 서산의 마애불처럼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 부처님도 계실 것이고, 운주사의 만산계곡에 흩어져 있는 미륵부처님들마냥 제멋대로인 부처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ꡓ
ꡒ아아, 운주사의 그 천불 천탑……ꡓ
순간, 나는 말문이 콱 막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백금출 사장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다 나오다니…… 광주서 남쪽으로 50Km쯤의 거리,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만산계곡, 그 계곡 곳곳에 불상과 불탑들이 흩어져있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이란 이를 두고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에는 겨우 일백여 분의 돌부처와 삼십여 기의 돌탑만이 확인되고 있다고 전한다.
나는 한 차례 더 다녀오고 싶은 욕심에서 큰스님께는 짐짓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대충 둘러보고 왔노라고 말씀드렸었지만, 예의 만산계곡에서 받았던 감동만은 내 머릿속에 그냥 그대로 남아있었다.
숲과 산 그리고 계곡 등지에 서 있거나 누워 있는 미륵부처님들…… 탑으로 세워졌거나 또는 소박한 형태로 깎여 논두렁과 밭두렁과 길, 그리고 암벽 위 아래에 세워져 있었고, 논베미와 보리밭 가운데까지 서 있는 그 광경은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80년대 중반, 참담하고 황량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바랑 하나만 달랑 걸머진 탁발승 차림으로 발 가는대로 무작정 떠돌던 시절의 어느 늦은 봄날, 나는 홀로 만산계곡에 있었다.
비포장도로는 여기 저기 거칠게 패여 있었고, 조금 부는 바람에도 흙먼지가 마냥 흩날렸다. 만산계곡에 이르는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풍광, 그것은 그해 오월의 상처와 한이 응어리진 전라도 민중의 삶을 닮아있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한결같이 못생긴 돌부처들 ─눈, 코, 입은 물론 신체의 비례마저도 정통불상이 지닌 도상에서 크게 어긋난 파격적인 형식미, 한없이 친근하면서도 배꼽을 거머쥐어야 할 만큼 우습게 느껴지는─ 그것들은 흩어져 있으면서도 집단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거기서 나는 보았다. 이 만산계곡은 전라도땅 여기 그냥 그대로 있어 왔음을. 백제 때도 전라도땅이었고, 통일신라때도 고려 때도 그냥 그대로 전라도땅이었다. 그것은 육자배기 가락이었다. 그리고 그해 오월 이후 더욱 강열해진 저항의식과 변혁에의 열망이었다. 절망과 좌절을 딛고 마침내 일어서야만 하는 전라도 사람들의 오기였다.
(일천 구의 미륵부처님이 다 세워지면 새 세상이 오리라…… 구백 구십 구 번째와 일천 번째가 되는 마지막 두 미륵부처만 일으켜 세우면 새 날이 열리는데, 아아 새 세상이 우리 앞에 활짝 열렸을 터인데……)
그로부터 십유오개성상(十有五個星霜)─ 나는 운주사의 그 만산계곡의 감동을 한동안 잊은 채로 있었다. 그런데 일각선사님을 제외한 내 도반 스님들조차도 돈 많고 사업수완 뛰어난 사람쯤으로만 여기고 있던 백금출 사장님께선 그 곳, 운주사 만산계곡의 감동을 이 곳, 성불사의 세불천 계곡에다 <천불동 만불산>으로서 재현하시겠다는 게 아닌가? 나는 죽비로 뒷통수를 한 대 세차게 얻어맞은 듯했다.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참선수도에만 정진하시던 우리 일각 큰스님께서 이 천불동 만불산 조성공사에 기꺼히 동참하시는 까닭을 비로소 알 듯 싶기도 했다. 나는 새삼스레 옷깃을 여몄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했다.
내친김에 내가 다시 물었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ꡒ…… 주제넘는 질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백사장님께서는 어느 쪽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ꡓ
ꡒ만불산에 조성하기로 하는 돌부처 말씀인가요?ꡓ
ꡒ예…… 경주 석굴암이나 서산 마애불 쪽인지, 아니면 만산계곡의 천불천탑 쪽인지…….ꡓ
ꡒ큰스님 생각은 어떠신지요?ꡓ
그가 짐짓 일각선사님께 대답을 미루었다.
ꡒ그거야 백 처사님께서 일찌기 계획하신 바가 있으시잖습니까? 천불동과 만불산의 부처님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조성하시겠다던…….ꡓ
일각선사님의 뒤를 이어 백금출 사장이 설명했다.
ꡒ제가 몇 마디 부언하자면 이렇습니다. 천불동에 모실 부처님과 불탑들은 숙련공들로 하여금 정성을 다하여 조성하도록 하고, 만불산의 부처님은 만산계곡의 그것처럼 비숙련공인 민중의 마음대로…… 성불산이 울산광역시의 경계 안에 있으니까, 울산을 예로 든다면 천불동은 사용자쪽이고 만불산은 노동자쪽…… 그 왜? 아시잖습니까? 1987년 노동운동 때 노도같이 일던 울산 노동자의 대 함성…… 일테면, 그 민중의 함성까지도 만불산에 옮겨보자는 건데…… 어째, 제 설명이 성에 차질 않지요?ꡓ
백금출사장이 나를 건너다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ꡒ아닙니다. 백사장님 말씀을 듣고보니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군요.ꡓ
내가 합장으로 답례하면서 대답했다.
ꡒ면구스럽게시리…… 그 왜? 칭찬도 과하면 욕이 된다는 걸 아시죠?ꡓ
ꡒ죄송합니다. 저는 다만…… 헌데 한 가지, 이런 말씀드려서 어떨지…….ꡓ
ꡒ뭔데요?ꡓ
ꡒ백 사장님께선 겉보기보다 한이 많으신 분인가봐요?ꡓ
ꡒ그렇게 보입니까?ꡓ
ꡒ소승의 지레짐작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운주사의 그 천불천탑…… 그게 다 완성되는 날에는 임금이 바뀌어 살기좋은 세상이 도래하리라 믿었다던, 그 민중의 뜨거운 비원이 문득 생각나기로…… 백 사장님의 고향이 혹시?ꡓ
ꡒ미륵부처님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에서 태어나긴 했습니다마는…… 이 불사와 연관짓는다면 죄로 갈테고…… 어쨌거나 고맙습니다. 오늘 여러 스님들께서 하신 말씀을 맘속 깊이 새겨두고 사심없이 불사에 임하겠습니다.ꡓ
백금출 사장님이 우리 앞에서 거듭거듭 다짐했다.
ꡒ나무관세음보살!ꡓ
마지막은 언제나 이랬다. 백금출 사장님의 다짐과 큰스님을 위시한 도반 스님들의 화답하는 염불소리…… 나는 저도 모르게 눈쌀을 지푸렸다. 판에 박힌 듯한 겉치레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백금출 사장님의 그 오랫적부터 몸에 배어버린 과장된 몸짓하며 상거래로 맺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곧잘 오감직한 인사치레 같은 게 그와 우리들 사이에 파여있는 깊은 골짜기를 새삼스레 상기시켜 주는 것만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나나 나의 사형 도암 수자와는 달리 큰스님께선 백금출 사장님의 이런 과장된 말투와 몸짓을 통째로 믿고계시는 눈치여서, 우리들은 더욱 안타까워했다.
ꡒ아미타불!ꡓ
지상의 불국정토를 목표로 추진된 <천불동 만불산>의 건립불사 계획은 그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우리 도반과 백금출 사장님 사이에 진지한 논의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일각선사님께선 몸소 성불사엘 다녀오신다, <천불동 만불산> 건립예정지를 답사하신다…… 숱한 말들이 있었다. 사실, 백금출 사장보다도 더 열을 올리셨다. 그것은 우리 상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일각선사님의 또다른 면모라면 면모랄 수 있었다.
우리들, 일각선사님의 상좌들은 차마 큰스님 앞에서는 가타부타 얘기할 수가 없었으나 삼삼오오 모이면 의견들이 분분했다. 크게 나누면 반대하는 쪽과 찬성하는 쪽으로 나눌 수가 있었는데, 반대하는 쪽은 ꡒ상구보리(上求菩裡)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한다ꡓ는 불교의 교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말하자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고 난 다음에 중생을 제도하라 했으니까 그따위 불사따위나 하느라고 허송세월할 게 아니라 수도에만 전심전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강력히 주장하는 스님이 일각선사님의 큰상좌이며 나의 사형인 도암 스님이셨다. 이에 반해 찬성하는 쪽은 ꡒ하화중생(下化衆生)하면서 상구보리(上求菩裡)해야 한다ꡓ는 거였다. 기약없는 대오해탈(大悟解脫)에만 매달려 산중에만 틀어박혀 있을 게 아니라 과감하게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그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면서 수도하여 해탈하겠다는 거였다.
나는, 말하자면 후자의 편에 속했다. 산속 깊숙히 틀어박힌 채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든 나만 대오해탈하면 그만 아니냐는 승려들의 안일한 사고방식을 싫어한 탓도 있었지만,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할 목적으로 <천불동 만불산>을 활용하시겠다는 큰스님의 말씀이 뜻하는 의미가 내 마음을 크게 흔들어댄 때문이랄 수 있었고, 무엇보다 만불산을 운주사의 그 만산계곡처럼 민중의 뜻에 따라 민중의 손으로 조성하겠노라던 백금출 사장님의 취지가 마음에 와닿은 때문이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요즘은 돈이다. 가난구제도 돈이요, 당장 시급한 <불교병원>건립이랄지, 늙은 스님들과 의지가지 없는 신도들이 기거할 양로원 같은 복지시설을 만들어 운영하재도 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돈, 돈, 돈……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할까? 산중에 들어앉아서 불자들이 던져주는 시줏돈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우리도 뭔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수익사업을 벌여야만 한다는 게 내 평소의 지론이었다. 따지고 보면, 백금출 사장과 나는 그러한 면에서는 진즉부터 의기투합하고 있었던 셈이다.
마지막 결정은 물론 일각선사님께서 하셨다.
ꡒ금번 <천불동 만불산> 건립불사는 우리 도반이면 누구나 다 참여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게을리 해서도 안될테니까,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을 번갈아 맡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판과 사판이란 여기 남아서 참선공부에 정진하는 수자를 편의상 이판으로 분류하고, 성불사로 나가서 천불동 만불산 건립불사에 동참하는 수자를 사판이라 이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판과 사판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점을 유념하기 바랍니다. 법랍(法臘) 5년 이상으로 희망하는 도반(道伴)중에서 네댓명 선발하기로 하고, 다른 도반들은 여기 남아 도암수자를 받들고 일심전력으로 정진을 게을리 말도록…….ꡓ
큰스님의 말씀은, 도암 사형처럼 참선수행만을 고집하는 도반도 의무적으로 한두 해쯤은 불사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것과, 나차럼 벗어부치고 불사에 전심 전력하겠다는 승려도 일정기간이 지나면 다시 선원으로 들어가서 참선수행을 하고 나와야만 한다는 얘기였다. 그 말씀에는 도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아니했었다.
나는 큰스님의 지시로 도반 중 법랍 5년 이상된 수자들로만 다섯명을 골랐다. 큰스님과 나를 포함하여 일곱 명을 채울 요량에서였다. 그리하여, 큰스님과 내가 앞장서서 도반들을 이끌고 이 성불사로 옮겨오게 된 것이었다. 지난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3

ꡒ청광 스님, 운전하실 줄 아세요?ꡓ
불사가 시작되고 한 주일도 미처 되지 아니하였을 때였다.
<천불동 만불산 조성 대불사 모연문>의 교정을 끝내고 인쇄소를 함께 나와 차에 오르면서 이도성 처사가 불쑥 물었다.
ꡒ자동차 운전 말씀인가요?ꡓ
ꡒ네, 면허증이 있으신가 하구.ꡓ
ꡒ운전은 좀 할 줄 압니다. 군대생활을 할때 수송병과였거든요.ꡓ
ꡒ그럼 면허증도 있으시겠네?ꡓ
ꡒ아뇨. 산속에서 수도나 하는 승려에게 그딴 면허증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싶어서…….ꡓ
ꡒ무슨 말씀이세요? 요즘은 차를 손수운전하는 <오너 스님>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도 작년에야 운전면허를 땄습니다만 교습장에서 보니까 여자스님들까지 운전교습을 받던 걸요. 그걸보니 불교도 이젠 진짜로 현대화되어가는구나! 싶더라구요.ꡓ
ꡒ스님들이 자동차나 운전하고 다닌다고 해서 그게 어디 현대화랄 수 있나요?ꡓ
ꡒ최소한 바랑 매고 목탁치며 동냥다니는 것보다야 현대화 아니겠습니까?ꡓ
ꡒ글쎄요…….ꡓ
ꡒ청광스님께서도 면허를 따세요. 이제 정지작업이 끝나고 불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시내 나들이도 잦을테고, 그 때마다 택시를 부르기도 번거롭잖아요?ꡓ
ꡒ면허만 따면 뭘합니까?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만 하는 수도승인걸요.ꡓ
ꡒ말하자면 자동차 살 돈이 없으시다, 그 말씀 아닙니까?ꡓ
ꡒ어디 자동차 살 돈뿐이겠습니까? 기름값 대기도 힘든 처지인 걸요.ꡓ
ꡒ그건 염려마세요. 제가 우리 사장님께 여쭈어서 최고급 차로다가…… 아니, 그건 성불사까지 비포장도로가 많아놔서 어렵겠고, 군대서 많이 몰아본 짚차로 하면 어때요? 짚차를 개조한 승용차로 하시든지…….ꡓ
ꡒ농담도 참…….ꡓ
ꡒ아녜요. 농담이 아닙니다. 앞으로 신도가 많아지면 미니뻐스 몇대 장만할 계획이 서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만 가지고선 안 될 겁니다. 요즘 세상은 겉치례도 중요하니까 큰스님도 모시고 다닐려면 최소한…… 아무튼 자동차 문제는 내게 맡기시고 청광스님께선 면허시험에 응시하세요. 군대에서의 운전경력을 인정받는다 치면 면허증이야 쉽게 나올 것 아녜요?ꡓ
ꡒ하려고 맘만 먹는다면야 별반 어려울 것도 없겠습니다만…….ꡓ
나는, 아닌게 아니라 그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절에서 나올 때야 공사장에서 나오는 트럭도 가끔 얻어탈 수가 있어서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일을 마치고 절로 들어갈 때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하루에 네 번 있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기다리는 거였지만 버스에서 내려 어둠이 내려앉은 산길 시오리를 걸어들어가야 하는 일 또한 쉽지가 아니했다.
ꡒ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제 집에 들려 차 한잔 하고 가세요?ꡓ
이도성 처사가 말했다.
ꡒ아뇨. 이게 막차인데, 놓치면 곤란하니까 정류소에 내려주세요.ꡓ
ꡒ늦을 것 같으면 제가 택시를 잡아드릴께요. 실은 청광스님을 뵙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까부터 제 집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ꡓ
ꡒ우리 불제자입니까?ꡓ
ꡒ그런 셈이죠. 만나보시면 청광스님께서도 아실만한 사람입니다. 처녀예요.ꡓ
그가 곁눈질로 힐끗 내 안색을 살피면서 말했다.
ꡒ처녀……?ꡓ
내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면서 반문했다.
ꡒ여승이 되고 싶어 안달복달하고 있는 처녀인데, 실은 제 처제입니다. 스님께서 말씀 좀 잘하셔서 그애 마음 좀 돌려주세요. 처가에선 말만한 처녀애한테 바람 집어넣어가지고 시집도 보내지 못한다며 사위암냥에 출가한 딸까지 깡그리 원망하고 있답니다.ꡓ
ꡒ아미타불!ꡓ
나는 이도성 처사의 간곡한 부탁에 가타부타 말없이 염불만 했다.
나와 불심행(佛心行)은 이렇게 만났다. 아니, 더 정확히는 성불사의 법회 때 한 두 차례 서로 마주쳐 얼굴만은 피차에 알고 있었다. 불심행은 일각선사님께서 내려주신 법명이고, 속명(본명)은 강금희다. 범띠라니까 설흔이 다 된 노처녀다.
ꡒ출가할 뜻을 가지고 계시다구요?ꡓ
함께 차를 마시면서 내가 그네에게 물었다.
ꡒ마음뿐이예요. 부모님이야 그렇다치더라도, 독실한 불자이신 언니와 형부까지도 저렇게 막무가내시니…… 가망없는 일 아녜요?ꡓ
불심행이 창문께로 눈길을 돌리면서 대답했다. 혼잣소리마냥 나직히 중얼거리는 그네의 목소리에선 진한 외로움이 묻어 나왔다. 내가 짐짓 그네를 위로했다.
ꡒ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했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언젠가는…….ꡓ
ꡒ그럼 청광스님께선 제가 출가하는 걸 찬성하신다는 말씀이군요?ꡓ
ꡒ찬성하고 안하고를 떠나 뭐랄까, 동지적인 일체감…… 아미타불! 저도 그런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한 승려거든요.ꡓ
ꡒ어마나! 스님께서도…….ꡓ
부처님 말씀에 한 자리에 얼굴을 맞대고 앉을 수 있다는 것만도 5백생의 인연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결과라 했던가. 빈말이 아니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 나와 불심행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걸 어찌 우연한 만남이라고 감히 한 마디로 말해버릴 수 있겠는가 말이다. 각설하고, 우리들은 뜻을 같이한 불제자로서 또한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할 뜻을 지녔었거나 지니고 있는 동지(?)적인 유대감 속에서 한결 가까워졌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날 이후, 불사를 핑계삼아 이도성 처사님댁을 뻔질나게 들락거렸지만, 실상은 거기 불심행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가 운전면허증을 낸답시고 자동차학원에 등록한 것도 말하자면 그러한 속셈이 있어서였다는 게 솔직한 표현일 터이었다.
ꡒ면허증이 나왔다던데, 사실입니까?ꡓ
이도성 처사가 물었다.
ꡒ아직 면허증이 나온 건 아니구요, 그 뭐냐, 얼마 안있으면 나오도록 되어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ꡓ
내가 빙그래 웃으면서 말했다.
ꡒ그, 면허시험에 통과하셨구만요?ꡓ
ꡒ네.ꡓ
ꡒ아이구! 이거, 축하합니다.ꡓ
ꡒ축하는 무슨…… 군대생활 하는 동안 줄창 운전대를 잡고 살았는데, 그딴 것 하나 통과하지 못한대서야…….ꡓ
ꡒ그렇지만 운전대를 놓고 산중에 틀어박혀 수도만 하신 지가 벌써 여러 해 아닙니까? 정말이지 이젠 마음 터억 놓아도 되겠군요?ꡓ
이도성 처사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ꡒ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ꡓ
내가 영문울 몰라 어리둥절해 하자,
ꡒ백 사장님께서 말씀이예요, 사업관계로 잘 아시는 분이 있어 <겔로퍼>라던가 최근에 출고되기 시작한 웨곤 스타일의 차인데, 성불사 몫으로 그걸 한 대 구입해 놓으셨거든요. 운전기사를 따로 고용해드릴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던 참인데 때맞춰 청광스님께서 면허증을 따셨으니깐요.ꡓ
이도성 처사가 자초지종을 길게 설명했다.
ꡒ그렇지만 운전대를 놓은 지도 오래이고, 아직은…….ꡓ
말은 그렇게 했으나, 기왕에 마련된 차라면 하루라도 빨리 출고하여 손수 운전해 보고 싶었다. 그러한 내 속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ꡒ겸손해 하시긴…… 낼이라도 차를 출고할 수가 있다니까, 어떡할까요? 큰스님 모시고 나오실래요?ꡓ
이도성 처사가 짐짓 물었다.
ꡒ언제요?ꡓ
ꡒ빠를수록 좋지요?ꡓ
ꡒ좋습니다. 기왕에 큰스님과 성불사를 위하여 마련한 차라니까, 큰스님께 여쭙고 가급적이면 모시고 나오도록 하겠습니다.ꡓ
ꡒ가급적이 뭡니까? 백금출 사장님을 봐서라도 큰스님을 꼭 모시고 나오셔야만 합니다. 정말입니다. 그것만은 청광스님께서 책임져주셔야만 합니다. 아셨지요?ꡓ
ꡒ승용차의 구입도 <천불동 만불산 건립불사>에 필요불가분한 일이라 말씀드리면야, 큰스님인들 어찌 우리들의 청을 막무가내로 거절하시겠습니까? 그 일은 제가 책임질테니까 염려마셔요.ꡓ
ꡒ진즉 그렇게 나오셨어야지요. 아무튼 저는 청광스님만 믿고 일을 추진하겠습니다.ꡓ
백금출 사장을 의식해서인지 이도성 처사가 신신당부했다.
ꡒ네, 계획대로 밀고 나가십쇼.ꡓ
돌아서는 발걸음이 오늘 따라 무척 가벼웠다. 바야흐로 거뭇거뭇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는 산길 시오리를 터벅터벅 걸어서 돌아가야만 하는 일에 종지부를 찍을 날도 뭐잖았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빠르면 내일쯤, 늦어도 2, 3일 안에는 이 길을 새 차를 타고 기분좋게 씨잉 씽 달려서 돌아갈 수가 있을 게 아닌가? 게다가, 불사를 핑계삼아 운전석 곁에다 예쁜 불심행보살이라도 태우고 이토록 호젓한 산길을 함께 드라이브할 수도 있을 것이고…… 생각하다가 나는 소스라쳐 놀랐다. 말 타면 경마잡히고 싶다고 했다던가? 명색이 출가한 수도승인데 분수도 모르고 이런 생각을 다하고 있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낯이 뜨거웠다.
(옴 살바못쟈 모지 사다야 사바하…)
이튿날, 새 차의 시승식은 백금출 사장님의 회사 앞 뜰에서 간략하게 치러졌다. 큰스님 앞으로 등록을 마치고, 책임보험을 비롯하여 대인, 대물, 차체, 자손보험 등등의 제반 수속절차를 마친 서류일체까지 백금출 사장이 손수 큰스님께 넘겨드렸다. 곁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나 이도성 처사는 남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고행제일>을 주창하시던 우리들의 일각선사님께서도 마침내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이고 마시는구나! 싶어서였다.
ꡒ점심공양은 제 집사람이 마련했답니다. 함께 가시지요?ꡓ
시승식으로 함께 차를 타고 회사 마당을 한바퀴 돌면서 백금출 사장이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큰스님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ꡒ아미타불! 이거 시내에 나올 때마다 보살님께 번번히 폐만 끼치구…….ꡓ
ꡒ아이구, 스님! 행여 그런 말씀 마십시요. 큰스님께서 제 집에 한번 왕림하시는 일이야말로 제 가족에게는 더없는 영광인 걸요. 저나 제 집사람의 욕심같아서는 제집에 큰스님을 모실 수 있는 기회가 날마다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ꡓ
빈말만은 아닐 터였다. 백금출 사장님이나 그댁 사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까지 모두가 불심이 돈독한 가정이라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 댁 사모님께서는 큰스님 대하시기를 부처님 대하시듯 온갖 정성을 다해서 공경하셨다. 그런게 오히려 부담스러우셨을까, 큰스님께선 염불만으로 인사를 대신하셨다.
ꡒ관세음보살!ꡓ
운전은 내가 했다.
오늘 일을 대비하여 어제 이도성 처사를 운전석 곁에 앉히고 두어시간 남짓 시험운전도 해 봤으나, 긴장한 탓으로 몸이 굳어 도무지 뜻대로 움직여주질 아니했다. 회사에서 백금출 사장님의 저택까지는 기껏 20분 남짓한 거리인데도 오늘따라 두 시간도 더 걸리는 거리마냥 느껴졌다.
ꡒ청광스님! 운전은 어디서 배웠어요?ꡓ
백금출 사장이 물었다.
ꡒ군대에서요. 수송병으로 복무했었습니다만, 운전대를 놓은 지가 원체 오래되어 놔서요, 마치 초보운전자 같은 기분입니다.ꡓ
긴장을 늦추지 않고 천천히 차를 몰면서 내가 말했다.
ꡒ잘 하시는대요, 뭐, 급하게 달리는 것보다야 천천히, 그리고 안전하게 다니는 게 잘하는 운전이지요. 안그렇습니까? 스님?ꡓ
백금출 사장이 곁에 앉은 큰스님께 응원을 청했다.
ꡒ아미타불! 소승이야 그런 일에는 문외한이라서…… 아무튼 청광수자는 원체 차분 차분한 성격이니까 안전운전을 하리라 믿습니다.ꡓ
큰스님께서는 내 서툰 운전솜씨 따위를 아랑곳 않으시고 여느 때마냥 줄곧 칭찬만 하셨다.
하기야 뭐, 일각선사님께서는 언제 어디서고 남에게 험담 한 번 안하시는 분이시다. 사람을 대할 때면 애초부터 그 사람의 단점 같은 건 아예 외면해버리시고, 항상 장점만 보시기 때문에 칭찬의 말씀이 절로 흘러나오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는 천하에 둘도 없는 사기꾼 같은 사람일지라도 일각선사님의 눈에는 성인군자로만 비쳐지는 것일까? 겉으로만 그러시는 게 아니다. 일각선사님께서는 언제 어디서고 내, 남 없이 철석같이 믿으신다. 상좌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ꡒ나야 산속에 가만이 틀어박혀서 참선이나 하면 그만이니까, 이런 고급 승용차따위 아무 쓸모없네마는, 이 성불사의 <천불동 만불산 건립불사>가 하루 이틀에 끝날 일도 아닌데 그동안 청광 자네가 오명가명 여러 가지로 불편할 듯싶어서 받아둔 거니까, 낼부턴 청광수자가 이 차를 마음대로 활용하시게나?ꡓ
성불사로 돌아오는 차중에서 큰스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말하자면, 명의야 누구 앞으로 되어있건 이제 이 차는 상좌인 청광 네 것이나 다름없는 거니까, 필요하면 언제든지 <내 차>로 알고 마음내키는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말씀이시다.
ꡒ예, 스님! 불사를 위해서만 이 차를 쓰되, 흠집 하나 내지 않도록 소중히 다루겠습니다.ꡓ
큰스님 앞이라서 말은 그렇게 했으나, 속으로는 나를 것 같이 기뻤다. 겉보기에도 튼튼하고 맵시좋은 차인데다가, 4륜구동이겠다, 바퀴도 커서 비포장도로인 이런 산길에서도 포장도로나 다름없이 달려주었다. 게다가, 공장에서 갖 빼낸 새차가 아닌가? 내가 일각 선사님의 상좌라는 사실을 가슴 뿌듯한 행복으로 실감하기는 이 때가 처음이지 싶었다. 말로만 들어오던 스승과 상좌 사이란 게, 속가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는 것도 나는 이때부터 비로소 실감했다.
ꡒ청광스님! 저어, 차 좀 태워주지 않으실래요?ꡓ
차도 있겠다, 무슨 꼬투리만 있으면 곧잘 들르는 이도성 처사님댁에서 불심행 보살이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뜸 물었다.
ꡒ태워드려얍죠, 보살님!ꡓ
내가 일부러 너스레를 떨어대었다.
ꡒ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고 진짜예요, 스님?ꡑ
ꡒ누가 가짜라 했습니까? 어딘지 목적지만 말씀하십쇼. 제가 총알같이 빠르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ꡓ
내가 장난끼를 섞어 짐짓 눙쳤다.
ꡒ스님두, 장난으로 하는 말씀이 아니래두 저러신다아. 제딴에는 벼르고 벼르다가 가까스로 드리는 말씀인데…… 정말이예요. 이러시면 더욱 섭섭해진다구요. 그 뭐냐? 시승식이라는 것 말씀인데요, 저만 쏙 빼놓으시구…… 그러실 수가 있는 거예요, 청광스님?ꡓ
불심행의 목소리에는 어린 소녀의 그것같은 응석끼가 잔뜩 배어있었다.
ꡒ아아, 이런! 그러고보니 불심행 보살님께 소승이 큰 결례를 했군요?ꡓ
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ꡒ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오히려…….ꡓ
ꡒ아뇨. 아직 늦진 않았으니까, 내친김에 지금 시승회를 하시죠, 뭐.ꡓ
ꡒ괜히 해본 소리예요.ꡓ
ꡒ매듭은 빨리 풀어버릴수록 좋은 겁니다. 오래되면 굳어져서 푸는데 힘이 더 들거든요. 어서 타세요! 특별히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구…… 차가 있는데, 까짓 것 절로 돌아가는 시간이 좀 지체된들 대수겠습니까?ꡓ
말은 그렇게 했으나 속으로는 뒤가 몹시 캥겼다.
천불동 만불산 건립공사로 인부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지, 중기소리며 발파작업 등등 주변 분위기가 어수선하기 때문에 승려들마저 덩달아서 기강이 해이해졌다 하시면서, 조석예불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빠지지 말고 꼭꼭 참석해야만 한다는 큰스님의 엄명이 내린지가 불과 이틀 전이었다. 지금부터 절로 돌아간다면 모를까, 그네를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나 즐기다보면 보나마나 저녁예불에 참석하기는 불가능할 터였다. 그럴 경우 문제가 커진다. 큰스님의 엄명이 떨어진 이상 누구라도 조석예불에 불참했을 경우 다음 날, 대중스님들 앞에서 참회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큰스님을 필두로 수자들하며 행자에 공양주까지 쭈욱 둘러앉은 대중방에서 큰스님 다음가는 위치에 있는 상좌녀석이 꿇어앉아서 선은 이렇고 후는 이래서 부득히 저녁예불에 참석할 수가 없었노라…… 생각만해도 끔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심행 보살 앞에서 천연덕스레 능청을 떨어대고 있었으니…… 그네 탓인지 새차 탓인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ꡒ말이 난 김에 그럼 쬐끔만 타보겠습니다.ꡓ
그네가 짐짓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다. 나는 교복을 입은 소년이 교복의 소녀와 처음 대면했을 때처럼 들뜬 기분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일순간 나는 내가 출가한 수도승이라는 사실마저 깜박 잊고 있었다.
ꡒ자아, 어디로 모실깝쇼, 불심행 보살님?ꡓ
ꡒ아무데나요. 날도 다 저물어가는데, 제가 괜한 투정을 부렸지요, 스님?ꡓ
ꡒ그런 말씀마시고…… 어때요? 모처럼 바닷바람이라도 좀 쏘여볼까요?ꡓ
ꡒ청광스님과 함께 노을지는 바닷구경이라…… 그, 좋지요.ꡓ
나는 이도성 처사님과 두어 차례 와본 적이 있는 개운포 바닷가로 차를 몰았다.
말이 바닷가랄 뿐이지, 그 곳은 실상 내 어린 시절의 꿈을 키우던 어촌의 그 바닷가, 그러한 낭만은 찾을래야 찾아볼 수도 없는 삭막한 곳이었다.

(서라벌 밝은 달빛 아래서
밤 늦도록 놀다가 집에 돌아와보니,
앗뿔사!
잠자는 아내의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아내의 것인데,
둘은 누구의 다리일꼬?
본래는 내 것이었지만
이제는 빼앗겨버렸으니,
어찌하리요,어찌하리오!)

처용의 전설이 얽힌 개운포(開雲浦) 주변은 언제 와봐도 낯이 설었다. 주변의 공장에서 내뿜는 새콤하고 퀴퀴한 냄새하며,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있는 굴뚝들이 여기 저기에서 불필요한 깨스를 태우는 불빛들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야경 등등.
ꡒ어마나! 이런 데서도 클로바가 지천으로 자라고 있네요.ꡓ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불심행이 탄성을 질렀다.
ꡒ그게 원체 자생력이 강한 식물이 되어놔서…….ꡓ
그네 곁으로 다가가면서 내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ꡒ스님! 우리, 누가 먼저 네잎 클로버를 찾아내나 내기하실래요?ꡓ
ꡒ해가 곧 질텐데 찾아지겠습니까?ꡓ
ꡒ해가 진들 대순가요? 굴뚝 끝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들이 대낮같이 환할텐데요, 뭘.ꡓ
ꡒ그야 그렇습죠만…… 그보다 우리 저기 앉아 얘기나 나누시죠?ꡓ
ꡒ네, 그게 좋겠습니다.ꡓ
우리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방파제께로 향했다. 바야흐로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는 바다는 잔잔했다.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파제 한켠 콘크리트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불심행이 먼저 입을 열었다.
ꡒ청광스님!ꡓ
ꡒ……?ꡓ
ꡒ한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ꡓ
ꡒ뭔데요?ꡓ
ꡒ스님은 왜 출가하셨지요?ꡓ
ꡒ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로군요?ꡓ
ꡒ싫으면 안하셔도 됩니다.ꡓ
ꡒ그보다 불심행 보살님께서는 왜 출가하시려는 거지요?ꡓ
ꡒ그거야, 스님이 더 잘 아시면서…….ꡓ
ꡒ우문현답(愚問賢答)이로군요?ꡓ
내가 짐짓 웃어보이면서 얼버무렸다.
ꡒ한 가지만 더요.ꡓ
불심행이 말했다.
ꡒ……?ꡓ
ꡒ스님, 사랑해보신 적 있으시죠? 어느 여자를 죽도록…….ꡓ
불심행이 전혀 장난스럽지도 아니한 물음을 장난끼를 섞어가며 자연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앗차! 싶었다. 그 물음이 자칫 헤어나기 어려운 덫이 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에도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아직 출가하기 전, 선원이라도 되어서 먼 바다 낯선 항구로 평생 떠돌아다니고 말까, 어쩔까?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무렵이었다. 누구를 죽도록 사랑해보신 적이 있으세요?…… 그 물음 뒤에 오는 것, 여자의 눈물과 신세타령 그리고 공식인 양 술술 이어지던 슬픈 사랑의 이야기…… 그걸 감당하기에는 내 마음은 그때 너무 여리어 있었다.
─나는 우리가 부르던 그 남자의 이름, 독고(獨孤)라는 게 성인지 이름인지 아니면 별명이었는지 지금도 정확히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냥 그를 독고씨라고만 부르고 있었어요. 내가 그를 처음 만나던 날, 바다 위엔 조용히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찻집 환성(歡聲), 창문 너머로 비 내리는 항구 잔잔한 바다를 마냥 바라보고만 있었지요. 소록소록 하염없이 내리는 빗물이 설움되어 내 가슴 속 깊이까지 촉촉히 배어드는 바로 그 시각에…… ꡒ실례합니다. 여기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ꡓ 독고, 그는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숱 많고 까아만 머리카락에 작은 물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던 게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나는 두어번 고개만 주억거렸지 싶습니다. 다시 비 내리는 바다 위로 암울한 시선을 던지고 말았었지요. 그 역시 말이 없더군요. 밤 항구, 그리고 부두 위에 부슬부슬 쉬임없이 내리는 밤비…… 멀리서 등댓불이 깜박이고 있었고, 바닷속으로 길게 뻗어나간 잔교(棧橋)의 맨 끝에 켜진 외등을 오색영롱한 띠로 변한 물방울들이 둥글게 감싸고…… 그렇게 항구의 밤은 깊어가는데, 그는 그냥 바위였습니다. 전혀 움직일 줄 모르는 바위…… 이윽고, 부웅! 부웅! 뱃고동을 울리며 환한 전등을 뺑 둘러 켠 여객선이 항구 안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검은 바다 위를 두둥실 떠오고 있었습니다. 10여분쯤이나 지체할까, 배가 부두에 닿아 손님이 오르내리고나면 배는 이내 항구를 떠나고, 한순간 북적대던 잔교엔 퀭한 공허만이 남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떠나고만 싶어지더군요. 밤배를 타고 멀리 아주 멀리…… 그렇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게 고작이었죠. 그 남자, 독고씨는 이튿날도 그 다음날도 나의 맞은편 한눈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그 자리에 바위처럼 마냥 앉아있었습니다. 마침내 나는, ꡒ마도로스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에 홀로 오래도록 떨어져 있노라면 이토록 지겨운 인간 세상도 조금은 그리워질테니까요.ꡓ 하는 그의 말에 이끌리고, ꡒ선생님은 지독한 염세주의자로군요?ꡓ 짐짓 묻는 나의 말에, ꡒ아뇨. 난 살고 싶은 거요. 행복하게, 아주 행복하게……ꡓ라고 말하면서, 그는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 독고는 바로 나였다, 라는 것은, 여자의 얘기를 듣고 여자와 자주 만나는 사이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네의 <독고씨>가 되어있더라는 얘기였다.
─살고 싶다는 것. 그것은 세상을 싫어한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가 아녜요?
─그렇지 않을 걸요. 살고 싶다는 것은 삶을 긍정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염세라는 것은 삶을 부정하는 것일 게구.
─그럼, 선생님께선 자살따윈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으셨겠네요?
─왜 안해봤겠습니까?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바램이 끊기고 말 때…… 그 때는 달리 방법이 없잖습니까?
─그럼 우리 함께 죽어요? 네, 독고씨!
─딱 하나, 마지막 기댈 언덕이라고 눈여겨 보아두었던 곳, 그곳에 다녀온 다음에 우리 그 문제를 다시 이야기해 보기로 합시다. 그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겠지요?
─아무렴, 기다리고 말구요.
내가 그 여자를 다시 만난 것은 일각 큰스님 문하에서 동안거(冬安居)를 세 번째 마친 이듬해 봄이었다. 그네는 하동포구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낙양(落陽)이라는 작은 찻집을 내고 있었다. 레지도 마담도 쿡크도 따로 없던, 그네가 쿡크이고 레지이고 주인마담이기도 한 조그만 찻집이었다.
ꡒ우리 그만 돌아가지요.ꡓ
이윽고, 내가 불심행에게 말했다.
ꡒ제가 경망스럽게 굴어서 화나셨어요?ꡓ
ꡒ아미타불! 그럴 리가 있습니까? 게다가 그런 질문따위 한두번 받아본 것도 아니구요.ꡓ
ꡒ그렇다면 어째서 저의 물음에는 일언반구 대답이 없으신 거죠.ꡓ
ꡒ말해드릴 게 아무 것도 없으니까.ꡓ
ꡒ정말이세요?ꡓ
ꡒ중이 거짓말하는 것 보셨습니까?ꡓ
ꡒ죄송합니다.ꡓ
ꡒ날이 많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만 일어서시죠?ꡓ
ꡒ왜, 절에 늦게 돌아가면 큰스님께 치도곤을 맞습니까?ꡓ
ꡒ치도곤을 맞다뿐입니까? 대중스님들 앞에서 참회까지 해야만 하고…… 감당하기 어렵습니다.ꡓ
ꡒ어마나! 이를 어쩌죠? 저는 청광스님께서 그런 곤욕을 치루시게 되는 것도 모르고 그만…….ꡓ
ꡒ아닙니다. 차가 있으니까 지금 출발해도 많이 늦진 아니할 겁니다.ꡓ
ꡒ그럼, 더 늦기 전에 어서 출발하시죠?ꡓ
ꡒ아미타불!ꡓ
나는 서둘러 차에 시동을 걸었다.
공해로 바다가 죽어가고 있다고 아우성들이지만, 그래도 검푸른 유월의 바다, 그 잔잔한 파도에 부서지는 불빛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아름다웠다.


4

불사의 진척이 예상했던 것보다 빨라서 좋았지만, 그 뒷수발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 수자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세월가는 줄도 모른 채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성불사의 주변은 터를 닦는 중기소리며 암벽을 쪼아대는 망치 소리에 귀가 다 먹먹할 정도로 아침부터 밤까지 소란스러웠다. 게다가,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신도들의 뒷바라지하랴, 초하루 보름으로 여는 정기법회하랴 눈 코 뜰새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산사에 남아서 계속 참선수도에만 정진하겠다는 고집불통의 사형 도암(道庵)스님에게 우는 소리를 해가며 구원을 요청했더니, 고작 사미승 몇 명 보내주고는 나몰라라 해버리는 것이었다. 다같은 일각선사님의 상좌인데 누구 누구는 산사에 행감치고 들앉아서 공부하고, 누구는 불사랍시고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니면서 일해야만 하고…… 생각하니 은근히 부화가 치밀었다. 생각같아서는 당장 도반 일행이 주석(住錫)하고 있는 산사로 달려가서,
ꡒ명색이 일각선사님의 큰상좌인 주제에 아무렴 이럴 수가 있는 거요? 사판승(事判僧) 노릇을 마다하고 한사코 이판승(理判僧)으로 남겠다는 사형의 뜻도 장하지만, 스승이 혼신의 힘을 다 기울여 하고 있는 큰 불사를 애써 외면하는 것 또한 상좌된 도리가 아니잖소? 옛 말에 복작거리는 장터 한복판에 앉아서도 좌선삼매에 젖을 수 있는 자라야만 참된 선승이라 했거늘, 사형은 그 되먹지도 아니한 고집으로 스승의 대불사를 그르치려 마시오!……ꡓ
어쩌고, 한 바탕 퍼부어 댄 끝에 산사에 있는 승려들을 큰스님의 엄명이라며 죄다 데려와버리고 싶었었지만,
ꡒ관둬! 예로부터 절 보기 싫으면 중이 떠난댔느니…… 안오겠다는 사람을 한사코 붙들어와선 그 뒷감당을 어찌 하려구? 공부하겠다는 사람은 한눈 팔지 않고 공부만 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도 불사인 게야. 그냥 놔 둬도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저절로 산에서 내려오게 될 거니깐, 힘이 들더라도 당분간은 청광수자 혼자서 감당해나갈 수밖에……ꡓ
큰스님께서 한사코 만류하셨다.
실상 우리들은 이 불사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지은 지 고작 10년 안팎의 사불당에 불과한 이 성불사에 이토록 많은 신도들이 문자 그대로 구름처럼 몰려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백금출 사장님은,
ꡒ20대에 출가하신 이후 50여 년을 한결같이 장좌불와(長坐不臥)하시면서 참선수도에만 정진하신 분으로, 우리 교계에서도 큰스님으로 널리 추앙받는 일각선사님을 몸소 친견(親見)하겠답시고 신자들이 다투어 몰려들고 있는 것입니다.ꡓ
라고, 큰스님께 말씀드리곤 했었다.
그 점만은 큰스님께서도 의심치 아니하시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나는 백금출 사장이 큰스님께 보고하지 아니한 게 한 가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바로 이도성 처사의 이른바 홍보전략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한 때는 개척교회 전도사로서 신도를 끌어오는 일에 도가 튼 사람이었노라고 말하곤 했었는데, 그게 빈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이내 알아차렸다. 날이면 날마다 이 성불사에 신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게 하는 데 사용한 이른바 그 홍보전략이라는 것만 해도 그랬다.
그가 첫번째 시도한 일은 매스컴을 동원하는 일이었다. 지방 신문과 방송의 종교 문화담당 기자들을 어찌 구워삶았는지 사흘이 멀다고 큰스님과 성불사의 기사가 다투어 게재되었고, 그런 기사가 실린 다음날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간지에 5단 통으로 <천불동 만불산 건립 모연문>의 광고가 실리곤 했었다.
두번째는 인근 사암의 신도회에서 제법 말발이 선다 싶은 보살들을 포섭하는 일이었다. 그 일엔 그의 부인과 처제인 불심행 보살까지 내세웠는데, 메스컴을 동원하여 홍보할 때와는 달리 이 일은 나하고도 미리 입을 맞추고 시작한 것이었다.
─능력있는 화주(化主) 보살로 한 50여 명을 골라 교육을 시켜볼까 하오.
─교육이라뇨?
─그 보살님들께 새삼스레 무슨 교리강습 따위를 시키자는 게 아니고…….
─그런데 왜?
─뭐랄까, 이를테면 쎄일즈교육 같은 것 말씀입니다. 말이 좋아서 권선(勸善)이지 신도를 끌어모으고 그렇게 끌어모은 신도들로 하여금 천불동 만불산의 건립불사에 시주하게끔 하는 일들이 따지고보면 판매행위, 시쳇말로 쎄일즈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도 말할 수는 있겠지요.
─그래서 하는 얘기 아닙니까? 훈련이랄까, 교육이랄까…….
─맙소사! 그런 일을 큰스님께서 허락하시겠습니까?
─제 말씀을 곡해하셨나본데, 큰 불사에 화주 보살님 여럿을 두는 일이야 예로부터 내려오는 일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고, 저는 다만 그 화주 보살님들로 하여금 능력을 배가할 수 있도록 판매기법을 터득시키자는 뜻으로다가…….
─이도성 처사님의 말씀은 알아듣겠는데, 문제는 그 말투로군요? 뭐랄까, 불교적인 냄새가 전혀 풍기지 아니하는 상업적인 용어…… 아무튼 큰스님 앞에서는 판매기법이니 쎄일즈교육이니 하는 따위의 용어를 삼가주십시요. 본말전도(本末顚倒)랄까, 자칫 부처님 팔아서 돈벌이하려느냐는 호통이 떨어지기 딱 알맞을 테니까요.
─충고 고맙습니다. 맹세코 큰스님 앞에서는 말조심하겠습니다.
세번째로, 그렇게 포섭한 보살들을 훈련시켜서 각자 전에 소속했던 사암의 신도들을 은밀히 빼내오는 일이었다. 큰스님의 명성도 명성이려니와 신문, 방송 등에서 사흘이 멀다고 떠들어대던 때여서 남의 절 신도들을 빼내오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불교신도라는 게 초파일(부처님 오신 날)에 축등이나 한 차례 켜는 사람이 대다수고 조금 부지런한 신도이다 싶으면 칠석이나 백중, 그리고 동지 때에나 불공하러 절을 찾아간다. 이런 신도들일수록 소속감이 약하고 소문에는 민감해서, 어느 절 어느 부처님이 영험하다는 말만 들으면 천리를 멀다 않고 찾기 마련이다. 이도성 처사가 이런 점들을 재빨리 간파하고 세운 전략(?)은 그런대로 성공한 셈이었다. 요즘 이 성불사에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는 신도들의 대다수가 백금출 사장의 입에 바른 말과는 달리 이도성 처사의 그 홍보전략의 결과로 확보한 신도들이었기 때문이다.
큰스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아셨다면야 노발대발하신 끝에, 불사고 뭐고 죄다 팽개쳐 버리시고 이 성불사를 훌쩍 떠나버리실지도 모를 일이어서, 나도 백금출 사장님처럼 이도성 처사의 그 홍보전략만은 큰스님께 곧이곧대로 보고하지 않기로 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의 소임은 날이면 날마다 문자 그대로 구름처럼 밀려드는 신도 관리라든가, 세불천 계곡 양켠에 조성 중인 천불동 만불산의 공사 진척상황을 그때 그때 점검하는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바로 그럴 즈음에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기인한 게 아니고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생긴 문제였다.
천불동이야 중소기업체의 사장님들이라든가 대기업체의 간부급 사원들, 말하자면 이 <천불동 만불산> 조성공사비의 조달에 크나큰 몫을 담당할 돈 많은 신도들을 대상으로 건립하는 거니까, 내가 나서서 감놔라 배놔라 섣부른 참견을 할 입장도 아니다. 그렇지만 세불천변 소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바위산에 조성중인 만불산이 문제였다. 청년불교단체를 방문한다, 크고 작은 기업체의 노동조합 간부들을 만나서 만불산 부처님조성공사의 취지를 설명하고 동참을 권유한다…… 쉴 사이 없이 움직였다. 그렇지만 내 앞에서는 취지에 찬동하던 사람들도 뒤돌아서면 그만이었다.
운주사 만산계곡의 그 천불천탑의 감동을 이 곳 세불천변에다 재현하겠다는 백금출 사장님의 원력도 들은 바 있었겠다, 나로선 천불동의 빠른 공사 진척상황과 비교되어 여간 마음 쓰이는 게 아니었다. 이내 몸도 마음도 지치고 말았다. 뭔가 재충전할 계기가 있어야만 했다. 쉬는 건 그 다음의 문제였다. 생각다 못해 큰스님을 찾아뵙고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그리고 며칠간의 말미를 청했다.
ꡒ하루 이틀에 끝날 불사도 아니고, 청광수자의 뜻이 그렇다면야 허락하고말고 할 계제도 아니로군. 그동안 청광수자 혼자서 동분서주하며 애쓰는 모습이 보기에 안쓰러웠는데 그첨저첨해서…… 어차피 불사를 위한 견학여행도 겸하는 거니까 시일에 괘념치 말고 차분한 마음으로 댕겨오시게나?ꡓ
ꡒ허지만 이곳 불사가…….ꡓ
ꡒ그게 조금은 걱정일세만, 정 뭣하면 도암에게라도 기별해서 빈자리를 잠시 메꿔주도록 해봄세.ꡓ
도암은 일각선사님의 큰상좌다. 돈오돈수(頓悟頓修)를 고집하며 불사에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내 사형이지만, 큰스님께서 부르신다는 데야 전들 어쩌겠는가? 나는 큰스님 앞을 물러나오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런 방법이 있었는데 여직 혼자서만 속을 끓였네.)
내친김에 나는 다음날로 행자를 시켜 도암사형을 모셔오도록 했다. 웬일인가 싶어 허둥지둥 성불사에 도착한 도암사형에게 전후사정을 말해주지도 아니한 채, 나는 훌쩍 산을 내려왔다. 한 가지, 산에서 내려올 때와는 달리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동행이 있었다. 불심행 보살…… 그렇지만 나는 이 여행을 그네와 함께 떠난다는 사실만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했고, 불심행의 형부인 이도성처사에게도 입조심하도록 신신 당부해 두었다.
ꡒ형부를 너무 믿지 마세요.ꡓ
차가 태화강을 건널 무렵 조수석에 앉은 불심행이 불쑥 말한다.
ꡒ관세음보살!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ꡓ
내가 짐짓 묻는다.
ꡒ무슨 뜻이 있다기보다…… 그 뭐냐? 속설에, 한번 배신했던 사람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느 때고 다시…….ꡓ
불심행이 말끝을 흐린다. 불심행의 속뜻을 헤아리는 데는 더 이상의 말이 없어도 충분했다. 이도성 처사가 백금출 사장을 등에 업고 천불동 만불산의 창건불사에 죽자사자 매달리는 이유가 겉보기와는 다를 수도 있으니까 미리미리 경계하라는…… 그렇지만 나는 그 점만은 짐짓 모른 체하고 말을 잇는다.
ꡒ아닌게 아니라 이도성 처사님의 입이 좀 가볍기는 합지요마는 설마 우리가 함께 여행 떠난 사실을 큰스님께 고자질이야 하실라구요?ꡓ
ꡒ청광수자님께선 그 일이 그렇게 마음에 걸리세요?ꡓ
ꡒ명색이 수도승인데…… 누군들 안그렇겠습니까?ꡓ
나는 정곡을 찔린 것만 같아서 움찔 놀란다.
ꡒ무슨 청춘남녀의 데이트도 아니겠다, 성스러운 목적으로 떠나는 여행인데 누가 뭐란들 마음 쓰실 일이 아니잖아요?ꡓ
ꡒ…….ꡓ
불심행은 주뼛거리는 내 마음을 오히려 다독거린다. 나는 위치가 바뀌어, 불심행 보살이 승려이고 승려인 내가 오히려 속인인 것만 같아서 속으로 ꡒ아미타불!ꡓ 염불하면서 저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린다.
ꡒ가만 있자아, 오늘의 일정은 경주 남산에 오르는 것으로?……ꡓ
불심행 보살이 짐짓 말머리를 돌린다.
ꡒ네, 그럴 작정으로 있습니다.ꡓ
ꡒ설마 남산이 초행은 아니실테고?ꡓ
불심행 보살이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린다.
이 울산은 신라적부터 경주의 변방 쯤으로 여겨져 왔다. 지금이니까 인구 일백만이 넘는 광역시로서 전국에서 일곱번째로 큰 도시가 되어있지만, 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경주와는 비교가 되질 아니한, 문자 그대로 시골 변방이었다. 그런 탓에 이 울산은 경주 생활권에 속해있었던 셈이었고, 광역시 승격 이전에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남이면서도 느낌으로는 경북에 가까운 편이었다. 그러 저러한 이유로 울산 사람들은 경주나들이를 이웃동네로 마실가듯 가볍게 여긴다.
ꡒ몇 차례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만…….ꡓ
나도 덩달아 혼잣소리마냥 중얼거린다.
ꡒ저는 이번이 두 번째인데, 한마디로 경주 남산은 야외조각전시장 같더군요?ꡓ
ꡒ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시각을 달리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ꡓ
ꡒ시각을 달리하신다면 천불동 만불산과 연관지어 살펴보신다는 뜻인가요?ꡓ
ꡒ말하자면 그 비슷한…… 일테면 경주 남산에 불상을 조각한 참 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경주 남산의 불상들과 만산계곡의 그 천불 천탑과는 무슨 상관관계가 없는 것일까? 세불천변에 조성할 만불산의 부처님은 경주 남산쪽을 닮아야 할까 아니면 만산계곡의 그 못생긴 부처님쪽이 더 적당할까…….ꡓ
ꡒ아니, 그럼?ꡓ
ꡒ왜요?ꡓ
ꡒ경주 남산만 다녀오는 게 아니고 운주사까지?…….ꡓ
불심행 보살이 의아해하며 나를 돌아본다.
ꡒ제가 보살님께 그 말씀을 미처 안드렸던가요?ꡓ
내가 차의 속도를 늦추면서 짐짓 되묻는다.
ꡒ이를 어쩐담?…… 저는 당일치기 여행으로만 여기고 아무 준비도 해오질 아니했는데…….ꡓ
ꡒ…….ꡓ
예상 밖이다.
경주 남산 부처님을 친견(親見)하고 올 거라면서 불심행 보살과 동행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짧게잡아 2박 3일, 넉넉 잡는다면 한주일도 더 넘게시리 운주사의 천불천탑에 서산의 마애석불까지 친견하고 와야만 하는 게 이 여행의 목적이라는 걸 그네에게 어찌 알려야 할까?…… 그 동안 내내 좌불안석이었기 때문이다. 헌데, 그네의 태도는 운전석에 앉은 이 땡중과 줄곧 함께해야만 하는 긴 여행에 오히려 잔뜩 기대를 걸고 있는 듯한 눈치였으니 기가 찰밖에…….
ꡒ아미타불!ꡓ
나는 때마춰 나타난 휴게소에 차를 주차시켰다.
문득, 큰스님의 노기띤 얼굴이 눈앞을 스친다. 사형과 사제들의 비웃음소리도 들린다. 나무관세음보살!…… 저도 모르게 온몸이 부르르르 떨린다.
ꡒ아니, 청광스님! 어디 불편하세요?ꡓ
불심행이 묻는다.
ꡒ아, 아닙니다. 이것 저것 생각을 좀 했더니만 머리가…… 휴게소에서 차나 한 잔 마시면 좋아질 겁니다.ꡓ
우리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휴게소로 들어갔다. 순간, 휴게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본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렇지만 불심행은 뭇사람들의 내쏘는 시선 앞에서도 오히려 당당했다. 그네는 커피를 받아온다, 받아온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타서 저어준다…… 여봐란 듯 내 커피시중까지 들어주는 게 아닌가?
ꡒ그만 일어서십시다.ꡓ
나는 커피를 마시자마자 그네를 채근하여 차로 돌아오고 만다. 곁눈질로 흘낏 흘낏 훔쳐보는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눈길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ꡒ청광스님께선 안즉도 어린애 같은 데가 있으시군요?ꡓ
뒤따라 차에 오르면서 불심행 보살이 웃는다. 나는 그네의 말을 한귀로 흘려들으면서 퉁명스레 내지른다.
ꡒ일정을 바꿔야겠소!ꡓ
ꡒ이 여행을 취소하겠다는 말씀인가요?ꡓ
ꡒ그런 뜻이 아니고…… 경주 남산은 돌아오는 길에 들리기로 하고, 내친김에 운주사부터 다녀오도록 합시다. 대구에서 88고속도로를 달려 광주에서 하룻밤 묵고, 날이 새기 무섭게 만산계곡을 향하여 출발…….ꡓ
ꡒ쫓기는 것도 아니고, 숨이나 쉬어가면서 말씀하세요.ꡓ
그네의 눙치는 말에, 내가 흠칫 놀란다. 그러고보니 나는 진즉부터 속으로 그리고 있던 여정을 그네 앞에 펼쳐보이기 위하여 숨도 쉬질 않고 주워섬기고 있었던 셈이다. 생각하니 절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시침 뚝 따고 내가 묻는다.
ꡒ왜, 싫으세요?ꡓ
ꡒ어차피 청광스님을 따르기로 한 건데, 싫고 좋고가 어딨습니까? 호호호호…….ꡓ
ꡒ…….ꡓ
주말이 아니어서 차가 밀리지는 아니했지만, 경부고속도로로 대구까지 가서 88고속도로를 광주까지 달려와보니, 초여름 하루해가 설핏 기울어 있었다. 나는 시가지 초입에 있는 주유소에 들어가 그 동안 텅 비어버린 기름탱크에 주유부터 한다.
ꡒ이걸 어쩐다?ꡓ
내가 불심행을 돌아보면서 머뭇거리자,
ꡒ왜, 길을 잘못들었습니까?ꡓ
기다렸다는 듯이 그네가 되묻는다.
ꡒ초행길이나 다름없는 운주사까지 밤길을 주파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광주에는 아는 절이 없어놔서 하룻밤 묵어갈만한 곳도 마땅찮고…….ꡓ
ꡒ까짓 하룻밤인데, 굳이 절을 찾아가서 신세질 게 뭐있어요?ꡓ
ꡒ그렇다고 차에 앉아서 밤을 지새운달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ꡓ
ꡒ이제 보니 청광수자님도 참 고지식하시네.ꡓ
ꡒ……?ꡓ
ꡒ모처럼 하는 여행인데, 호사 좀 해얍죠.ꡓ
ꡒ호사……?ꡓ
ꡒ이름난 관광호텔 쯤에서 하룻밤 묵어간다면 호사지 뭘. 안그래요, 청광수자님?ꡓ
ꡒ……?ꡓ
나는 대답대신 얼굴만 붉힌다.
이건 나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설흔이 다 되어가는 노처녀티를 낸다고나할까, 불심행 보살은 숫제 나를 젖혀두고 주유소의 종업원을 불러 관광호텔로 가는 길까지 꼼꼼하게 따져묻는 게 아닌가? 기가 찰 노릇이다. 내가 자청한 여행인데 이제와서 이러쿵 저러쿵 따질 계제도 아니고…… 헌데, 정작 일이 벌어진 것은 관광호텔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불심행은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스스럼 없이 프론트로 다가간다. 나는 숙박비만은 내가 치루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몸에 걸친 승복 때문에 선뜻 그네의 뒤를 따라가지 못하고 멈칫거린다.
ꡒ주말이 아니어서 빈방은 많은가본데 돈도 아낄 겸 하나만 빌렸습니다.ꡓ
불심행이 받아온 열쇠를 흔들어보이면서 웃는다.
ꡒ돈은 내게 많은데…….ꡓ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는 심경으로 얼굴을 붉히며 겨우 입만 달싹거린다.
ꡒ그럴 필요 뭐 있습니까? 겨우 하룻밤 묵어가는 걸 가지고…….ꡓ
ꡒ…….ꡓ
ꡒ삼층인데, 그냥 걸어올라 가시죠?ꡓ
ꡒ아아, 예에…….ꡓ
나는, 저놈의 땡중 좀 보게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직 해도 덜 떨어진 버얼건 대낮에…… 어쩌고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만 같아서 저도 모르게 손으로 뒷통수를 가린다. 게다가, 아까부터 쿵쾅거리는 심장 뛰는 소리하며, 삼층까지의 계단이래야 몇이나 된다고 헐떡헐떡 차오르는 가쁜 숨소리…… 나는 언제부터인가 저도 모르게 흥분되어 있었다.
ꡒ방도 크고 깨끗한 게 이만하면 되었네요, 뭘?ꡓ
복도에서 머뭇거리는 나를 돌아보면서 불심행이 벙긋 웃는다.
ꡒ네? 아아, 그렇군요.ꡓ
나는 무우 캐먹다가 들킨 처녀아이마냥 머쓱해하면서 방으로 들어선다.
ꡒ온종일 운전하시느라 몹시 지쳤을 터인데…… 더운 물로 씻으시고 푸욱 좀 쉬세요.ꡓ
ꡒ저보다 불심행이 먼저…….ꡓ
ꡒ그렇지만 어찌 제가 먼저…….ꡓ
그네가 주저하자,
ꡒ괜찮다니까 저러신다.ꡓ
내가 한사코 등떠민다.
ꡒ그럼, 실례…….ꡓ
그네가 마지못해 욕실로 향한다. 나는 푸훗푸훗 소리 죽여 참고 있던 숨을 내쉰다. 만사가 뜻대로 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바로 그때였다. 나의 들뜬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벌어지고만 것은.
ꡒ아 참! 청광수자님?ꡓ
욕실에 한발 들여놓으려다 말고 불심행이 뒤돌아본다.
ꡒ……?ꡓ
내가 말없이 고개를 쳐들어 그네와 눈이 마주치자,
ꡒ이따가 욕실로 들어와서 제 등을 좀 밀어주실래요?ꡓ
불심행이 장난스레 한마디 툭 내지른다. 나는 정곡을 찔린 것만 같아서 흠칫 몸을 움츠린다. 문득 불심행이 요부(妖婦)라는 생각이 든다. 불여우같은 요부…… 내가 가까스로 그네의 청을 거절한다.
ꡒ그, 그건 좀…….ꡓ
ꡒ그러실 줄 알았어요. 저야 어차피 관세음보살님도 아니고, 청광수자님께서도 노힐부득이라기엔 아직…….ꡓ
ꡒ노힐부득?……ꡓ
ꡒ예, 노힐부득과 달달박박…….ꡓ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불심행 보살의 자태는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그네가 던진 이 몇 마디는 할(喝)이고 또한 봉(棒)이었다.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힘이 빠져나간 두 다리를 가까스로 추스려 가부좌를 튼다. 정수리께에다 어름물을 퍼다붓기라도 한듯 온몸이 차차로 식어간다. 아아, 노힐부득…….
삼국유사 제3권 제4 탑상(塔像)편에 수록된 ꡒ남백월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ꡓ이라는 두 스님의 얘기를 빗대어 한 말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 때의 의안군으로, 현재의 경남 창원지방의 남백월산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전해온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어릴 적부터 한마을에서 자란 죽마지우로서, 뜻이 맞아 함께 출가하여 달달박박 스님은 남백월산의 북쪽 기슭에 노힐부득 스님은 동쪽 기슭에 각기 토굴(암자보다 더 작은 규모의 절간)을 짓고 수도에 전념했다. 선덕왕 8년, 어느 날 해질 무렵이었다. 나이 스무살 쯤 되어보이는 절세가인이 북쪽 토굴에 홀연이 나타나서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다.
ꡒ절이란 엄숙하고 깨끗한 곳인데 감히 아녀자의 몸으로…… 지체 말고 냉큼 이 곳을 떠나거라!ꡓ
달달박박 스님이 큰 소리로 꾸짖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 걸어버리는 것이었다. 하릴없이 돌아선 색시는 동쪽 토굴에서 수도하는 노힐부득 스님께 통사정했다.
ꡒ이 곳은 수도하는 도량이기 때문에 부녀들이 출입하여 더럽혀서는 안되지마는 궁벽한 산골인데다가 깜깜한 밤인데 어찌 문전박대를 하리오. 들어와서 묵어가시구랴.ꡓ
밤이 이슥하자 설상가상으로 예의 색시가,
ꡒ불행히도 제가 공교롭게 해산기미가 있으니 죄송스럽지만 스님께서 짚자리를 좀 깔아주십시요.ꡓ
하는 게 아닌가? 노힐부득 스님은 마지못해 촛불을 켜고 짚자리를 만들었다. 산고도 없이 쉽게 아이를 낳은 색시는 노힐부득 스님에게 목욕까지 시켜달라고 했다. 노힐부득 스님은 일변 부끄럽고 일변 두려웠으나 내친 걸음이어서 함지박 속에 색시를 앉히고 더운 물을 떠다가 목욕을 시켰다. 잠시 뒤, 통 속의 물에서 짙은 향기가 무럭무럭 풍기는가 싶더니 물이 이내 금빛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노힐부득 스님이 깜짝 놀라자 예의 색시가,
ꡒ우리 스님도 이 물로 목욕을 하세요.ꡓ
하고 권했다. 노힐부득 스님은 영문도 모른 채 색시가 권하는 대로 그 물로 목욕을 했더니, 웬걸 정신이 상쾌해지면서 자신의 살결이 순식간에 금빛으로 변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그의 곁에는 전에 없던 연화대가 하나 생겼다. 예의 색시가 연화대를 가리키며,
ꡒ거기 앉으세요. 본시 나는 관음보살인데 대사가 크나큰 부처님 도를 성취하도록 와서 도와드린 것이랍니다.ꡓ
라는 말을 마치자 홀연히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이것이 전부다. 헌데, 불심행은 이 날 밤 욕실에서 무슨 뜻으로 내게 이 얘기를 불쑥 꺼내었을까? 그건 밤새껏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화두(話頭)이기도 했다.
이튿날, 새기가 무섭게 나는 불심행을 채근하여 시가지를 벗어난다. 말이 좋아 채근이지 따지고 보면 그것은 오기였다. 노힐부득을 흉내내어 댓바람에 탕 안으로 뛰어들어가 그네의 등이라도 북북 밀어줬더라면 좋았으련만…… 공부가 부족하여 차마 그럴 용기만은 내질 못했다. 그대신 내 딴에는 오기가 발동하여 입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선을 하다가 졸다가…… 그렇게 밤을 밝혔다. 창문 밖이 밝아올 무렵 꾸벅꾸벅 졸다말고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서 눈을 떴는데, 아뿔사! 침대 위에 쌕쌕 잠들어 있는 불심행의 모습이 그렇게 평화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네에겐 마치 삼국유사에서나 보았음직한 예의 그 관세음보살님의 현신인 양 섣불리 근접할 엄두조차 내볼 수 없는 위엄마저 서려 있었다. 다음 순간, 나는 작고 초라한 자신의 육신을 보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참담함 바로 그것이었다.
내 여행은 거기서 사실상 끝났다.
만산계곡을 거쳐 내친김에 서산 마애삼존불의 해맑은 미소를 친견하고, 쉬엄쉬엄 경주 남산의 부처님들까지 찾아보는 등 한 주일도 더 넘게시리 불심행 보살과 동행을 했었지만 그건 여행이 아니었다. 떠날 때와는 달리 불심행 보살은 불심행이 아니었고, 나 또한 청광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5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운주사─
잘 닦여진 포장도로 위를 달려 우리는 곧장 천불 천탑으로 더 잘 알려진 운주사에 도착했다. 무슨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지 운주사 입구는 주차 행렬과 차양을 친 난장으로 벅적벅적하다.
<제¶o회 운주대축제>
하늘 높이 떠있는 풍선에 걸린 현수막의 글귀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축제 한 마당인지…… 나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다.
ꡒ아아! 바로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천불 천탑…… 석불과 석탑이 우후죽순으로 어우러져 문자 그대로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군요?ꡓ
광장 한켠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불심행의 입에서는 탄성이 끊이질 아니한다.
ꡒ…….ꡓ
나는 대답대신 고개만 겨우 끄덕인다.
ꡒ누군가 석굴암 부처님은 더 이상 손댈 곳이 없는 부처님이고 운주사의 못난이 석불들은 꼭 손댈 곳만 손댄 부처님이라더니…… 저기 좀 보세요. 눈이며, 코, 입은 겨우 갖다붙였다고 해야 옳을 정도로 밋밋할 뿐이고 옷주름은 선각으로 간단히 처리해 버린 저 솜씨…… 아니, 솜씨라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도대체 기교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이 왜 이렇게 끌리는 거죠?ꡓ
불심행이 나를 돌아보며 쌩긋 웃는다. 어젯밤 관광호텔에서와는 딴판이다.
ꡒ보살님께선 운이 좋은 편이라고나 할까, 이 곳이 초행이니까 더 큰 감동을 받으셔서 참 좋으시겠습니다.ꡓ
내가 저도 모르게 비아냥거린다.
ꡒ아니, 청광수자님께선 비바람에 마모된 저 투박하고 순박한 못난이 부처님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씀인가요?ꡓ
ꡒ예나 지금이나 골바람만은 여전하달까요?ꡓ
나의 심드렁한 대답이 마음에 걸렸던지,
ꡒ왜 이러세요? 심통난 어린애마냥?ꡓ
불심행이 종종걸음으로 바짝 다가오면서 묻는다.
ꡒ마음이 편칠 않아서 그럽니다.ꡓ
ꡒ아니, 왜요?ꡓ
ꡒ이제 이 곳엔 원시성이 별반 남아있질 않아요. 조각논들이 이어져 사람들의 생활 한가운데 어우러져 있던 불탑과 불상들의 그 내밀함이 이젠 영영 사라져버렸다 이 말씀입니다.ꡓ
ꡒ분별없이 벌이는 운주대축제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ꡓ
ꡒ축제라는 것도 그렇지만 이 중수불사…… 제가 이 곳을 다녀간 80년대 중반의 모습은 이렇지 않았단 말씀입니다. 절이래야 요사체 겸 법당으로 쓰이는 허름한 집 한 채뿐이었고, 이 일대의 석탑과 석불 주변은 모두 논과 밭이었습니다. 능주에서 이 곳으로 오는 비포장 도로는 논길과 산길로 사람들의 손길에 훼손되질 아니해서 자연미에 신비감까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삶을 위한 생산의 터전과 신앙, 종교적 조형물이 자연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사람의 생활 속에 살아있는 예배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ꡓ
ꡒ……?ꡓ
ꡒ절 입구 석불군 옆의 희고 멀쑥한 화강암 석탑과 석등은 이 곳 못난이 불상들과는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고, 일주문을 시작으로 새로 중건중수한 저 건축물들, 주위 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건축물들 때문에 운주사 유적이 본래 지니고 있던 조화로운 분위기를 아주 망쳐버렸지 뭡니까?ꡓ
ꡒ가만! 청광스님 말씀대로라면 불사를 한 게 되려 환경파괴라는 말씀인데…… 그럴 수가 있는 거예요?ꡓ
ꡒ환경영향평가라는 건 불사의 경우에는 더욱 필요한 거라고 봐요. 전통과의 조화라든가 원형의 보존 등등 일반적으로 쓰이는 환경영향평가라는 것과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긴 하겠지만서두……ꡓ
ꡒ그런 건 종단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 아닌가요?ꡓ
ꡒ당연히 그래야겠지요. 헌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못해요. 직무유기랄까, 무관심이랄까, 종단차원에서 타당성을 검증한다거나 사계의 권위자를 초빙하여 불사의 규모를 주위 환경과 알맞게 조절한다든가…… 그런 점에 있어서는 성불사에서 하고 있는 <천불동 만불산 건립불사>도 예외가 아니지요.ꡓ
ꡒ성불사야 새로 짓는 사불당이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문화재가 있는 성스러운 골짜기마저 그렇다는 건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ꡓ
ꡒ문화재 보수라면야 국가에서 주는 돈으로 공사를 해야 하니까 다릅지요. 감독관청의 눈치도 봐야 하고 자칫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허지만 이 운주사는 아무도 돌보지 아니한 버려진 절터인 채로 있어온 데다가 유물이래야 국보나 보물로 지정될 만한 것들도 아니었을테니까, 누가 불사를 일으켜 공사를 벌이거나 말거나 종단측에서는 관심 밖이었겠지요. 다들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니깐.ꡓ
내가 제풀에 열을 올려 투덜거린다. 내딴에는 이유있는 항변인 셈이다. 종단의 명령체계가 바로 서있지 못한 건 어제 오늘에 비롯한 일도 아니다. 불사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각 사암의 주지라든가 화주보살 등이 발원하여 불사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면, 그것은 응당 상급기관이랄 수 있는 도 단위의 종무원을 통하여 중앙의 총무원에 보고되어야 하고, 총무원에서는 불사의 타당성 등등을 검증한 다음, 적법한 절차에 따라 가부를 결정해야만 할 터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아무나 발원하고, ꡐ불사란 절로 절로 되는 것ꡑ이라면서 발원문을 남발하여 시주를 받기도 한다. 그러다가 뒷감당을 못할 지경에 이르면, ꡐ에라 모르겠다ꡑ 팽개치고 수자걸음을 쳐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ꡒ따지고 보면 개발이냐 보존이냐 하는 문제이겠는데, 사람에 따라 견해를 달리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ꡓ
불심행이 이의를 제기했다.
ꡒ어떻게?ꡓ
ꡒ이 운주사를 소개한 팜플릿에 보면, 이 절의 주지스님인 법진이라는 비구니스님께서 운주사 중창의 서원을 세우고, 천불천탑도량인 이 일대 산과 들 만여 평을 사들여 도량을 정화하고 대웅전을 비롯한 법당과 요사 등을 중건 중창했다지 뭡니까? 여느 사람이 쉽게 해낼 불사가 아닌데…… 대단하질 않습니까?ꡓ
ꡒ보존한다는 문제를 외면한다면야 그럴 법도 하겠습니다마는…….ꡓ
내 대답이 성에 차지 않았던지,
ꡒ청광수자님, 오늘은 정말 이상하시다. 마치 심술난 아이마냥 말꼬투리만 잡으시려들고…….ꡓ
내 곁으로 바짝 다가서면서 따지려든다.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지난 밤 무등산의 그 관광호텔에서의 불편했던 심기가 나도 모르게 되살아났던 게 아니었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ꡒ그럴래서 그런 건 아닌데…… 미안해요, 보살님!ꡓ
ꡒ아이, 또 저러신다.ꡓ
ꡒ미안 미안…… 우리 이제 티격태격 그만 하고…… 참, 그건 아시지요? 왜 천불천탑인가?ꡓ
ꡒ글쎄요. 그건 잘…….ꡓ
ꡒ불교에서는 천을 가득할 만(滿)자를 써서 만수라 이릅니다. 그러니까 천불이란 무량무수(無量無數)의 부처님을 이르는 말도 되는 셈이지요. 헌데, 중국의 남북조시대부터 성행했던 이 천불신앙은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부터 성행했다거든요. 불경에 보면 과거 장엄겁(莊嚴劫), 현재 현겁(賢劫), 미래 성숙겁(星宿劫)의 삼세(三世) 삼천불 가운데 현재 현겁의 천불신앙을 이르신 말씀인데, 큰 절에서 자주 마주치는 천불전도 바로 이 천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ꡓ
등성이를 오르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설교조로 아는 체를 해보이기 시작한다.
ꡒ요즘은 삼천불 조성불사를 하는 절도 있나보던데?ꡓ
불심행보살도 덩달아 맞장구치기 시작한다.
ꡒ있지요. 그건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천불…… 허지만 이 곳 천불천탑은 우리 민중의 비원(悲願)이 서려있어 한층 의미가 깊다고 할까요? 그것을 대표하는 부처님이 바로 저 두 분의 와불입니다.ꡓ
ꡒ어마나! 금슬좋은 한쌍의 부부 같네. 그죠?ꡓ
ꡒ그렇게 말하는 분들도 더러 있나봅니다마는 그보다는…….ꡓ
내가 천불동 운주사에 전해내려오는 설화를 간추려 그네에게 들려준다.
<하룻밤 사이에 천 구의 미륵불만 세워지면 수도 서울이 바뀐다.> 고려왕조의 지배 아래 있던 백제 사람들은 이 지상에 미륵의 용화세계를 수립할 희망에 불타고 있었다. 그들은 미륵의 용화세계는 돌이 정이나 끌, 망치 등으로 깎이고 쪼여 미륵상이 되는 것처럼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그렇게 만들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그들은 이 만산계곡에서 그들의 믿음을 실행했다. 새벽 첫닭이 울기 전에 일천 구의 미륵부처님을 조성하여 일으켜 세울 수가 있었는데, 그래서 이 땅에 그들이 원하는 용화세계를 건설할 수도 있었는데, 마지막 두 구의 미륵부처님인 바로 이 와불을 세우지 못하고 그만 새벽닭이 울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부처님 두 분의 조각도 완성했겠다, 일으켜 세우기만 하면 새 날이 열렸을 터인데……, 맺힌 한을 다 풀고 용화세계에 안주할 수가 있었을 터인데……, 잠시를 더 기다려주지 못한 수탉의 울음소리가 그지없이 원망스러웠을 터이었다. 게다가, 그 수탉의 울음소리마저 민중을 두려워한 고려왕실의 간교한 술수에서 비롯했었다니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ꡒ술수라니요?ꡓ
ꡒ날이 새려면 아직 멀었는데 흉내 잘 내는 사람을 시켜 수탉울음을 흉내내어, 꼬끼오-! 했더니 그 소리에 속아서 마을의 수탉들이 다투어 울어대기 시작했었다지요. 그래 날이 새는 줄로만 알고 그만…….ꡓ
ꡒ어마나! 이를 어째?ꡓ
ꡒ결국 구백 아흔 아홉 번째와 일천 번째가 되는 이 두 분의 부처님은 끝내 일으켜 세워지지 못했고, 거기따라 민중의 꿈과 희망도 그만…….ꡓ
ꡒ안타까운 얘기로군요? 허지만 성불사의 불사, 천불동 만불산 조성불사에서야 설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요?ꡓ
발길을 돌리면서 불심행이 딴에는 별다른 생각없이 툭! 내지르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그네가 별 생각없이 내던진 그 한마디가 예리한 비수로 내 가슴에 와서 푹! 박히고마는 까닭이.
(괜한 걱정이겠지. 어차피 불사란 시작만 해놓을라치면 절로 절로 되어지게 마련인데…… 다들 절집 일이라서 절로 절로 되어지게끔 점지된 것으로 믿고 있는데…….)
나는 내 속에 일기 시작한 불길한 생각들을 떨구어버릴 양으로 머리를 세차게 내두른다. 오늘따라 깨림칙한 생각들을 쉽게 떨구어버릴 수가 없다. 문득 현실을 너무 외면한 채 산사에만 안주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 요즘이 어느 때인가? 신문이라도 들춰보면, 어느 하루 기업부도에 관한 기사가 실려있지 않는 날이 없다.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재벌급에 속하는 대기업까지도 부도니 법정관리니 해대면서 나라가 온통 난리법석 아니던가? 헌데, 우리는?…… 아니, 나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내 얼굴은 순식간에 불화로를 끼얹은 듯 화끈 달아오르고 마는 것이었다.
엊그제까지도 국민소득 일만 불 시대와 선진국 진입을 자축한답시며 흥청거리던 우리나라가 하루아침에 국제통화기금(IMF)의 신탁통치를 받아야만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뉴스는 충격적이었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설마, 설마? 하며 믿으려하질 아니했었다. 산중 수도승이랄 수 있는 나도 물론 그랬었다. 나라가 부도 위기에 몰려있다거나 대량 실업사태가 일어날거라는 등등 코 앞에 닥친 대통령선거 얘기와 함께 온통 벌집 쑤셔놓은 듯이 시끄웠지만, 우리들은 남의 일인 양 강 건너 불보듯 하고 있었다. 세속의 일에는 초연해야 한다는 게 승려 본연의 자세라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세상이 시끄러워 사람들이 저마다 위기의식을 느낄 때면 부처님께 의지하려는 마음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니까, 시주함에 들어오는 돈이야 흥청망청 들떠 있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우리들은 부처님 앞에 엎드려 목탁만 열심히 두드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노라면 시간의 수레바퀴는 여느 때마냥 절로절로 굴러갈 것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만산계곡에서 불심행 보살이 별 생각 없이 불쑥 내던진 그 한마디 말 ─첫닭이 울기 전에 아흔아홉 번째와 일천 번째의 미륵부처님을 끝내 일으켜 세우지 못했던 그 한스러움이 성불사의 천불동 만불산 조성불사에서 생기지 말란 법이 있겠느냐는 의미로 내 가슴에 와서 박히던 그 한마디가 나를 일깨웠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른 채 불심행 보살과 더불어 나돌아다니던 만행(漫行)에서 돌아와보니 그 사이 성불사의 <천불동 만불산 건립불사>에도 끝내 제동이 걸려 있었다. 일각 큰스님의 법력에다 백금출 사장님의 재력을 보태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도성 처사의 사업수완까지 도입하여 벌여온 크나큰 불사였는데…….


6

ꡒ오늘이 무슨 날이냐? 공사장의 소음도 안들리고, 성불사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로구나?ꡓ
인기척을 알아듣고 밖으로 뛰어나와 인사하는 행자에게 내가 거두절미하고 묻는다.
ꡒ안즉 모르셨어요? 어저께부터 공사가 중지되고 말았는데…….ꡓ
행자가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ꡒ아니, 왜?ꡓ
ꡒ천불동의 큰 시주님들에게 문제가 생긴 데다가 백 사장님의 회사마저…….ꡓ
ꡒ부도가 났다는 말이냐?ꡓ
ꡒ그랬다고 들었습니다.ꡓ
ꡒ이게 왠 날벼락이람?ꡓ
ꡒ좌우지간 어서 큰스님께 가보세요. 다들 거기 모여 대책을 의논하고 계십니다.ꡓ
행자녀석이 전에 없이 재촉한다.
ꡒ알았다.ꡓ
<아이엠에프(IMF)시대>라고 일컬어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신탁통치─ 사업의 귀재라는 백금출 사장님마저 쓰러뜨릴 정도라면 말로만 듣던 예의 IMF한파는 그냥 차가운 바람이라기보다 오히려 세찬 태풍일 터이었다. 지상의 모든 것을 죄다 쓸어 버릴 만큼의 초특급 태풍…… 저도 모르게 주지실로 올라가는 나의 발걸음은 빨라진다.
ꡒ스님 댕겨왔습니다.ꡓ
내가 큰스님 앞에 오체투지로 세 번 절하면서 혼잣소리마냥 입술만 달싹거린다.
ꡒ때맞춰 잘 돌아왔네.ꡓ
그 한마디로 일각 선사님께선 엉덩이에 뿔이 돋아 나돌아다니는 상좌녀석을 맞아 주신다. 나는 제풀에 오금이 저려 몸둘 바를 모른다. 그렇지만 겉으론 태연한 체,
ꡒ이도성 처사님께서도 올라오시고, 무슨 대책 회의를 하셨나 보죠?ꡓ
내가 짐짓 묻는다.
ꡒ그 뭐, 대책회의라기보다…….ꡓ
이도성 처사가 우물쭈물 멈칫거리자,
ꡒ대중공사는 이미 끝난 거니까 실무책임자라 할 수 있는 두 분이서 따로 의논하시는 것이 좋을 듯싶은데…… 도암수자의 생각은 어떠신가?ꡓ
큰스님께서 도암사형의 의견을 물으신다.
ꡒ그거야 큰스님 뜻대로…… 어차피 소승이야 이번 불사에서 한발 물러서 있어놔서 감놔라 배놔라 할 처지도 아닌 걸입쇼.ꡓ
도암수자의 대답이 심드렁하다. 이제 나도 만행을 끝내고 돌아왔겠다, 이만큼서 손을 털고 산사로 돌아가고픈 눈치가 역력하다.
ꡒ그래선 안되지. 이 불사는 어디까지나 우리 도반의 일이고, 도암은 맏이로서 마땅히 사제들을 지휘감독해야 하거늘……ꡓ
큰스님의 목소리가 여느 때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시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있었던 대중공사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사실이 미루어 짐작된다.
ꡒ…….ꡓ
도암사형은 말없이 고개만 떨구고 만다.
ꡒ그동안 공사진척상황도 궁금하고…… 먼저 이 처사와 함께 현장부터 살펴보겠습니다.ꡓ
도암사형을 앞질러 내가 말씀드린다.
ꡒ그리 하시게.ꡓ
큰스님의 하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주지실을 나선다. 눈치빠른 이도성 처사도 이내 내 뒤를 따른다. 우리들은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아무 말없이 땅만 보고 걷는다.
ꡒ여행은…… 재미 좋았어요?ꡓ
저만큼 천불동 건립 공사현장이 보이는 세불천 가까이에 이르자 그가 마침내 입을 연다.
ꡒ……?ꡓ
갑작스런 그의 물음에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ꡒ별다른 뜻이 있어서 묻는 게 아니라 그냥 인사치레로다가…….ꡓ
그가 나의 안색을 흘낏 살피면서 입가로 느물느물 웃음을 흘린다. 순간 내 등에 오싹 소름이 돋는다. 그의 말이 의미하는 걸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그의 처제이기도 한 불심행과 나와의 관계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미 좋았느냐고, 재미에 특별한 액센트를 붙여 묻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시침 뚝 따고 대꾸한다.
ꡒ세상이 이런데 여행이라고 무슨 재미가 있었겠습니까?ꡓ
ꡒ하긴 뭐…….ꡓ
ꡒ그보다, 백금출 사장님께서 부도라니…… 대체 어찌된 겁니까?ꡓ
내가 짐짓 화제를 바꾼다.
ꡒ나라가 온통 부도천국인데 백금출 사장님인들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겠습니까?ꡓ
ꡒ……?ꡓ
ꡒIMF 때문에 자동차가 팔리지 아니하는 데다가 정리해고다 뭐다 데모로 날이 새고 데모로 날이 저물다보니 자동차 관련 부품업체들이 줄줄이 무너지지요, 게다가 건설경기는 바닥 모르고 추락하지…… 사운을 걸고 추진했던 웅촌의 그 삼천 몇백 세대나 되는 대단지 아파트의 분양율이 겨우 15%에 불과했으니 이 바닥에서 날고 긴다는 백금출 사장인들 어쩌겠습니까? IMF태풍이 백 사장님을 비켜가는 것도 아니고…….ꡓ
이도성 처사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ꡒ나무관세음보살! 어떤 태풍에도 끄덕 없는 거목이라 여겼던 백금출 사장님까지 이렇게 당하실 줄이야 그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ꡓ
내가 짐짓 그를 위로한다.
ꡒ누가 아니랩니까?ꡓ
ꡒ헌데, 이 성불사는 어찌 되는 겁니까? 설마 어디 은행 같은데 저당이 잡혀있다거나 그런 일은 없겠지요?ꡓ
ꡒ그러믄요. 백금출 사장님께서 다른 건 몰라도 그 점만은 분명히 해두셨습니다. 성불사의 토지며 건물 등등은 천불동 만불산 건립불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주지스님 앞으로 모두 등기되어 있습니다. 그건 청광스님도 잘 아시잖아요?ꡓ
ꡒ아미타불! 소승은 다만 사정이 다급해서 저희가 모르는 사이…….ꡓ
ꡒ청광스님두, 우리 사장님의 불심을 그렇게 모르십니까?ꡓ
ꡒ나무관세음보살! 백 사장님의 신앙심이야 여느 출가승보다도 더 돈독합지요. 소승이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다만 하루 아침에 불사가 중단되고 동원된 중기소리도 멈춰버렸기로…….ꡓ
ꡒ지금이야 충격이 원체 크기 땜에…… 물론 자제구입비다, 노임이다, 중장비대여료다…… 이것 저것 청산해야 할 것들이 산적해 있긴 합니다만, 백금출 사장님께서야 능히 헤쳐나갈 방책을 강구하실 분이시고…… 급한 불만 끄게 되면 다시 불사에 눈을 돌리시게 될 겁니다. 큰스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이만큼 기반도 잡혔겠다, 기왕 시작한 불사니까 이 일만은 계속해야 하는데…….ꡓ
ꡒ달리 무슨 계획이라도?ꡓ
ꡒ공사를 재개해얍죠. 염려마십시요. 팔십년대 초반 그 어렵던 오일 쇼크 때도 교회를 신축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다가 시줏돈만 잘 걷힌다면야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앞장 설테니 스님들께서는 제 뒤만 받혀 주십시요.ꡓ
이도성 처사가 불끈 거머쥔 주먹을 흔들어보이기까지 하면서 큰소리친다. 다소 과장되어 보이기는 했으나, 결코 헛소리만도 아닌 듯해서 마음이 조금 놓인다.
ꡒ어디, 믿는 구석이 있나본데…… 이도성 처사님의 복안이 어떤 것인지 소승에게도 좀 들려주실래요?ꡓ
중기가 멈춰있는 천불동 건립현장으로 들어서며 내가 묻는다.
ꡒ해답이야 빤한 것 아닙니까?ꡓ
ꡒ해답이 빤하다니?ꡓ
ꡒ이번 불사라라는 게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백사장님께서는 기반조성공사까지 책임지고 그 나머지는 신도들의 시줏돈으로다가…….ꡓ
ꡒ그거야 경기가 좋을 때의 얘기고…….ꡓ
ꡒ물론 돈줄로 여겼던 천불동이 아이엠에프 땜시러 저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아이엠에프 덕에 뭉텅이 돈을 긁어모은 사람들도 많다니까 그런 사람들을 시주로 끌어모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얍죠.ꡓ
ꡒ이런 아이엠에프 시대에 뭉텅이 돈을 벌다니? 당치않은 말씀 마십쇼.ꡓ
ꡒ청광스님께서 뭘 몰라서 그러시는데…… 많아요. 요즘 고급 유흥가에서는 건배를 할 때도, 이대로! 한다잖아요? 말하자면, 그들의 배를 불려주는 아이엠에프 시대가 오래도록 지속되거라!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ꡒ설마?ꡓ
ꡒ울산에는 그런 사람이 특히 많답니다. 환차손으로 앉아서 뭉칫돈 버는 기업가며 최고 40 몇 퍼센트까지 하는 고액 이자로 배를 불리는 자본가들…… 자고나면 가득가득 차오르는 샘물처럼 주머니에 돈이 넘쳐나는 사람들의 주머니 끈을 좀 풀어보자는 건데…….ꡓ
ꡒ무슨 수로?ꡓ
ꡒ한 가지, 생각해둔 게 있긴 있는데 큰스님께서 허락해주실지 어떨지…….ꡓ
ꡒ불사를 계속할 수만 있다면야 큰스님인들 허락하고 말고가 있으시겠습니까?ꡓ
ꡒ하기야 이 판국에 방편의 호 불호를 따질 계제도 아니겠습니다만…….ꡓ
ꡒ어떤 건데……?ꡓ
ꡒ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오자 이겁니다. 일반 신도들에게는 진신사리를 친견할 때 시주를 받고 돈 많은 사람들에게는 사리탑 건립기금으로다가……ꡓ
ꡒ계획은 좋지만서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가 이천오백 년이 다 되어가는데 진신사리를 어디서 구해온단 말씀입니까?ꡓ
ꡒ태국, 태국에 가면 손쉽게 구해올 수가 있답니다.ꡓ
ꡒ설마?……ꡓ
ꡒ우리끼리니까 숨기지 않고 말씀드리는 건데, 태국이라는 나라가 불교가 국교 아닙니까?ꡓ
ꡒ그렇습지요.ꡓ
ꡒ게다가 죽으면 모두 화장을 하지요?ꡓ
ꡒ그거야 불교가 국교인 나라에서 당연한 장례문화지요.ꡓ
ꡒ태국의 사원에 가면 그 화장장에서 나온 사리가 절에 보관되어있는 사리함에 그득 차 있다는 겁니다. 그걸 얻어오는 거예요. 부처님 진신사리인지 태국의 이름없는 스님의 사리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부처님의 진신사리라면 다들 그렇게 믿을 밖에요. 실제로 그런 사리를 가져와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로 둔갑시킨 경우가 더러 있었답니다. 그 왜? 부처님 진신사리 어쩌고 하는 광고를 스님께서도 신문에서 보셨잖아요?ꡓ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그 동안 차마 발설하지 못하고 있던,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이어서, 차라리 귓구멍이라도 씻어내버리고 싶었던 부처님의 진신사리 봉안 얘기를 불교로 개종한 지 몇 해 안된다는 이도성 처사를 통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리(舍利)라는 말은 범어의 음역으로서, 유골 특히 부처님 또는 성자의 유골을 일컫는 말이다. 특히 불교에서는 그 유골 중에서도 수행의 공덕으로 나오는 콩알, 쌀알, 좁쌀 크기로 백색, 검은색, 붉은색을 띤 결정체만을 사리라 일컫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는 진신사리(시신)와 쇄골사리(유골)의 두 가지로 나누며, 부처님의 경우에는 특별히 유골은 신골(身骨)사리라 하고, 부처님이 남긴 교법은 법신(法身)사리라 일컫는다. 또한 이 사리라는 건 특정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 예컨데 학자라든가 성직자는 물론이고 종교생활을 하는 선남선녀에게서도 나온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도 인도나 태국처럼 화장이 일반화되고 사리를 추려내는 장치만 갖춘다면 수녀나 신부 목사들에게서도 사리가 쏟아져 나올 수 있을 터이다.
ꡒ나무관세음보살! 그 말씀은 안들은 것으로 해두겠습니다.ꡓ
내가 잘라 말한다. 물론, 이도성 처사의 얘기가 전혀 근거없는 얘기만도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요 근래에도 종종 있어왔던 <부처님 진신사리 모셔오기> 불사에서 어느 절 어느 스님께서 그러한 <깜짝쇼>를 벌였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돈 적도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우리 큰스님이 어떤 분이신가? 평생을 장좌불와 하시면서 참선수도에만 전력해 오신 분이다. 아무리 불사가 급하기로소니…… 그런 짓은 못하신다. 누군가 태국에 가서 사리를 나눠주도록 교섭을 해야 하고, 그럴 듯한 연출을 위해서 태국스님까지 몇 분 모셔와야만 하고…… 내 면전에서 감히 그따위 발상을 얘기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도성 처사에 대한 불쾌감을 떨궈버릴 수가 없었다.
ꡒ이거야말로 전국의 불교신자를 다 끌어모아 그 시줏돈으로 불사를 쉽게 마무리할 수 있는 기막힌 아이디어인데…….ꡓ
그가 빈 입을 쩝쩝 다시면서 자꾸만 아쉬워한다.
ꡒ두 번 다시 거론하지 마시래두요?ꡓ
저도 모르게 내 목소리가 높아진다.
ꡒ알았습니다. 아깝지만 그 부처님 진신사리 얘기는 없던 일로 해두지요.ꡓ
앞장서서 공사현장으로 들어서며 그가 말한다.
ꡒ…….ꡓ
나도 더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른다. 천불동 공사현장은 미처 정리가 되지 아니한 채로였지만 공사의 진척상황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준공 직전에 이른 건물만도 이곳 저곳에 대여섯 채가량 널려 있고, 그런 건물의 꾸미다 만 정원에는 석탑이며 석등들이 안치되어 있다. 그것들은 석물공장에서 기계로 깎아다 세운 것들이어서 석질이며 모양이 한결같다. 생동감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찾아볼 길이 없는 규격품들─ 나는 항상 그게 불만이었는데, 만산계곡의 그 천불 천탑을 보고 온 지금은 더욱 그러하다.
애시당초 이 천불동은 백금출 사장의 사업목적에 따라 휴양지에 있는 콘도미니엄처럼 일년에 몇 주일간의 이용권을 분양할 계획이었다. 명목이야 천불동의 불사에 시주하는 것이었지만, 시주의 댓가로 이 곳의 유일한 숙박시설이 될 그 천불동의 집 한 채를 본인과 그 가족들로 하여금 평생토록 이용할 수 있는 회원권을 받게된다. 주된 시주(고객) 대상으로 중, 소 기업인과 돈 많은 자영업자들을 꼽았다. 그리고 그 계획은 적중했다. 적어도 시행초기에는 그랬었다는 얘기다. 서민과 노동자들에게 개방한 만불산의 불상조성 공사가 호응을 얻지못해 지지부진한 것과는 달리 시작 첫날부터 분양신청이 쇄도했었다. 그것이 백금출 사장님으로 하여금 이 곳 천불동 건립 공사에 있는 돈 없는 돈 죄다 끌어모아 진력하게끔 다그친 계기가 되었었다. 그 천불동 공사는 대소사를 모두 이도성 처사가 주관했었다. 따지고 보면 예의 부처님 진신사리 불사에 관한 발상도 딴에는 이 공사에 대한 책임감에서 비롯했지 싶다.
ꡒ그 IMF한파만 아니었어도 지금쯤은 다는 몰라도 최소한 몇몇 건물은 준공이 되어 숙박시설로도 활용이 가능했을 터인데…….ꡓ
내가 난감해하는 이도성 처사를 위로할겸 짐짓 화제를 바꾼다.
ꡒ두 말하면 잔소리지요. 중, 소기업체 사장은 말할 것도 없고 여기 투자한 대부분의 자영업자들까지 돈줄이 꽁꽁 막히다보니 무슨 경황이 있었겠어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도 바쁜데…… 허지만 지금 다들 애쓰고 있으니까 머잖아서 경기도 회복될테고…… 그 뭐, 부처님 일인데 절로절로 다 잘 풀리겠지요.ꡓ
ꡒ나무관세음보살!ꡓ
내가 한숨처럼 염불하면서 발걸음을 돌린다.
천불동은 일천좌의 부처님을 봉안하고, 그에 버금가는 불탑을 조성한다는 목표 아래 일차로 서른여섯 채의 건물이 들어설 계획이었다. 한 동에 부처님 세분(삼존불)씩 모두 일백팔 분의 부처님을 봉안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고, 그것들은 큰스님과 백금출 사장님 그리고 이도성 처사의 주관으로 추진되는 불사였다. 애초부터 나의 관심 밖에 있었달까, 어차피 가진 자들이 하는 불사이기 때문에 내가 끼어들 틈도 없었다.
나의 관심은 딴 데 있었다.
만불산─
발상이야 이 곳에 천불동 만불산 건립을 발원한 백금출 사장에서 비롯했지만, 이제는 발원한 당사자보다 내가 오히려 더욱 열심인 셈이다. 그렇지만 먹고살기에 바쁜 근로자들을 상대하는 일이어서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매양 지지부진 했었다. 보다못해 이도성 처사가 차라리 이쯤해서 손을 떼는 게 어떻겠느냐는 충고까지 여러 차례 했을 정도였다. 실상 나도 지쳐 있었다. 내가 그 북새통에 만산계곡의 천불천탑을 친견하겠답시고 불심행과 함께 훌쩍 여행을 떠나버린 것도 그러 저러한 이유가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이쯤해서 불사에서 아예 손을 떼버리고 말 것이냐, 아니면 심기일전해서 일만불 조성불사에 두 팔 걷어부치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칠 각오로 매달려 볼 것이냐, 그도저도 아니라면 승복을 벗어 팽개치고 불심행이라도 꼬드겨 하산하고 말 것이냐…….
ꡒ세상일이란 참…….ꡓ
천불동 공사장을 나와 세불천을 따라 쭈욱 이어지는 오솔길로 들어서며 이도성 처사가 혼잣소리마냥 중얼거린다.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내가 종종걸음을 쳐 그의 등뒤로 바짝 따라붙으며 묻는다.
ꡒ아미타불! 무슨 말씀입니까?ꡓ
ꡒ들어보세요! 저 소리…….ꡓ
그가 뒤돌아보면서 말한다.
ꡒ들립니다. 돌을 조는 망치소리 같기도 하구…….ꡓ
ꡒ가진 자들은 다들 나가떨어졌는데 반대로…….ꡓ
ꡒ그럼 저 소리가 석불을 조성하며 망치질하는…….ꡓ
ꡒ맞습니다. 청광스님께서 여행 떠난 뒤부터 한 사람 두 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한 게 지금은…….ꡓ
ꡒ나무 관세음보살! 어서 가보십시다.ꡓ
내가 급한김에 이도성처사를 앞질러 세불천변으로 향한다.
천불동 건립 예정지로부터 얕으막한 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세불천이 굽돌아 흐르는 골짜기가 나오는데, 그 양켠은 소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바위산이다. 말하자면 세불천을 끼고 있는 그 바위산이 만불산의 중심이 되는 셈이다. 다가갈수록 돌을 쪼는 정소리는 더 크게 들린다. 한 두 군데서만 나는 소리가 아니다. 골짜기 여기 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가족 단위로 나와서 곁에다 텐트까지 쳐놓고 바위를 쪼아대는 사람도 있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ꡒ이제보니 청광스님께선 선견지명이 있으셨던가 봐요?ꡓ
뒤따라 온 이도성 처사가 불쑥 내배앝는 말이다. 칭찬인지 비아냥거림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나는 그 말을 칭찬으로 접수하기로 한다.
ꡒ아미타불! 돈도 안되는 일에 집착한답시고 걷어치우라시던 때가 언제 적 일인데 이제와서 칭찬이십니까?ꡓ
ꡒ제가 소견이 좁아서 그만…… 천불동에도 시주하셨다가 취소했던 우리 절 보살님 한 분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청광스님의 큰 뜻을 알아 봤달까요?ꡓ
ꡒ무슨 말씀이신지 소승은 당최…….ꡓ
ꡒ이따가 보시면 압니다.ꡓ
나는 왠 영문인지도 모른 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ꡒ어마나! 청광스님? 여행가셨다더니 언제 돌아오셨어요?ꡓ
낯익은 보살님 한 분이 우리를 알아보고 다가와서 반갑게 인사한다.
ꡒ누구신가 했더니…… 바깥어른이십니까?ꡓ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위만 쪼아대고 있는 처사님을 눈으로 가리키면서 내가 묻는다.
ꡒ예, 스님!ꡓ
ꡒ아미타불! 고맙습니다. 보살님께서 이렇게 몸소 불사에 참여하여 주시고…….ꡓ
ꡒ아닙니다. 감사말씀은 제가 올려얍지요. 스님께서 이렇게 새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셔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주신 은혜 하해와 같은 걸입쇼. 나무관시엄보살!ꡓ
뜻밖의 인사말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는 나에게 이도성 처사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여 주었다.
혜광화 보살님(그네의 법명이 혜광화였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의 남편 박씨는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이 울산바닥에서는 제법 잘 나가던 중소기업체의 사장님이었다.
기계부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회사였는데, 품질을 인정받아 생산품은 없어서 못팔 지경이었다. 회사는 날로 번창했다. 은행에서 융자도 받고 사채도 얻어 값비싼 생산설비를 외국에서 들여오는 등 시설투자에도 돈을 아끼지 아니했다. 헌데, IMF가 화근이었다. 원청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생산한 제품은 팔리지가 아니했고, 결제대금으로 받은 어음마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설비투자 명목으로 빌어 쓴 은행대출금은 만기가 도래했으나 갚을 길 없지…… 불과 육개월만에 알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는데, 그 자신과 가족들이 거리로 나앉은 것만은 어찌 어찌 견딘다 하더라도 직원들의 밀린 임금에 퇴직금…… 게다가 그를 믿고 보증을 서준 친척과 친구들까지 알거지가 되고 마는 참혹한 현실에는 어째볼 도리가 없었다. 무작정 집을 나와서 떠돌기를 또 반 년, 그는 말 그대로 폐인이었다.
달포 전쯤이던가, 실직 노숙자들의 실태를 특집으로 보도하던 텔레비전 화면에 얼핏 내비친 남편의 모습을 발견한 혜광화 보살이 수소문 끝에 남편을 찾아 반은 어거지로 끌고와서 이 불사에 동참시켰다는 것이었다. 한사코 마다하던 박 사장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정과 망치를 들고 바위를 쪼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그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그 일에 몰입했다. 해가 뜰 때 시작하여 어두워질 때까지 손에 든 정과 망치를 놓지않으려 했다. 몸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그는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옛날의 그 잘 나가던 박 사장님의 모습이 점차로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ꡒ나무관세음보살!ꡓ
두 볼을 타고 흐르는 혜광화 보살님의 눈물을 지켜보면서 나도 속으로 울었다. 혜광화 보살의 그 눈물 속에서, 아내의 손에 이끌려 이 골짜기로 돌아와 불사에 동참해 준 그네의 남편 박 사장의 모습에서 나는 비로소 만산계곡에 녹아있던 그 함성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운주사의 그 만산계곡에 녹아있던 민중의 함성은 거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세불천변 이곳 저곳에서 들렸다. 절망을 뛰어넘기 위하여 손에 물집이 잡히는 줄도 모르고 돌을 쪼아대는 망치소리와 함께 울려퍼졌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빛이었다. 나는 비로소 나의 갈 길을 찾은 것이었다.
ꡒ감사합니다. 스님!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고마운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더랬습니다.ꡓ
해고 근로자 김씨도 이런 말을 했다. 그는 구원의 여신상으로 관세음보살님을 조각한다는 것이었다. 바위 곁에다 텐트까지 쳐놓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낮이고 밤이고 거기 매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ꡒ여기만 오면 희망이 보여서…….ꡓ
해가 설핏 저물면 아내와 함께 손수레를 끌고 일터로 나간다는 노점상 박씨─ 그는 졸립고 지친 몸을 이끌고 나와서 하루 한나절만 돌을 쪼아 부처님을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조성하고 있노라고 그가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미륵부처님이 분명했다.
ꡒ청광스님, 많이 변하셨어요.ꡓ
불사를 돕기 위하여 성불사에 기거하기 시작한 불심행보살이 넌즛이 건네는 말이다.
ꡒ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신지…… 소승이 원체 바쁘게 나돌아댕기는지라 보살님께 행여 소흘한 점이라도?ꡓ
되묻는 나의 말에,
ꡒ천만의 말씀…… 저는 다만…….ꡓ
불심행은 뭔가 말을 할 듯 말 듯 멈칫거린다.
ꡒ우리 사이에 못할 말씀이 무에 있다구…… 어서 말씀하세요?ꡓ
ꡒ청광스님! 방금 우리 사이라고 말씀하셨어요?ꡓ
ꡒ네, 우리 사이…….ꡓ
ꡒ저는 헛들었는가 했더랬는데…… 진짜였군요?ꡓ
ꡒ왜? 뭐가 잘못되었습니까?ꡓ
ꡒ아, 아뇨…….ꡓ
ꡒ그런데, 왜?ꡓ
ꡒ이젠 목욕탕에서 발가벗은 제 등도 밀어주실 수 있겠구나 싶어서…….ꡓ
ꡒ…….ꡓ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들은 맡은 소임이 달라 한자리에 앉아 얘기할 틈도 없었다. 우리들은 피차 실직한 근로자와 파산한 중소기업체 사장님들의 재기를 돕기 위해서 안팎으로 분담하여 두 팔 걷어부치고 일했다. 나는 울산노동사무소와 각 기업체의 노동조합과 실직노동자단체 그리고 각 언론매체는 물론이고 울산지역의 불교 신도단체까지 찾아다니면서 실의에 빠진 근로자와 파산한 기업체의 사장님들을 만불산으로 끌어들였다. 끌여들여서 마음을 쉬게 하고 주렸던 배를 채우게 했다. 각 사암의 신도회 소속 보살님들이 자원봉사로 일을 도왔고, 주지스님들은 쌀이며 라면이며 옷가지 등속을 모아 보내주셨다. 사회단체나 언론기관에서도 우리를 도와 취업박람회를 성불사에서 열게끔하여 작으나마 실직자들에게 일자리를 구해주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하루 한 차례, 법회를 열어 부처님 말씀으로 그들의 가슴에 새롭게 자리한 희망의 새싹을 가꾸었다.
ꡒ……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이 만불산에 여러분이 조성하는 부처님이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륵부처님을 조성하느냐? 아미타불을 조성하느냐? 또는 관세음보살님을, 문수보살님을, 지장보살님을 조성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는 넓고, 사람은 많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모두 잠자코 있다면 구원의 손길이 어디로 뻗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우리를 돕기 위해서는 일시적이나마 보살로 현신하신다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보살님들이란 구원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그 분들은 맡은 소임대로 항상 우리들을 도와주실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도움을 갈구하지도 아니하면서, 노력해보지도 아니하면서 도와주시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되지요. 도움을 바라는 분들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손을 내밀고 도움을 청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여기 모여 바위에 부처님을 새기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정으로 바위를 쪼고 망치로 정을 때리는 그 소리는 바로 S.O.S.입니다. 부처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제발 어서…… 소승은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분명한 약속을 하나 해드립니다. 지금 여러분이 지극정성을 다해 조성하고 있는 돌부처가 다 완성되는 날, 이 만불산에 여러분의 부처님이 봉안되는 바로 그 날, 여러분의 간절한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나무석가모니불…….ꡓ
설법을 마치고 절로 돌아오는 길에 불심행 보살과 딱 마주쳤다. 그네가 나를 기다렸거나 아니면 우연히 마주쳤거나…… 모처럼만의 해후이기도 해서 내가 반색한다.
ꡒ오늘은 짬이 조금 나셨던가 봐요?ꡓ
ꡒ짬이 나서라기보다 청광스님의 법문 말씀이 듣고 싶어서…… 아주 훌륭한 법문이었습니다. 정말이예요. 일찌기 어느 선지식에게도 이런 법문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만불산…… 실직근로자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이 곳의 부처님들도 만산계곡의 그 못난이 부처님들 못잖게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청광스님의 그 법문말씀을 들으면서 그걸 확신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ꡓ
ꡒ마치 떠날 사람마냥…… 왜 그러세요. 불심행 보살님?ꡓ
ꡒ오늘이……, 불심행으로서 뵙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니깐.ꡓ
ꡒ아니, 왜요?ꡓ
ꡒ저 내일 삭발합니다.ꡓ
ꡒ네?……ꡓ
ꡒ미안해요.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서…….ꡓ
ꡒ은사스님은?ꡓ
ꡒ석남사 주지스님…….ꡓ
ꡒ그럼 수계식도 석남사에서?ꡓ
ꡒ예…….ꡓ
ꡒ법사스님은?ꡓ
ꡒ그야 물어보나마납지요.ꡓ
ꡒ아아, 큰스님?ꡓ
ꡒ네, 바쁘신 분인 줄이야 알지만…… 청광스님께서 제 수계식에 증명법사가 되어 주셨으면 하는데…… 일각선사님 모시고 와주세요.ꡓ
ꡒ아암, 가얍죠. 가구 말구요. 누구의 삭발 수계식인데 제가 안가겠습니까?ꡓ
나는, 그렇지만 그네에게 축하한다는 그 말 한마디만은 끝내 해주질 못했다. 그 말까지 다 해버리고나면 내 마음 한 구석에 뻥 뚫려버린 커다란 동공을 아무도, 아무 것도 메꾸어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