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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08:30에 서울 청담동 자이APT에서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하니 예상대로 고속도로는 지체와 정체를 반복하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는 입장에서 즐겁고 행복해야 하였는데도 마음이 무거워 평상심이 점점 잃어갔으며 무엇엔가에 흘린 듯 마음이 불안하고 안정이 되질 않았다.
집에서 아직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도 마누라에게 부탁하고 떠나온 것이 마냥 후회스럽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왕 여행을 가기로 약속하였으니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즐기려 하였으나 쉽게 적응이 되지않았고 도로가의 아름다운 경치마져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서울 영등포고등학교 국사 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한때 쌍용자동차의 무쏘를 동경하여 소유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쌍용자동차의 무쏘를 한 번도 소유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현대자동차만을 소유해왔었다.
여행 당일 출발 장소가 청담동으로 결정되자 나는 양재동에서 41번 노란 버스를 승차하였다.
강남구청역에서 하차한 다음 강남구청역에서 다시 7호선 지하철을 갈아타고 청담역에서 하차하였다.
청담역 14번 출구로 나와 영동대교 쪽으로 내려가니 친구들이 이미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상기된 얼굴을 하고 여행의 기대치 때문에 들떠 있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라 나는 마냥 즐거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동원된 차량을 보니 내가 평소 좋아했던 스포츠 유틸리티 자동차인 구형 쌍용자동차 무쏘였다.
연식은 10여전의 차량이었지만 바퀴를 교체하고 이번 여행을 위하여 정비를 하는 등 상당히 애쓴 흔적이 엿보여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4명이 스포츠형 다목적 자동차인 무쏘에 승차하여 전라도 신안군 압해도 송공 항을 향하여 출발하니 기분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여행 기간동안은 일기가 화창하고 아무 사고 없이 즐거운 여행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쌍용자동차 무쏘는 경부고속도로 천안에서 천안 논산 간 민자도로로 진입하여 달리다가 정안 휴게소에서 잠간 휴식을 취한 후 공주 서천 간 고속도로로 진입하였다.
공주 서천간 고속도로는 평일에는 주행량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래서 드라이브 코스로는 최고의 도로로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이유로 남도를 여행할 때는 늘 이 도로를 이용하곤 하였다.
오늘도 역시 공주 서천간 고속도로에는 자동차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아 주변 경관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무한 질주의 쾌거를 자랑하는 무쏘 SUV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무안 IC를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오전 11시가 가까워지면서 배가 허전하고 식사 시간이 다가온 것을 의식한 나는 남도에서 맛 집중의 맛 집으로 소문난 도리포횟집을 소개하게 되었다.
음식의 맛도 환상적이었지만 더 맛깔스러운 것은 고소하고 훈훈한 인심일 것이라고 자랑하며 넉살을 좀 늘어놓았더니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남도의 후한 인심과 음식의 맛은 천하의 일품이라고들 너도나도 덕담을 늘어놓았다.
전남 무안군 해제면 송석리에 위치한 도리포는 해제반도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갯벌이 천연의 모습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서 언제던지 습지를 바라볼 수 있었으며 게는 물론 짱뚱어, 숭어, 민어, 도미, 농어 등의 집산지로 알려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갯벌이 펼쳐져있는 바다에서는 남여노소가 직접 갯벌에 들어가 팔 소매를 거둬 올리고 낙지를 잡고 있었는데 아주 소박하고 순수하여 어디서 이러한 어촌의 순박한 풍경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어촌의 풍경은 민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한 폭의 그림 같았고, 갯벌을 놀이터로 삼아 아우들과 장난을 치는 짱뚱어가 시커먼 모습을 들어 내놓고 눈을 껌벅거리고 있을 때는 마치 개구리 눈과도 흡사하게 보였다.
또한 갯벌 사이 고랑에는 그물을 쳐놓은 개매기도 볼 수도 있었는데 대부도에서 체험하였던 숭어 잡이 개매기가 생각나 마음을 풍요롭게 하였다.
이곳 어민들은 주변 갯벌과 바다에서 잡아들이는 어종을 무안읍으로 운송하여 판매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고 도리포횟집들에 공급하여 환금화시킴으로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하니 애향심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남다르다고 여길 수 있었고 외지 인들은 신선한 자연산 어종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겨서 일석 이조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이곳 도리포에는 횟집이 여러 군데 있어서 어디로 들어갈까 생각하다가 ‘KBS 6시 내고향’에 8번이나 소개되었다는 도리포횟집의 간판을 보고 이곳이 도리포에서 서비스와 친절이 가장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도리포횟집에으로 들어갔다.
도리포횟집 주인 사장님과 사모님은 아주 친절하였다.
소박하고 다정한 인사가 몸에 베여있는 듯 보였으며 사모님 또한 요리 솜씨가 뛰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농어회와 세발낙지를 시켜놓고 자연의 신선한 바람을 쏘이며 미각을 음미하면서 여행에 대한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잠시 후 농어회가 들어왔다.
모두들 배가 고파서 인지 아니면 미각의 충동에 참을 수 없어서였던지 정신없이 먹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술잔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배가 고픈 김에 나는 와인 한잔을 들이켰다.
온 몸이 나른해지고 몽롱해지면서 기분이 상쾌하여 지더니 와인 한 잔이 꿀맛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술을 많이 들지는 않았으나 오늘은 왠지 한 두 잔 정도는 마셔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주변의 바다와 자연이 어우러지는 농촌의 모습이 마치 산수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풍경처럼 소박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술은 항상 붓과 벼루와 같아서 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에 취할 때는 술이 흥을 돋구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달라보이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은 술이라고 하였던 이백과 두보가 생각났다.
이 두 분이 만약 술이 없었다면 과연 시선과 시성의 경지에 이르렀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 잔의 술이 마음을 동요시키고 있었다.
횟집 아주머니가 세발낙지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와서 먹는 방법을 직접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세발 낙지를 젓가락에 둘둘 말아 한 입에 넣고 먹어보라고 권하는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처음에는 모두가 주춤주춤하였으나 그것은 잠시 뿐이었고 세발 낙지를 젓가락에 둘둘 감아 먹기 시작하였다.
마늘과 참기름으로 버물린 된장을 조합하여 낙지를 씹기 시작하니 미식가가 아니고서는 이혜할 수 없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맛갈스러운 안주와 한잔의 술이 흥을 돋구니 금상첨화였고 이백과 두보와 같은 풍류객들이 부럽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다음 술에 취하고 경치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무쏘를 타고 무안방향으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무쏘 계기판에 빨간 경고 표시가 나타나 깜박거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차에서 내려 차체를 조사하여보니 무쏘 뒷편 범퍼와 유리창에 검정 오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우리들은 엔진 오일이 세서 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엎드려서 차체 밑을 살펴해보니 오일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보험회사 측에 연락을 하였다.
하지만 보험회사 측의 늑장 대응으로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 말았다.
지방 국도 가장자리에 주저 앉아 농촌의 풍경을 바라보고 소일하다가 주위에서 일손을 바삐 놀리는 어르신께 농촌 생활의 이모저모를 물어보았더니 노동에 비하여 수입이 적어 늘 쪼들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곳이 농촌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농촌의 고달푼 생활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견인차가 곧 도착할 것이라는 전화를 받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차주는 오히려 우리들에게 차가 고장난 것을 미안해 하고 있었다.
나는 순둥이에 가까운 차주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오기 전에 카센터를 들려 정비를 하였다는 말을 들었었는데도 차가 고장나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고 경제적 피해가 없기만을 기도하였다.
견인차 기사는 곧장 무쏘 차를 무안 읍내에 있는 자신의 카센터로 견인하여 차체를 조사하여 보더니 엔진오일의 누수가 주원인이었는데 그것은 오일관의 마개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오일관 마개를 다시 막고 엔진 오일을 주입하면 괜찮을 것이라는 카센터 사장의 말을 듣고 실낱 같은 기대에 가슴이 다시 부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안읍 카센타에서 엔질 오일관 마개를 다시 막고 엔진 오일을 보충한 다음 신안군 압해읍 송공선착장을 향하하여 이동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엔진 소리가 커지면서 쇠와 쇠가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도로를 달리며 여행을 지속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하여 목포로 방향을 틀었다.
목포에 도착하여 무쏘차 정비공장을 찾고 있었는데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벌써 많은 시간이 경과하여 퇴근시간이 가까워졌고 시내는 차량이 증가하여 정체가 아주 그심해져가고 있었다.
쌍용차 정비 공장을 찾기 위하여 스마트 폰을 두드려 보기도 하고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였으나 다들 모른다고 하였다.
낭패였다.
차종에 따라 정비공장 문제로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현대나 기아 자동차 였더라면 쉽게 정비공장을 찾을 수도 있었겠으나 무쏘차였기 때문에 정비 공장을 쉽게 찾을 수 없다니 쌍용차 정비 개선문제가 시급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전라남도 도청 부근에서 또 한차례 차에서 내려 지역 주민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도청 1급 정비공장에 가면 쌍용차 정비공장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겨우 쌍용차 정비공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정비공장에 들어가 정비기사에게 차를 확인해 보도록 맡겨놓고 정비기사의 확인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비기사는 엔진을 교체하여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 이틀 정도는 걸릴 것이라 하였다.
뾰족한 방법이 없어 수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차를 정비공장에 맡기기는 하였으나 이 후 여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핵심 사안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나 개인적인 생각오로는 목포에서 하룻 밤 내지 이틀을 보낸 후 서울로 다시 올라갔으면 하였으나 다수는 여기까지 내려왔으니 원래 목표대로 여행을 계속하자고 하였다.
하는 수 없이 소나타 까스 차를 렌트하여 여행을 강행하기로 하였다.
까스 차를 렌트하여 여행을 계속하는 것은 좋았으나 안좌도, 팔금도, 암태도, 자은도 등 네개의 도서에는 까스 주유소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까스 차를 렌트하여 도청 1급 정비공장을 나섰다.
날은 이미 저물었기 때문에 목포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였다.
목포 북항 리젠트모텔에서 숙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신안군 압해읍 송공선착장으로 이동하였다.
압해도 송공선착장에 도착하여 도선을 위한 표를 예매하고 출항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태풍이 제주도 근처까지 접근하였다는 뉴스 특보가 방송되고 있었다.
태풍에 관한 뉴스 특보를 들은 나는 여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송공선착장에서 바다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바람이 약간 강해지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여우비인 것 같기도 하고 태풍의 전조일 것 같기도 한 예고를 암시나 하는 것처럼 바다는 태풍 전야의 음산함을 보여주고 있어서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여우비가 갑자기 바람과 함께 휩쓸려 주변에 설치된 천막을 휘날리게 하더니 나까지도 휘청거리게 하였다.
북풍한파인 듯 추위가 엄습해와 옷깃을 여미게 하였으며 여행일정에 영향을 미치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운 중압감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였다.
여객선에 몸을 싣자 출항 신호가 울리더니 압해도 송공선착장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바다는 내해라서 인지 내가 두려워하였던 것 만큼 격랑은 없었다.
파도는 대체로 잔잔하고 잠잠하여서 태풍과는 무관한 지역인 것 같았다.
나의 걱정은 괜한 기우에 불과하였으며 압해도 송공선착장을 떠난 신안 농협 페리호는 예정시간에 암태도 신석리 오도항에 도착하여 여객과 화물차를 내려놓고 오던 길로 유유히 사라졌다.
여객선이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이별이란 항상 우리들 주변에 상시하고 있는 인생의 반쪽이었는데도 오늘은 새삼스럽게 연인과의 슬픈 이별을 보는 것처럼 공허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암태도 면사무소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아귀찜을 시켜놓고 여유 있는 담화를 나누다가 점심식사를 마친 후 암태도 노만사라고 하는 사찰로 이동하였다.
노만사를 찾기 위하여 노만산 아래 마을로 들어섰으나 사찰 입구로 들어서는 입구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마을 주민들에게 사찰 입구를 물어보기 위하여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는 데 도무지 인적을 찾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마을은 한적하고 적막하기만 하였다.
마을 안의 주택들을 거의 둘아보다시피하고 집안으로 들어가 주인장 계시냐고 물어도 보았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가며 돌아서서 마을을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유독 개 한 마리가 나를 보고 짖어대고 있었다.
주인이 없는 빈 집을 지키려는 개의 성실함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개가 짖는 소리에도 전혀 미동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마을 안에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마을에 사람들이 없는 이유를 가만히 생각하여보니 아마도 이 시간대는 주민들이 들에 나갔거나 태풍에 대비하기 위하여 바닷가에 나가서 어선들을 살피고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인적을 찾지 못하고 마을을 빠져나오고 있었는데 마침 이 마을 주민인 듯 보이는 아주머니가 맞은 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반거워서 웃으며 노만사 입구를 물어보았더니 마을 입구에서 산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노만사가 나올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서있었던 곳에서 20m 전방이 바로 마을 입구였다.
마을 입구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더니 노만산 능선으로 올라가는 임도가 보였다.
임도는 있었으나 노만사를 가리키는 이정표나 안내 표지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해메고서야 표지판을 발견할 수는 있었는데 그 표지판은 A4 용지 절반 정도 크기의 판자로 만들어진 안내판이었다.
그것도 산비탈에 비스듬히 꽂아져 있었을 뿐 아니라 나무덩쿨로 가려져 있어서 우리가 쉽게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이 작은 푯말로 보아 노만사라고 하는 사찰의 역사와 규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만산의 높이는 300m 이내의 낮은 산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였으며 산아래 어촌은 목가적이고 평화롭게 보였다.
노만사 초입 진입로가 약간 가파르기는 하였으나 멀리까지 바라보이는 바다가 시원스럽기도 하였고 산 능선과 비탈에는 가지각각의 야생초들이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하늘을 찌를 듯이 빽빽한 낙락장송의 허리를 인동초들이 감고 있어서 얼마나 고통이 심할까 걱정을 하면서 노만사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 사찰의 대웅전도 속계 사람들에게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듯이 부처님은 이곳 노만사에서도 인간들의 불계로의 진입로를 찾을 수 없도록 시험하고 있었다.
어느새 등에서는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이러한 땀 흘리는 고통 쯤이야 충분히 극복하고 견딜만 하였으나 나의 주변에서 발생하는 건강 이상 징후들이 나를 괴롭게 만들고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럴 때면 가끔씩 배낭을 짊어지고 산을 찾아 고행의 길을 오르곤 하였는데 인간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업보여서 슬프거나 괴로워할 것도 아니라고들 하지만 수양이 덜 된 나에게는 여간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나 자신을 극복하고 마음의 고통을 다스리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 암태도 노만사라고 하는 조그마한 암자까지 이르렀으나 가슴의 심처에서는 불안이 가라 앉지 않았다.
노만산 8부 능선의 길은 어느새 종점에 거의 다다라서 사찰 건물이 가물가물하게 시야에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온 하늘을 덮고 있는 한 구루의 팽나무가 노만사를 가리고 있어서 마치 노만사의 아이콘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1불 2보살을 모시는 부처님의 전당은 본래 한옥이었으나 어랜 세월에 시달려 헐어지고 한 칸의 불당으로 다시 중축한 듯 보였다.
이 지역은 섬인데다가 너무 외지이고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하루 종일 기다려보아도 보살 한 분 볼 수 없었다.
사찰의 규모는 아주 작았으며 승려들의 요사채가 오히려 불당보다 커서 사찰과 비교가 되었다.
그러나 요사채를 지키고 있는 한 마리의 개가 오랫만에 찾아온 인기척을 느끼고 유난히 반가워서 그런지 온 산이 쩌렁쩌렁하게 짖고 있었다.
대웅전 뒤쪽에는 약수터가 있었다.
약수터를 들여다보니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청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약수터 안에는 짙은 안개가 끼여 이슬이 맺혀있었는데 부처님의 눈물인 듯한 물방울이 떨어질 때는 생사고락의 여운이 한없이 메아리치는 것처럼 느껴졌고 인간의 고뇌와 고통을 덜어주려는 부처님의 손길이 이 작은 약수터에도 미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한 때는 부처의 눈물이 병자를 치유하고 완쾌하였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서 문성시하였다는 이 사찰은 세상을 등진 운둔자의 은거지처럼 고즈넉하였다.
사방은 고요하였고 인기척은 없었으나 한 마리 개가 주인인 듯 이곳저곳 주위를 살피고 있었으며 지금도 보석 같은 빛을 발산하고 있는 약수는 지난 과거의 빛을 바랜 채 세상에서 점점 잊혀져가고 있었다.
노만사의 불당은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이라기보다는 평범한 농가에 비견되었으며 잠깐 고개를 돌려 승봉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곡리 마을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노만사라는 사찰 이름은 약수가 떨어져 이슬이 가득하다는 데서 연유하였다고 하였다.
노만사는 신안군 향토 유적 전용사찰 제 1호로서 규모는 대웅전 1동과 칠성각 1동 요사채 1동 뿐이었다.
1873년 창암화상이 대흥사 분회로 설립하였을 당시만 하여도 초가 건물이었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관리가 소홀해지고 건물이 무너지려 하였던 것을 1944년 천복운씨가 사재를 들여 중수하였다고 하였다.
법당 앞에 팽나무 고목이 비스듬히 서 있는 모습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명상에 잠겨 사색하는 듯 보였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들은 해탈의 경지에 이른 보살들을 환영하여 박수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듯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노·병·사 해탈의 심안이 노만사까지 미치는 듯하여 이곳 노만사의 한적하고 적막한 분위기와는 달리 노만사는 부처님 가슴처럼 넓은 사랑을 세상에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노만사를 둘러보고 돌아서려 하였는데 마음이 쓸쓸해지고 우울해지는 것은 어떤 연유에서 였을까?
인간이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며 이치여서 외롭거나 쓸쓸하다는 것 자체가 없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노만사의 쓸쓸한 분위기를 뒤로하고 자은도와 팔금도를 거쳐 안좌도 천사의 다리로 이동하였다.
천사의 다리는 두리와 박지 섬, 반월 섬을 연결하는 총 길이 1,462m 목교였다.
전날에 암태도 노두를 걸어보고 넘실거리는 바다 물결 속에 잠기는 순간을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겨 놓기도 하였고, 모세가 홍해를 건넜듯이 나도 노두를 걸어보고 싶은 욕망 간절하였으며 이집트 람세스 3세가 2륜 전차를 타고 홍해 근처까지 모세를 추격한 생생한 장면을 생각하면서 노두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였었다.
소나타 승용차를 타고 안좌도 두리에 이르러 두리와 박지 섬, 반월 섬을 연결하고 있는 목교인 천사의 다리를 바라보니 가슴이 확 트일 것 같았다.
여행 일자가 평일이다 보니 목조 다리를 걷는 사람들은 낚시꾼들이나 지역 주민들에 불과하였으나 공휴일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가하고 여유가 있어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명은 훨씬 더 환상적이고 자극적이었다.
태풍이 바닷물을 휘저어서인지 바닷물은 투명하고 맑아서 바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고 하늘은 구름 한 점 볼 수 없는 파란색 일색이었으며 끝없이 넘실거리는 바닷물 위에 시원한 바람을 등지고 비행하는 바닷새 한 마리가 목교 위를 걷고 있는 나를 보고 시비를 거는 듯하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앞을 바라보니 부부인 듯한 남녀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낚시하는 부부에게 다가가서 ‘무슨 고기가 주로 잡힙니까?’라고 물었더니 입질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말에 그물을 들추어 살펴보았더니 불운한 망둑어(운저리)만 잡혀 있었을 뿐 다른 어종은 보이질 않았다.
나는 다시 박지 섬으로 걸어갔다
박지 섬에 있는 박지리 마을은 면적이 1.75㎢이고 해안선 길이는 4.6km 였으며 산 정상 높이는 해발 130m였다.
이 마을은 오래 전부터 범죄가 없는 마을로 고씨가 맨 처음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하며 1700년 대 김해김씨가 정착하였다고 하였다.
마을 산책로가 아주 아름다울 것 같아 해변 산책로를 통해서 박지리 마을까지 가보려 하였으나 시간이 여의치 않아 다시 반월 섬으로 걸어갔다.
반월 섬까지 연결되어 있는 천사의 다리 위에서 왼쪽에 있는 박지리 마을을 바라보았더니 바닷물에 투영되어 나타나는 그림자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신선들만이 즐길 수 있는 선경이 아닌가도 생각이 들었고 이 곳 박지리 섬은 호수 같은 바다를 앞에 두고 반월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썰물 때 두 섬은 갯벌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는데 박지 섬 뒷산에는 조그마한 암자가 있었으며 반월 섬 뒷산에도 아담한 암자가 있었다고 하였다.
박지 섬 암자에는 젊은 스님 한 분이, 반월 섬 암자에는 비구니 한 분이 살고 있었다.
박지 섬 스님은 멀리 아른거리는 자태만 보고 반월 섬의 비구니 스님을 사모하였으나 밀물이면 바닷물이 가로 막았고 썰물이면 허벅지까지 빠지는 갯벌이 가로 막고 있었다.
달 밝은 보름달이면 반월 섬 암자에서 불공드리는 비구니의 목탁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하였고 그러한 밤이 지속되면 외로움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서 반월 섬 비구니에게로 향한 사모의 정은 밤을 지새게끔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박지 섬의 스님은 망태에 돌을 담아 반월 섬을 향하여 쌓아 나갔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서 몇 년이 지난 후 사랑의 돌무지 다리는 이어져 갔고 이것을 지켜본 반월 섬의 비구니도 광주리에 돌을 담아 머리에 이고 박지 섬을 향하여 부어 나갔다.
세월은 지나 젊은 스님은 중년이 되었고 꽃다운 비구니 스님은 중년의 여인이 되었다.
겨울의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두 사람은 묵묵히 돌무지 다리를 쌓아 나갔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두 사람의 모습은 점점 변하여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갔으나 사랑과 연모의 정은 짙어만 갔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의 사랑의 돌무지 다리는 점점 가까워져서 갯벌 한가운데서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거칠어진 두 손을 부여잡고 놓을 줄을 모르고 서있었다.
바닷물은 멈추지 않고 불어나 점점 높아져 갔으나 두 사람의 뜨거운 사랑은 주위를 잊은 듯하였다.
바닷물이 차오르는 데도 두 사람은 얼어붙은 듯 돌아설 줄 모르고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한 몸처럼 서있게 되었다.
박지 섬과 반월 섬 주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였으나 바닷물은 이미 두 사람을 삼키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신안군 안좌도 박지 섬과 반월 섬을 배경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었는데 너무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인 것 같아 주민에게서 듣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내세에서는 꼭 이루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으며 신안 암태도 박지 섬과 반월 섬을 연결하는 목책 다리는 지금껏 한반도 어느 곳에서도 걸어볼 수 없는 다리였다.
사랑이 담긴 천사의 다리는 이번 안좌도, 팔금도, 암태도, 자은도를 여행하면서 보고 느꼈던 것 중 가장 화려하고 깊은 감동을 주었으며 오랫동안 나의 가슴속에서 잊히지 않으리라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