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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과 신안
단성장날(4, 9일)이라 성내리 중심가가 다소 붐비었다.
방향잡기가 조금 애매해 사거리 SK농협주유소 사무실에 들렀다.
김태식 대리의 친절한 안내는 내 여정에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백지에 일일이 그려가며 동문서답하는 늙은 이를 납득시켰다.
그의 안내를 참고해 단성~산청 40리길을 첫 날에는 원지(신안면)~
정곡(산청읍)을 경유하여 가기로 정했다.
단성면사무소직원은 향토자료 구하려고 방문한 늙은이에게 특별한
봉사를 하고 싶었던가.
현아지(縣衙址)를 묻는 나를 차에 태우고 잠시 달려간 곳은 단성교
인근 강루리의 문화재자료 제290호 산청읍청정(山淸挹淸亭).
조상의 얼을 받들고 고을의 번영, 화목을 기원하며 각지의 유학자와
학문적 교류를 위해 안동권씨 33세손 권두희가 지은 정자란다.
병풍처럼 둘러 있는 적벽산과 백마산, 굽이쳐 돌아가는 경호강 맑은
물 등 산수(山水)가 빼어난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해발166m에 불과하나 이름처럼 붉은 퇴적층에 다름아닌 적벽산(赤
壁山)과 매치(match)된 경호강을 이 지역(단성과 신안)민들은 적벽
강이라고 부른단다.
남강, 경호강, 적벽강 등 이름을 세 개나 가진 강이다.
젊은 그는 아마도 이 고가(古家)를 옛 관아로 알고 있었던 듯.
강루리(江樓)와 성내리(城內)로 전전하던 현아의 마지막 위치는 현
단성초등학교 교정이라는데.
산청읍청정(1. 2), 단성교, 적벽산과 구3번국도(3. 4), 백마산과
경호강(5)
단성현아터도 단성향교도 들르기엔 이미 멀어진 단성교 앞이다.
다리 건너서 산청의 남부관문이며 교통요충지인 신안면(新安) 원지
삼거리까지 갔다.
지리산의 날머리로 자주 활용해온 지점이다.
신안면사무소에 들렀으나 신안역, 신안원에 대해 아는 이가 없다.
게다가, 강(남강) 하나 사이일 뿐인데 분위기가 단성과 사뭇 달랐다.
적벽산을 끼고 남강따라 북상하면 길이 3번국도에 흡수된다.
진주 대평면 분기점에서 헤어진 후 외율리(명석면) 도내고개를 넘고
양천(陽川)을 건너 여기까지 달려온 국도다.
3번국도가 백마산을 지나 월명산 자락에 이르면 명동제(堤)가 있는
신안리 명동마을이다.
옛 신안역이 있었다는 곳이며 그 동쪽에 신안원도 있었단다.
이 지역 촌로들은 이 길을 삼남대로라고 말한다.
봉화대로 주변 분들이 그 길을 삼남대로로 알고 있는 것 처럼.(옛길
59번글 참조)
언젠가, 신안땅 어데선가 '삼남대로' 표석을 본 적도 있다.
신안리 입구에서 구도로를 택했다.
초입은 문익점사적지(史蹟址)다.
문익점신도비, 문익점묘, 도천서원(道天書院), 신안사재(新安思齋)
등 여기도 문익점 성지다.
문익점사적지(1), 묘(2), 신도비(3), 도천서원(4. 5)과 신안사재(6)
안봉리(安峰), 외송리(外松)를 지나 산청읍땅에 들어섰다.
옛 산음현(山陰縣), 더 예전엔 지품천현(知品川縣)이었던 지역이다.
지금의 산청군(山淸)은 대규모 행정구역개편이 단행된 1914년에 옛
단성현과 산음현(山陰顯)이 통합된 행정구역이란다.
그러면, 지명 산음이 자취를 감추고 산청이 등장한 것은 18C중후반
(영조43년:1767)이라는 기록은 뭔가.
대동지지의 통영별로에도"경도발770리 산청"이며 곳곳(다른문헌들)
이 산음 아닌 산청인데.
1750년 저작으로 알려진 택리지 이후 산음은 보기 어렵다.
의도적인 왜곡일 리 없으니 단순한 오류라 하자.
품위를 아는 지품
단성과 산청, 각 20리 간이라는 오조점(烏鳥店)이 아직껏 오리무중
(五里霧中)이다.
물어볼 상대 만나기 어렵거니와 어쩌다 만나는 이 아무도 모른단다.
신안리, 범학리(泛鶴) 일대에서 실패하고 정곡리에 도착했다.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에 딸린 정곡역이 있던 지역인데 초입의 한
서구풍 집에 들렀다.
마침 마당에서 뭘 하고 있는 분에게 물어볼 요량이었는데 생면부지
늙은 길손에 대한 그의 의외의 호의에 감읍할 지경이었다.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인데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으나 쉬어갈 방이
많으니 편히 유하고 가시라"는 68세의 순천박씨 풍규(朴豊圭)님.
그는 어떤 연유에서 이처럼 갸륵한 호의를 베풀려 한 것일까.
옛 지품현의 중심부였으며 정곡역(正谷驛)이 있었다 해서 정곡마을
또는 역촌이라 한다는 상식 정도 밖에 모르는 그다.
고향을 떠난지 하도 오래되어 잘 모른다는 것.
이 집은 건축업에 종사하던 서울에서 귀향해 손수 지었단다.
얘기 범위를 넓히고 보니까 공교롭게도 그는 서울 생활을 내 집에서
지근인 덕성여대 옆(쌍문동)에서 했다.
정녕, 그는 솔밭공원과 4.19국립묘역을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내 집 앞을 지나기도 했을 터.
이 사실을 알고난 그는 호의를 정중히 사양하는 내게 더욱 아쉬움을
표하며 산청 방문의 기회가 오면 꼭 들러서 쉬어가란다.
넓은 듯 하나 좁은 세상이다.
삭막한 듯 하나 살 만한 세상이기도 하다.
박풍규와 그가 지은 새 집(1)과 우정학사(2)
품위를 아는 시내(知品川)와 바른 골짜기(正谷)는 같은 뜻일 터.
해 안의 시간이 조금밖에 남지 않아 걸음을 재촉하려 하는데 길가의
한 건물이 또 붙들었다.
여기가 옛 지품땅이었음을 말해주는 지품초등학교다.
학생수 격감으로 폐교되고 건물은 리모델링하고 보완하여 군내우수
중고생들의 영재 교육장으로 재활용중인 '우정학사'란다.
역시 품위를 잃지 않는구나.
그러나, 대형사업가의 헌물(獻物)이라고는 하나 운영의 주체가 공공
기관이라면 이 특별한 혜택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계층의 상실감 또는
위화감도 동시에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밤에 찜질방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군민의 세금으로 차별을 조장하고
있다는 불만이 적잖다니까.
살 만한 산음
늦은 시간이지만 혹시나 하고 들렀는데 업무량 과중 때문일까.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일에 열중중인 산청읍사무소 직원들의 도움
으로 향토사에 조예 깊다는 분(전 단성면장 S)을 소개받았다.
이중환이"음침하여 살 만한 곳이 못된다(山陰陰晦不可居:擇里志)"던
산음땅에서 나는 계속 살만한 느낌 속에 깊숙히 빠져들고 있다.
내일 그 분을 만나게 된 데에 당연히 기분이 고무된 것인가.
어둑해 가는 시각인데도 향교에 들렀다.
산청향교라고 전란에서 예외가 되겠는가.
세종22년(1440)에 건립되었으나 '임진 병자' 전란에 화를 입었단다.
도 유형문화재 제224호 향교 안내판의 해설 글이다.
아니, 병자년 호란때 청국병들이 산청까지 내려와 향교에 불 지르고
갔다는 말인가.
'임진. 정유'의 잘못임에 틀림 없다.
비록, 오류투성이지만 영어해설에서는 왜란이라 하고 '임진 정유'때
임을 확인해 주는 연대를 밝히고 있는데('1592~1598'이라고)
산청향교
방문객중에는 건성인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꼼꼼히 살피기도
할 텐데 긴 세월을 저리 방치해 두고 있다니.
하루를 잘 마치는 중인데 또 속상할 일을 만났는가.
산청온천랜드가 신선한 내일을 약속하고 있는데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이 고질(?)로 부터 자유로울 날이 언제쯤?
원지행 첫버스편으로 어제 걸은 길을 정곡삼거리까지만 되돌렸다.
3읍면계(산청, 신안, 단성)에서 단성의 다른 길을 걸을 것이면서도
미리(도중) 하차한 것은 어제 고마웠던 정곡리462-1번지, 박풍규님
집을 다시 마음에 담아두려고.
또한, 멀리에서 나마 성심원도 살펴보려고.
박풍규와 성심원도 산음을 살만한 곳이 못된다는 진단을 뒤집을 만
한 사례임에 틀림 없으니까.
지형적으로 음산하면 어떠냐.
양지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으면 살 만한 곳이지.
성심원
성심원(聖心院)은1959년에 가톨릭'작은형제회'(프란치스꼬수도회)
가 산청읍 내리, 지리산 웅석봉 자락에 세운 한센노인요양시설이다.
<그리스도 복음의 정신과 프란치스꼬 성인(St.Francesco1181~1226)의
모범에 따라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한센인을 한가족으로 받아들여
보호와 치료에 헌신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아주며 복지증진을 통
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간다>는 목적으로.
그래서, 170여명의 남녀 노인들과 60여명 직원들의 이 공동체에는
"환자는 없고 가족이 있을 뿐"이란다.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고.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는....."
(신약성서 1데살 5:16~18)
하지만, 이해와 지원의 폭이 넓어진 이즈음과 달리 예전에는 얼마나
많은 멸시와 기피의 대상이었던가.
나는 가톨릭신도가 아니지만 그들의 순수한 사회구원활동에 대해서
만은 한 없는 경의를 표한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 정신을 표방하지만 비리 투성이이며 그나마도
외화내빈(外華內貧)인 개신교의 활동과 달리 진정성이 있으니까.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정적이 감도는 이른 아침의 성심원.
경호강 건너 산 기슭 곳곳에는 그들이 자기의 그리스도와 성모에게
온몸으로 매달리고 있는 자국들이 보이는 듯 했다.
단성 단편1(신라땅에서 고구려 건국정신이 부활?)
3읍면계에서 1001번지방도로 따라 경호강(남강상류)을 건너면(어
천교) 단성면 방목리 어천(魚川)마을이다.
웅석봉자락 오지마을인데도 여름에 경호강과 어천계곡을 찾는 이들,
지리산 태극종주자들과 웅석봉 등산객들에게는 인기있는 마을이다.
어천마을(1)을 지나 꼬불길을 오를 때 반겨준 활짝 핀 진달래꽃(2)
해발1.099m웅석봉(熊石峰)은 지리산국립공원권 밖인데다 산청군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돼, 언뜻 독립산 같으나 실은 지리산 품안이다.
"곰이 가파른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는 애잔한 전설의 웅석봉은
바래봉(전북남원시운봉읍)에서 시작하는 지리산 태극종주의 마지막
봉우리이며 들머리 봉이기도.
지리산 종주의 개념을 종래의 천왕봉~노고단에서 웅석봉~천왕봉~
노고단~만복대~덕두산(1115m남원인월)까지 넓히는 이들도 있다.
찰라적 발작에 다름아닌 산(웅석봉)의 유혹을 뿌리치고 재(태극종주
자들은 이 재를 '한재'또는'大峴'이라 부른다) 넘어 웅석봉 물을 가둬
만든 저수지의 마을 청계리로 내려섰다.
봄 햇살을 받아 수면이 검푸른 청계제(堤)를 뒤로 하고 계속 남하(南
下)하면 운리(雲里) 탑동마을 단속사지(斷俗寺址)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 는 뜻으로 속리(俗離)보다 단호한 결의가
담긴, 왠지 무거운 느낌을 주는 이름이다.
불교 중흥기인 신라35대 경덕왕22년(742~764)에 창건되었단다.
산문인 광제암문(廣濟嵒門에서 짚신을 갈아신고 들어가 절 구경을
하고 나면 짚신이 다닳아 못신을 만큼 큰 규모였다는 절이 어찌하여
겨우 3층석탑 2기만(보물 제72, 73호) 남은 처지가 되었을까.
원래의 이름은 '금계사'(金溪寺 錦溪寺?)였는데 너무 많은 식객들로
골머리를 앓다가 속세와 아예 단절한다는 뜻의 단속사로 개명했다나.
이후로 사나와진 사찰인심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 폐사된 것이라
는 구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단속사지 산문(1), 2기의 석탑(2)과 당간지주(3), 정당매(4)
지근에는 려말 대사헌에 올랐던 통정 강회백(通亭姜淮伯)이 단속사
에서 수학하던 소년시절에 심었다는 매화(政堂梅)도 있다.
수령이 무려 640여년이라는 정당매는 남사리 분양매(汾陽梅또는元
正梅), 시천면 산천재 남명매(山天齋南冥梅)와 함께 산청삼매(三梅)
중 하나란다.
길은 “다물민족학교” 앞으로 나있다.
1990년 4월에 서울 우이동(강북구)에서 개교한 뒤 1994년에 이
곳으로 옮겨왔다는 특수기관이다.
다물(多勿)은 '되물린다', '되찾는다'는 의미의 순수 우리말이란다.
'위복구토위다물(謂復舊土爲多勿)'이라 하여 잃어버린 옛 영토를 되
찾는다는 의미로 고구려건국정신이기도 하다는 것.
삼국통일이라는 명분으로 외세와 결탁해 고구려의 웅지를 꺾어버린
신라땅에서 고구려 건국정신의 부활을 보다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다물민족학교(전재)
다물교육은 "일반적인 정신교육이 아니라 영광과 수난이 교차했던
민족사의 재조명을 통해 현 국내외 정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정립
하고 강력한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역사속에서의 자신의 존재의의
와 역할을 자각하는 거시적 의식혁신 프로그램"이란다.
긍정적이고 자극적인 단어들이 망라되었지만 긴문장이 초점을 흐려
놓아 무얼 강조하는지 막연하다.
개설 이래 굴지의 대기업 임직원과 각급 공무원, 군인, 대학생, 여성,
청소년 등 무려 27만여명이나 참여했다지만 혁신된 것이 무엇인가.
빛과 소금이 되기엔 프로그램에 한계가 있는 것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