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프로그래머와 의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 질문의 열쇠이다. 내가 현재까지 깨달은 것은 여기까지이고 나머지는 독자들의 몫이다.
종교는 미지의 것을 믿는 것이다. 과학은 미지의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철학은 미지의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진리에 대한 문제이다.
삶은 아주 잠깐이고 죽음은 그다지 멀리있지 않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모르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진실을 안다면. 죽음! 그것은 그리 큰 공포는 아닐 것이다. 다만 조금 슬플 것 같다. 아쉽고.
진실과 진리에 관한 이야기는 1년전 쓴 글의 첫 시작이었다. 이 명제에 대해선 그리 달라진 것이 없는데 이번 글에서 재차 이야기하는 것은 <다름과 틀림>처럼 <진실과 진리> 또한 우리가 쉽게 혼동하여 각별히 주의하고 구분해서 생각해야 할 명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진실과 진리는 같은것이며 고정불변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착각이 종교, 철학, 사상, 윤리 등 관념을 바탕으로 둔 학문이나 사유, 도덕과 문화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어떤것이 진리이고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면 좀처럼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말을 풀어보면 진실은 참된 사실이다. 진리는 참된 이치이다.
어떤 사실이 진짜로 옳은 것이라면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에 사실이 변했다 하는 것은 그 앞의 사실은 거짓이었다는 뜻이다. 500년 전 쯤에 천동설이라는 사실이 지동설로 바뀌었다. 지동설이 사실로 인식되자 천동설은 거짓이 되었다. 진실은 과학처럼 나름 객관적 증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과학도 계속 진화하고 어제의 과학이 오늘은 신화가 된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늘을 윗물, 바다를 아랫물로 표현한다. 태초의 세상은 물(창1,2)이었는데, 물을 갈라 궁창을 만들고(창1,6), 궁창을 윗물과 아래물을 가르고(창1,7),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고(창1,8), 아랫물은 한데모아 바다와 뭍을 구분하셨다(창1,10).
창세기의 이야기를 만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이 온통 물로 가득찼을거라 생각했다. 하늘도 파랗고 바다도 파랗고, 수평선에는 하늘과 바다가 연결되어 있고, 심지어 물이 비가 되어 하늘에서 떨어지니 하늘이 파란것은 바다처럼 물로 가득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여 거꾸로 거슬러 태초의 세상은 온통 물이라고 생각하였다.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를 규정한 과학용어가 허블상수이다. 허블이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을 처음 알아내었기 때운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팽창속도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주가 한점으로 모아지는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계산한 결과가 137억년이다. 창세기시대나 지금이나 과학 추론 방법이 비슷하지 아니한가? 과학은 그 시대의 사실을 대표한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빛은 가시광선과 적외선 자외선 등 여러 파장이 있으며, 빛의 산란 현상때문에 가시광선 중 푸른빛만 반사되어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거라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처럼 과학은 나름대로 그 시대의 사실성을 반영하지만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과학적 사실이라 생각하는 많은 부분들이 미래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학생때만해도 절대 깨질 수 없는 기본입자는 원자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답을 썼단 틀린 답이다. 이처럼 사실성 여부에 있어 그래도 가장 정확한 것은 과학이지만 과학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절대 진실일 수는 없다. 종교나 철학은 과학보다는 사실성의 면에서 부족할 수 있으나 대신 훨씬 빨리 앞으로 갈 수 있다.
앞글들에서 철학적 논증을 하였듯이, 윤회는 불교의 믿음이지만 철학적으로도 사실이고, 우주가 영원무궁한 것이라 생각했던 중세때에 성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에 시작이 있었음을 그의 고백록에 써놓았고, 아직 은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200년전에 에드가 앨런 포우는 그의 서사시 유레카에서 우주의 시작과 우주가 커졌다 다시 줄어들어 소멸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에드거 앨런 포우(Edgar Allan Poe, 1809~1849)의 이야기를 잠깐해보자. 미국의 천재 작가이며 문학에 과학을 접목시킨 문학 이론가, 시인, 소설가, 비평가이자 시와 소설의 새로운 이론을 개척했지만 미국 문단에서 이단아로 취급받으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딸랑 40년의 짧은 삶을 산 이 천재의 삶은 세상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도망가고, 어머니는 요절하고, 양아버지와도 관계가 나빴고, 아내마저 요절한다. 술, 마약, 병은 그의 삶을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았고 세상은 이 가난하고 불행한 천재를 불법 선거에 동원하였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과 천채성은 당시의 어느 과학자보다도 진보하였다.
그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이야기를 인터넷에 나오는 글을 인용해보자.
<밤은 왜 어두운가?>를 묻는 올버스 패러독스 이야기. 밤이 되면 하늘은 어두워진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17세기 천문학자 케플러(Johannes Kepler)는 밤하늘이 어두운 이유에 대해서 의문을 품은 최초의 과학자였다. 만약 항성의 숫자가 무한하고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다면, 항성들은 밤하늘의 모든 부분에 골고루 퍼져 있을 것이다. 항성들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은 불덩어리처럼 빛나고, 뜨거운 열로 지구를 불태울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상에는 어떤 생물체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케플러는 우주가 무한한 것이 아니라 유한하다고 주장했다.
밤의 어두움은 1820년대에 활동한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하인리히 올버스(Heinrich W. M. Olbers)에게도 궁금증을 안겨주었다. 그는 천체 관측을 통해서 당시 유행하던 개념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밤마다 브레멘에 있는 자신의 집 꼭대기 층에서 혜성과 소행성을 관찰했다. 케플러와는 달리 올버스는 우주가 무한하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믿음이 어두운 밤하늘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다. 우주는 항성간 물질로 이루어진 구름으로 가득 차 있고, 이 구름이 별빛을 가로막아서 마치 햇볕을 가리는 양산처럼 항성의 빛을 어둡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항성간 구름의 존재가 확실히 밝혀지기 이전부터 이 흥미로운 주장을 폈다. 그러나 그가 불러낸 구름은 밤하늘의 역설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한한 우주에서 별빛은 그 구름을 가열시켜서 끝내 붉게 타오르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밤하늘은 케플러의 생각처럼 밝게 빛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밤하늘의 수수께끼는 (케플러를 비롯해서 그보다 앞서 비슷한 고민을 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공정한 일이지만) "올버스의 패러독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패러독스에 대한 진정한 해답은 과학자가 아닌 한 시인이 발견했다. 그는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의 무시무시한 소설들, 중세풍 공포 문학, 그리고 그의 혼란스러운 개인적 삶, 마흔 살의 나이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심한 음주벽 등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과학, 특히 천문학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가졌으며, 프랑스의 천문학자 피에르 시몽 드 라플라스(Pierre-Simon de Laplace)의 성운 가설에 매료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라플라스의 성운 가설에 따르면 태양계는 먼지와 가스로 이루어진 원시 구름에서 생겼다고 한다. 포는 그 가설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 본질에 진실을 간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그 가설은 포를 고무시켜서 우주론에 대한 에세이 "유레카(알았다!): 산문시"를 쓰게 만들었다.
포의 견해에 따르면 올버스의 패러독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배경의 거리가 너무 방대해서 그곳에서 나오는 어떤 빛도 우리에게 전혀 도달 할 수 없기 때문에" 풀릴 수 있다. 포를 난처하게 만든 것은 우주가 무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측면에서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우주는 아주 젊기 때문에 먼 거리의 항성에서 나온 빛은 여전히 매우 빠른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항성들이 태어나기 이전의 시대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우리 우주는 유한하다. 이것은 우주는 영원무궁하다는 과거의 관념과 배치된다. 또 하나의 진실이 바뀐 것이다. 이 진실의 변화는 우주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통채로 바꾸는 대사건임에 틀림없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무한의 우주에 살고 있다.
예를들면 자본의 무한축적이 가능한 사회. 우주조차도 유한한데 인간은 무한을 추구한다. 공간적 무한도 부족해서 시간적 무한 즉, 상속이라는 이름의 세습을 통해 부와 권력을 영원의 시간으로 확대하려한다. 자본주의의 부조리는 여기서 시작되고, 또 이의 해결을 통해 문명은 진화하여야할 것이다.
우리 우주가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라든지, 의지가 프로그래머에 의해 우주 외부에서 온 것이라든지, 모든 생명은 하나의 의지에서 나온 형제 관계라든지 하는 것을 과학이 증명하려면 아마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여 나는 철학의 도구인 이성적인 논리로 이를 설명하고 이 철학적 사실 아래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진리의 문제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진리를 용어로 풀어보면 참된 이치이다.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용어이다.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는 모두 다르다. 인생도 어렸을 때, 젊었을 때, 늙었을 때 살아가는 이치는 당연히 달라야한다. 부자가 살아가는 이치가 다르고 가난한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달라야 한다. 산에 사는 사람과 바닷가에 사는 사람의 사는 이치가 다르고, 더운곳에 사는 사람과 추운 곳에 사는 사람의 사는 이치도 당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삶을 살아가는 참된 이치, 즉, 진리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이다. 우리 세상에 60억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면 진리는 60억개가 필요한 것이고, 수 경, 수 해의 생명체가 있다면 그 하나하나의 생명마다 살아가기 위한 진리가 필요한 것이다.
진리를 특정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 특정을 벗어나는 모든 것은 거짓이 되거나 심지어 죄가 되기도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경구절을 써놓고 진리를 자기 나름대로 특정해 그 울타리 안에서만 사는 것을 자유라고 한다면 너무 우습지 아니한가?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자유이다.
생명은 의지이며, 의지는 물질의 결정성과 확률성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다. 우리의 프로그래머는 생명 즉, 의지가 주는 자유를 만끽하라고 자기 의지를 분사한 것이다.
여기에 한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나는 홀로 동떨어져 있는 독립된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은 개별 개념이 아니라, 공동 개념이다. 우리는 한 프로그래머 즉, 한 하느님에게서 나온 거대한 하나의 생명군집이다. 우리는 아직 지성의 문이 열리지 않아 내가 나를 보지못하듯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을 뿐이다. 이제 인간이라는 독특한 지적생명체는 그것을 서서히 깨닫게 될 것이다. 사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이것을 오래전에 깨닫고 사랑으로, 자비로 혹은 인의예지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생명을 대하라 하였다.
우리의 종교가 어떠하든 혹은 무신론자이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대의 치장일 뿐이다. 우리는 섬처럼 하나하나 외동떠러진 생명체로 느껴지지만 사실은 바다 밑에 땅으로 다 연결되어 있듯이 결국은 하나의 생명군락이다.
우주를 보라! 이 광활한 우주에 먼지보다도 작은 우리 지구. 아직까지는 우리밖에 없지 않은가? 혹은 생명체가 사는 별이 몇 더 있다 하더라도 생명은 너무나 독특하고 진귀하며 소중하고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우연히 인간으로 태어나, 우리의 지성을 마음껏 활용하여 우주와 생명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순환되는지를 알게 된 최초의 사람들 혹은 생명체일지도 모른다.
설레지 않는가? 지구가 평편하지 않고 둥글다는 것을 안 최초의 사람이 있었다. 빛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안 한스 베테라는 최초의 사람이 있었다. 밤이 왜 어두운지를 알게된 최초의 사람이 있었다. 우주가 유한하며 시작점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최초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우주가 어떻게 시작된 것이고, 어떻게 유지되고 있고, 생명이 무엇인지를 안 최초의 사람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