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살바도르와 덴마크의 친선경기에 3만여 명의 관중을 끌어모을 수 있는 도시는 전 세계에 단 한 곳밖에 없을 것이다. 그곳은 산살바도르도 아니고 코펜하겐은 더더욱 아니며, 바로 로스앤젤레스이다. LA 콜로세움(LA Coliseum)으로 가는 길에 나는 내가 미국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축구팬들은 모두 키도 작은데다 피부도 가무잡잡했다. 프로그램 판매자와 구걸꾼은 거의 없었지만 있다고 해도 덴마크인처럼 보였다. 어느 누구도 상대팀을 야유하는 팀 상징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축구팬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판매하는 음식도 비위생적인 버거뿐이었던 것 같다. 이 모든 요소가 비미국적이었던 것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한 인물인 보스턴 헤럴드 Boston Herald 의 한 칼럼니스트는 닉스 축구 페스티벌[Nix soccer festival, 바로 이 축구 시합]과 월드컵의 상업적 대성공에 대해 썼다. 1994년 월드컵은 미국 이민국이 주도한 일종의 신용 사기 행위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3,0000명가량 되는 엘살바도르인과 함께 콜로세움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대회 조직위 관계자들이 겨우 1,5000명으로 발표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경기장 소유자들에게 입장료 수입의 일부를 나누어줘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래쪽에서 지난 번 라트비아에서 만났던 사람을 보았다. 묄러-닐젠(M ller-Nielsen)이 덴마크팀 상비군을 훈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엘살바도르와의 경기가 있고 나서 3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와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다시 만났다. (덴마크가 그곳에서 경기를 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5개월 동안 3번씩이나 한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서로 다른 세 개의 대륙에서 말이다.
엘살바도르 관중은 모든 게 즐거웠다. 그들은 자기들이 쏜 축포에 환호했다. 잠시 후 경관 두 명이 적발된 축구팬 한 명을 데려가는 게 보였다. 그 작은 신장의 2류 엘살바도르팀이 큰 키의 2류 덴마크팀에게 2대0으로 졌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즐거워했다. 경기 막바지에 이르자 과거 내전[미국과 메히코의 캘리포니아 영유권 전쟁]에 대한 향수가 생각났던지 그들은 그라운드가 아니라 관중석에다 대고 축포를 쏘기 시작했다. 폭죽이 터지는 걸 보면서 그들은 희희낙락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출구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 빈 좌석으로 병이 하나 날아와 깨지자 나도 자리를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Los Angeles Times --스포츠란이 12면이나 되었다--를 살펴보았는데 시합 관련 기사는 단 한 줄도 싣고 있지 않았다.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나중에 미국 대표팀 코치 보라 밀루티노비치(Bora Milutinovic)가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나한테는 여기서 일하는 게 훨씬 쉽죠. 여기서는 신문을 펴도 축구 얘기가 없거든요. 메히코라면 매일 매일 뭔가 새로운 소식이 쏟아지죠. 하긴 이런 게 메히코 아니겠어요." 밀루티노비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20년을 보내고 미국으로 건너온 세르비아인이다.
아나(Ana)는 엘살바도르 출신의 가정부다. 미국 출국에 즈음하여 나는 사우스-센트럴 LA(South-Central LA)에 있는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 지역은 LA 흑인 폭동이 일어났던 바로 그곳이다. 거실로 들어갔더니, 친척 몇 명과 아나, 그리고 축구광인 남편 엠베르(Hember)가 있었다. 두 부부의 갓난아이 디에고(Diego)는 한쪽에 마련된 간이침대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엠베르가 나에게 디에고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마라도나(Maradona)야말로 축구계에서는 최고의 사나이죠. 디에고가 두 살만 더 먹으면 이 녀석이 뛸 만한 팀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TV에서 축구 관련 얘기가 나오면 이 녀석을 TV 앞에 놓아 잘 볼 수 있도록 한답니다." 엠베르는 메히코 리그 경기를 중계방송하는 그 지역 히스패닉[Hispanic, 미국 내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라틴계 주민] 채널만 본다. 또, 그는 엘살바도르와 덴마크의 경기를 직접 보러 콜로세움에 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덴마크에는 키 큰 선수들이 정말 많더군요." 나는 엘살바도르에서도 시합 때면 축포를 쏘아 터뜨리는 것이 흔한 일이냐고 물었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을 벌였다간 감옥에 가죠."
보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는 일요일마다 직접 경기도 했다. 이를 두고 그는 교회에 가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의 팀 선수들이 모두 라틴 아메리카 출신이었을까? "우리 팀 선수들은 모두 엘살바도르의 누에바 과달루페(Nueva Guadaloupe) 출신입니다." 또, 그가 참여하고 있는 리그에는 자메이카와 벨리즈 출신의 흑인들로 구성된 팀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미국 흑인 팀도 서너 팀 있었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미국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하지 않더군요. 하지만 이제는 미국 사람들도 서서히 축구를 좋아하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인들이 다 축구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의 팀이 가끔 란초 파크(Rancho Park)에 가면 소프트볼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뜬공을 피해 몸을 웅크리는 자세를 취했다. "그들도 우리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우리도 그건 마찬가지죠. 경찰에 연락하는 건 그들이고, 그들도 미국인이니까 결국 우리가 자리를 비켜줘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미국팀이 엘살바도르와 싸우지만 않는다면 미국의 승리를 바랐다. 미국팀 최고의 선수는 우고 페레스(Hugo Pe rez)라고 그는 생각했다. 페레스는 엘살바도르 출신이다.
이야기를 계속하자 엠베르는 고향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가 엘살바도르 홍보 비디오 테입을 꺼내 내게 틀어주었다. 장면 중에는 물속에서도 서로 공을 차며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왔다. 그의 말이다. "해변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축구를 하죠."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이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구사하는 이상한 억양과 옷차림, 그리고 부모들 때문에 거리에서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이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보여줄 수 있는 비장의 무기는 거리에서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치고받는 유럽식 공놀이였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다시 한 번 조롱과 수모를 받았다. 그들이 야구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미국인들이 축구를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미국인들은 축구를 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그들이 추수감사절을 기념하고 관광단이 되어 유럽을 찾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이 대도시의 교외에 살고 있는 백인 중산층일 거라고 부지불식간에 생각한다. 수천만 명의 히스패닉계 미국인들이 축구를 직접 하고 관전하고 관련 기사를 읽고 있다. 심지어는 교외의 부유한 백인들도 자기들 나름의 방식으로 축구를 한다. 나 역시 미국에서 축구를 하곤 했다. 열 살 때 우리 가족은 햇볕이 좋은 캘리포니아의 대학 도시 스탠퍼드(Stanford)에서 1년 간 산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소년 소녀들이 축구를 한다. 부유한 미국인들이 축구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축구 전도사들이 축구를 널리 확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빈민가의 아이들은 축구는 얼간이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게 현실이다.
스탠퍼드에서 내가 만난 코치들은 대부분 축구라는 경기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스포츠 종목에서 작전 개념이나 전술을 빌려왔다. 한 코치는 자기팀이 코너킥을 얻게 되면 골포스트 쪽으로 공중 볼을 띄우려는 킥커(kicker)에게 '독수리!' 또는 '나선 강하!'와 같은 작전명을 외쳐대곤 했었다. 또다른 코치는 자기팀이 공격을 시작할 때 두 명의 풀-백은 페널티 에어리어의 양쪽 모서리에, 그리고 센터-백은 정면의 페널티 서클에 정확히 위치하도록 하는 대형을 고수했다. 그러면 그들은 공이 자기편 진영으로 넘어올 때까지 뒷짐을 지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또, 라이트-해프[전통적인 WM대형에서 W의 오른쪽 아래 끝점에 해당하는 자리로 수비를 담당한다]는 잡은 공은 무조건 5야드 정도 왼쪽으로 패스하라는 작전 지시를 받고 있었다. 이 이론은, 말하자면 오버래핑하는 자기편 라이트-백의 발에 자동으로 공이 이어지도록 하겠다는 구상에서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전술이 성공적으로 실행된 적은 거의 없었다.
내가 아는 한 전술이나 작전에 크게 신경을 쓰는 아이는 없었다. 그들은 유럽 어린이들이 오보에를 연주하는 것처럼 축구를 했다. 부모들은 그저 축구를 하면 아이들 건강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재미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흥분되는 그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따라서 기량이 돋보이는 선수들도 거의 없었다. "좋아요. 미국에서 축구를 하는 인구는 1500만 명이나 됩니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에게 축구는 여러 종목 중에서 그냥 선택할 수 있는 레크리에이션의 하나일 뿐입니다." 사커 아메리카 Soccer America 의 편집자 린 벌링-마누엘(Lynn Berling-Manuel)이 내게 한 말이다. "펠레(Pele )--그가 은퇴한 지도 10년이 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활동하는 축구 선수는 많지만 그 중 단 한 명도 진정한 프로라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스탠퍼드의 내 친구들 중에서 축구 경기를 직접 관전한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조지 베스트(George Best)가 자기 고장 팀 산호세 어스퀘이크(San Jose Earthquakes)에서 뛰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 분명 경기장을 찾았고, 또 구경한 사람이 있기는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는 축구가 미국에 막 도입된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북아메리카축구리그(North American Soccer League, NASL)는 많은 관중을 끌어모았다. 거기 가면 이제는 한물 간 유럽 선수들이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퇴물들의 묘지죠." 지안니 리베라(Gianni Rivera)는 NASL을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퇴물들이라고는 해도 역시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다! 1981년 어스퀘이크와 뉴욕 코스모스(New York Cosmos)의 대전을 지켜본 게 기억난다. 그 시합에는 베스트, 프란츠 베켄바워(Franz Beckenbauer), 요한 네스켄스(Johan Neeskens)가 출장했다. 몇 달 후 우리 가족이 집에서 어스퀘이크의 시합을 시청하고 있었을 때다. 베스트가 공을 몰고 수비수에게 돌진하다가 갑자기 볼을 발아래 멈춰 세웠다. 곧이어 상대 선수 머리 위로 볼을 가볍게 차올리고는 재빨리 그 선수를 돌아서 다시 공을 잡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계속된 경기에서 별다른 내용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로리 캘러웨이(Lawrie Calloway)는 영국에서는 울프(Wolves) 블랙번(Blackburn) 슈루즈베리(Shrewsbury) 로치데일(Rochdale) 등에서 뛰었다. 그는 1974년 미국으로 옮겨왔다. 미국에서 그가 활약한 클럽 중에는 어스퀘이크도 끼어있었다. 어스퀘이크 시절의 그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버밍햄 말씨와 캘리포니아 사투리가 한데 뒤섞인 억양으로 내게 말했다. "영국 2부리그에서 온 우리가 유명인사가 되었다는 건 두 말 하면 잔소리죠. 나는 영국에서 내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시는 조지 베스트, 찰리 조지(Charlie George), 바비 무어(Bobby Moore)와 같은 1류 선수들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던 시절이었죠. 여기 왔더니 당신 같은 기자들에 의해 내 인물 단평이 실리고 TV에도 출연한답니다. 나로서는 정말 기분 좋은 일이죠." 기자로서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NASL은 1985년에 문을 닫아야 했다. 리그를 운영하던 인사들이 단기간에 너무 많은 클럽을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거기다 축구에 대해서도 그들은 너무 몰랐다. 리그 회장인 고(故) 하워드 새뮤얼스(Howard Samuels)가 이런 상황의 어려움을 토로한 바 있다. 팬들 역시 전문가들이라고 할 수 없었다. 캘러웨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치어리더에게 환호했습니다. 또 선수가 공을 60야드 정도 차내거나, 헤딩으로 30야드 정도 보내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열광했죠. 지금 하는 얘기는 산호세에 있었을 땐데요. 우리 팀에는 미친 조지(Crazy George)로 통하는 치어리더가 한 명 있었습니다. 대단한 유명인사였어요. 최장시간 응원 기록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으니까요. 그는 경기장 한쪽 편은 '어스(Earth)'를 다른 한쪽 편은 '퀘이크(quakes)'를 연호하도록 했는데, 이게 무려 13분 30초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겁니다. 그 와중에 우리는 골을 먹었지만 말이에요."
현재 캘러웨이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블랙호크(San Francisco Bay Blackhawks)의 코치로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인터뷰를 할 당시 그들은 메히코 리그에 참여하려고 하고 있었다. "모험적인 대도박이라고 할 수 있죠." 그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정말로 가망이 없는 헛된 기도일까? "카디프[Cardiff, 영국 웨일스 남부의 항구 도시]팀이 잉글랜드 리그에서 뛰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죠. 생각해보면 불가능할 것도 없어요." 그렇다고는 해도 블랙호크가 새로운 미국 프로 리그의 창설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도 인정했다. "그렇다고 정말 평생 메히코 리그에서 뛰고 싶지는 않아요." 샌프란시스코는 메히코 최서북단에서도 북서쪽으로 475마일이나 떨어져 있다.
캘리포니아의 또다른 영국인 피터 브리지워터(Peter Bridgwater)는 스탠퍼드에서 열리는 월드컵 경기의 총책임자다. 그는 성마른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히우나 로마, 바르셀로나는 최고의 월드컵 개최 도시인데 반해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는 그렇지 않은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봐요, 쿠퍼씨. 당신은 영국 어디 사십니까? 런던이요?! 하이베리(Highbury)는 작은 도시죠, 그리고 웸블리는 훨씬 더 작은 도시입니다! 그렇다면 웸블리가 축구를 하기에 적당한 장소일까요?" 그렇다면 그는 어떤 팀들이 스탠퍼드에서 시합을 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일까? "잉글랜드죠!" 그러나 언짢겠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스탠퍼드는 레밍턴스파[Leamington Spa, 잉글랜드 워릭셔주에 있는 소도시]와 같다.
미국인들은 축구가 남성들의 경기라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나는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자라면서 여성들이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여성들이 축구를 하는 모습을 본 것은 스탠퍼드에서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우리는 공놀이를 했고, 학년 전체가 이 놀이에 참여했다. 미국에는 4살짜리 여자 애들이 참가하는 축구 리그가 있다. 이 나라 축구 선수의 거의 절반이 여성이다.
나는 이 나라 최대 축구 잡지의 여성 편집자인 린 벌링-마누엘(린 벌링-마누엘씨에게로 보내지는 엄청난 양의 우편물이 도착한다고 한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다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에 의하면, 핵심은 미국 여성이 미국 남성과 동시에 축구를 접했다는 것이었다. 유럽 여성들과는 달리 그들은 결코 국외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여성 자신이 어떻게 직접 축구를 접했던 것일까? "우리 아버지는 일평생 축구 경기라곤 가본 적이 없는 분이셨죠. 나는 여섯 아이 중 맏이였는데, 자식이 여섯이나 되었으니 당신께서는 어디에도 가실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러던 1967년, 우리 고장 축구팀 오클랜드 클리퍼스(Oakland Clippers)가 아주 싼 가격에 가족 패키지를 제공하는 것 아니겠어요. 20달러 정도면 가족 모두를 데려갈 수 있을 뿐더러 차까지 주차할 수 있었으니 아버지께서 이거야말로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실제로 아버지로 통하는 남성들이 가장 큰 소비자 집단이었죠.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 모두는 축구팬이 되었답니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만요. 우리 집만 그랬던 게 아니고 다른 집도 다 그랬던 것 같아요." NASL은 가족을 대상으로 축구 입장권을 팔려고 했고 따라서 자동으로 여성이 이에 포함되게 되었다. "이 방침은 타 종목에서는 시도해본 적이 없는 독특한 마케팅 경향이었어요. 물론 처음에는 그들도 날려버리고 부셔버리는 마초(macho)적 게임으로 축구를 선전했죠. 당연히 표는 안 팔렸구요.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실망스럽다는 듯 이런 말을 내뱉었죠. '뭐야, 이건. NFL이 아니잖아.'" 결론을 말해야겠다. 1991년 중국에서 미국 대표팀은 사상 최초로 여자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나는 캘러웨이 브리지워터 벌링-마누엘과 모두 전화로 대화를 나누었다. 전화는 전 세계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전화를 통해 만난 적도 없는 낯선 사람에게 솔직한 인터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미국인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발견했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이름 모를 거리들을 터벅터벅 걷고 난 후 LA에 도착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늘어붙어 있어야 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전화로 인터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베이징에서 우승 트로피를 높이 들어올렸던 당시 미국 대표팀 주장 에이프릴 헤인리치스(April Heinrichs)와 연락이 되었다. 그녀는 메릴랜드 대학에 있었다. 이 나라에서 최고 수준의 여성 축구가 펼쳐지는 곳은 바로 이와 같은 대학들이다. 헤인리치스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여기서 여자팀 전임 코치로 있습니다. 제 직업이니까 존재 이유라고도 할 수 있겠죠. 저를 도와주는 전임의 보조 코치도 있고, 8,0000달러 이상의 예산도 우리 팀에 배정되어 있지요." 나는 그녀에게 영국 TV 연속극 얘기를 했다. <여감독 The Manageress>이라는 제목의 드라마인데, 남자 프로팀을 감독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로, 성차별에 맞선 투쟁과 헌신적 노력으로 주위의 존경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헤인리치스가 그 드라마에서 일체감을 느꼈을까? "절대로 아닙니다. 나는 29살이에요. 나는 이 나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여성 체육인의 1세대에 속합니다. 나보다 10년이나 15년 연상의 선배들과 얘기를 해보면, 그들은 현실 경험에서 받은 상처들이 있을 겁니다." 이 말을 통해 나는 미국 페미니즘의 초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연대를 추산할 수 있었다. 미국 여자 대표팀의 월드컵 우승으로 페미니즘 운동이 영향력을 더욱 넓힐 수 있었던 것일까? "글쎄요 ." 헤인리치스의 대답은 주저하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사과했다. "어쨌거나 계속해서 멋진 플레이와 득점을 보여주셔야겠죠." "페미니즘과는 별도로, 당연히 그래야죠."
그녀가 영국과도 맞서 싸운 적이 있었을까? "시합을 해본 적이 있어요. 작은 나라인데도 훌륭한 선수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죠. 훈련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주 모이는 것도 아니잖아요. 몸 관리를 잘 하는 건 더더욱 아니구요. 우리에게 없는 것을 그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이 이 사태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주말마다 TV로 방송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남자 축구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 말이예요."
미국에서 축구가, 그리고 아마도 특별히 여성 축구가 중간계급의 운동이라는 것에 그녀가 동의했을까? "아닙니다." 아니라구? "아닙니다. 미국에서 축구는 중상계급의 스포츠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불행히도요." 잠시 후 그녀가 말을 보탰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에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왜일까? "이 분야에서는 훈육이 강조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950년 월드컵 대회에 출전한 거의 대다수의 미국 선수들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출신이었다. 사실 세인트루이스는 이렇다 할 축구 문화를 가지고 있는 도시는 아니었다. 대표 선수가 이 도시에 편중된 진짜 이유는 미국 축구협회가 이 도시에 있었고, 또 협회 재정이 너무 빈약하여 선발 위원을 각지에 파견할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 알다시피, 1950년 미국 대표팀은 잉글랜드를 1대0으로 격파했다. 그러나, 귀국할 때 그들은 비행기 두 대에 나누어 타고 돌아와야 했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환영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한 선수의 아내뿐이었다. 이 여성도 늦게 돌아오는 남편의 바가지를 긁기 위해 공항에 나온 것이었다.
엘살바도르와 덴마크의 시합 다음날 태평양을 내려다보는 산타바바라의 한 호텔로 당시의 미국 대표팀을 찾아갔다. 레드라이언호텔은 내게는 너무 비쌌다. 그래서 4~5마일 떨어진 변두리에다 방을 하나 잡아야 했다. 사실 그 호텔도 내게는 무리다 싶을 정도로 좀 비쌌다. 나는 해변을 따라 레드라이언호텔까지 걸어갔다. 히스패닉 몇 명이 해안에서 공을 차며 노는 게 보였다. 태평양에 연접한 아담한 아열대의 학원 도시 산타바바라--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도 이곳에 산다--는 축구처럼 거칠고 격렬한 경기를 하기에는 너무나 안온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딘 링크(Dean Linke)와의 약속에 한 시간을 꽉 채워 늦게 레드라이언호텔에 도착했다. 그는 미국의 홍보 담당관이었다. 그의 비서가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딘이 나를 직접 맞이하지 못해 몹시 유감스러워 했다고 했다. 그리고 축구 클리닉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뜨는 것을 양해해달라고 전해 왔다. 한편으로 그는 준비해둔 보도자료가 유용하게 쓰이길 바랐다. 비서가 약간 큰 백과사전만큼이나 두꺼운 자료 뭉치를 내게 건넸다. 미국에서 월드컵을 치르는 것은 브라질에서 월드 시리즈 야구를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브라질 사람들은 빈정거렸다. 축구가 미국 실내 스포츠와 비교해볼 때 별 가능성이 없는 빈약한 대안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미국 축구 리그를 운영했었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다. 미국인들은 심판이 코너킥을 선언해 잠시 경기가 중단되면 그 틈을 못 참고 버거를 사먹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그러나 당시에 나는 그들이 월드컵을 개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그 비서관조차도 월드컵 개최지로서의 산타바바라에 대한 나의 판단에 의견을 같이 했다. "대양과 바로 접한 경기장에 앉아, 다른 300명과 더불어 경기를 관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비록 경기가 형편없었다 해도 담장 너무 해변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일링(sailing)을 하고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기죠." 그 지역 연고의 프로팀은 이미 오래 전에 파산해 없어진 상태였다.
링크가 가고 없었기 때문에 나는 먼저 루마니아팀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들 역시 레드라이언호텔에 묵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현지 매니저를 찾았다. 줄리안 스탄출레스쿠(Julian Stanculescu)라는 시카고에 산다는 루마니아인이었다. 그는 앳된 얼굴에 붙임성 있는 인상이었다. 그가 머무는 방 마루에서 한 자루의 축구공이 보였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진짜 국제적 수준의 축구 선수들이 가지고 연습했을 공이었다. 줄리안이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공을 하나 꺼내 발 아래로 이리저리 굴렸다. 줄리안은 종교 집단의 안내책자 같이 생긴 것을 내게 건네며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 책자 표지에는 두 사람의 사진이 있었는데, 한 명의 턱수염만 빼면 두 사람 다 줄리안과 너무나 흡사했다. 그 소책자에는 미국 축구 학교(American Soccer Academy)의 취지가 실려 있었다. 사진 속의 인물도 한 사람은 줄리안(부회장)이었고, 턱수염을 한 사람은 Dr. 빅토르 I. 스탄출레스쿠(Victor I. Stanculescu, 회장)라는 인물로 그의 아버지였다. 줄리안은 자신과 Dr. 빅토르가 바비 롭슨(Bobby Robson)과 절친한 친구 사이라면서 그들의 선의(bona fides)를 확인시켰다.
나는 공 튀기기를 계속했고 줄리안은 수준 이하의 저질 농담을 마구 뇌까렸다. 잠시 후 두 명의 음식 담당자가 아침식사로 루마니아팀에게 무엇을 제공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왔다. 이 얼마나 황홀한 매력인가! 이 국제적인 축구 스타들은 아침식사로 무엇을 먹었을까? 루마니아 선수들은 오믈렛과 아마도 시리얼을 달라고 했던 것 같다. 팀 주치의만 부쿠레슈티식 햄과 달걀 요리를 주문했다. 단 마실 물만은 반드시 밀폐된 용기로 제공해 달라고 줄리안은 강조했다. 직전에 루마니아팀은 남아메리카에서 막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물을 잘 못 마셔 배탈이 난 선수들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더이상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곧이어 줄리안이 나를 데리고 루마니아팀 코치 코르넬 디누(Cornel Dinu)를 찾으러 갔다. 디누는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가자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줄리안에게 딱딱거렸다. 나는 1시간 동안이나 로비에서 기다리면서 미국과 루마니아 대표 선수들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한 루마니아 선수가 특별히 내 눈에 띄었다. 아직 10대인 듯했고, 촌스런 머리 모양으로 볼 때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이 선수는 내가 앉은자리 맞은편 소파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 선수가 가엾게 여겨졌다. 아마도 그는 루마니아에서는 대스타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의 앤디 신턴(Andy Sinton)처럼 말이다. 더구나 루마니아는 아직도 어지간한 축구 강국이다. 그러나 이곳 산타바바라에서 그는 외톨이였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사회적 지위가 나보다 훨씬 더 낮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영어를 할 줄 아는데다가 사커 아메리카 기자도 몇 명 알고 있었다. 반면에 그는 아마도 조그만 클럽에서 뛰고 있었을 것이며 대표팀에도 막 합류한 신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고 확신한다.
줄리안이 다시 내게 와서 디누가 미안해하며 이제 나하고 얘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는 이미 아주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한 시간을 더 기다렸다. 기자들은 많은 시간을 기다리는 법이다. 드디어 디누가 나타났다. 키가 컸고 얼굴은 얽어 있었다. 그가 자리에 앉았는데 시선을 내게 주지 않고 딴곳을 바라보았다. "이 친구가 바로 루마니아에서 전설과 같은 인물이죠." 통역을 해주는 줄리안이 다시 내게 확인해주었다. 디누는 선수 시절 국가간 A매치에 75차례나 출전했다. 차우세스쿠 몰락 이후 그는 한때 체육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곧 사임하고 국가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나는 그 이유를 물었다. "정치와 축구 사이에서 나는 축구를 선택했죠." 그가 머뭇머뭇 대답했다. 그도 각료 생활이 더 편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긴장감이야말로 우리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죠."
루마니아의 축구 상황은 어떠했을까? 그는 골빈 클럽 대표들을 비난했다. 당연히 경기장을 찾는 관중수도 급감했다. "전에는 축구가 모든 루마니아 국민의 양식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딴데 쏠려 있습니다." 과거 차우세스쿠 통치기의 호시절을 아쉬워하는 한 축구인의 외침이라고나 할까!
남아메리카 여행은 어땠냐고 물었더니 그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한 에이전트가 이 여행을 주선했는데, 아, 도대체 이 작자가 모든 일정을 자기 편리한 대로 잡아버린 겁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루마니아팀은 아르헨티나에서 파라과이 에콰도르 페루에 이르기까지 끝도 없이 날아다녀야 했다는 것이다. "한번은, 며칠씩 계속 여행한 상태에서 예정된 경기 시작 몇 시간 전에야 겨우 현장에 도착한 적도 있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로 오기 위해 LA행 비행기를 탔는데, 이게 웬걸, 메히코시티에 중간 기착하더니 우리에게 다음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내리라는 겁니다!" 이런 일은 루마니아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미국팀이 인근 대학에서 연습하는 것을 구경하러 갔다. 대표팀보다 먼저 그곳에 도착한 나는 긴장한 학생들과 더욱 긴장한 대학팀 코치와 함께 선수들을 기다렸다. 그들은 모두 오렌지를 들고 있었다. 나도 한 개를 얻었다.
미국 선수들이 도착해 훈련을 시작했다. 이윽고 연습이 끝났는데, 밀루티노비치 감독을 포함해 몇 명 선수들이 철수하지 않고 한 쪽 골문 앞에서 노닥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나한테 공을 차보라고 했다. 나는 프로 선수들이 킥 하나도 세심하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밀루티노비치의 바나나킥을 잡으려고 했는데 회전이 많이 걸려 손에서 빠져 나가버린 것이었다. 그가 보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중에 대표팀 공격수 피터 버미스(Peter Vermes)에게 미국팀이 어떤 성적을 거둘 것으로 예상하느냐고 물었다.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죠. 저로서는,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으면 좋겠어요."
다시 레드라이언호텔. 밀루티노비치는 호텔 로비의 소파에 큰대자로 드러누워버렸다. 내가 녹음기를 면전에 갖다대고 미국 기자들은 그의 발치에 몰려있었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별명이 두 개 있다. 기적을 일구는 사나이(Miracle Worker)와 보라 볼[Bora Ball, '보라'는 밀루티노비치의 이름으로 아드리아해에서 계절적으로 부는 차가운 북동풍을 가리키기도 한다]이 그것들이다. 기적의 사나이 부류들이나 대다수 영국 감독들과는 달리 그는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다. 기자들하고도 격의 없이 지내는 편이다. 사커 아메리카 에서 일하는 영국인 던칸 어빙(Duncan Irving)이 밀루티노비치와 처음 만나 악수한 얘기를 내게 해주었다. 던칸이 손을 꽉 쥐자, 밀루티노비치가 더 세게 손을 잡았다. 이에 질세라 던칸도 다시 더 힘을 주었고, 밀루티노비치도 악력을 더욱 발휘하여 이에 응수했다. 던칸이 마지막 힘을 다했다. 그러자 밀루티노비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하! 당신 마피아로군!" 그는 디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만약 그레이엄 테일러(Graham Taylor)가 자신의 홍보요원을 내보내고 이 세르비아인을 고용했었더라면 아마 지금도 영국 감독으로 있을지 모를 일이다.
밀루티노비치는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스위스 메히코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그리고 지난 두 차례 월드컵에서 메히코와 코스타리카를 감독했다. 코스타리카가 1990년 제노바에서 스코틀랜드를 격파한 것은 바로 그의 지도하에서였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열정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파시온(Pasio n)"이라고 그가 스페인어로 말했다. "열정! 당신들은 열정적이지 못해요." 그가 기자들에게 말했다. 그가 미국인 사회에서 어떤 열정의 단서를 보았을까? "미국인들의 문제는, 미국인들에게 문제가 없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열정을 갖기에 미국인들은 고통이 너무 없는 민족이라는 게 그의 요지였다. 미식축구는 3~4시간씩 계속된다. 그러니 팬들이 군것질거리나 화장실을 찾아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국민은," 그는 놀라움을 느끼는 듯했다. "이곳은 미국이죠. 에를 들면, 또, 이 도시 산타바바라를 보세요, 이 호텔도 ." 그러다가 그가 꼬리를 사렸다. "이곳은 미국입니다. 다들 아시죠? 미국은 정말 독특한 나라죠.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세르비아인이어서 좋은 때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왜 없겠습니까? 당신도 아시겠지만 그런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사람들도 자신이 영국인인 걸 자랑스럽게 여기잖아요. 나도 세르비아인인 게 자랑스럽습니다. 상황이 좋지는 않죠. 그렇지만 우리가 무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가 덧붙였다. "혹시 당신 자그레브[Zagreb, 크로아티아의 수도]에서 왔습니까?" 나는 황급히 아니라고 대답했다. "농담이었어요!" 그도 재빨리 맞받았다. 그가 처음으로 우리에게서 시선을 옮겨 먼데를 바라보았다. 어리석은 질문을 한 게 몹시 후회스러웠다. "내 가족은 보스니아와의 국경 지대에 있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한 1백 야드 정도 떨어져 있을 겁니다. 여기서 바다까지 거리만큼 될까요." 그가 창문 밖을 가리켰다. 그가 곧 화제를 바꾸었다. "선수들과 함께 하는 생활은 정말 즐겁습니다. 내가 스페인어를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죠. 그런데도 사람들이 다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요. 모두가 즐거워합니다." 그는 몇 개 국어나 했을까? "나는 스페인어 세르비아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합니다. 러시아어도 알아듣죠. 불가리아어는 언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영어를 배우려고 노력 중입니다. 생각해보니 네 가지 정도 되는군요. 영어라,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는 법이죠. 네 가지 정도 합니다." 우리가 선수들에 관해 묻자 그는 익살을 떨며 대답했다.
기자 간담회가 끝났다. 미국팀 골키퍼 토니 미올라(Tony Meola)가 나를 찾아 왔다. 링크가 자기를 보냈다고 했다. 우리는 밀루티노비치가 드러눕다시피 했던 소파에 같이 앉았다. 우리 둘 다 23살이었다. 그는 이미 스타였다. 그가 무엇이 한 소년으로 하여금 미국 대표 선수로 활약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했는지 내게 말해주었다. 한때 아벨리노(Avellino)팀의 보결 선수이기도 했던 미올라의 아버지 빈센트(Vincente)는 미국으로 이민와 이발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정착한 곳이 바로 뉴저지주 커니(Kearny)였다. 커니는 미국의 평범한 소도시는 아니다. 그곳에는 1920년대에 대양을 가로질러온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계 주민들이 주로 살고 있다. 그들은 뱃삯을 지불하기 위해 면직물 공장에서 일했다. 또 그들은 축구에 매달렸다. "내 팀 동료들의 아버지들은 모두 영국 어딘가에서 자라신 분들이었죠." 미올라의 말이다. 그리고 운이 닿으려고 했던지 커니는 자이언츠 스타디움(Giants Stadium)에서 불과 3마일 거리에 있다. 미올라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그러니까 바로 NASL의 최고 전성기에 뉴욕 코스모스는 자이언츠 스타디움으로 8,0000명의 관중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미식축구 팀 뉴욕 자이언츠(New York Giants)가 겨우 3,0000명을 동원하고 있었을 때 말이다. 커니의 주민수는 겨우 3,8000명밖에 안 되지만 현 미국 대표팀 선수 3명을 배출했다. 미올라, 탭 라모스(Tab Ramos), 그리고 더비 카운티(Derby County)의 존 하키스(John Harkes)가 그들이다. 미올라와 하키스는 거의 20년 가까이 함께 선수 생활을 해왔다. 그리고 하키스의 아버지가 이들을 지도했다.
이 에피소드를 전형적인 미국의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미국 선수들 중 일부가 겪었음직한 이야기라고 해야 더 적절할 듯하다. 놀랍도록 상세한 링크의 보도자료가 내게 많은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고 페레스의 아버지 할아버지 친척은 모두 엘살바도르에서 프로축구 선수였다. 피터 버미스의 아버지도 헝가리에서 프로 선수였다. 마찬가지로 마르셀로 발보아(Marcelo Balboa)의 아버지는 아르헨티나에서, 탭 라모스의 아버지는 우루과이에서 프로 선수로 활약했다. 반면 캐시 켈러(Kasey Keller)의 아버지는 소프트볼 투수였으며, 에릭 위날다(Eric Wynalda)의 아버지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했고, 브루스 머레이(Bruce Murray)의 아버지는 골프 선수, 크리스 설리번(Chris Sullivan)의 아버지는 권투 선수, 크리스 헨더슨(Chris Henderson)의 아버지는 직장 야구 선수였다.
미국인으로 국적을 바꾼 선수들도 있었다. 페르난도 클라비호(Fernando Clavijo)는 우루과이 출신의 프로 선수다. Janusz Michallik{폴}는 국제 경기에 참가한 폴란드인의 아들로 16살 때 폴란드를 떠났다. 장 아부르(Jean Harbour)는 생화학을 연구하려고 미국에 온 경우로 역시 나이지리아인 국제 경기 출전 선수의 아들이었다. 브라이언 킨(Brian Quinn)은 벨파스트 출신의 게일인으로 축구와 헐링 스타였는데, 한 실내경기의 중간 휴식 시간에 아내와 함께 미국 시민이 되었다. 프리토리아 출신 로이 베흘러(Roy Wegerle) 역시 마이애미의 마리 가르갈로(Marie Gargallo)와 결혼함으로써 미국 여권을 취득했다. (미들랜드[Midlands, 프리토리아가 속해 있는 남아프리카의 한 지방]의 기후가 그들 두 사람에게 견디기 힘든 험악한 한파임은 분명하다.) 두 명 선수가 더 있는데, (독일에서 태어난) 토마스 둘리(Thomas Dooley)와 (네덜란드 태생의) 어니 스튜어트(Earnie Stewart)가 그들이다. 이 두 선수는 모두 유럽인 어머니와 현지 근무 중인 미국 군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둘리는 영어를 거의 못 한다. 그러나,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Sports Illustrated 와 인터뷰했을 때 그는 자기가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미제 자동차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독일에서는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독일에서는 아주 흔한 일이다. 대표팀 내에 히스패닉계 선수가 더 많이 있었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밀루티노비치가 이 나라에서 운영되고 있는 모든 세미-프로 리그에 선발 요원을 다 보낼 수는 없었다.
다음으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자 한 사람과 나는 에릭 위날다를 인터뷰했다. 그는 분데스리가의 자르브뤼켄(Saarbr cken)에서 뛰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목격한 사실인데 그의 자동차 번호판이 'WYNALDA'로 되어 있었다. 금발에 잘 그을린 구리빛 피부를 하고 있는 그를 보면 누구라도 캘리포니아 해변 아이들을 연상할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 그는 이 고장 사람이었고, 독일 TV에도 파도타기 하는 그의 모습이 소개되었다. "파도타기 하는 것처럼 그가 축구를 한다면 우리는 세계 챔피언도 될 수 있을 겁니다." 밀루티노비치가 이렇게 말했다. 밀루티노비치와 위날다는 서로에게 자신들이 알고 있는 독일어를 써먹으며 좋아했다. 위날다에게 우리 기자들과 함께 술집에 가서 한잔 사라고 했던 것도 바로 밀루티노비치였다. 코치에게 루마니아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볼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생겼다. "빌어먹을 루마니아 놈들! 내 관심사는 승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동안 실력 향상을 이루었는지가 중요한 문제죠." 위날다가 계산서에 밀루티노비치의 이름으로 서명을 했다. 계속해서 그는 상당한 액수의 팁도 써넣었다.
그는 우리에게 자기가 아버지 데이브(Dave)에 의해 억지로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데이브 위날다의 부모는 네덜란드인으로, 그는 1970년대 월드컵 경기를 TV 앞에서 울고 웃으며 보냈다. 그는 축구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운동 경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보여주는 경기 방식이 반드시 이에 부합한 것은 아니었다. 에릭 위날다는 1990년 월드컵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 퇴장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밀루티노비치가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자네에게는 규율이 필요해. 그리고 규율을 배우려면 독일이 최고지."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가, 그가 분데스리가에서 첫 시즌을 시작한 2월이었는데, 당시 그는 리그 득점 3위였다. 디 벨트 Die Welt 는 그를 '골잡이 빅 맥(the Big Mac on the Ball)'이라고 불렀다. 그는 FC 자르브뤼켄(FC Saarbr cken)에서 자신의 T-셔츠를 3000매나 팔았고 그의 형 브란트(Brandt)도 유럽으로 건너와 그의 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가 그를 동행취재하고 있었다. 그는 루마니아와의 경기를 끝내고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내가 아는 한 그는 돌아가서 시즌 내내 더이상의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자가 그에게 미국에서 축구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물었다. "미국축구연맹 집행 위원들한테 물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위날다의 대답을 더 들어보자. "그들은 계속해서 축구의 TV 중계방송 시간을 사려고 시도했죠. 야구건, 축구건, 아니면 심지어 테니스도 자기 종목의 방송 시간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이렇게 해서, 내가 부르기 좋아하는 것처럼 축구가 핫도그 스포츠(hot-dog sports)가 되버린 겁니다. 내 말 뜻은 엉덩이 계속 붙이고 앉아 핫도그나 뜯어먹는다는 얘깁니다. 그 작자들은 유럽 축구가 어떻게 돌아간다는 걸 잘 알고 있죠. 그런데도 그들은 담배 연기 자욱한 방에 죽치고 앉아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런 사태를 중단시키기 위해 우리가 무얼 할 수 있겠어?' 작년에 축구 열기가 사그라든 건 바로 폭발적인 비치 발리볼 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유럽에서는 말이죠. 축구팬들이 경기 시간 내내 함께 서 있습니다.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깃발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응원가를 부릅니다. 이렇게 하다가 중간 휴식 시간이 되면 간단히 요기를 하고 다시 관중석으로 돌아가 또 응원을 합니다. 유럽 축구팬들은 미국의 축구팬들보다 훨씬 더 몰두하는 경향이 있죠. 브라질이 경기에서 지면 사람들은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버팔로(Buffalo)가 수퍼볼(Super Bowl)을 놓쳤다고 해서 투신자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가 루마니아와의 시합이 있던 날 아침 우리에게 좀더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밀루티노비치의 합숙 훈련은 그렇게 긴장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출장하고 나서 그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자와 나는 영국 축구팬들이 이 번 월드컵 대회에서 난폭하게 굴 것인가의 문제로 설전을 벌였다. 나는, 돌을 던지며 여기저기 몰려다니는 것은 고사하고 워싱턴이나 LA 도심지에서 영국 팬들을 많이 볼 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쉽게도 나의 예측을 검증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밀루티노비치가 우리에게 말했다시피 산타바바라 시민들은 문제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최근 몇 주 동안 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나이지리아의 경기, 아스날(Arsenal)과 리즈(Leeds)의 경기, 그리고 엘살바도르와 덴마크의 시합을 지켜보았다. 이들 시합과 비교해볼 때, 미국과 루마니아의 경기는 아주 차분했다. 관중석 내 앞에는 한 가족이 휴대용 의자를 펼쳐놓고 앉아 있었다. 킥오프가 시작되기 전에 네 명의 루마니아 축구팬이 국기를 흔들며 그라운드를 질주했다. 관중은 이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루마니아 축구팬들의 돌출 행동이야말로 진짜 '파시온(pasio 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경꾼 중에는 여자도 많았고 아이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은 부쿠레슈티의 그것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미국이 득점에 성공했다. 전반전 내내 관중은 시합에 집중하지 않고 여기저기 왔다갔다 했다. 환상적인 루마니아의 8번 선수 일리에 두미트레스쿠(Ilie Dumitrescu)가 골을 성공시켜 스코어는 1대1 동점이 되었다. 후반전도 내내 점수가 나지 않고 지루한 공방만 계속되자 관중은 관심 없다는 듯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월드컵 대회를 조직하는 일은 분주하고 수고도 많이 들어가는 일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회 조직위원장 스캇 팍스 르텔리에(Scott Parks LeTellier) 역시 바쁜 일정 중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내 전언을 확인하고 전화를 걸어주었다. 나는 산타바바라에서 목격한 축구팬들의 반응을 전하며, 그들이 축구에 대해 일반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는 게 걱정되지는 않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남부 캘리포니아의 현상으로 사실 저로서도 당황스럽습니다. 수퍼볼 경기에서도 3쿼터 중반만 되면 여기 사람들은 썰물 빠져나가 듯 퇴장해버립니다. 이런 현상은 야구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죠. LA 타임즈 의 한 칼럼니스트가 1984년 올림픽 대회를 취재한 기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행사나 경기 중간에 먼저 자리를 떠버리는 남부 캘리포니아인들 특유의 경향은 칼 루이스(Carl Lewis)의 100m 단거리 경주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났다. 결승선까지 2초의 거리를 남겨둔 상태에서 그들은 모두 자리를 떠버렸다.'"
산타바바라에서는 경기가 끝나고 현장에서 디누가 미국 기자들과 즉석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다만 통역을 내켜하지 않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줄리안은 흘겨보았다. 한 미국 기자가 미국팀이 가장 잘 하던 게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줄리안이 디누의 대답을 다음과 같이 옮겼다. "유니폼 하나는 잘 차려입었더군요. 그 친구들이 축구를 제대로 하려면 한 백 년은 더 걸릴 겁니다. 미국인들이 항공모함이라도 가져온다면 겁이 좀 날까요. 그들의 코치는 아주 존경스럽더군요. 유고슬라비아는 훌륭한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했죠. 나 자신 어머니 쪽으로 피를 물려받은 유고슬라비아인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잘 압니다." 이 얘기를 듣자 기자들은 기분이 상한 듯했다. "나는 정말 미국 국민과 그들의 문화, 그리고 민주주의를 존경합니다." 전장관께서 그들에게 다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이 신생 루마니아팀은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라틴 민족은 다음 세대에 대한 믿음이 대단합니다.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은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습니다. 사실 계속해서 우릴 기만해온 것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그리고는 다른 기자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디누가 내게 다가오더니--줄리안이 뒤를 따랐다-- 나에게 자기 명함을 주는 것이었다. "당신이 대단한 전문가이며, 또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이 친구가 생각하는군요." 줄리안이 설명해주었다. 3개월 후에 디누는 해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