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로운 자는 불면의 밤을 지새며 눈물을 흘리고, 그보다 더 외로운 자는 자기의 외로움을 베기 위해 날카로운 劍이 된다. 그보다 더욱더 외로운 자는 마침내 스스로 외로운 악기임을 깨닫는다. 박정대의 시에서 그 악기는 다섯 개의 검에 베어진 한 개의 심장이며, 열 두 개의 촛불이며, 한 척의 흰 돛배이다. 음악이 먼 곳까지 울려가듯 아픈 심장으로, 촛불로, 바람의 돛배로 먼 꿈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박정대의 두 번째 시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다. 그런데 이 시집은 그의 첫 번째 시집인 {단편들}(세계사, 1997)과 쌍생아라 할 수 있다. 꿈에서 내려왔다가 꿈으로 오르지 못한 자([아침가리, 새들이 날아가 죽는 곳])의 떠돎과 외로움은 이 두 권의 시집에서 반복되고 있는 주요 테마이다. 박정대가 등단한 1990년으로부터 시간을 따져보면 그는 10년이 넘게 동일한 테마에 붙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적 주제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 또한 유사함을 보인다. 아니 동일함을 의식적으로 고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자주 구사하는 패러디와 한 편의 시에 담겨 있는 여러 개의 변주들,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단상 형식의 글 모음 등은 이전의 시집과 동일성을 구축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집요함이 지루함이 아니라 절실함으로 공감되는 까닭은 그의 반복적 상상력이 단순한 반복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내적 혁명을 위해 자신의 슬픔을 스스로 자를 수 있는 '검객'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빠른 劍도 자신의 슬픔은 버히지 못하는 법"([貞陵에는 별이 많다])이라고 劍의 방식을 부정한다. '劍'이 예리한 판단과 의지에 맡겨진 세계라면, 슬픔이나 외로움은 판단과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그는 깨닫고 있는 것이다. 첫 시집 {단편들}은 그것을 알아 가는 과정이며, 그의 두 번째 시집은 다섯 개의 劍으로 베어진 한 개의 심장이 다섯 개의 劍보다 더 끈질긴 '외로움의 악기'임을 발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劍은 악기보다 무력하다. 즉 박정대는 劍으로 베어낼 수 없는 것들을 음악으로 풀어내야 함을 이 시집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음악은 판단이나 의지보다 더 자유롭게 이곳과 저곳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내적 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집에 유독 여러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진 음악과 동일한 형식을 지닌 시가 많음은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2.
판단과 의지, 사유와 인식이 아니라 음악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는 박정대의 시어를 빌어 표현하자면 '사랑'이며 '꿈'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로서 존재한다. 시인은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가슴속에 품고 꿈의 세계에서 현실로 귀환한 것이지요"([아침가리, 새들이 날아가 죽는 곳])라고 말한다. 그 현실은 이전의 시집 {단편들}에서는 잔인한 추억, 폐허로운 세월, 버림받은 오후로 표현되며, "내 가슴으로부터 한번 떠나간 애인은 영원히 복구되지 않았다"([물질적 황홀 8]), "황혼녘의 엽서는 어둠에 지워졌으니/우리들의 사랑은 진부했구나"([두 달 정선]), "기억의 처음에서 끝까지 아아, 나는/추억도 없는 길을/가고 있었던 것이다 "([추억도 없는 길])라고 말해진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현실'이다. 상실감으로 가득한 현실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박탈되었음을 뜻하며, 결국 자기 부정을 통해서 자기를 설명할 수밖에 없는 그런 세계 속에 시인을 유폐시킨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위하여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위하여
나는 스스로 감히 글을 쓴다
―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하여] 부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인식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죽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기 부정으로서의 존재 확인이 아무것도 아닌 '나'를 넘어서게 하는 내적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순간 이미 존재는 적어도 그 이상이 되는 것이다. 無化된 자신을 "꿈꾸지 않는데도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꿈꿀 수 없는데도 나는 살아 있는 것이다"([내 생애 마지막 개기일식])라고 거듭 확인하면서 그는 스스로를 다시 명명한다.
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좀 궁금해하겠지만, 나는 정해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내 이름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중략)
그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어지럽지 않다. 견딜 수 있다. 내가 아픈 건 네가 아프기 때문이다. 갑자기 숲의 음악 소리가 커졌다. 바람이 아프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바람의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나무들이 아프기 때문이다. 누군가 끊임없이 술잔을 비운다. 술잔 밖 세상이 아프기 때문이다. 나는 어지럽지 않다. 견딜 만하다. 그러나 네가 아픈 건 내가 여전히 아프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 [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 부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가 '정해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나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 이전 시집과의 또 다른 점이다. '정해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 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편재'하는 나를 의미한다. '당신'이 부르는 것에 따라 나는 그 모두일 수 있는 것이다. '내 이름은 당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수동적 존재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것이 타자의 아픔에 도달하는 절묘한 방법임을 이 시는 말하고 있다. 숲과 바람과 나무가, 술잔과 세상이 아픔으로 상생하듯, 나는 너와 아픔으로 상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가 아니라 나는 너인 것이다. 내가 너의 아픔으로 비벼지며 서로의 '경계'를 넘어가려 할 때 나는 비로소 음악 소리를 낸다. 그 음악이 폐허 위에 "새롭게 이 세계의 지도를 그려"([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가는 방법인 것이다.
3.
그러나 음악이 되려하는 나를, 아니 음악이 되어야만 하는 나를 그대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 "문장 속의 생애는 끝나지 않고 생애 속의 문장은 여전히 읽혀지지 않"([내 생애 마지막 개기일식])는 것이다. 즉 나는 꿈으로 가는 도정에서 수없이 많은 마음의 촛불을 꺼뜨리고, "어디로도 가려 하지 않는/바람과 배 한 척"([달])을 밀며 여전히 "차갑고도 딱딱한 밤"([뼈아픈 후회])을 헤매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정을 그는 길고 긴 밤으로 기록한다.
그래서,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집을 덮고 나니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 다음에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라는 노래를 들었다, 밤은 참 길기도 하다, 빅토르 최의 노래를 더 들으며 세 대의 담배를 연거푸 피웠다, 재채기가 나고 콧물이 났다, 휴지로 코를 풀었더니 눈물이 났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을 생각했다, 밤은 참 길기도 하다, 아직 기타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 [그리고 그후에 기타의 눈물이 시작되네] 부분
마침표가 없는 밤의 길, 끊임없는 쉼표로 지속되는 밤의 공허 속에 시인은 시와 영화와 노래를 퍼담는다. 로르카와 에밀 쿠스트리차와 전인권과 빅토르 최와 기타 등등의 것들은 그의 외로움의 하중과 비례하는 밤의 백일몽들이다. 그것들은 '나'의 '흰 돛배'가 방랑했던 페루이며, 혜화灣이며, 은척이며, 아침가리이며, 모래郡이며, 해미읍성이며, 부석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박정대의 화자는 늘 어디론가 가고 있으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그는 "우리는, 우리들 가슴속의 내륙에서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었다"([나는 음악처럼 떠난다])고 고백한다. 그것이 그의 음악이다. "나뭇잎들이 보내주었던 그 한 척의 음악은 이제 더 이상 나에게 당도하지 않네, 나는 지금 미완의 자세로 앉아 담배 연기만 자욱히 날리며 내 방의 새벽 공기를 더럽히고 있는 불모의 사막이네"([아침가리, 새들이 날아가 죽는 곳])라고 고백한다. 그것이 그의 음악이다. "나는 나를 버리기 위하여 이곳에 왔다"([지구의 북호텔에서])고 그는 고백한다. 그것이 그의 음악이다.
그의 음악은 먼 곳으로 풀려나 '너'의 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직 '허공'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매번 당도하는 곳은 "허공에 매달린 항구"([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이며, "텅 빈 그릇처럼 캄캄해져 오는 밤"([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이며, "자꾸만 텅 비어가는 링거병 같"([겨울에 해미읍성에 갔었네])은 겨울 하늘이다. 즉 그의 음악은 가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그러나 갈 수 없는 비애 속에서 탄생한다. 따라서 그의 음악은 '너'와의 화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홀로 연주되는 푸르디푸른 추운 음악이다. 외로움과 슬픔은 그가 말하는 음악과 동일어인 것이다. 부재와 상실이 '나'를 음악이 되게 하는 것이며, 그것이 또한 부재하는 '사랑'을 기억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러니 그의 음악은 아이러니하게도 불멸의 '사랑'인 것이다. 이 음악 속에서 이미 상실한 추억과 사랑은 불멸한다. 따라서 "떠날 때는 한꺼번에 모두 비명을 지르며 떠나"([겨울에 해미읍성에 갔었네])간 애인은 "내가 두 눈이 멀어/음악만이 나를 끌고 가는 곳"([은척에서])에 '나'와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음악은 홀로 연주되는 푸르디푸른 추운 음악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함께 사랑을 확인하는 연주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세운 고통과 꿈의 '망명정부'이며 '격렬비열도'이다. 아직도 그의 '격렬비열도'엔 음악 같은 눈이 내리고, 흰 돛배가 겨울 바람을 밀고 가고, 열 두 개의 촛불이 불타고 있다. 그러는 한 그는 외로울 것이며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리나 그러는 한 그는 불멸하는 사랑과 추억을 간직할 것이다.
4.
박정대의 두 번째 시집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가는 '밤의 여행자'의 노래이다. 길고도 긴 밤처럼 그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여행지는 이곳과 저곳이 단절되어 있으면서 또한 완강히 이어져 있다. 아무도 없으면서 '너'로 가득하다. 과거이면서 현재이다. 외로움이면서 사랑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음악'이라는 마음의 상징물이다. 마음에서 넘쳐나는 '음악'은 '劍'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이 시인의 내적 힘이다. 그것으로 그는 내려왔던 꿈의 사다리를 다시 오르고 있는 중이다. 그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것이다.
그 자신 '경계'에 거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목소리는 리차드 브라우티건과 황지우와 로르카와 짐 자무쉬와 보르헤스와 폴 발레리와 로맹가리와 백석과 체 게바라와 뒤섞여 있다. 풍자나 비판이 아니라 인유에 가까운 다성성으로서의 패러디 방식은 이것과 저것을 해체하고 모든 것이 넘나들 수 있는 경계적 사유를 반영한다. 그것은 음악이 구획된 공간을 벗어나듯 상상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패러디는 한 시인의 상상력의 풍요를 말해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빈곤을 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패러디는 근본적으로 창조적이기보다 해석적인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에 박정대의 아름다운 상상력이 침윤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