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녀는 기녀가 아니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김유신이 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말이 길을 따라 다다른 곳은 사랑하는 여인 천관녀의 집이었고, 김유신은 자신을 이곳으로 이끈 말의 목을 베고 맙니다. 이를 두고 유신참마(庾信斬馬)라고 합니다. 그런데 김유신은 왜 이토록 단호하게 천관녀를 버린 것일까? 신라의 장군이자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 삼국시대의 정통역사서인 삼국사기는 모두 50권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10권이 인물들의 전기를 기록한 열전인데, 여기엔 궁예, 견훤, 장보고, 연개소문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의 전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3분의 1인 3권이 김유신 열전입니다. 김유신에 대한 많은 기록 중 그의 인간적인 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하면, 천관녀와의 사랑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천관녀는 김유신이 사랑했던 여인입니다. 하지만 김유신은 자신을 천관녀의 집 앞으로 이끈 말의 목을 벨 정도로 모질게 천관녀를 버립니다.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이야기는 신증동국이란 세권의 책에 기록되어있는데 모두 고려중엽 이후에 쓰인 것들입니다. 이 책들에 남아있는 내용은 모두 비슷한데 그 중 김유신과 천관녀의 만남에 대한 부분을 보면 "하루는 우연히 계집종의 집에 유숙하였다"라는 한 줄의 기록뿐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기록이 두 사람의 헤어짐에 대해서입니다. 어느 날 김유신을 마주한 어머니는 더 이상 천관녀를 만나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자 김유신은 어머니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하게 됩니다. 기록에 남아있는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이렇듯 간단합니다. 하지만 그 길지 않은 기록 속엔 두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김유신에게 버림받은 천관녀는 머리를 깎고 평생 홀로 살며, 유신을 위해 기도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랑에 대한 기록의 마지막엔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릉 동쪽에 천관사가 있으며, 그 절이 천관녀의 집이다." 그 천관사가 바로 천관녀의 집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의 천관사지자리가 됩니다. 그런데 천관사지에서 기마인물형 토기가 발굴되었습니다. 바로 가야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토기입니다. 이 토기엔 특이하게도 발 앞부분에 발걸이가 새겨져 있습니다. 경주 금령총에서 발굴된 5-6세기의 기마인물형 토기와 분명 차이가 있는 것으로 천관사지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 토기는 덧신처럼 생긴 발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발걸이는 기마인물형 토기의 연대를 추정하는 단서가 됩니다. 경주 황오동 고분에서 유사한 모양의 유물이 발견 되었는데 바로 7세기에서 8세기의 것입니다. 이외에도 7세기의 유물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기와입니다.
이 기와엔 '습비'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경주박물관에서도 이와 유사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안압지에 출토된 기와에도 '습부'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안압지에서 출토된 또 다른 기와엔 한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경주의 행정구역은 양부, 사량부, 본피부, 모량부, 한지부, 습비부 등 모두 6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기와에 새겨진 습비라는 글씨는 바로 이 6부의 이름으로 기와를 만들었던 지역을 표시한 것입니다. 습비부는 신라의 6부 가운데 습비부를 나타내는 것이며, 7세기후반에 만들어진 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김유신이 살던 시대인 7세기의 유물들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천관사지는 김유신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김유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나타납니다. '석편'이죠. 직사각형 모양의 석편은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는데, 석편엔 글씨를 새겼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석편에 새겨진 글씨는 ‘태대각간’. 이는 신라의 최고관직인 태대각간과 같은 의미로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리던 관직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김유신이 태대각간의 자리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유신과 천관녀가 만난 건 언제일까요? 두 사람이 만난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소싯적이라고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정확히 언제쯤일까요?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이 화랑이 된 건 15살 때입니다. 그리고 17살 때 단석산의 중악 석굴에 들어가 기도를 하고 무술을 연마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살에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러니까 15살에 화랑이 되고 17살 이후엔 무술을 연마하는데 에만 열중했으니 그 사이인 16살 즈음에 천관녀를 만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나이에 단호하게 사랑하던 여인 천관녀를 버릴 수 있었을까? 기록에 의하면 어머니의 반대 때문입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김유신을 앉혀놓고 공명을 세워 군친의 영광이 되어야하거늘, 술파는 아이와 음방에서 유희를 즐기고 있다며 야단을 칩니다. 그런데 최근 이 기록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천관녀가 기녀가 아니라는 새로운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과연 천관녀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최근 천관녀가 기녀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천관사가 있는 위치 때문입니다. 천관사 뒤편으로 자리하고 있는 야트막한 산이 도당산입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궁 남쪽에 정청을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궁 남쪽의 궁은 곧 월성을 말하는 것이고 바로 이 자리가 궁궐의 남쪽에 해당되기 때문에 바로 천관사 자리가 도당을 베풀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고대에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항상 제사를 지내고 어떤 신령스러운 곳에서 했던 걸로 미루어 도당이라는 의미가 종교적인 문제와 관련되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실제 경주의 지리지인 동경통지를 보면 신라시대 정사를 논의하던 곳은 신령스러운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도당산은 경주부 남쪽 5리에 있는데 신라는 왕의 즉위의례를 반드시 이곳에서 했다" 즉 왕이 즉위한 뒤 신께 제사를 올리는 즉위의례를 도당산에서 했다는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신라시대 즉위의례를 했던 곳은 도당산의 어디였을까?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신궁의 제사기록을 살펴보면 모든 제사가 왕이 즉위한 다음해에 거행됩니다. 이는 신궁에서 즉위의례가 거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도당산에 신궁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가 신궁자리였다는 걸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을 보면 사제사, 천관사, 천은사가 있습니다. 바로 하늘과 관련된 절터가 있고 천관사, 사제사가 다 도당산성을 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가 우리의 고유한 토착신앙의 중심부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신성한 곳에 기녀의 집이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더욱 짙게 하는 것이 천관녀라는 이름입니다. 말 그대로 하늘의 관리라는 뜻입니다. 천관이란 중국 주나라 6관의 하나로 천관, 지관, 춘하추동이 있는데 그 중 천관은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제사에 관여할 수 있었을까?
삼국사기에 보면 시조신 박혁거세를 모시는 제사를, 박혁거세의 친누이인 아노가 주관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자가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화랑의 기원을 통해서도 여자가 제사에 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화랑의 전신은 원화였습니다. 진흥왕 37년 원화를 뽑았는데 남모와 준정이라는 여자였으며 이들은 제사를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여자 대신 남자를 뽑고, 그 이름도 원화가 아닌 화랑이라고 했습니다. 원화에서 화랑으로 바뀌는 건 진흥왕 때인데 사기에 천관녀가 나오는 건 진평왕 조금 지나서입니다. 이때는 원화가 폐지되고 화랑으로 바뀌게 되었지만 원화와 같은 여성이 제사를 담당하는 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고 하나의 유제로 남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김유신이 사랑했던 천관녀는 기녀가 아니라 제사를 담당했던 여사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관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책에서는 왜 천관녀를 창녀, 천관녀의 집을 창가라고 표현했을까? 그건 기녀 즉 기생의 기원이 바로 여사제였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정일치 시대엔 나라의 최고 지위에 여사제가 있었지만 제정이 점차 분리되면서 그 지위가 낮아져 여사제로 변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이 책들이 쓰인 때는 고려말과 조선시대입니다. 유교적인 입장에서 여사제를 낮게 평가해 기녀로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한 가지의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 책에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어머니가 천관녀와의 만남을 반대했던 이유는 분명 기녀와 어울려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천관녀가 기녀가 아니라면 어머니가 천관녀와의 만남을 반대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김유신의 출신배경에 있습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국 왕족의 후예입니다. 법흥왕 19년 금관가야의 구해왕이 가족을 데리고 투항해 왔는데 구해왕의 증손이 김유신입니다. 이렇게 신라에 복속된 구해왕은 상등의 관위를 받는데 이때 상등의 관위는 높은 직위를 의미합니다. 당시 김유신가문은 진골귀족으로 편입됩니다. 신라는 엄격한 신분사회로 진골, 육두품, 오두품 등으로 신분을 구분해 놓았는데 신분에 따라 오를 수 있는 관등과 관직이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신라의 신분제도가 얼마나 엄격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최치원이라는 인물입니다. 최치원은 12살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는데, 그 이유는 6두품의 신분으로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아찬이상의 벼슬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라에 복속된 김유신 가문은 신라 최고의 신분인 진골귀족에 편입되었으나 그들은 신라의 정통 진골귀족 집단과는 달랐습니다. 어느 집단이고 새로운 집단이 기존 집단에 편입될 때 배타성이 작용하게 되는데 김유신의 증조부인 구해왕도 신라에 투항해 진골귀족으로 편입 되었으나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은 숙홀종이라는 진골귀족, 즉 진흥왕 집안의 딸인 만명부인과 결혼을 하려했으나 여타 진골귀족의 반대로 도망을 가서 결혼 후 김유신을 낳은 것입니다. 그렇게 신분의 한계를 안고 태어난 김유신이었기에 당시 하급귀족에 불과했던 여사제인 천관녀와의 만남을 지속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사제였던 천관녀와의 사랑이 이뤄질 수 없었던 데엔 또 한가 지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법흥왕 때 이차돈이 순교하면서 신라사회엔 불교가 공인되게 됩니다. 이후 진흥왕 때에 불교진흥책을 펴게 되는데 당시 진흥왕은 불교에 매료되어서 스스로를 전륜성왕이라 자처하고 두 아들에게도 동륜태자, 사륜태자라는 불교식의 이름을 붙일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김유신이 살던 진평왕 때에 와서는 화랑에도 불교신앙이 뿌리내리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김유신이 이끌던 낭도들의 무리인 용화향도입니다. 이는 불교의 미륵신앙을 추구하던 단체로서 이런 분위기에서 토착신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여사제와 만난다는 것은 출세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유신의 어머니가 둘 사이를 갈라놓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첫댓글 유신참마.
천관녀.
당시에 신분제도 목숨이지요.
6두품의 최치원 결국 신분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지요.
천부경이 눈에 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