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귀지 제거에 집착한 까닭은?
[낮은 한의학] 영조의 이명
영조, 귀지 제거에 집착한 까닭은?
가끔 이명이나 난청으로 내원한 환자와 상담을 하다 보면, 귀지 얘기를 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하도 이명이나 난청이 심해서 귀지를 제거했더니 효과를 보았다는 얘기다. 어떤 환자는 귀지를 제거하는데 병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되레 귀 외이도에 염증을 안고 오는 경우도 있다.
사실 귀지는 만만하게 볼 인체의 배설물이 아니다. 귀지는 귀를 보호하는 점액이 귀를 덮고 있는 피부에서 나온 각질, 외부에서 들어온 먼지 등과 결합해서 만든 것이다. 귀지는 외이도를 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염증이 생기는 것을 사전에 막는 긍정적인 기능이 있으니 함부로 제거해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이런 귀지가 비정상적으로 커져서 외이도를 막는 지경에 이르면 난청이 생기거나, 특정 자세에 따라서 고막을 자극해 이명(귀울음) 증상을 유발한다. 즉, 귀지를 제거했더니 난청이나 이명 증상이 완화되었다는 환자의 얘기는 어느 정도 의학적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조선 왕조 실록>을 들여다보면, 영조 때도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영조 때 대비로 모시던 숙종의 세 번째 부인 인원왕후는 난청으로 고생했다. 어릴 때 귀앓이를 하다가 귀지를 파내서 증상이 개선된 적이 있었던 영조는 대비에게 '귀지를 제거하면 이명의 개선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조언한다.
당시 의관 정문항은 귀지를 곡침(휘어진 침)으로 파내서 고친 경험이 많다고 자신하며 나선다. 이 대목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현대 의학에서도 귀지를 제거할 때 글리세린 용액을 넣어서 녹이거나, 귀에 의학용 집게(forceps)를 넣어서 제거하기 때문이다. 정문항의 곡침은 사실 조선 시대의 의학용 집게였다.
귀지를 제거하는 방법 중에는 납지구(蠟紙灸)도 있다. 귀에 한지를 말아 넣고서 불을 붙이면 귀 안과 밖에 압력 차이가 생긴다. 결과적으로 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바람이 부는 효과가 나타나는데 이 때 귀속의 이물질이 일부 배출되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듣고서 '아!'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어 캔들(ear candle)'과 같은 원리다.
실록을 보면 영조 자신이 직접 이 방법을 써 보고 나서 인원왕후에게 권했다. 그럼, 영조의 납지구 후기는 어땠을까?
"처음 하고 나서는 먹먹해 귀가 먹은 것 같았는데, 이튿날이 되자 청력이 좋아진 것 같았다. 날이 더워져 7장이나 하기는 부담스러우니 2장만 먼저 대비 전에 권해보는 게 어떠냐?"
귀앓이 vs. 코골이
의관들은 인원왕후가 약과 침으로 난청 증상이 개선 된 만큼 굳이 위험한 납지구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진언하며, 실제 치료에는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화는 영조 자신이 귀앓이 즉, 이명과 난청 때문에 계속해서 고통스러워했음을 방증한다. 그런데 영조의 병은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박지원이 설명부터 살펴보자. 박지원은 <연암일기>에서 이명과 코골이를 이렇게 비교했다. 이명은 자신만 아는 "내향적 괴로움"이고 코골이는 다른 사람만 괴롭히는 "외향적 괴롭힘"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고서 새삼 무릎을 치면서 그의 천재성에 감탄했다.
한의학의 사유를 염두에 두면, 코골이는 외향적이고 때로는 몸까지 비대한 열이 많은 사람이 잘 걸리는 양적인 성향의 질병이다. 반면에 이명은 내향적이고 소심해서 속을 끓이는 사람이 잘 걸리는 음적인 성향의 질병이다. 영조야말로 그의 삶이 말해주듯이 전형적인 후자였다.
영조의 정치 이력은 파란만장의 연속이었다. 어머니 숙빈 최 씨가 천출인 무수리였으며, 왕위 계승에서도 이복형인 경종 아래에서 힘없는 왕세제일 따름이었다. 경종의 어머니가 장희빈이었고, 장희빈의 죽음이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 씨의 고발로 야기된 점을 기억하라. 그를 둘러싼 궁중 암투는 말 그대로 사느냐, 죽느냐의 살얼음판이었다.
정치 이력뿐만 아니라 건강도 최악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 또 정조와의 갈등을 부각하려고 그를 강하게 그리는 드라마가 많다 보니, 많은 사람은 영조가 기골이 장대한 강골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조선 왕의 평균 수명이 47세 정도였던 반면, 영조가 83세 천수를 누린 것도 이런 편견을 부채질한다. 하지만 영조는 평생 약으로 살아간 약골이었다.
영조가 평생 앓은 질병이나 복용한 약물은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가장 애기중지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았던 처방은 바로 '이중탕'이다. 이 처방은 손발이 차고, 위통 복통을 자주 호소하며, 대변은 설사거나 무르고, 소변도 옅은 색으로 자주 보거나 보기 힘들어하는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것이다.
영조는 이 이중탕 처방에 녹용과 우슬 등의 약재를 더해 '건공탕'이라고 부르며 평생을 가까이하면서 늘 복용하였다. 약 이름만 봐도 영조가 얼마나 애착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죽하면 약 이름을 '나라를 건국한 공로가 있다'고 붙였겠는가? 아무튼 영조가 천수를 누렸으니, 이 약은 이름값은 한 셈이다.
첫댓글 잘 보고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