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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운염
이메일 ; un-yeom@hanmail.net
장소 ; T.I.A.M.O.〃백묘[白猫]
운염 백카 5주년 이벤트 응모 소설
-무궁화-
날마다, 날마다 지고 피는 이름.
지고 피는 해를 바라보는 이름.
*무궁화*
교문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여름을 나타낼 사진을 찍어서 이번 공모전에 낼 생각이었다. 초점을 잡고 거리를 찍으려는데, 내 카메라의 초점에 익숙한 사람이 잡혔다. 카메라를 천천히 내리고 그를 자세히 보았다. 두 명이었다. 한 명은 그 녀석이고, 그 옆의 여잔… 연인인 것 같다. 가만히 눈을 뜨고 나에게 다가와 서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좋아 보이는 얼굴. 나와 사귈 때보다 더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입. 그리고… 더 이상 나를 담고 있지 않는 눈까지. 넌 정말 행복해 보이는구나.
고개를 숙였다가 작게 미소를 짓고 고개를 들었다. 녀석은 자신의 새로운 연인의 손을 매만지면서 작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녀석의 새 연인도, 녀석도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와 헤어진 지 1 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 새 연인이 생길만 했다. 난 별로 녀석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녀석을 좋아했다.
"좋아 보이네."
나도 모르게 녀석에게 말을 건넸다. 질투였던 것일까? 나와 지낼 땐 이렇게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하지 않았기에 섭섭한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지금 이 순간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건, 부럽다는 것이다. 녀석의 새 연인이.
"응.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 너는?"
무슨 의도로 물어보는 것일까? 녀석이 나에게 하는 행동은 늘 다정해서 나도 모르게 환상을 품고 만다. 마치 TV속 연예인이 다정한 행동을 하면 좋아하고 행복한 팬들처럼. 녀석은, 옛 연인에게 안부를 물어보는 것일까? 아니면 동정일까? 아니면… 자신은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나에게 으스대는 것일까? 혼란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조금 흔들었다. 지금은 내 알 바가 아니지.
"뭐… 별로. 과제에 리포트 쓰기에 바쁘거든."
생활에 충실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녀석과 헤어지고 집에 와서 일주일을 꺽꺽 울었었다. 내가 잘못했었단 것은 알고 있기에 그랬었다. 일주일을 울고 난 다음에 난 정말 팔팔했다. 나 자신도 놀랄 정도의 회복력이었다. 휴학했던 학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난. 하지만 학교에 다니고 3일 후, 녀석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녀석이 나와 헤어지고 밥도 먹지 않고 울고 있다고. 밥 대신 술을 주식으로 삼고 있다고. 그리고 나에게 다시 녀석의 곁으로 돌아와 달라고 부탁했었다. 하지만 난… 그걸 거절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녀석을 만나지 않았다. 가끔 녀석을 집 앞에서 본 것 같았지만, 모른 척 했다. 그리고 일주일 전, 녀석은 갑자기 잠적했다.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저 녀석의 친구에게 그 소식을 듣고 '날 많이 사랑했었구나, 그 애.' 이 생각뿐이었다. 모질게 그를 떠나보내고 일주일 그를 못 잊었던 것뿐이었다. 난 그에게 일말의 감정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근데, 오늘. 내 앞에 나타나서 연인과 웃고 있는 이 녀석은 무엇일까?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리포트얘기까지 꺼낸 것은. 그것은 녀석에게 '넌 날 잊지 못하고 방황했지만, 난 널 잊고 이렇게 잘 살고 있었다.' 는 것을 알리고 약간의 자부심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 확실히 그 이유였다.
"그렇구나. 잘 살고 있었네."
그 애의 눈이 가시가 돼 다가온다. 나를 질책하는 눈빛. 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게 따갑게 다가오는 눈빛에 벗어날 순 없었다. '난 잘못 없어. 날 못 잊었던 네 잘못이야.' 열심히 변명을 해 보지만, 난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그에게 못된 장난을 했는지. 처음부터 다 내 잘못인 거였다.
"잘 살고 있었어."
다시 한 번 들려온 말에 다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잘 살고 있었지."
"저기… 신유씨… 이 분은 누구……?"
여린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들렸다. 신유의 새 연인이다.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걸 보니, 목소리만 들어도 신유를 향한 사람이 느껴져 눈살을 찌푸렸다.
"너도 들어봤지? 내 전 여자친구. 채다희."
"아… 안녕하세요, 최가연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가연씨. 채다희라고 해요. 능력 좋다? 강신유."
"뭐, 내 진짜 매력을 가연인 알고 있으니까."
"왜 그래… 다희씨 앞에서 부끄럽게."
다정한 말다툼을 하는 두 사람의 앞에 있기 힘들었다. 내 추잡한 질투에 내 자신이 버티기 힘들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눈을 감았다. 정말 이상하다. 아니, 알 것도 같은 마음. 하지만 부정하고 싶은 마음. 정말 싫다. 인정 할 수 없다. 그리고 어차피 다시 꿈꿀 수도 없다. 시계를 보았다. 마침 운 좋게도 강의시간이다.
"강의시간이네, 나간다. 가연씨도 다음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네, 다희씨. 어서 들어가 보세요."
"잘 가라."
"아앙."
착하다. 신유의 새 연인 가연은 너무 착하다. 내 질투가 무색할 정도로 착하다. 바르게만 큰 것 같은 그 올곧은 단아함도 신유에게 애정서린 눈빛을 보내는 것도, 그리고 신유의 옛 연인인 나에게 다정히 대해주는 가연은… 너무도 착해서 질투를 할 수 없다. 이렇게 뒷북을 치는 것 같은 내가 수치스럽다. 강의실에 들어가서 강의를 들었다. 굉장히 중요한 강의였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예전에 신유에게 했던 사람으로선 해야 하지 않았어야 할 장난을 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정말 후회되는 장난.
1년 전,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지만 난 태평했었다. 이미 사진작가로 이름을 날렸고, 한 유명한 대학에서 러브 콜이 들어왔기에 수락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친한 친구들과 모여서 재밌는 일을 궁리하던 참에 내 눈에 보인 게 신유였다. 정말 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고, 한 여자만 바라볼 것 같은 그 순박함이 아이들 사이에서 폭발할 정도의 인기를 끌어 모았기 때문이다. 신유를 보던 나는 아이들에게 '신유의 망가진 모습' 을 보면 어떻겠냐고 물었고, 당연하게도 내 제안은 솔깃했다. 아이들의 열렬한 호응 하에 그 이후로 우연을 가장해서 신유에게 접근했고, 신유와 정말 다정한 연인을 연출하면서 신유의 마음은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수능 바로 전 날 난 신유를 냉정하게 차버렸다.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내게 매달리던 신유를 차갑게 내치고 집에 들어왔었다. 신유와 헤어지고 일주일을 울었던 이유는 그에게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가슴 따위 아프지도 않았다. 전화로 학교에 잠시 휴학한다고 말하고 집에 틀어박혀서 정말 일 주일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친구에게 신유가 수능을 보다가 뛰쳐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나의 일 주일의 그 시간들로 그에게 사죄했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다친 신유가 내 사죄를 받아 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기억에서 신유는 지워졌다. 당연했다. 1년 전이었으니까. 오늘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에 대한 생각, 전혀 나지 않았다. 오늘 신유를 보고 이제야 나는 알았다. 난 신유에게 해선 안 될 짓을 했다는 것을.
처음부터 강의를 들을 정신이 아니었다. 예전에 친구에게 들었던 말처럼, 신유가 수능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던 것처럼,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보는 교수님에게 허리를 조금 숙이며 인사하곤 일어나서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신유…"
정신 나간 여자처럼 이곳저곳을 헤집으며 신유를 찾았다. 지금 당장 그를 보고 사죄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를 꼭 껴안으며 말하고 싶다.
"신유… 어디에 있는 거야…"
이제야 비로소,
"내가, 내가 널 찾고 있어. 신유…"
내 마음이 네게로 향했노라고.
"신유…"
정신없이 뛰어가다가 다리에 힘이 탁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입에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이제야 신유를 사랑하게 됐지만, 이미 마음이 떠나간 신유가 날 바라보지 않을 게 뻔해서.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그의 연인이 그의 곁에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주저앉아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내 자신이 서럽다.
고개를 숙이고 햇빛에 반짝거리는 눈물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태양이 날 비추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의 태양은… 빛을 잃었다. 고개를 들어 태양을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반짝이는 눈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바닥에 떨어져있는 눈물과 합쳐져서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더 이상 흐느낌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단지 눈물만 흘러내렸을 뿐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었다. 신유와 함께 이제야 진실 된 새로운 사랑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난 늦은 것이었다.
누군가가 걸어가는 듯 터벅터벅한 걸음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걸음소리는 내 앞에서 뚝 끊겼다. 내 앞에 서있는 듯 했다. 그가 태양을 가렸기에 내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생겼다. 당연히 내가 길을 막았기 때문에 멈춘 것 같았기 때문에,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풀려버린 다리 때문에 휘청 이며 다시 주저앉으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내 손을 단단히 붙잡아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놀란 난 고개를 들었다.
눈부신 태양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죄송해요. 곧 비켜설게요."
오랫동안 울어서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약간 웃기는 목소리였기 때문에 그가 웃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했다. 다리에 어느 정도 힘이 돌아왔기 때문에 안정되게 내 힘으로 서서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
"아, 그리고 잡아준 것 고마웠어…"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가 나를 껴안았기 때문이다. 그의 힘에 밀려서 난 옆에 있는 벽에 몸을 둔탁하게 부딪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나를 놓지 않았다.
"역시…"
"아, 저, 저기… 이것 좀…"
"난… 무궁화 체질이 아니야…"
소란스레 움직이던 몸을 멈추고 말았다. 익숙한 목소리에 다시 눈물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예전에 많이 들었던 목소리. 지금까지 내가 애타게 찾고 있던 목소리.
"신… 유… 니……?”
아무 말 없이 그가 날 껴안은 손에 힘을 더 준다. 숨까지 막혀오지만 난 지금 기뻐서 그런 것 까지 상관할 수 없었다. 나 역시 그의 목에 손을 두르고 그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무궁화를 하려고 했어."
잔잔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무 행복한 기분에 몸이 나른해 온다. 다시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난 넘어지지 않았다. 신유가 나를 지탱하고 있었기에. 꿈만 같다.
"무궁화는 아침에 꽃을 피우고 저녁에 다시 지고 말아. 그리고 다시 아침에 꽃을 피우지. 그래서 그런 무궁화를 하려고 했어. 너를 지우고 새로운 사랑을 위해 피어나려고 했어."
"……."
"너무너무 아팠어. 천성이 해바라기였기 때문에 더 힘들었어."
"…….”
"그리고… 나의 태양이 날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해바라기는 부셔지고 말았어."
"미안…해…"
"그래서 무궁화가 되려고 했어. 꽃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루가 흐르면 땅 위에 꽃을 버릴 수 있는, 그런 무궁화를. 새로운 시작을 하고, 하고, 또 하는 무궁화를 하려고 가연이를 만났는데…"
"으흐… 흐흑… 미안… 미안, 신유야…"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도 울고 있는지 떨림이 전해져온다. 하지만 나를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그렇기에 난 지금 그에게 나를 지탱하고 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흐느낌을 연신 흘리다가 겨우 말을 잇는다.
"너를 보자마자 나의 태양이 다시 피어나고 말았어. 다시 해바라기가 피어버린 거지."
"미안… 으흐흑… 정말… 미안…"
"역시… 난 무궁화가 아니야…"
그가 품에 안았던 나를 떼어낸다. 조심스러운 손. 내 얼굴을 보던 그가 미소를 짓는다.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려있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숙인다. 그와 함께 떨어지는 눈물.
"신유야…"
"다희야."
"미안해…"
"사랑해."
"정말 미안했어…"
"다시 시작하자."
"으허어어엉…"
그의 말이 끝나자 눈물이 다시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토록 그리웠던 품에 정신없이 안겨 들어서 끅끅거리며 울어댔다. 이제 알았다. 난… 그의 이런 면에 반해버린 거였다. 예전에 일주일을 눈물로 보냈던 것은 그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를 사랑해서… 그래서였단 것을… 난, 예전부터 나만 바라보는 그의 해바라기 체질에 반해버린 것이었다.
"울지 마, 다희야."
"으허어어엉…"
"울지 말라니까…"
신유가 나를 조심스레 바닥에 앉힌다. 그리고 손으로 나의 눈물을 닦아준다. 행복하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그래서 눈물이 나왔다. 기뻐서 울음이 나온다는 말… 그 말은 진짜였다. 기뻐서 계속 눈물이 나온다.
"근데… 가연씨는?"
겨우 울음을 멈추고 신유에게 물었다. 신유가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미안한 표정으로 교문을 힐끗 쳐다본다. 내 좋은 시력으로 보기엔, 교문엔 가연씨가 우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연씨는 손을 흔들어 주곤 교문 밖으로 사라졌다.
"가연인… 좋은 남자를 찾을 거야."
가연씨가 가여워지는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가연씨에게 좋은 남자는 신유, 너야.'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여운 그녀보다 내 사랑이 더 강했다. 아니, 강하다고 믿고 싶다.
"내가 널 잊으려는 마음에 가연이에게 안 될 짓을 했어."
"괜찮아."
"고마워.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마음이 괜찮아졌어."
신유가 웃었다. 미안해진다. 가연씨에게. 어쩐지 '내가 더 많이 사랑하니까, 가연씨 보다 신유 행복하게 해줄게요.' 라고 말하고 있다. 신유가 하품을 하더니 내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댄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나른함이다.
"근데, 다희야."
"응?"
"우리… 다시 시작했으니까, 오늘이 1일인건가?"
"아…"
"응응? 오늘이 1일인건가?"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돌리려다 신유의 머리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신유가 머리를 부여잡고 아파한다. 하지만 이건 네 잘못이라고. 라고 생각해 보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왜 그래? 많이 아… 으앗!"
"데이트가자."
갑자기 고개를 드는 바람에 놀라서 넘어졌는데, 그런 나를 안아들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신유. 행복하다.
"다희야."
"응? ……이 아니라, 내려줘!"
"넌 무궁화니까, 밤에 지더라도, 아침엔 다시 피어서 해를 기다리는 나를 바라봐야 돼. 알았지?"
"알았으니까, 내려줘! 으아앗! 무섭다구!"
태양은 지금 이 순간에도 뜨겁게 더위를 쏟아내고 있다. 이 더운 여름날, 난 새로운 시작을 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여름아래 신유의 품에 안겨있다. 1년 만에 다시 내게 이런 행복이 찾아올 수 있으리란 생각, 해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난 지금 내 생에 최고의 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사랑해, 신유."
앞으로 난 이 남자와 함께 내 생에 마지막 여름까지 함께 보내겠지.
*해바라기*
가연이가 오랜만에 시내에 나가자고 해서 억지로 끌려나왔다.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기에 집에만 박혀있었던 나였기에 굉장히 오랜만에 본 거리는 푸르렀다. 이제야 비로소 여름이구나, 그녀가 내 곁을 떠난 지 벌써 1 년이 지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새삼 시간이 빠르다는 것을 느꼈다.
가연이도 집에 자주 찾아오는 내 친구, 동진이의 동생으로 동진이의 억지로 사귀게 된 지금의 애인이다. 그녀의 기억에 집에만 박혀서 나오지 않아 덩달아 가연이도 매일 불쾌한 내 집에 박혀있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하지만 내 생각으론, 한 여자를 못 잊는 나를 사랑하는 건 그녀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가연이는 미술 전공으로 대학을 다닌다. 동진이완 전혀 다른 이미지의 동생이다. 거리를 보더니 공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작게 웃으며 말하는 가연이. 가연이에게 미안했기에 대학에 들어가서 미술 재료를 가져오라고, 공원에 가자고 그랬더니, 생각 외로 많이 기뻐하는 게 느껴져서 코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괜히 가연이를 내가 괴롭히는 것 같다.
"어?"
가연이가 멈칫한다. 입구에서 누군가가 거리의 사진을 찍고 있다. 알 것 같다, 누군지. 나를 버린, 그렇지만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사람. 그녀다. 그녀도 사진을 찍다가 우릴 발견했는지 사진기를 천천히 내린다. 익숙한 모습이다. 그녀를 많이 보고 싶고, 아직도 사랑하지만 그녀를 향한 분노가 없는 건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암흑으로 바꾼 그녀를 증오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한다. 가연에겐 미안하지만, 그게 이유였다. 증오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녀를 사랑해서. 가연을 사랑할 수 없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연이가 당황하며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내 걸음에 맞추어서 그녀에게 걸어가는 가연이. 난 천천히 그녀의 앞에 섰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와 가연이를 바라보는 그녀. 가연이가 내게 더 바짝 붙었다. 두려운 걸까? 가연이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아, 난. 지금은.' 가연이는 불안한 듯 하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가연이에게 고개를 돌려서 다시 그녀를 응시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를 향한 심장은 두근거리고 있다. 내가 그녀를 바라보듯, 그녀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좋아 보이네."
좋아 보여? 내가?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이 모습이 좋아 보인단 말이지… 난 지금 너와 헤어지고 술에 찌들어서 헐어버린 위장에, 상처받은 심장에, 빌어먹게도 너를 사랑하는 머리 때문에 내 옆에 서있는 가연이까지 상처를 주고 있는데 말이야. 이제까지 집에 처박혀서 해를 볼 수 없었고, 나의 태양이던 네가 떠나버려 내 인생의 지구는 암흑으로 빠졌는데. 좋아 보인다고? 자조적인 생각이 머리에 꽉 들어찼다. 입을 열면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내 비참한 인생을 말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 나는 물론이고 가연이까지 상처를 받을 것 같아서 그러지 않았다. 단지 가연이의 손을 꽉 잡으며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응.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 너는?"
잘 살고 있었다는 걸 알리려했다. 나는 너를 잊었어. 라는 행동이 티가 나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나도 다정한 어투였다. 그래,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해바라기 신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짓을 냉정하게 고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냉정한 말도 그녀에게 다정하게 말하겠지. 빌어먹을 해바라기 신세.
"뭐… 별로. 과제에 리포트 쓰기에 바쁘거든."
미소까지 지으며 말하는 그녀. 비참하다. 정말 비참하다. 그녀는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나 혼자만 빌빌댔던 꼴이 우스워서 견딜 수 없다. 그녀를 향한 내 눈이 곱지 않을 게 뻔했다. 질책하고 있을 테지. 하지만 심장은 다른데 말이야. 1년이라는 시간동안 난 참 많은 걸 배웠다. 사람은 배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고등학교의 나는 한 번의 추락으로 인해 타락해 버렸다. 그것도 지금 내가 사랑하고 있는 그녀로 인해. 해바라기를 접으려 했다. 가연이와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했었다, 한 땐.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난 천성이 해바라기였다.
"그렇구나. 잘 살고 있었네."
약간 비꼬는 듯이 말했다.
"잘 살고 있었어."
아까의 말이 비꼬는 말이었다면, 지금 말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잘 살고 있었구나, 이제 나도 잘 살아야지. 라는 의미가 유포된 말이었다.
"잘 살고 있었지."
그녀의 말이 들리고 나도 모르게 가연의 손을 꽉 잡았다. 화가 난다.
"저기… 신유씨… 이 분은 누구……?"
가연의 말이 들려왔다. 평소에 오빠라고 하던 애가, 신유씨라고 부르자 난 가연이가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내가 가연의 손을 꽉 잡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앗 하며 손을 느슨하게 잡았다. 가연이에게 미안하다. 내 화에 가연이가 다치는 걸 원하지는 않지만 가연이는 다칠 수밖에 없다는 걸 안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 가연이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도 들어봤지? 내 전 여자친구. 채다희."
내 말에 가연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다희를 보며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최가연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가연씨. 채다희라고 해요. 능력 좋다? 강신유."
가연의 말에 다희가 대답해 온다. 약간 질투하는 것으로 들린다면 내 착각일까? 비꼬는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싱글싱글 웃으며 대꾸했다.
"뭐, 내 진짜 매력을 가연인 알고 있으니까."
"왜 그래… 다희씨 앞에서 부끄럽게."
가연이 볼에 홍조를 띄며 대답했다. 이렇게 좋아하는 걸까? 다희가 질투를 하길 바랐다. 하지만 다희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시계를 보고는 손을 들고 흔들었다.
"강의시간이네. 나, 간다. 가연씨도 다음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네, 다희씨. 어서 들어가 보세요."
떠난 사람에게 뭘 바란 건지… 허탈한 마음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라."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는 다희를 보다가 교문에 몸을 기댔다. 오랜만에 봐서일까? 심장이 너무나 떨린다. 가연은 내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내가 떠나는 게 두려운 것일 것이다. 확실히 그랬다. 아마 그나마 남아있는 내 이성과 가연이 아니었다면 난 당장 다희에게 달려갔을 거다. 천천히 미소를 짓고 가연을 바라보았다.
"괜찮으니까, 미술재료 가져 와."
"정말 괜찮아요?"
"어엉. 그래. 그러니까 빨리 갔다 와."
계속 걱정을 하는 가연을 살짝 손으로 밀쳤다. 몸이 밀치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가연에게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야 안심한 듯 가연도 웃으며 손을 흔든다.
"금방 다녀올게요. 기다려요, 오빠."
가연이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자리를 옮겼다. 강의실이 보이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강의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강의실 문이 열리고 보이는 다희의 모습에 벽에 기대던 자세를 고쳤다. 이상했다, 다희가. 곧 이어서 다희는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찾다가 갑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서 뛰어서 대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멀리에서 가연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지만, 지금은 다희가 더 중요했고, 다희가 더 급했다.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해를 등지고 서서 저 멀리에 주저앉아 가는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다희를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천천히 다희에게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다희가 내 눈에 클로즈업 되어서 주변이 백지로 변해보였다. 다희 앞에 서서 다희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다희가 일어나려고 하다가 휘청 이며 주저앉으려 하기에 다희를 잡았다.
"죄송해요. 곧 비켜설게요."
다희가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약간 웃기는 목소리였지만 지금 다희가 누군가 때문에 울었다는 게 더 신경 쓰여서 가만히 다희를 붙잡고 있었다. 다희는 곧 자기 힘으로 일어나더니 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잡아준 것 고마웠어…"
다희가 말을 하는 도중에 다희를 그만 꼭 안고 말았다. 내 힘에 밀려 다희가 옆에 있는 벽에 몸을 둔탁하게 부딪쳤지만 상관 않고 다희를 꼭 안고 있었다.
"역시…"
"아, 저, 저기… 이것 좀…"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다희는 몸을 계속 움직였다. 아마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껴안았기에 당황했으리라. 하지만 그런 다희를 더 힘주어 안고 말을 이었다.
"난… 무궁화 체질이 아니야…"
이제야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다희는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을 이해 할 수 없다는 듯이 천천히 내게 물었다.
"신… 유… 니……?"
난 말없이 다희를 더 힘주어서 안았다. 잠시 가만히 있던 다희가 천천히 손을 올려서 내 목에 자신의 손을 감는다. 믿을 수 없었다. 난 바로 다희가 나를 밀치리라 생각했는데, 다희가 내 포옹을 받아들이다니. 믿을 수 없어서 한 동안 우두커니 다희를 안고 서 있었다.
"무궁화를 하려고 했어."
조용히 말했다. 다희가 내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궁화는 아침에 꽃을 피우고 저녁에 다시 지고 말아. 그리고 다시 아침에 꽃을 피우지. 그래서 그런 무궁화를 하려고 했어. 너를 지우고 새로운 사랑을 위해 피어나려고 했어."
다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너무 아팠어. 천성이 해바라기였기 때문에 더 힘들었어."
"……."
"그리고… 나의 태양이 날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해바라기는 부셔지고 말았어."
"미안…해…"
"그래서 무궁화가 되려고 했어. 꽃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루가 흐르면 땅 위에 꽃을 버릴 수 있는, 그런 무궁화를. 새로운 시작을 하고, 하고, 또 하는 무궁화를 하려고 가연이를 만났는데…"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서 다희의 어깨에 매달린 가방 줄에 떨어졌다. 그리고 다희 역시 눈물을 흘리는지 옷이 조금씩 젖어간다. 다희의 떨림과 내 떨림이 이어졌다.
"으흐… 흐흑… 미안… 미안, 신유야…"
다희의 목소리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계속 울음이 나와서 이을 수 없었다. 다희는 나를 밀치지 않았고, 난 다희를 안은 팔을 풀지 않고 내게 기대오는 다희를 지탱했다. 그리고 겨우겨우 울음을 억누르고 말을 이었다.
"너를 보자마자 나의 태양이 다시 피어나고 말았어. 다시 해바라기가 피어버린 거지."
"미안… 으흐흑… 정말… 미안…"
"역시… 난 무궁화가 아니야…"
다희를 조심스레 떼어냈다. 다희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있다. 그런 다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내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다희가 내 이름을 조심스레 불렀다. 그리고 난 그에 맞춰서 서투르게 고백을 했다.
"신유야…"
"다희야."
"미안해…"
"사랑해."
"정말 미안했어…"
"다시 시작하자."
"으허어어엉…"
내 고백이 끝나자, 다희는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며 내게 안겼다. 끅끅거리며 우는 다희를 안고 머리와 등을 툭툭 쳐주며 달랬다.
"울지 마, 다희야."
"으허어어엉…"
"울지 말라니까…"
말끝을 흐리며 다희를 조심스레 바닥에 앉혔다. 그리고 손으로 다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다희는 진정한 듯 간간히 기침을 내뱉었다.
"근데… 가연씨는?"
아차, 했다. 고개를 돌려서 교문을 바라보니 미술용품을 품에 안은 가연이가 우리 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교문 밖으로 사라졌다. 미안했다. 하지만 가연이 좋은 남자를 찾기를 바랐다.
"가연인… 좋은 남자를 찾을 거야."
내 말에 다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다희에게 미안함을 안겨주려고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가 널 잊으려는 마음에 가연이에게 안 될 짓을 했어."
이러면 미안해하겠지? 이렇게 생각했지만, 다희는 내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 말엔 정말 마력이 있는 것 같다. 그 한 마디에 가연이에게 미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시는 걸 보면. 그 말에 마력이 있는 게 아니라, 다희에게 마력이 있는 것 같다.
"고마워.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마음이 괜찮아졌어."
웃으면서 말했더니 다희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다희의 머리에 머리를 기대고 나른하게 하품을 했는데, 문득 내 고백이 생각났다. 다희가 아까의 내 고백을 수락하는 건지, 거절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열었다. 확실하게 해두고 싶다.
"근데, 다희야."
"응?"
"우리… 다시 시작했으니까, 오늘이 1일인건가?"
"아…"
"응응? 오늘이 1일인건가?"
투정을 부리듯 다희에게 다가갔더니, 다희가 몸을 피한다. 다희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려 하다가 내 머리에 머리를 쾅 부딪치고 말았다. 정말이지 너무… 아팠다. 머리를 부여잡고 아파하고 있었다.
"왜 그래? 많이 아… 으앗!"
"데이트가자."
말하는 다희를 안아들고 걸어갔다. 다희는 당황하며 손을 휘젓더니 곧 어색하게 손으로 내 목을 감는다. 행복하다.
"다희야."
"응? ……이 아니라, 내려줘!"
말로는 내려달라면서도 내 목을 손으로 감고 있는 다희. 정말이지 너무 귀엽다. 날 멀뚱히 바라보는 다희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내 눈빛에 다희가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넌 무궁화니까, 밤에 지더라도, 아침엔 다시 피어서 해를 기다리는 나를 바라봐야 돼. 알았지?"
"알았으니까, 내려줘! 으아앗! 무섭다구!"
다희의 목소리를 들으며 교정을 걸어 나갔다. 교정 옆에 있는 분수대와 그 옆에 만발이 피어있는 해바라기를 바라보았다.
'넌 무궁화니까, 밤에 지더라도, 아침엔 다시 피어서 해를 기다리는 나를 바라봐야 돼. 알았지?'
다희에게 했던 이 말은,
'네가 다른 남자에게 잠시 한 눈 판다고 해도, 나중엔 널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다시 돌아와야 돼. 알았지?'
라는 의미가 부여된 말이었다. 평생토록 다희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니까, 다희가 떠나도 난 바보같이 다시 기다리기만 해야겠지. 그래도 기다림은 행복하다.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니까.
"사랑해, 신유."
다희의 고백에 조용히 웃기만 했다. 덥지만 행복했다. 지독한 태양이 이렇게 더운 여름을 만들어 내고 있지만, 아마 지금 이 순간 내 심장보단 뜨겁지 않겠지?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