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캄보디아 교전사태의 이해 (중)
선택의 기로에 선 태국사회
저자 : 크메르의 세계 연구부
행복했던 "하이소"의 나라
권위주의(authoritarianism)와 독재(dictatorship)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태국의 국가체제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매우 복잡하고도 우아한 체제유지 시스템을 가진 사회이다. 태국 사회는 이집트처럼 권리를 박탈당한 국민들이 한마음으로 증오할만한 구체적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태국의 범-보수 기득권층은 (1)정치인과 관료들, (2)군부, 그리고 (3)"옐로우셔츠"(PAD)로 대표되는 극우 시민사회가 주요한 정치적 역할 담당자로 등장하며, 여기에다 임명직 사법부와 전통적인 재계, 그리고 고학력 혹은 고소득 중산층들이 보수층의 기층을 형성한다. 또한 지역적으로는 방콕과 남부지방이 보수세력의 지리적 스펙트럼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이들 모두를 아우르며 통합성과 안정을 부여하는 구심점이 왕실이다. 특히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1927년생) 국왕 개인이 엄청난 상징성을 가지는 체제로서, 혹자는 태국의 체제를 "푸미폰 중심주의"라 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치적 형식 면에서는 "전제 군주제"의 요소가 강한 "입헌 군주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태국의 국왕과 왕실이라는 제도는 보수층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그러한 존경심을 유발시키고 유지할 수 있는 문화적 체제들도 발전시켰다. 정교하게 구성된 왕실의 의전행사들과 그에 부합하는 훈장과 왕실품계 시스템 등은 창출된 권위에 우아한 품격까지 더해준다.
태국에서는 심지어는 유치원생을 포함하여 모든 학생들이, 아침마다 푸미폰 국왕의 초상화 앞에서 국기게양식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극장에서는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국왕찬가>가 흘러나오고, 이때는 외국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기립해야만 한다. 푸미폰 국왕의 건강이 좋을 때는, 매년 12월5일 국왕의 탄생일에 육, 해, 공군 및 해병대 병력으로 구성된 왕실근위대가 근엄한 열병 및 분열식 행사도 가졌다. 이럴 때 국영 TV들은 퇴장하는 왕실인사들이 탄 수십 대의 노란색 롤스로이스 차량들이 광장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그 마지막 1대까지도 생방송하곤 했다. 물론 평소에도 저녁 7시가 되면 모든 TV 방송은 왕실동정만 다루는 뉴스를 일정 시간 방송한다. 국왕, 왕후, 왕세자, 3명의 공주들, 왕세자의 첫번째 부인, 왕세자의 세번째 부인, 국왕의 손자, 손녀, 외손녀들과 그들이 참석한 행사의 내용까지 서열에 따라 차례로 전해진다.
이 모든 모습은 대단히 자연스러워 보이며, 왕실의 상징색깔인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 속 깊이 우러나서 국왕과 왕실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원래 군사정권이 명목상 즉위시켰던 라마 9세(푸미폰 국왕)는 올해로 만 65여년간의 재위기간을 통해, 이제 태국 국민들의 살아있는 부처님이자 준-신격화된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와 왕실의 이러한 권위는 문화적 차원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태국에서는 왕실가족을 비판할 경우 최대 징역 15년형에 처할 수도 있는 <왕실모독 처벌법>이 존재한다. 이 법률은 범죄사실 1건 당 최대 징역 15년형이므로, 여러 건일 경우 수십 년에 이르는 징역형도 가능한 가공할만한 법률이다. 더구나 이 법률은 외국인들에게까지 예외 없이 적용되며, 태국을 전문으로 하는 제도권의 외국인 학자들조차 그 영향을 받고 있을 정도이다. 아마도 그 점으로 인해 한국인들이 가진 태국에 대한 지식은 상당히 제한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한국의 태국 전문가들 역시 이러한 부분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는 국경을 넘어서까지 실질적 효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태국의 억압은 가공할만한 것이다. 최근에는 <컴퓨터 범죄 단속법>이라는 별도의 법률까지 제정되어 있다. 또한 출판물은 물론이고 인터넷 검열의 수준은 최근 들어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에 속하게 되었다. <국경없는 기자회>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태국의 언론자유도는 탁신 정부 시대인 2004년에 세계 65위 수준에서 작년(2010) 4-5월 시위기간 중에 135위로 추락했고, 이후로도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러한 제도적 장치 외에도, 국왕 폐하를 너무도 사랑하는 "오토바이 헬멧을 착용한 괴한들"이 어느날 다가와서, M-16 기관총과 M-79 유탄발사기를 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위키리크스>(WikiLeaks)가 최근에 폭로한 미국 국무부 "외교전문"을 살펴보면, 2008년 11월 초에 미국대사관이 태국 상류층의 저명인사로부터 수집한 첩보가 소개되어 있다. 이 문서에서는 일각에서 탁신 전 총리를 암살하는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에서 책정한 청부비용이 고작 1만 달러(약 1,100만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들에 대해선 더욱 저렴할 것이다. 태국은 그런 가공할만한 어둠의 기제도 동시에 가진 사회이다.
화려한 빛과 가공할만한 어둠을 동시에 가진 태국식 체제유지 장치는, 어떤 면에서는 원래 1940년대 정권을 잡았던 친일 독재자 빽 피분송캄(Plaek Pibulsonggram) 총리 시대에서 유래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태리의 무솔리니를 존경했던 피분송캄은 자신의 우상화를 위해, 독일 나치가 사용했던 선전선동술을 많이 벤치마킹했다. 그리고 훗날 그 우상화 대상이 빽 피분송캄 총리에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으로 바뀐 것 뿐이다.
가령 대로변과 가정집들에서 피분송캄의 초상화들이 걸려있던 자리엔, 이제 국왕이나 왕실인사들의 사진이 대체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있는 고등학교 군사조직 "육군 예비군 학생단"(ARFS)도 원래는 피분송캄이 나치의 "히틀러 청소년단"을 모방해서 만든 조직이다. 또한 저녁마다 왕실동정을 방송하는 것도, 피분송캄이 사용했던 언론이용 방식과 동일한 것이다.
더구나 푸미폰 국왕은 "왕실사업"이라는 이름 하에 수많은 건설사업들과 사회사업들도 벌였다. 일부는 왕실에서 재원을 부담했지만, 거대 토목공사들의 경우 국왕이 발의하고, 정부예산으로 짓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 공덕은 모두 푸미폰 국왕에게로 돌아갔다.
국왕에 대한 우상화는 왕실의 오랜 전통과 결합하면서 더욱 세련되어졌다. 게다가 푸미폰 국왕은 장수를 했다. 태국에서는 거의 70세 정도의 노인들까지도 "푸미폰 아둔야뎃"이란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의 국왕을 본 적도 없고, 심지어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조차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 모두 자발적으로 존경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국왕은 곧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공기이자 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세련된 권위주의도 결국은 하나의 권위주의일 뿐이다. 따라서 태국사회는 다른 형태의 권위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부작용들이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인권유린과 사회적 계급질서, 그리고 여러 종류의 차별현상들이 아직도 뿌리깊게 남아 있다.
이와 동시에 느슨해보이지만 집중된 권력으로 인해 부의 편중도 동반된다. 우선 푸미폰 국왕과 왕실가족들은 "왕실재산 관리국"(CPB)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공식적으로 운용하며, 국왕을 비롯한 왕족 개인들이 별도로 투자한 액수는 추정조차 불가능하다. <포브스>(Forbes) 지가 2008년 8월에 발표한 세계왕족 재산순위에서 푸미폰 국왕은 350억 달러를 보유하여 세계 왕족들 중 1위를 차지했다. 비록 태국 정부에서 부인하긴 했지만, <포브스> 지가 사용한 통계는 CPB에서 운용하는 자산만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CPB가 태국 최대 기업집단인 "시암시멘트 그룹"(SCG)의 대주주라는 점과, "수완룸 나이트 바자"를 비롯한 방콕 시내 주요 토지들을 엄청나게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이다. 태국 왕실의 재산규모를 정확히 알기란 불가능하다. CPB의 연례 결산내용은 오로지 푸미폰 국왕 한사람에게만 보고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CPB의 모든 사업들은 법률에 따라 면세혜택을 받는다.
국왕과 왕실이 권위를 부여받으면서, 태국의 모든 권력은 왕실주변으로 모여든다. 그에 따라 왕실주변 인사들이 문민 정치인들과 군 장성들, 그리고 재계 인사들 사이를 조정하는 권력브로커 역할까지 하게 된다. 국왕자문기구인 "태국 추밀원"(Privy Council of Thailand)은 최대 18명의 인사들로 구성되며, 대부분 군 출신 전직 총리들과 전직 사법부 수장 등 사회원로급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바로 소위 "하이소"(Hi-So, ไฮโซ)[주: 상류사회high society를 의미하는 태국식 속어]라 불리는 방콕 및 태국 중산층들의 체제유지 시스템에서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현재의 추밀원 의장은 육군사령관 출신으로 1980년대에 총리를 지낸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1920년생) 장군이다. 올해 91세인 쁘렘 의장이 생일을 맞이하면, 그의 저택에는 환갑줄에 접어든 군부의 4성 장군들과, 과거 자신의 수하였던 인사들의 자녀들인 고위 정치인들이 문안을 하기 위해 대거 몰려든다. 그는 때때로 자택에서 거행되는 만찬장에서 군부의 수장을 공개적으로 야단치기도 하는데(위키리크스 폭로전문 참조), 하물며 과거 주치의의 자녀인 40대 중반의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1964년생) 총리가 태국 정치에서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얼마나 될 것인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쁘렘 의장은 '쭐라쩜끌라오 왕립 사관학교'(CRMA: 육사)에서 연설하면서, "군대는 정부가 아니라 국왕에게 충성하는 조직"이라고 공공연히 발언하기도 한다.
<위키리크스>가 최근에 폭로한 미 대사관 전문은, 현재 태국의 범-보수 기득권 세력에서 최고의 의사결정권자가 푸미폰 국왕의 부인인 시리낏(Sirikit: 1932년생) 왕후이며, 국왕과 왕후의 충실한 대행자가 쁘렘 의장이라는 속설들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문서에서 언급되는 내용은 시리낏 왕후가 바로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 총리를 축출한 "2006년 쿠테타"의 배후라는 것이다.
왕실을 정점으로 하는 태국 보수사회는 이러한 권위를 바탕으로 각계의 중산층들에게 적절한 권력과 부의 획득기회를 분배하고 조정한다. 또한 범-보수층의 각계 중진인사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결국 이 네트워크와 관계를 갖게 된다. 그리고 만일 이 네트워크가 포괄하는 거대한 구조에서 벗어나는 순간, 사회적 추락의 위험은 상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태국식 권위주의 체제를 "봉건주의적 산업사회"라고 부른다. 그것은 마치 봉건시대의 주군과 영주의 관계처럼, 중간 지배계층의 자율권과 최고 권위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 구조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러한 네트워크가 태국 경제와 산업도 지배한다. 아마도 지구상에 출현한 모든 종류의 권위주의 중에서도, 태국식 권위주의야말로 가장 세련되고 자연스러우며 복잡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어떤 면에서는 가장 진화된 형태의 권위주의라고도 볼 수 있다. 더구나 권력구조가 이렇게 복잡하다 보니, 정치적 투쟁이 발생했을 때 책임을 져야할 사람도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문제가 발생하면 마치 추밀원 위원들이 두는 장기판의 말과도 같은 총리나 군부 수장 몇명만 적당히 바꾸면, 다시금 사회는 잘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체제에 대한 종교적 믿음을 갖고 "하이소" 계층에 편입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행복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국민 모두가 "하이소" 계층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한 사회가 가진 재화와 용역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며, 하나의 계층이 "왜곡된 구조를 통해" 더 많이 갖게 되면, 반드시 "구조적으로" 빈곤하고 소외되는 계층도 출현하기 마련인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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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태국을 움직이는 보수정치의 실세들. 푸미폰 국왕의 자문기구인 "태국 추밀원" 위원들의 단체사진. 앞줄 왼쪽에서 5번째가 의장인 쁘렘 띠나술라논 예비역 대장이고, 6번째가 2006년 쿠테타 직후 1년간 과도정부 총리를 지낸 수라윳 쭐라논 예비역 대장이다. 대부분이 70~80세 이상인 국가원로들이다. |
2가지 색깔의 나라 : 옐로우셔츠와 레드셔츠
전직 경찰 출신으로 태국 굴지의 정보통신 재벌로 성장했던 탁신 친나왓 총리는, 2001년 2월 9일 취임하여 태국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임기를 다 채운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사상 최고의 투표율을 보였던 2005년 총선에서도 500석 중 374석을 확보하며 기록적인 승리를 거뒀다.
탁신은 태국 남부 '무슬림 반군들' 진압과정 및 "마약과의 전쟁"에서 발생한 인권유린 및 인명살상으로 인해 비판을 받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1997년에 발생한 "아시아금융위기"의 여파를 극복하고 태국 경제를 새롭게 도약시킨 시기이기도 했다. 그의 정책들은 특히 2가지 측면에서 태국 사회가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하나는 그 동안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농민들을 비롯한 저소득 계층에 눈을 돌려 획기적인 저가 의료정책과 생계자금 대출 등에 힘쓴 점이다. 범 보수파에서는 이것이 파퓰리즘이었다고 비판했지만, 이 과정에서 태국의 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힘을 자각하게 되는 본질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이 점은 현재 태국이 당면한 사회적 갈등에서 결정적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왕실을 정점으로 하고 군부를 매개로 하는 권력 중개행위에 제동을 걸려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부분 때문에 결국 그는 쿠테타를 통해 실각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가 뿌려놓은 변화의 동력으로 인해 실각한 후에도 계속해서 왕당파와 민주화세력(엄밀히 말해 선거 중심주의자) 사이의 분열을 더욱 촉진시키게 되었다. 탁신이란 아이콘이 하나의 사회를 양분시킨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2006년 9월 쿠테타 전후로 생겨난 정치적 구도가 "옐로우셔츠"(PAD: 국민민주주의 연대)와 "레드셔츠"(UDD: 반독재 국가민주 연합전선)로 대변되는 거대한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다.
먼저 세력화된 것은 PAD였다. 이들은 탁신 정권을 부패했다고 비난하며, 장기간의 가두투쟁에 나서 혼란을 야기시켰다. 왕실의 상징색깔인 노란 셔츠를 입은 PAD 시위대는 대체로 중산층 출신들이 주를 이뤘고, 극우적 민족주의자나 극단적 금욕주의자들도 섞여 있는데, 이들의 구호는 "우리는 국왕 폐하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의 가두투쟁이 방콕 여론의 기초를 놓는 가운데, 2006년 9월 19일 탁신의 외유 중 쿠테타가 발발하여 헌정은 중단됐고 탁신은 실각했다. 노란셔츠들과 방콕시민들은 이 쿠테타에 환호하면서 시위를 중단했다. 그들은 이로써 자신들의 행복한 "하이소" 사회가 다시금 제 자리로 돌아가리라 믿었던 것이다. 태국의 "하이소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대로"(status quo)이다.
쿠테타 이후 군사정권이 임명한 과도정부가 1년간 집권한 후, 2007년 12월에 새로운 총선이 실시됐다. 하지만 결과는 또다시 친 탁신계 정당이 승리하면서, 사막 순타라웻(Samak Suntharawet: 1935-2009) 총리 내각이 들어섰다. PAD는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자 2008년 3월부터 또다시 가두투쟁에 나섰다. 8월26일에는 정부청사를 포함한 여러 관공소 건물들을 점거했다. 사막 총리는 사임을 거부했지만, 무력을 통한 강제진압 시도도 하지 않았다. 기간시설 점거 등 시위가 더욱 과격해지는 가운데, "태국 헌법재판소"는 9월9일 사막 총리가 이권개입을 금지한 <2007년 헌법> 제267조를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사막 총리가 취임한 뒤에도 자신이 진행하던 TV 요리쇼 사회를 계속해서 맡음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봤다는 것이 판결의 이유였다.
"헌법재판소" 판결이 있고 난 후, 탁신 전 총리의 매제이자 선임 부총리를 맡고 있던 솜차이 웡사왓(Somchai Wongsawat: 1947년생) 교육부장관이 총리직을 승계했다. 9월17일 국회 내 선거에서 298표를 얻은 솜차이 부총리는, 163표를 얻은 "민주당" 당수 아피싯 웻차치와 의원을 누르고 총리로 취임했다.
11월25일 PAD는 자신들이 "히로시마 작전"이라 불렀던 행동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바로 방콕의 "수완나품 국제공항"을 점거한 것이다. 모든 항공편은 곧 취소되고, 수천 명의 여행객들이 공항 내에 발이 묶였다. 솜차이 정부가 진압명령을 내렸지만, 군대는 이를 거부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또다시 "헌법재판소"는 12월2일 판결을 내려, 연립여당을 구성한 3개 정당이 부정선거를 치뤘다며 해산을 명령했다. PAD는 기자회견을 열고 모든 투쟁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PAD 지도자이며 언론재벌인 손티 림텅꾼(Sondhi Limthongkul)은 "우리는 승리했고,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했다. 이제 여당에 대한 정치활동 금지를 우려한 국회의원들이 이동을 시작됐고, 결국 정계개편을 통해 "민주당"의 아피싯 당수가 국회 내 투표에서 총리로 선출됐다. 이제 방콕과 남부지방의 중산층들은 영국에서 태어난 옥스포드 출신의 젊은 총리에게 기대를 걸었다.
레드들의 성장
레드셔츠(UDD) 세력의 결집은 2006년 9월 쿠테타가 발생한 직후부터였다. 초창기에 이들의 구성원은 주로 탁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이었던 북부 및 북동부의 농민들이었고, 여기에 도시 노동자들과 지식인 등 다양한 민주화 세력이 가세한 형태였다. 이들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 자신들이 선택했던 결과를 도둑맞은 것에 대해 좌절감과 분노를 갖고 있었다. 더구나 극우 보수파 시위대의 과격투쟁과 사법부의 절묘한 역할 분담까지 이뤄지면서, 그러한 사례는 2006년 쿠테타 단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두 번이나 더 발생했던 것이다.
태국사회의 정치적 긴장구조에는 이렇게 선출직 권력과 국왕에 의해 부여된 임명직 권위 사이의 대결 구도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념적 측면에서는, 지구 상 대부분의 세계에서는 이미 100년 전에 사라져버린 봉건적 세계관과, 21세기의 합리적 상식주의가 충돌하는 싸움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양측이 가진 의식구조의 차이로 인해, 태국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대결은 거의 종교전쟁에 비견할만한 세계관끼리의 충돌과도 같은 것이다.
쿠테타 직후 결집을 시작한 레드셔츠들은 처음에는 미약한 출발을 보였다. 이들은 쿠테타 직후의 과도정부 시절을 넘기고, 다시금 투표로서 자신들의 의지를 표명했다. 옐로우셔츠들이 친 탁신계 정권을 흔들 때도 이들은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아피싯 정권이 출범하자, 드디어 이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2009년의 송깐(태국 신년) 시위는 이들의 위력을 최초로 보여준 사태였다. UDD의 시위로 파타야에서 개최된 "아세안 정상회담장"이 취소되기도 했다. 하지만 방콕에서 벌어진 마지막 시위에서, 이들은 군대의 강력한 진압을 통해 해산당했다.
레드셔츠들의 70일 항쟁
2010년 2월 26일 태국 대법원은 탁신 전 총리의 국내 동결자산 약 23억 달러 중 절반이 약간 넘는 14억 달러를 국고로 몰수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극도로 양극화된 태국 정치의 진행과정에서 큰 변수로 남아있는 문제였다.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까지 이 날을 고비로 UDD가 봉기하여 태국사회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탁신 전 총리는 지지자들에게 침착히 행동해줄 것을 당부했고, UDD 지도부 역시 판결 이전부터 전국적 봉기일을 3월12일로 늦추어 공지했다. 우려했던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3월12일부터 전국적으로 출정집회가 열렸다. 3월14일(일) 방콕에서 대행진이 예정되어 있었고, 전국의 UDD들이 방콕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국민들의 직선을 거치지 않은 아피싯 정부의 해산과 즉각적인 총선실시를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다. 방콕으로 가는 도로와 수로마다 붉은셔츠와 붉은 깃발에 뒤덮인 차량과 선박들이 몰려들었다. 경찰은 이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설치했던 검문소들에서 이들이 방콕으로 가는 길을 내주었다.

(사진: Niemal Gosh) 왕너이에서 방콕으로 가는 고속도로 검문소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협상을 하고 있다.
2010년의 UDD는 2009년과 비교해서도 몰라보게 성장해 있었다. 최대 10여만명에 이른 시위의 규모도 상당했지만, 2개월이 넘는 투쟁기간을 통해 이들은 자신들의 진면목을 전세계의 언론 앞에 드러냈다. 이들은 자신들이 특정한 개인을 위해 동원된 무식한 농민들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정의에 관해 주체적 자각을 가진 시민들임을 보여주었다. CNN과 BBC를 비롯한 주요 언론들도 이들에게 호의적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시위현장 주변에서는 의문의 폭발사고와 사건사고들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기도 했다. PAD는 자신들의 본거지인 방콕에 모여든 거대한 붉은 물결에 압도되어 대응 집회조차 포기했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기자회견을 통해 "군대가 질서유지를 하라!"(유혈사태라도 좋으니 강제진압하라는 의미)는 입장표명 외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여주지 못했다. 심지어는 입원 중인 푸미폰 국왕조차, 판사들에게 "정직하게 직무를 다하라"는 은유적 발언을 하면서 군부를 압박했다.
정부와 시위대 사이에는 역사상 전례없는 협상과 수단들이 동원됐다. UDD 시위대는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자진해산 방안을 제외한 거의 모든 수정안들을 제시했지만, 처음부터 협상의지가 없었던 정부는 적절한 기회에 "총"으로 대답해주었다. 2번의 유혈진압이 있었고, 특수부대들과 저격수들이 최전방 시위대원을 한명씩 한명씩 사냥하기도 했다. 최소 91명이 사망하고 1,800명 이상이 부상하는 거대한 유혈사태이자 느리게 진행된 학살이었다. 하지만 방콕을 붉게 물들였던 농민들은, 이제 태국사회가 다시금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란 점을 분명하게 각인시켜주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태국만큼은 안정된 사회일 것"이라는 국내외 투자자들이 가졌던 오랜 믿음에도 균열을 남기고 있다.
기로에 선 태국사회
5월19일 강제진압 후, 항복한 UDD 지도부는 대부분 구속 수감됐다. 정치적 생명을 연장한 아피싯 총리는 "국가화합안""을 발표하고 정국수습에 착수했다. 하지만 아피싯의 화합방안은 대부분 보수파끼리의 화합이었고, 재야 세력과의 대화나 유혈사태에 대한 진상조사와 같은 실질적 조치들은 부족하거나 형식적이었다. 게다가 뒤에서는 UDD 세력에 대한 구속과 탄압도 이어졌다. 인터넷과 언론의 검열도 더욱 강화됐다.
시간이 가면서 태국사회가 외형적 안정감을 회복하자, 아피싯 총리는 총선실시 의향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국제언론들을 위해 옥스포드 출신 총리가 영어로 선사하는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았다. 아피싯 총리는 올해(2011)로서 임기가 끝나게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아무리 미룰려고 할지라도 <헌법>에 따라 결국은 금년 중에 총선을 실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태국의 범 보수파가 작년의 유혈사태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총선을 실시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가진 자신감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 선거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최근 몇년 간 "현상유지"를 바라는 태국의 보수파는 변화를 막기 위해 안간 힘을 써왔다. 쿠테타도 있었고, 극우파 시위대와 사법부의 분업을 통한 헌정 중단, 레드들의 시민항쟁과 유혈진압 등, 2006년 9월 이후로 태국사회는 모든 형태의 가능한 정치적 수단들을 소모시켜 버렸다. 아마도 이제 남아 있는 수단은 총선이라는 정상적 수단 아니면, 기존 헌정체제의 틀을 깨는 양자간의 선택만 남은듯도 보인다. 아피싯 총리는 최근 또다시 총선에 대해 여운을 남긴 발언을 남겼다. 하지만 총선이 그렇게 쉽사리 가능한 일이라면, 과연 작년에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일 이유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한편 세계 최장기간 재임군주인 푸미폰 국왕은 2009년 연말부터 입원 중인 상태이다. 하지만 태국인들은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의 이름이나, 왕위의 계승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 <왕실모독 처벌법>의 서슬 앞에서 그들은 왕위계승에 관한 문제를 꺼내는 일은 아예 엄두도 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태국인들이 왕위계승 문제에 대해 모두들 우려하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위키리크스>가 최근 폭로한 문서에 따르면, 심지어 쁘렘 띠나술라논 추밀원 의장조차 왕세자의 성정과 행실에 대해 미국 대사 앞에서 걱정했다고 한다. 만일 태국 국왕과 왕실의 권위나 권력이 영국 왕실과 같이 상징적인 수준이라면 그만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푸미폰 국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태국식 봉건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치인 및 관료들, 군부 지휘관들, 사법부와 재계 등 복잡한 "하이소들"을 과연 누가 나서 통합시켜줄 수 있을 것인가.
푸미폰 국왕은 최근 다소 호전된 모습으로 공개적 행사를 갖긴 했지만, 장기간 입원 중인 노인이다. 태국은 이제 21세기의 남아있는 기간들에 영속적 영향을 미치게 될 국가적 운명의 기로에 서있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태국인들 스스로 공론화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에 더욱 두려운 일이 될 것이다. 물론 그 두려움은 지켜야 할 기득권을 가진 "하이소" 중산층들에게 더욱 가공할만한 것이다. 태국은 지금 온통 불확실성에 휩싸인 정치일정이라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 앞에 서있는 것이다.
심상치 않은 움직임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다소 소외됐던 것처럼 보이던 "옐로우셔츠"(PAD) 세력이 갑작스레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불과 2,000~3,000명에 불과한 규모의 프린지한 집단이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결코 왕실이나 군부의 동향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관심을 갖게 만든다.
캄보디아는 작년 12월29일 국경지역에서 조사활동을 벌이던 태국인 보수파 7명을 불법잠입 혐의로 체포했다. PAD는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태국 내 반-캄보디아 정서를 활용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 확보를 위한 틈새를 노리고 있다. PAD는 불과 2년 전에 자신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던 아피싯 총리 정부에 대해, 캄보디아 국경 문제를 보다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며 비난하고, 지난 1월25일부터 정부청사 주변 거리를 점거하고 정권퇴진 운동을 벌이고 있다.
최근에 발생한 "쁘레아위히어 사원" 주변의 교전사태는 PAD 시위가 시작된지 열흘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발생한 것이다. PAD는 2월4일 최초의 포격전이 있기 며칠 전부터 캄보디아가 논란의 지역 내에 비문을 세운 일을 문제삼았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다시 아피싯 총리의 입을 통해 반복됐고, 그에 따라 전술한 바와 같이 캄보디아가 2차례나 연속적인 양보행위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3번째로 요구한 캄보디아 국기 철거 문제에서 양국은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원 주변으로 병력을 증강시켰고, 이후 교전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태국 언론 <빠차타이>(Prachatai) 영문판의 보도에 따르면, PAD 지도자이자 언론재벌인 손티 림텅꾼은 2월7일(월) 집회에서 지지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가 전쟁에 굶주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의 아이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서, 영토 수호를 위해 죽는다면, 그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우리는 30만명의 장병들을 보유하고 있고, 그들은 캄보디아 군인들보다 훨씬 잘 무장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국방부장관인] 빠윗 웡수완(Pravit Wongsuwan)은 군인도 아니다. 그가 차라리 정치적 이익을 좇아 말을 하는 정치인이라 해야만 한다.
지금 태국 군인들이 죽었다. 왜냐하면 태국군 장성들이 단호하지 못해 죽은 것이고, 그들이 국경에서 캄보디아에 대한 석유수출이나 상품을 팔아먹는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해서 죽은 것이다. 태국군은 빠윗 장군과 달리 국가와 [왕실의] 보위를 수호해야만 한다. 국가, 국왕, 왕후보다 중요한 것은 그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
푸미폰 국왕이 서명한 국왕령에 따라, 태국 군은 2010년 9월에 정기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왕립 태국군" 최고의 요직인 "왕립 태국육군"(RTA)사령관(참모총장)에는 빠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1954년생) 대장이 임명됐다. 빠윳 장군은 퇴임한 아누퐁 파오찐다(Anupong Paojinda: 1949년생) 대장보다 사관학교 2년 후배로서, 아누퐁 장군을 형님이자 스승처럼 따르는 오랜 부하이자 참모였다. 하지만 왕실에 대한 충성도 면에서는, 아누퐁 장군보다 훨씬 더 강고한 입장을 가졌다고 한다. 작년의 UDD 시위대 유혈 강제진압도 실제로는 육군본부 참모장이었던 빠윳 장군이 주도적으로 지휘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누퐁 장군과 빠윳 장군은 현재 태국군 최고의 엘리트 부대로 불리는 "제21연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제21연대는 "왕실근위사단"이라 불리는 제2사단 예하 부대로서, 방콕에서 동쪽으로 약 100 km 떨어진 빠찐부리(Prachin Buri)에 주둔한다. 한국전 참전부대이기도 한 제21연대는 "왕후근위연대"라는 특별한 명칭을 갖고 있다. 빠윳 장군은 제21연대에서 군대생활을 시작하여, 제21연대장(대령), 제2사단장(소장), 제1군구사령관(중장) 직책을 아누퐁 장군의 뒤를 그대로 물려받으며 성장했다. 아누퐁 장군은 제1군구 사령관이던 시절에 당시 참모장 빠윳과 함께 2006년 쿠테타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방콕포스트>(Bangkok Post) 소속의 군사분야 전문기자인 와사나 나누웜(Wassana Nanuam)에 따르면, 빠윳 장군은 청년 장교 시절부터 시작하여 오랜 기간 시리낏 왕후를 위해 복무해왔다고 한다. 지난 몇달 동안 태국 육군은 후속 인사도 거의 다 마쳐가고 있다. 태국 육군은 전국을 4개 군구로 나누는데, 각 군구사령관들과 주요 사단장들이 모두 빠윳의 사관학교 동기나 후배들, 그리고 제21연대 출신들로 메워졌다. 태국 보수정치의 정점에 시리낏 왕후가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제 태국 군부 역시 "시리낏의 군대"로서 그 성격을 보다 명확히 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태국은 의회정치와 군주제 모두에서 결정적인 과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빠윳 사령관과 제21연대 전성시대를 맞이하면서, 장차 만의 하나 있을지도 모를 무력의 사용 면에서도 결전의 자세가 충분히 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태국군의 잠재적 적들이 태국 내부에 존재할지, 아니면 태국 외부에 존재할지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는 상태이다.
최근 캄보디아 국경갈등이 발생하면서, 아피싯 정부와 태국 군부는 그 움직임에 있어서 이견을 노출하기도 했다. 아피싯 총리가 PAD의 압력에 따라 캄보디아 국기 철거 의사를 표명했을 때, 국방부장관 빠윗 웡수완 대장이나, 빠윳 사령관의 동기로서 "쁘레아위히어 사원"을 비롯한 태국 북동부 지방을 관할하는 제2군구 사령관 타왓차이 사뭇사콘(Thawatchai Samutsakorn) 중장은, 총리의 요구가 캄보디아 측에 대해 지나치게 무리한 것일 수도 있다는 발언을 흘리기도 했다. 미국 워싱턴의 "외교관계협의회"(CFR) 소속 동남아시아 전문가 조슈아 쿨란트칙(Joshua Kurlantzick) 박사는 2월10일자 기고를 통해, 아피싯 총리의 군부에 대한 통제력 약화 징후가 보이고 있으며, 심지어 최전방 상황이 아피싯 총리에게 제대로 보고되지도 않는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태국에서는 최근 새로운 쿠테타가 발생할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잇고 있다. UDD 지도자로서 국회의원이란 신분으로 인해 유일하게 구속을 면한 짜뚜뽄 뽐빤 (Jatuporn Prompan) 의원은 PAD 시위 발생 다음날(1.26) 발언을 통해, 빠윗 웡수완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주요 지휘관들이 안가에 모여 쿠테타를 모의했다는 구체적 첩보를 입수했다고 주장했다. 군부 인사들은 이를 부인했고, 캄보디아와의 교전사태가 발생하기 직전에는 빠윳 짠오차 사령관까지 나서서 그러한 소문들을 부인했다. 조슈아 쿨란트칙 박사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군대가 쿠테타를 모의한다는 소문이 방콕에 만연하자, 최근 빠윳 짠오차 육군사령관은 이같은 주장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하지만 2006년 쿠테타가 발생하기 며칠 전을 기억해보라. 당시에도 군부는 어떠한 의지도 없다고 부인했었다. 금년에는 어느 쪽에도 베팅하지 말기를......." |
한편 태국 외교관 출신으로 "싱가포르 동남아시아연구소"(ISEAS) 객원연구원으로 있는 빠윈 차차왈퐁판(Pavin Chachavalpongpun, ปวิน ชัชวาลพงศ์พันธ์) 박사도 2월7일자 기고를 통해, 왕당파 내부에서 아피싯 정부와 PAD가 대립각을 세울수록, 전통적인 보수층들은 다시금 UDD가 힘을 얻게 될까봐 두려워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빠윳 사령관이 정부가 상황을 충분히 통제하지 못한다면, 쿠테타 역시 여전히 매력적인 선택지 중 하나"라고 발언했다는 보고를 인용했다. 그러면서 빠윈 박사는, "만일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태국인들은 다시 한번 정치적 소요, 특히 폭력사태를 견뎌내야만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최근에 발생한 태국-캄보디아 사이의 교전사태는 바로 이러한 미묘하고도 중요한 시기에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태국 내 상황만 놓고 볼 때, 캄보디아 국경에서의 긴장고조는 한동안은 쉽사리 완화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 악화될 가능성까지 엿보이고 있다. 하지만 교전 상대국인 캄보디아 역시 국경문제에서 쉽사리 발을 빼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어서, 태국-캄보디아 사이의 국경갈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 편에서 캄보디아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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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 동안 크세에서 배웠던 내용을 복기하는 심정으로 읽어 봤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포괄적이지만 한 방향으로 잘 정리되어 머리에 쏙쏙 들어 옵니다.
감사합니다~ ^ ^
대단합니다,
오마이뉴스에서 그대로 옮겨서 게제하고,,
축하드립니다,
울노주인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