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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26성인 시성 150주년을 맞이하여
이 건숙 율리엣다수녀 (예수성심시녀회 나가사키 분원)
가톨릭 역사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이한 예를 꼽는다면 한국과 일본의 경우다. 한국은 학문 연구라는 구도(求道)의 길에서 하느님을 찾았다. 일본은 선교사가 뿌린 복음의 씨앗이 어느 한 시기에만 화려하게 꽃을 피운 나라다.
1597년 2월 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으로 26분이 순교했고 이분들이 일본성인 26위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가문이 정권을 잡았지만 박해는 계속되었다. 250년간의 긴 탄압이었다. 하지만 한명의 사제도 없이 신자들의 힘만으로 교회를 지켜냈다. 이것이 일본 가톨릭의 특이한 점이다.
일본 순교 역사의 출발점은 나가사키(長崎)의 니시자카(西坂) 순교지다. 이곳에서 26위 성인들이 순교한 이후 하느님을 증거 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자 세계는 놀랬고 일본을 순교자의 나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1862년 6월 8일 당시 교황 비오 9세는 ‘26위 성인’의 시성식을 거행했다. 일본은 여전히 박해 중이었고 신자들이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5년 뒤 다시 ‘205위 복자’의 시복식을 선언해 일본교회에 힘을 실어주었다.
1) 프란치스코회의 활동
1590년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주변국가에 대한 야심을 갖게 된다. 이렇게 되자 1593년 필리핀 총독은 히데요시에게 사절단 명목으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4명을 파견했다. 그들은 마닐라를 떠나 1594년 입국해 지죠호라가와(四條堀川)의 묘만지(妙満寺)에 머물게 된다. 그러면서 히데요시의 정주(定住) 허락을 종교적 허가로 받아들였다.
이후 이들은 스페인 풍의 성당을 지었다. 2층 구조로 아래층에 회랑을 넣고 좌우에는 부제석과 성가대 자리까지 구비한 꽤 큰 성당이었다. 그리고 그해 10월 4일 프란치스코 축일에 ‘천사의 모후이신 성모님’을 주보로 축성식을 갖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1595년에는 가난한 이들과 한센 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개설하였다. 환자는 점점 많아졌고 병원에서 일하는 신자들은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주변은 자연스레 신자들의 마을이 되었는데 ‘다이우스 마을’이라 불렀다. 다이우스는 라틴말로 하느님을 뜻하는 ‘데우스’의 일본식 발음이다.
이듬해인 1596년 10월 19일 ‘산 페리호 사건’이 터졌다. 스페인 무역선 산 페리호가 마닐라를 출발해 멕시코로 가던 중 태풍을 만나 토사(土佐)에 표류하였다. 그런데 배에는 수도회 신부 5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이 목적지가 아니었다.
이들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항해사의 말이 불씨가 되어 히데요시를 크게 자극하였다. 그가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스페인은 선교사를 보낸 후 주민들이 신자가 되면 군대를 보내고 나중에는 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다.’
히데요시는 분노를 일으켜 12월 7일 교토(京都) 수도원을 포위하게 했고 8일에는 프란치스코 회원 체포령을 내렸다. 그리고 9일에는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1597년 1월1일에는 오사카에서도 관련신자 7명과 예수회원 3명이 붙잡혀 모두 24명이 되었다. 이들은 교토로 호송되었다.
다음은 프로이스 신부의 기록이다. ‘그들을 태운 달구지가 옥문 앞에 다다르자 그들은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바오로 미키 수사는 겸손한 태도로 한 사람 한 사람을 포옹한 뒤 프란치스코회 신부에게 말했다. 오늘 하느님의 자비로 행복한 운명 맞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신부님들의 덕택이라 생각하며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시인과 마부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보다니.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모욕을 받고도 기뻐할까? 이런 사람이 세상에 다시 있을까?’ 하며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날 밤 바오로 수사는 그들을 위로하고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은혜로움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옥안에는 비신자 네다섯 명과 다른 죄인들도 같이 있었는데 바오로 미키의 말을 들고 눈물을 흘렸다. 1597年2月5日(慶長元年12月19日)(ARSI, Jap.Sin, 53, f.71)
(당시 나가사키에 살던 루이스 프로이스는 1597년 3월 25일 기록을 마쳤다. 프로이스의 서명이 있는 원문은 로마 예수회의 고문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2) 26성인과 나가사키의 길
히데요시는 신자들의 양 귀와 코를 자르고 교토의 대로에서 조리돌림을 시키고 모욕을 준 뒤 나가사키에서 책형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24명은 1월3일 이찌죠 모도리바시(一条戻橋)에서 귀를 잘리는 형을 받았다. 그리고 죄인들에게 최대의 모욕과 수치를 주는 관습에 따라 소달구지에 태워져 교토의 대로에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교토 신자들은 순교자들이 옥에 되돌아 올 때 까지 따라 다녔는데 그들 중에는 자신도 이 행렬에 넣어 달라고 간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1월 4일 교토를 출발해 나가사키로 향했다. ‘850㎞ 순교의 길’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이 지나는 길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나왔다. 창문과 지붕위에도 구경꾼들이 있었다. 손은 묶여 있었지만 밝은 얼굴에 기쁨이 넘쳤고 상처에도 슬퍼하지 않았다. 순수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걸었다. 하루 평균 30Km를 걸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기도의 길이었다. 수치와 모욕과 돌팔매질 그리고 추위와 허기도 천국을 사모하는 정화의 수단으로 바뀌어 갔다.
6명의 외국인과 12살의 루도비꼬 그리고 13살의 안토니오와 16살의 토마스는 감동적이었다. 당시 순교자 대표 격이었던 밥티스타 신부는 일본어가 서툴러 표현을 제대로 못하였다. 그러나 신학교 출신의 바오로 미키 수사는 매일 강론을 하며 걸었다. 나가사키를 향한 선교의 행렬이었다.
일행이 미하라성(三原城 오늘날의 히로시마)에 와서 잠시 휴식 할 때 16살의 고자키 토마스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었다. 그는 아버지 고자키 미키엘과 함께 순교했다.
‘중략 - 신부님과 저희들 24명은 나가사키에서 처형되기 위해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신부님들이 안 계신다고 걱정하지 마시고 범한 죄에 대해 깊이 통회하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총에 대해 감사드리면 임종 때에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현세는 허무한 것이기에 천국의 영원한 행복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은 무엇이든 잘 인내하고 큰 애덕을 실천 하십시오. 내 동생들 만쇼와 필리버를 비신자들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는 어머님을 위해 주님께 기도합니다.
(1597년 1월 19일)
24명을 돕기 위해 행렬을 따라오던 두 사람에게 감시인들이 신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교우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즉시 체포되어 순교자의 행렬에 가담했다. 이렇게 해서 26명이 되었다. 두 사람은 체포된 것을 애통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부터 지복의 운명에 선택되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환호와 감사를 드릴 뿐이었다.
2월 4일 늧은 저녁, 오무라의 소노기(彼杵) 해변에 닿았다. 눈썹 같은 달은 공중에 걸렸고 3척의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어촌의 불빛이 밤의 장막을 밝히고 있었다. 순교자들에게는 마지막 기도의 밤이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던 밤과 같았다. 그들은 십자가를 끌어안기 위해 최후의 힘을 모아 새벽을 맞이하였다. 몸은 비록 밧줄에 묶여 있었으나 영혼은 깃털처럼 가볍게 천국 문 앞에 서있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물길을 가르고 그리스도인의 도시 나가사키에 닿게 될 것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니시자카(西坂) 언덕에는 4천명의 군중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형리들은 무슨 일을 벌일까 긴장하고 있었다. 그때 순교자들은 개선장군처럼 구경꾼들을 위로하며 니시자카 언덕을 올라갔다. 현장에는 이름이 적혀있는 26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나가사키 출신인 안토니오는 7개월 전 교토로 가 프란치스코 수도회 동숙자로 있다가 순교를 위해 금의환향했다. 그는 부모가 보는 앞에서 영광의 길을 갈 것이다.
요한 고토의 부모가 장한 아들을 지켜보기 위해 바다를 건너 왔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묵주를 드렸다. 10달 전에 세례를 받은 12살의 루도비꼬는 형장에 들어서자 차랑차랑한 목소리로 ‘내 십자가는 어디 있습니까?’ 하자 형리들이 놀랬다. 아빌라 출신인 밥티스타 신부는 창이 아닌 못에 박힐 것을 청하며 두 손을 내밀었다. 바오로 미키 수사는 십자가에 묶여 자신을 바라보는 군중 앞에서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중략 - 나는 필리핀 사람도 아니고 일본인으로 예수회 수사입니다. 그리고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을 속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한 길뿐임을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나는 국왕 (도요토미 히데요시)과 나를 사형에 처하도록 책임진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국왕에 대한 미움은 없고 그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프로이스, 1597년 ‘순교기록’ 145항 발췌)
좋은 가문의 무사 출신인 바오로 미키는 용서한다고 말했다. 용서는 윗사람이 수하에게 하는 말이었지 죽음을 앞에 둔 죄인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더욱이 당시 무사 사회에서는 통용 될 수 없는 말이었다. 언어의 새로운 혁명이라 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3) 순교지 니시자카(西坂)
1597년 2월 5일 정오, 니시자카에서는 일본인 20명과 외국인 6명이 귀한 생명을 바쳐 하느님께 최후의 증언을 하였다.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850km 순교의 길은 교회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길이었다.
이 길을 걸어왔던 26성인은 화형 당했지만 그들이 매달렸던 십자가는 1597년 여름까지 형장에 있었다. 나가사키 교우들은 감시자의 눈을 피해 유해 일부를 가져가기도 했다. 그러다 십자가를 모두 제거하자 교우들은 동백나무를 심어 순교자들을 기억하였다. 그리고 나가사키 항에 입항하는 포르투갈 배들은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예포(禮砲)를 쏘아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어느 사이엔가 나가사키 신자들은 니시자카를 ‘마르치레스(순교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맨발로 언덕을 오르기도 했고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순교지를 찾는 이들이 더욱 많아졌다. 그들은 순교자들을 묵상하며 좌절에서 희망을 얻었고 상처에서 치유를, 미움에서 용서를 얻어갔다.
4) 세계 속의 26성인
순교자의 소문은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 선교사를 통해 세계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성인들의 출신지 나라뿐 아니라 타국에서도 일본순교자의 공경이 확산되었다. 시복식 이전에도 이미 ‘26위 순교 책자’가 발행되었고 목격자들의 말을 듣고 그린 성화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은 포르투갈과 멕시코 대성전에 그려진 벽화다. (멕시코 대성전 벽화는 어린이가 순교자의 십자가 아래에서 수건을 들고 있는 그림 - 26성인 기념관에도 소장되어 있음)
시복식은 두 그룹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일본교회는 도쿠가와 막부의 박해 중에 있었지만 교황청은 시복식을 통해 교우들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1627년 울바노 8세 교황은 1차로 프란치스코 수도회 관련자 23명을 시복했다. 그리고 1629년에는 예수회원 3명을 다시 시복했다.
2차례 시복식은 1862년 6월 8일 시성식을 통해 통합되었다. 당시 교황 비오 8세는 ‘일본 26성인’이란 명칭 하나만 사용했던 것이다. 또한 순교당시 대표자는 밥티스타 신부였으나 시성식 대표는 바오로 미키로 바꾸었다. 순교일 2월 5일은 아가다 성녀 축일과 중복되므로 일본에서만 2월 5일에 축일을 지내고 다른 나라에서는 2월 6일 지내기로 했다. 음력을 사용하던 일본에서는 그날이 게이쵸(慶長) 12월 18일이었다.
5) 순교로 부터 400년 (순례 지정 장소)
세계 2차 대전의 후유증은 나가사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구나 원폭의 상처는 심각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1956년 4월 6일, 나가사키 시(市)는 순교지 니시자카(西坂) 언덕을 사적지로 지정했다. 그리고 1982년에는 시성 100주년 기념으로 기념관과 기념성당(필리피 성당)이 신축되었고 26성인 부조(浮彫)도 만들어졌다.
기념관과 필리피 성당은 이마이 겐지(今井兼次)가 시공 설계했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성가족 성당’을 모체로 한 카우디 풍으로 지어 나가사키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26성인의 부조는 후나코시 야스다케(船越保武)의 작품으로 브론즈 1장씩을 조각하여 통합한 작품으로 성인들과의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부조로 유명하다,
고(故) 시마모도 가나메 (島本要) 나가사키 대주교는 2002년 4월 니시자카 언덕과 성 필리피 성당을 ‘대사를 받을 수 있는 순례지’로 지정하였다. 그리고 매년 2월 5일에는 26성인과 이곳에서 순교한 한국 스페인 포르투갈 필리핀 등 각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세계적인 순교행사를 거행하도록 했다.
2012년 6월 10일은 시성 1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본 주교단은 이 날을 기해 니시자카 순교지를 ‘일본 가톨릭 나가사키 순례지’로 한 등급 높여 부르게 했다. 그리고 ‘요셉 체노토우 교황 대사’를 모시고 순례지 제막식과 더불어 26성인을 기리는 26개의 동백나무를 심는 행사도 함께 할 예정이다. 이 동백나무는 26성인이 순교한 자리에 그 옛날 나가사키 교우들이 심었던 동백나무를 대신하는 것이다.
26성인 사건은 400년 전 일이지만 그들을 기리는 마음은 여전하다. 26성인의 순교는 나가사키뿐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끼쳐 니시자카를 방문하는 순례자는 국적 문화 종교와 관계없이 끊이지 않고 있다.
26성인은 같은 일본어로 기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서로 다른 점을 내세우기보다 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위에 서야하고 그러다보니 타인을 위한 배려가 퇴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웃을 용서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26성인의 순교는 우리의 눈을 다시 뜨게 한다. 그곳이 바로 니시자카 순교지다. 성인들이 순교의 길을 걸으면서 하느님을 찬미했던 노래가 있다. 모든 백성들아 주님을 찬미하라.(Lautate Dominum Omnes Gentes)’는 성가다. 그 노랫소리는 오늘도 니시자카를 찾는 이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모아 올리게 한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17)
첫댓글 아멘. 2012년은 일본의 복음화를 위한 묵주의 기도 운동을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나가사끼 순례지를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이...
선교의 주보 성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녀 소화데레사와 모든 성인성녀들이여,
중국과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신부님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한국 교회의 창립자들과 순교자들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