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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삼순] 01
S#01. 자막
제1부 인생은 봉봉 오 쇼콜라가 가득 든 초콜릿 상자입니다.
S#02. 호텔 복도 (자막, 2004년 12월 24일)
화면 밝아지면 긴 복도가 나타난다. 서스펜즈적인 분위기다.
현우가 여자의 어깨를 안고 걸어온다.
뒤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손뜨개 목도리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삼순이가 나타난다. 조심조심 현우를 미행중이다.
현우와 여자가 룸으로 들어간다.
문이 닫히자 다다다 달려와 문에 바작 귀를 대는 삼순. 문과 바닥 사이에도 귀를 대어보느라 납작 엎드린다.
바람난 남자를 미행하는 여자가 대부분 그렇듯이 추잡스럽다.
그걸 깨달았는지 곧 일어나는 삼순.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삼순, 선글라스를 벗어든다. 눈물이 그렁한 채 문을 빤히 바라본다.
저 반대편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불온한 상상에 눈물이 툭 터질 것 같은데, 그러나 곧 눈물을 슥슥 닦는다.
눈빛이 처량함에서 살기로 바뀐다!
삼순 : (복수의 화신처럼 잘근잘근 내뱉는다) 흥, 감히 나를 두고 바람을 펴? 방앗간집 셋째딸 삼순이를 모독한 댓가가
얼마나 끔찍한건지 생생하게 보여주겠어. (가방에서 뭔가를 휙 꺼낸다. 신문지에 둘둘 만 칼이다. 눈을 번득이며 이를간다)
오늘, 너 죽고 나 산다!
S#03. 호텔 룸
욕실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흘러나오면서
현우,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와인리스트를 꼼꼼히 살펴본다.
잘 생긴 얼굴과 여유와 귀티가 배어있는 행동들...곧 수화기를 들고 룸서비스 번호를 누른다.
현우 : (예의 그 부드러운 말투) 여기 XXX혼데요, *** XX년산 한병 부탁합니다. 거기 맞춰서 뭐 먹을만한 거 알아서 보내주시구요.
예. (수화기 내려놓는데 초인종 울리자) 누구세요?
삼순 : (E 변조한 목소리) 룸서비스입니다.
현우 : (벌써? 황당하다. 갸웃하며 나간다)
현우, 문 연다.
들이닥치는 삼순.
놀라서 펄쩍 물러나는 현우.
현우 : 너!
삼순 : (노려본다)
현우 : 너, 어, 어떻게 여길...
삼순 : (한발 한발 다가든다. 미저리 분위기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도 딴 여자랑 있었니?
현우 : (강하게 부인) 아아니, 그땐 아버지 회사 창립파티 (하는데)
삼순 : (말 자르며) 재작년 크리스마스 때는?
현우 : 그때도 아버지 회사 (하다가) 회사 창립일이 하필이면 12월 24일이야. 알잖아.
삼순 : (방 한 가운데 멈춘다) 근데 오늘은 창립파티 안가고 여기서 뭐해?
현우 : (아차차!)
삼순 : (미저리처럼 눈빛은 서늘한데 말은 나긋나긋하다) 어머, 어떡하니? 오늘이 12월 24일이라는 걸 몰랐구나?
쯧쯧, 요즘 조기치매가 무섭다더니. 녹차의 주성분인 카데킨이 치매예방과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두루두루 유식한 자기가 가르쳐 주구선? 앞으론 녹차 마~니 마셔 이 새끼야?
현우 : (소름 끼친다) 너, 너 왜 이러니...
삼순 : 내가 왜 이러느냐고? 그걸 묻기 전에 니가 뭘 잘못했는지부터 생각해봐.
현우 : (요설이 시작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적이고 부드러운 말투!) 삼순아, 넌 지금 뇌 속의 브레이크가 고장났어.
사소한 오해로 뇌 속의 질서가 무너져서 정신상태가 균형을 잃은 거야. 침착해. 안그러면 넌 폭력을 멈출 수가 없어.
자, 심호흡을 해봐. 후우- 후우-
삼순 : 지랄 한번 제대로 이단옆차기 한다?
현우 : (벙!) ...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언어는 삶의 방식과 깊은 연관이 있어.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 언어에 반영되거든?
그러니까 '지랄'이라는 상스러운 어휘를 구사하면 삼순이 니가 살아온 삶이 (하는데)
삼순 : 옘~병?
현우 : (벙!!! 넘어지며) 너, 타락했구나. 누구야.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니?
삼순 : (심은하처럼) 부셔버릴거야.
삼순, 칼을 확 치켜든다.
호텔방의 부분조명 탓에 처키인형같다.
룸서비스 : (E) 실례하겠습니다.
S#04. 호텔 복도
처키처럼 칼을 치켜들고 있던 삼순, 흠칫 놀라 돌아본다.
룹서비스 : (별꼴이다) 들어갈 거 아니면 좀 비켜주시죠.
삼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문 앞에서 그러고 있었다. 아무짓도 안한 척 우아하게 딴청하며 간다.
초인종 소리에 이어 현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현우 : (E) 누구세요.
룸서비스 : (E) 룸서비습니다.
삼순, 현우의 목소리에 놀라 허둥지둥 도망을 간다. 아, 현우가 나를 보면 어떡하지? 비참한 내 모습을 들키면 어떡하지??
상상속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소리 나지 않게 필사적으로 뛴다.
그러나 하이힐 신은 발목이 꺾이며 철퍼덕 온몸으로 엎어진다.
넘어지면서 신문지 말이를 놓치자 그 안에서 흉기가 튀어나온다. 칼이 아닌 감자깎이다.
재빨리 뽈뽈뽈 기어가 감자깎이를 주워드는? 순간, 철컥! 문 따는 소리!
삼순, 카펫 바닥에 넙죽 엎드린다. 할 수만 있다면 바닥이 되고싶다.
문 열어주던 현우, 무심코 삼순 쪽을 보게 된다. 뭔가 이상하다. ? 갸웃...하더니 걸어오기 시작한다.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삼순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굴러다닌다. 현우면 어떡하지? 어떡해...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다가온 현우, 삼순을 내려다보고 있다.
스커트 차림으로 해삼처럼 바닥에 눌러붙어 손에는 감자깎이를 쥐고 나 몰라라 생까고 있는 해괴망측한 삼순!
현우, 삼순의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푸욱 한숨만 나온다.
삼순, 차마 눈은 못 뜨고 안면 근육만 움찔거린다.
현우 : 삼순아.
삼순 : (눈 감은 채 이크!)
현우 : (차분한) 일어나.
삼순 : ...............
현우 : 여기서 밤 샐 거니?
삼순 : ...............
현우 : 그만하고 일어나. 우리 할 얘기 있잖아.
삼순 : (어느새 목이 메었다) 내가 어떻게 일어나.
현우 : 일으켜줘?
삼순 : 쪽팔려서 어떻게 일어나냐구, 이 나쁜 자식아. 어엉- (울음 터뜨린다)
S#05. 호텔 커피숍 (동 밤)
마주앉은 삼순과 현우.
현우는 부드럽고 차분하게, 삼순은 가시 돋혀서, 기관총 연사하듯이 쉴틈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현우 : 언제부터 알았니.
삼순 : 한달 전쯤에.
현우 : 어떻게.
삼순 : 현우씨 핸드폰 문자 봤어.
현우 : 혹시 위치확인 같은 것도 했니?
삼순 : (잠시 생각하다가 끄덕끄덕)
현우 : (표정 굳는다) ...근데 왜 말 안했니, 한 달 동안.
삼순 : (왠지 주눅 든다)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서.
현우 : 넌 한 달 동안 나를 속였어. 내 핸드폰을 감시하고 위치확인까지 하면서 시침 떼고, 오늘은 미행까지 하고.
삼순 : (이런 적반하장이!) ............... (물 마시고) 내 남자가 변했는데 그 정도도 안하면 그게 여자야? 현우씨 변한지 오래 됐어.
툭 하면 핸드폰 꺼놓고 잘 받지도 않고 문자 씹고, 바쁘단 핑계로 만나주지도 않고. 지난 달엔 23일만에 만났어,
그것도 내가 회사 앞으로 찾아가서.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다고 현우씨 얼마나 짜증 부렸는지 기억나?
옛날엔 그렇게 찾아가면 좋아했잖아. 거기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야. 이런 날도 혼자 내버려두는데,
그럼 난 어떡해야 돼? 처분만 바라고 가만 있을까?
현우 : 그래서, 배신감 들었니?
삼순 : 그래!
현우 : 원망스럽니?
삼순 : 그래!!
현우 : 신뢰도 무너지고?
삼순 : 입 아퍼!!
현우 : 예전하고 같을 순 없겠구나.
삼순 : 당연하지!!
현우 : 그럼 헤어지자.
삼순 : ???!!!
현우 : 이렇게 서로 우스운 꼴로 헤어지긴 싫었는데 어쩔 수 없구나. 한동안 무심하게 대한 거, 인정한다.
미안하다. 변명은 안하겠다.
삼순 : (이게 아닌데! 온 몸이 떨린다) ...내가, 싫어졌니?
현우 : 아니.
삼순 : 아까 그 여자, 사랑하니?
현우 : 아니.
삼순 : (버럭) 근데 왜?!!! (눈물이 고인다)
현우 : (피곤한 표정이 된다)
삼순 : 말해, 이 자식아! 이유가 뭔데!
현우 : 헤어지잔다고 그렇게 욕을 해대는 건 반지성적인 행동이라는 걸 상기해줬으면 좋겠다.
삼순 : (눈물 글썽한 채) 옛날엔 시원시원하다고, 재밌다고, 많이 하라 그랬잖아 이 나쁜 놈아.
내가 욕할 때마다 흥분된다고 그랬어 안그랬어, 이 말탱구리야!!!
아, 너무 컸다!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는 가운데 삼순과 등을 맞대고 있는 남자는 푸하! 하고 웃기까지 한다.
현우 : (끙...곤혹스럽다) 여긴 콩코르드 광장이 아니야. 한 옥타브 낮춰.
삼순 : 나 지금 눈에 뵈는 거 없어. 이유가 뭐야, 빨리 말해. 현우씨 박식하고 유식한 거, 나 알고 하늘 알고 다 아니까
어려운 말 쓰지 말고 내 수준에 맞춰서 간단하게 말해. 은유법, 비유법, 직유법, 그런 개수작 부리지 말고 쉽게 말해.
수학, 철학, 논리학, 천문학, 엿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몸통만 말해.
현우 : (말이 안통하는군, 한숨 쉬고는) 안되겠다. 지금 네 몸속에는 흥분과 폭력을 유발하는 호르몬이 가득 차 있어.
그게 빠지면 그때 얘기하자. 미안하다, 못 데려다줘서. (일어나 간다)
삼순, 눈물 고인 채 쳐다본다. 이게 마지막일 것이다. 다시는 저 얼굴을 볼 수 없겠지...
주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으로부터 터져나온다.
삼순 : (벌떡 일어나며) 날 사랑하긴 했니?!
커피숍 안에 그 말이 울려퍼진다.
모든 손님들과 모든 종업원이 쳐다본다.
마지막으로 현우가 우떡 서더니 돌아본다.
삼순 :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은 잔뜩 메인 채) 3년 동안, 흑... 넌 한 번도 사랑한단 말을 해준 적이 없어... 날 사랑하긴 한 거야?
사람들이 일제히 현우를 쳐다본다. 여자 울린 그를 모두들 개새끼 보듯 한다. 품위는 물 건너갔다.
현우, 사람들 시선은 아랑곳없이 뚜벅뚜벅 테이블로 다가온다.
케잌 먹던 젊은 여자도, 웨이터도, 점잖은 할머니도, 인형을 안은 여자아이도, 시가를 문 외국인도, 모두들 미동 없이 쳐다본다.
어떻게 될지 너무 궁금하다.
현우, 다가와 멈춘다.
삼순 : (잔뜩 긴장한)
현우 : ...사랑했다.
삼순 : !
어디선가 휴- 안도하는 소리가 들린다.
현우 : 사랑했다, 볼이 통통한 여자애를. 세계 최고의 파티쉐가 되겠다고 파리 시내 베이커리란 베이커리는 다 찾아다니던
여자애를 사랑했다. 꿈 많고, 열정적이고, 활기차고, 항상 달콤한 냄새를 묻히고 다니는 여자애를 사랑했다. 그런데...
삼순 : (그런데?)
현우 : 내 사랑은 여기까진데 왜 여기까지냐고 보채면 난 어떡해야 되니?
삼순 : !
현우 : 미안하다, 여기까지라서. (돌아서서 나간다)
젊은 여자애 하나가 얼결에 박수를 치다가 멀쓱해서 곧 멈춘다.
몇몇 여자들이 '어머, 멋있다'고 속닥인다.
삼순, 다리가 풀려 자리에 털썩 앉는다. 멍한 눈가에 눈물이 한가득이다.
힐긋힐긋 사람들이 연민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웨이터가 붉은 와인 한 잔과 티라미슈 한 조각을 서빙한다.
???????????? 삼순이 쳐다보자,
웨이터 : 힘 내시라는 저희 지배인님의 배렵니다. (주먹으로 파이팅 해주고 간다)
삼순, 그제야 정신 차리고 눈물 훔치며 주위를 둘러본다.
마법에 걸린 걸까? 실내의 모든 사람들이 삼순을 향해 파이팅!을 해준다.
삼순, 더 비참해진다. 와인을 단숨에 마시고는 일어나 나간다.
S#06. 호텔 옥상 &룸 (동 밤)
난간에 서 있는 삼순. 목도리가 바람에 휘날린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도심의 야경이 휘황하다. 크리스마스이브의 화려함이...
삼순, 두 팔을 벌린다. 두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아주 유연하게, 바람에 몸을 맡긴다.
프레임아웃.
추락하는 삼순이... 슬픈 미소를 지은 채 도심의 야경 속으로 파묻혀간다...
삼순 : (E 마음의 소리) 현우씨... 날 잊지 말아줘. 죽는 건 괜찮지만 당신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건 견딜 수가 없어.
부디 행복해야 돼... 사랑해 현우씨... (문득 공중에서 뚝 멈춘다. 휙 고개 들면서) 이럴 줄 알았지?
여자와 한창 정사중이던 현우, 무심코 고개 들다가 창문 밖 삼순이와 눈이 마주친다. 딱 걸렸다!
놀라서 화다닥 여자에게서 떨어져나가는 현우.
삼순의 눈이 띵~ 빛난다. 레이저빔이라도 나올 것 같다. 말을 잘근잘근 씹는다.
삼순 : 내 눈을 똑똑히 봐. 이 눈으로 평생 너를 쫓아다닐 거야. 밤이면 밤마다 꿈 속에 나타나 괴롭힐 거야.
바람난 너 땜에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 흥, 이젠 니 차례야. 한번 당해보시지, 불면의 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내가 이 여자를 왜 버렸을까, 평생 땅을 치고 후회할 걸? 이게 사랑이냐고? 개뿔?
미안하다, 내 사랑도 아까 그 커피숍에서 끝났다! 안녕, 한때 내가 미치게 사랑했던 개자식아!
다시 추락하는 삼순의 몸.
S#07. 호텔 앞
쿵 떨어지는 삼순. 적막...
행인들이 무심히 삼순을 지나쳐 간다. 고요......
거리를 휘도는 싸늘한 겨울바람... 낙엽이 뒹군다.
이윽고, 삼순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삼순 : (E 마음의 소리) 이게 다 무슨 소용인데... (눈을 뜬다. 눈물이 그렁하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장례 치루면
먹고 사느라 바쁘고, 지 자식 낳아준 마누라도 돌아서면 남남인데 니가 뭐라고 너를 평생 기억해.
S#08. 동 커피숍
와인이 그대로 있다.
입술을 앙다물며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삼순.
삼순 : (E 마음의 소리) 헤어진 남자 기억 속에 들어앉아 있는 건 또 무슨 의미고. 그건 추울 때 마시는 오뎅국물보다
더 값어치가 없는 거야, 알어? (서러움이 격해져 입을 틀어막고 뛰쳐나간다)
S#09. 호텔 로비 화장실
터지려는 울음을 틀어막고 다급히 들어오는 삼순. 가운데 칸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흐느낌 소리가 들린다. 흑... 그러면서 옷 벗는 소리가 들린다.
뭘 많이 부딪히기도 하고, 울음이 본격적으로 터지기 직전의 흑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린다.
다 벗었는지 변기에 앉는 소리가 들린다.
마악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둔 코르셋이 보인다. 마치 곤충이 벗어놓은 허물처럼 펑퍼짐한...
삼순, 코르셋을 벗고 다시 입은 블라우스의 단추를 잠그며 흐느끼고 있다.
울음이 격해져 단추 잠그기를 포기한다. 결국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한다.
다 끝났다. 타오르던 불꽃은 꺼지고 환희도 기쁨도 사라졌다. 버려진 자의 아픔만이 남았다.
한번 터지자 무서울 게 없다. 울음소리가 더 커진다. 엉엉...엉엉...엉엉......
삼순 : (E 마음의 소리) 그런 적이 있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이 나였던 시절.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아득하고 목울대가 항상
울렁거렸다. 그 느낌이 좋았다. 거기까지 사랑이 가득 차서 찰랑거리는 것 같았다. 한 남자가 내게 그런 행복을 주고
또 앗아갔다. 지금 내가 울고 있는 건 그를 잃어서가 아니다. 사랑... 그렇게 뜨겁던 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믿어지지 않아서 운다. 사랑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아버려서 운다. 아무 힘도 없는 사랑이 가여워서 운다.
까만 마스카라가 번져 검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손바닥으로 슥슥 닦자 검은 눈물이 온 얼굴에 번진다.
그때 노크 소리.
삼순, 상관 않고 운다.
두 번째 노크 소리. 그냥 운다.
세 번째 노크 소리. 힐끗 쳐다본다. 손기척하기에는 너무 멀다.
삼순 : 있어요. 엉엉...
네 번째 노크 소리.
삼순 : (짜증) 있어요오- 허어엉...
다섯 번째 노크 소리.
삼순 : (왕짜증) 있다구요오!
여섯 번째 노크 소리.
삼순 : (왈칵 화가 난다) 귀 먹었어요? 있어요, 사람 있다구요! 나 방금 실연 당해서 눈에 뵈는 게 없으니까 그냥 놔둬요, 에?
화를 내자 울음이 더 크게 따라 나온다. 엉엉엉...
일곱 번째 노크 소리.
삼순 : (폭발! 벌떡 일어나며) 누구야! 나랑 해보겠다는 거야 지금? (발로 문을 뻥 찬다)
슬로우로 문이 열린다. 마치 알리바바의 문처럼...
문이 열리며 한 남자의 모습이 느린 화면으로 나타난다.
고급스런 캐주얼 양복을 빼입고, 패셔너블한 도트무늬 넥타이를 매고, 하얀 얼굴, 도도하게 30도쯤 쳐든 턱, 서늘한 눈매...
진헌이다.
그 뒤에서는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남자 서너명이 힐긋힐긋 보고 있다.
어리둥절한 삼순, 너무 놀라 입이 쩍 벌어진다!
얼굴엔 검은 눈물! 채 잠그지 못한 블라우스 사이로는 허연 가슴!
진헌 : (미간 찌푸리며) 뭡니까 아줌마. 변태예요?
삼순 : (뭐? 변태?)
진헌 : (재빨리 가슴을 훑고는) 아니면, 남자화장실에서 수유 중입니까?
삼순 : (수유? 얼른 가슴을 본다. 아뿔싸! 얼른 가슴을 가리고 쾅 문을 닫는다)
남자화장실이었구나! 이런 개망신이 있나! 몰라몰라몰라 난 몰라!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는 삼순.
진헌, 종이타월로 아직 물기 남아있는 머리와 옷 등을 닦는다.
그러다가 아! 뭔가 떠올라 가운데칸을 돌아본다. 아까 커피숍의 그 여자구나.
참 한심하다는 표정이더니 다가가 노크를 한다.
삼순, 노크소리에 으헉! 놀라 그만 주저앉고 만다.
진헌 : (높낮이 없이 냉랭하게) 이런 날 남자가 다른 여자랑 호텔에 왔으면 게임 끝난 겁니다. 다음부턴 왜 그랬냐고
묻고 따질 것도 없이 정강이 한번 걷어차고 끝내세요. 세상에 널린 게 남자고, 남자, 다 거기서 거기예요.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간다)
삼순, 벙 하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S#10. 호텔 로비 (또는 화장실 앞)
화장실에서 나와 현관으로 향하는 진헌. 속내를 알 수 없는 특유의 도도한 표정.
S#11. 호텔 커피숍 (S#05)
진헌은 귀티 나고 예쁜 맞선녀와 마주앉아 있다.
진헌 : 이런 경우 채원씨는 어떻게 하겠어요?
맞선녀 : (벌써 몇 번째 틀렸지만 아직은 봐준다. 미소로) 채원이가 아니고 채운이요.
진헌 : 아, 실례. 채운씨 같으면 내 남자가 다른 여자랑 호텔에 왔다가 들켰다. 어떡하시겠어요?
맞선녀 : (미소) 글쎄요...그런 비극적인 생각은 안해봐서...
진헌 : (끄덕끄덕) 비극적이라...
그때, 진헌과 등을 맞대고 앉은 삼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삼순 : (E) 내 남자가 변했는데 그 정도도 안하면 그게 여자야? 현우씨 변한지 오래 됐어. 툭하면 핸드폰 꺼놓고 잘 받지도 않고
문자 씹고... (이하 계속 들리면서)
진헌 : 저런, 여자가 좀 눈치가 없네요. 전화를 안받으면 벌써 종 친건데. 안그래요?
맞선녀 : (슬슬 화가 난다. 그래도 참는다) 그건 그렇고 지금 하시는 일은 재밌으신가봐요?
진헌 : (건성) 일을 재미로 하나요? 먹고 살자고 하는 거지.
맞선녀 : (저거 지금 나를 놀리는 거지? 또 참고 미소로) 네에... 그런데 호텔엔 언제쯤 들어가실 계획이세요?
어머님이 많이 기다리시는 것 같던데.
현우 : (E) 그럼 헤어지자.
진헌 : 이런, 남자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네요?
맞선녀 : (드디어 울그락불그락)
삼순 : (E) 내가, 싫어졌니?
진헌 : 그걸 이제 아셨나.
삼순 : (E) 아까 그 여자, 사랑하니?
진헌 : 그건 상관할 바 아니지.
삼순 : (E) 근데 왜?!!!
진헌 : (깜짝 놀란다!)
맞선녀 : (화나 가서 푸르딩딩)
삼순 : (E) 옛날엔 시원시원하다고, 재밌다고, 많이 하라 그랬잖아, 이 나쁜 놈아.
내가 욕할 때마다 흥분된다고 그랬어 안그랬어, 이 말탱구리야!!!
진헌 : (푸하! 웃는데... 물세례! 윽! 순간 놀랐다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맞선녀 : (일어나 물텁의 물을 끼얹은 뒤다) 너, 이 바닥에 좌악 소문난 거 모르지? 무례하고 건방지고 안하무인이라고.
맞선 보기 싫음 너희 어머니하고 너희 집에서 해결해, 여자들 헛수고 시키지 말고. (간다)
진헌 : (이제 끝났군, 냉랭한 미소를 지으며 린넨으로 물을 닦는데)
삼순 : (E) 날 사랑하긴 했니?!
진헌 : (돌아본다)
삼순이 대답을 기다리며 보고 있고 현우가 저만치서 보고 있고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두 사람에게 꽂혀 있다.
진헌, 퍽 웃으며 앞을 본다.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현우 : (E) 사랑했다, 볼이 통통한 여자애를. 세계 최고의 파티쉐가 되겠다고 파리 시내 베이커리란 베이커리는 다 찾아다니던
여자애를 사랑했다. 꿈 많고, 열정적이고, 활기 차고, 항상 달콤한 냄새를 묻히고 다니는 여자애를 사랑했다. 그런데...
진헌 : (재밌는 걸?)
현우 : (E) 내 사랑은 여기까진데 왜 여기까지냐고 보채면 난 어떡해야 되니?
진헌 : ...............
S#12. 호텔 현관 앞 (현재)
모범택시가 달려와 멈춘다.
기다리고 있던 진헌이 올라타고 택시는 곧 떠난다.
삼순이 회전문 밀고 나온다.
택시 안기다리고 처벅처벅 걷다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다가온다.
널부러져 있는 삼순의 시체. 깨진 사랑의 파편 같다.
삼순, 망연하게 자신의 시체를 내려다본다.
시체는 우스꽝스럽고, 바라보는 삼순은 참담한...
삼순 : (Na) 연애의 뒷모습이 이런 거라면, 이렇게 우스운 거라면... 다시는 사랑 따위 하지 않겠다. 다시는...
삼순, 다 털어버리듯 씩씩하게 걸어간다.
S#13. 전광판
<하지만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사람으로 밖에 치유할 수 없답니다.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세요. ^.^>
이모티콘이 윙크하면서 화면 어두워진다.
F.O
S#14. 수영장
F.I
힘차게 수영하는 진헌.
S#15. 샤워실
샤워를 한다.
S#16. 오피스텔 안
스킨을 바른다. 머리 손질을 한다. 속옷을 입는다.
시계 키고, 와이셔츠 입고, 커프스 달고, 넥타이 골라 매고, 양복 갖춰 입고, 식탁에 배달되어온 녹즙을 마시고,
신발장에 쭉 늘어선 구두, 그 중 하나를 꺼내고 신고,
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신발장의 거울로 도도하게 치켜뜬 눈으로 마지막 점검을 하고 나간다.
지금까지 한결같은 표정, 도도함이 섞인 무덤덤...
S#17. 레스토랑 '보나뻬티-Bon Appetit' 앞
모범택시가 달려와 멈춘다.
내려서 들어가는 진헌.
테라스를 청소하던 웨이터들이 인사한다.
끄덕 목례하며 들어가는 진헌.
S#18. 보나뻬띠 안
현관문이 활짝 열린다. 마치 마법의 성이 열리는 것처럼!
진헌의 시점으로 카메라가 들어간다.
테이블 세팅 중이던 웨이터와 웨이츄리스들이 제각각 인사를 한다. 자유로운 듯 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카메라는 그들을 하나하나 지나치며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간다.
주방문이 열린다. 카메라가 역시 성큼 들어간다.
주방 직원들도 각자 자기 일 하다가 인사하고 또 다시 자기 일에 몰두한다. 활력이 느껴진다.
카메라는 이들을 지나쳐 또 안으로 들어간다.
S#19. 주방 일각
걱정스럽게 뭔가 상의하고 있던 오지배인(60초)과 쉐프 이현무(30중)가 돌아본다.
60이 넘은 오지배인은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유니폼 정장을 입고 나비넥타이를 하고 백발이 성성한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넘겼다.
들어서던 진헌, 분위기를 감지한다.
오지배인 : 오셨습니까.
현무 : 날씨는 좋은데 좋은 아침은 아니네.
진헌 : 무슨 일이에요?
현무 : 앙리가 오늘 아침 비행기로 파리로 돌아갔어.
진헌 : ......?
오지배인 :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답니다.
진헌 : (저런!) ...안됐네요... 언제쯤 돌아올 수 있대요?
현무 : 그게 문제야, 다신 돌아오지 않겠대.
진헌 : !
현무 : 어떡하지? 오늘 당장 디너부터 문제야.
S#20. 결혼정보업체
삼순, 전근대적으로 생긴 커플매니저(남자)와 마주앉아 있다.
매니저 : (신상명세 보며) 아버지는 안계시고 세자매중의 셋째딸... 소유 부동산은 단독주택 한 채... 누구 명의로 되있어요?
삼순 : 어머니요.
매니저 : (적는다) 어머니... 몇 평이에요?
삼순 : 네?
매니저 : 집이 몇평이냐구요.
삼순 : 안재봐서 모르는데요.
매니저 : (누가 그런 걸 재봐) 등기부등본에 나와있잖아요.
삼순 : 안봐서 모르는데요.
매니저 : 지금 날 놀리는 겁니까?
삼순 : 아뇨.
매니저 : (웃기는 여자군!) 큼... (신상명세 보며) 최종학력은 숭의여고 졸업에 르코르동 블루 이수라... 이게 뭐죠?
삼순 : (자랑스럽게) 파리에 있는 요리학교에요. 100년이 넘는 전통을 갖고있죠.
매니저 : 어쨌든 고졸이고.
삼순 : (뭐시라?)
매니저 : 월수는... (펄쩍 뛴다) 아니 이럴 수가! 월수입이 빵원이네요?
삼순 : (난처해진다) 지금은 잠깐 쉬는 중이거든요. 금방 취직할 거예요. 워낙 전문직이니까. (방긋 웃어준다)
매니저 : 그걸 어떻게 장담하죠?
삼순 : 네?
매니저 : 나이는 서른에 고졸이면서 편모슬하인 뚱녀를 받아줄 회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삼순 : (눈이 훌떡 뒤집어진다) 뚱녀요? 아, 아니 이봐요, 아저씨. 아니 매니저님. 저는 지금 회원가입하러 온 거예요.
당신네 회사 상품을 팔아주러 온 거라구요. 그런데 손님한테 이렇게 무례한 회사가 세상에 어딨어요?
매니저 : 이봐요, 김삼순씨. 그러고보니 이름도 참 거시기하네. 어쨌든 삼순씨,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알려주는데,
얼굴에 손댔어요 안댔어요.
삼순 : 백퍼센트 자연산이에욧!
매니저 : 이것 봐 이것 봐, 양심 없는 것 좀 봐. 어떻게 요즘 같은 시대에 손 한번 안댈 수가 있어 그 얼굴에?
삼순 : (폭발 일보 직전!) 뭐예요? 뭐 이런 개뼉다구 같은 회사가 다 있어?
매니저 : 댁도 만만치가 않아요. 이런 조건으로 결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하며 비디오테잎을 탕 내놓는다) 파니핑크라는
영화예요. 초절정리얼리티 노처녀 영화라고 할 수 있죠. 거기에 보면 이런 대사가 있어요.
여자 나이 서른에 연인을 만나기란 길 가다가 원자폭탄을 맞는 것보다 어렵다!
한세기가 넘는 영화 역사상 최고의 명대사라고 할 수 있죠. 노처녀를 이렇게 직설적이고 리얼하게 표현한 대사는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집에 가서 발 닦고 이거나 보세욧, 결혼할 생각 꿈에도 하지 말고!
삼순 : (못참고 벌떡 일어난다) 이 영화를 지금 리메이크 하면 아마 서른을 마흔으로 고쳐 쓸걸요?
요즘 서른은 옛날 스물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아셔야지!
매니저 : (벌떡 일어나 눈을 맞대고) 그건 여자들 생각이고, 우리 남자들 생각은 쌍팔년도에서 한치도 나아진 게 없다는 걸
아셔야지! 여잔 일단 어리고 이뻐야 돼욧!
삼순 : 오오 그러셔? 니들 남자들은 안늙니? 뱃살 축 늘어져 가지고 영계 찾으면 안 비참하니? 곱게 늙어야지 아저씨들아.
그리구 뭐? 뚱뚱하다구? 그래, 나 뚱뚱해. 케잌이랑 초콜릿 만드는 게 내 직업인데 그럼 안 뚱뚱하고 배겨?
백수라고? 그게 내 잘못이야? 경제 죽인 사람들 다 나오라 그래!
S#21. 결혼정보업체 (동)
소파에 앉아 졸다가 컥, 목이 꺾여 잠이 깨는 삼순. 침고인 입을 다시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커플매니저가 다가오자
어? 저 자식! 슬그머니 째려보다 일어난다.
매니저 : (꿈과는 정반대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다가오며) 저희가 잠깐 상의를 해봤는데 김 삼순씨는 특별관리회원으로
등록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삼순 : 그게 뭔데요?
매니저 : 성사될 때까지 무한공급을 받는 겁니다. (은근하게) 남자를 밑도 끝도 없이!
삼순 : (아, 구미가 당긴다. 은근하게) 근데 밑도 끝도 없으면 밑도 끝도 없이 비싸지 않을까요?
매니저 : 물론 그렇죠. 하지만 평생을 좌우하는 결혼인데 그 정도 투자는 하셔야죠.
삼순 : 얼만...데요?
매니저 : (빙긋) 9백 9십 9만원입니다.
S#22. 달리는 버스 안 (동)
의자에 앉아 졸다가 쿵! 창에 머리 찧고 잠 깨는 삼순.
삼순 : (비몽사몽) ...무슨 꿈이 미니시리즈네...
삼순, 정신 차리고 자세를 단정히 한다. 면접 보러가느라 잘 차려 입고 무릎에는 케잌 상자가 놓여있다.
문득 인상 찌푸린다. 앞 의자 등판에 붙은 결혼정보업체 광고.
꿈속의 커플매니저가 사장인 듯 어서 오라고 두 팔 벌려 웃고 있다.
삼순 : ???? 만원 빠진 천만 원을 평생 철이 안 드는 수컷들한테 바치라구? 흥, 웃기고 있어!
봄날 풍경 속으로 달리는 버스.
S#23. 나사장 호텔 전경 (동 낮)
S#24. 호텔 로비
나사장(60초), 윤비서(40대)를 대동하고 들어온다.
진헌이 뒤따라온다.
나사장 : 우리 델리에서 베이커리류를 산다고?
프런트맨들이 깍듯하게 인사하자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인사 받아가며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진헌 : (어머니한테조차도 깍듯하고 냉랭하다)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아침 비행기로 갔는데 다신 안 돌아오겠답니다.
그동안 향수병에 시달렸거든요. 새 파티쉐 구할 때까지만 여기서 사다 쓸려구요.
나사장 : 우리 델리, 서울에서도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 품질 좋고 비싸기로.
진헌 : 당분간 마진은 포기합니다.
나사장 : 너 그거 아니?? 호텔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외국인 주방장을 쓰는 경우는 딱 한 곳이야.
진헌 : 하나 더 있어요, 이태원에. 조그만 비스트로긴 하지만 사장도 주방장도 프랑스 사람들이죠.
나사장 : 어쨌든 연봉이 안맞아서 쓸 수가 없다더라. 그런데 넌 주방장도 아닌, 겨우 케잌과 과자 만드는 파티쉐를 외국인을
쓰고 있으니 업계에서 비웃는 건 당연하지 않겠니?
진헌 : 겨우라뇨. 프랑스에서는 김치 같은 음식들이에요. 전 가짜요리 안만듭니다.
나사장 : (엘리베이터 앞에 멈추어 흘긴다) 잘난 척은? 분에 넘치니까 하는 소리야. 매출에 비해 순익도 낮고.
진헌 : 재밌어서 하는 거지 떼 돈 벌 생각 없어요.
나사장 : 잘났구나 아주, 에미 돈으로 판 벌려놓구.
진헌 : 다 갚았잖아요.
나사장 : (계속 못마땅하다)
엘리베이터 문 열리고 셋이 모두 탄다.
S#25. 엘리베이터 안
나사장 : 김회장님 손녀딸, 다음주에 결혼한다더라. 기륭건설 장남하구.
진헌 : ?
나사장 : (흘기다) 니가 작년 크리스마스에 퇴짜 놓은 아가씨!
진헌 : (아, 기억난다) 전 참석 안해도 되죠?
나사장 : (약이 오른다) 도대체 결혼은 언제 할 거야? 내년 봄이면 미주 초등학교에 입학 하는데
손 잡고 학교 갈 숙모라도 있어얄 거 아냐?
진헌 : 제가 볼 겁니다. 제가 손 잡고 입학식 가고 자모회도 나가고 급식 때도 제가 가서 밥 퍼주고 국 퍼주고,
그러니까 맞선 좀 그만 보죠.
나사장 : 맞선 보기 싫으면 결혼 해.
진헌 : 디너 얼마 안남았어요. 빵 주세요.
나사장 : 얘긴 하겠지만 크리스가 안된다 그러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진헌 : 크리스가 저 좋아하잖아요. 전화만 넣어주세요.
나사장 : (표정 험상 궂어지더니 갑자기 진헌의 등짝을 뻑! 친다)
진헌 : 억! (거의 주저앉는다)
윤비서 : (힐긋 봤다가 무간섭. 니힐한 묘한 표정의 소유자다)
나사장 : (아픈 손목을 부여잡고) 나쁜 자식. (버럭) 언제까지 이러고 다닐 거야? 당장 걷어치우고 들어와!
진헌 : (가끔 있는 일이다. 귀찮은 표정이 역력하다)
나사장 : 야 이 놈아, 별 다섯 개짜리 호텔 놔두고 달랑 하나 있는 아들이 나가서 레스토랑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 그러는 줄 알어?
진헌 : 엄마는 여관장사, 아들은 밥장사.
나사장 : 뭐? (분기탱천해 핸드백으로 퍽퍽 때리며) 이 놈이 에미를 놀려? 이 미련한 놈아, 너는 뭐 천년만년 20대일 줄 알어??
서른 넘으면 금방 마흔되고 쉰 돼 이 놈아! 다 늙어서 남들 사장, 회장 소리 들을 때 그때 경영수업 받을 거야?
진헌, 여전히 무심한 표정의 윤비서를 방패막이 삼지만 고스란히 맞는다.
지금껏 깍듯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그저 엄마의 주먹을 피하는데 급급하다. 아이처럼 반말도 튀어나온다.
진헌 : 억! 억! 억! (화가 나서) 자꾸 때리면 나도 못 참는 수가 있어!
나사장 : (눈 동그래진다) 이 자식이?! (핸드백으로 머리통 퍽 갈기며) 못참으면! 못참으면 니가 어쩔 건데?
순간 띵~ 소리가 나자, 얼른 우아하게 자세 바로 잡는 나사장.
진헌도 윤비서 등 뒤에서 나와 옷매무새 단정히 한다. 눈 깜짝할 새다.
문 열리지만 아무도 없다. 누군가 잘못 눌렀나보다.
문 닫힘과 동시에.
나사장 : (구타 시작) 못참으면 어쩔 건데! 어쩔 건데! 이 자식이 에미한테 협박을 해?
진헌 : (아이 참...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악 날라오는 엄마의 팔을 확 붙잡는다)
나사장 : (당황) 어어? 이 놈 봐라? 안놔?? 안놔?
진헌 : (큰 키로 내려다보며) 나사장 요즘 외롭지. 남자랑 잔지 얼마나 됐어?
나사장 : 야!!!
S#25. 호텔 로비
삼순, 케잌 상자를 들고 호텔 로비로 들어와 두리번거린다.
S#26. 사장실 복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나사장 나오자 엘리베이터 기다리던 직원 두어 명이 인사한다.
나사장, 우아하게 인사받으며 간다.
직원들, 곧 갸웃해한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넥타이는 헤벌어지고 뺨에는 손바닥 자국이 난 진헌이 시침 뚝 떼고 기품있게 나와서 걸어간다.
S#27. 비서실
화나서 성큼성큼 들어서는 나사장.
윤비서와 진헌이 따라들어온다.
나사장 :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진헌 : 대신 돈 복 있잖아요.
나사장 : (멈춰 확 흘긴다)
진헌 : (오로지 엄마한테만 하는 표정- 애교스럽게 씨익 웃으며) 일복도 있네?
나사장 : (그 표정에 그만 웃음 터진다) 아후 못살아 정말... 아우 징글징글해... 저게 어디서 나왔을까.
진헌 : 나사장 다리 밑에서.
나사장 : (버럭) 올해 안에 결혼해!
진헌 : (찔끔) ...크리스한테 빨리 전화나 너줘요.
나사장 : 느이 형한테 확 일러버릴 거야! (사장실로 들어간다)
진헌 : (심드렁) 형한테 안부 전해줘요.? (윤비서 보며) 나사장, 별 일 없는 거죠?
윤비서 : 늙느라 그러시지. 근데 언제까지 택시 타고 다닐 거야? 운전하기 겁나면 어머니 말씀대로 기사를 붙이든가.
진헌 : 괜찮아요, 생각보단 편해요.
S#28. 동 호텔 주방 내 간이사무실
창문 너머로 바쁜 주방의 모습 보이고,
사무실이라고 할 것까지 없는 공간에서 한국인 쉐프와 독대하고 면접 보는 삼순.
쉐프 : 2003년 부터 작년 12월까지 낭뜨 근무... 낭뜨는 왜 관두셨어요? 규모도 크고 대우도 좋은 곳인데.
삼순 : (당황한다. 예상한 질문이지만 거짓말을 잘 못한다) 어...뭐랄까...(우아하게) 저랑은 세계관이 다르다고나 할까... 그래서....
쉐프 : ? 세계관이라면...
삼순 : (곤혹스럽다) 음... 저는... 음식은 만든 사람의 삶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전... (내친 김이다) 훌륭한 케잌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 삶의 질도 훌륭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몇시간 쯤 외출 할 수도 있다는, 그런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죠.
쉐프 : (아리송) ...?
삼순 : (베시시 웃어주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여자가 달콤한 케잌을 만들 순 없잖아요?
쉐프 : ? ...그러니까 결론은, 베이커리업계에서 일년 중 가장 바쁜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랑하는 사람과 노느라고 무단외출을 했다,
그래서 해고당했다, 이 말인 것 같은데...
삼순 : 아뇨, 논 게 아니라 지키기 위해서요.
쉐프 : ? ...그래서 지켰습니까?
삼순 : 아뇨, 헤어졌습니다.
쉐프 : (진지한) 유감이네요.
삼순 : (겸연쩍은 웃음) 고맙습니다. (준비해 온 케잌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케잌 꺼낸다) 망고무스예요.
실력을 확인하기에는 이 방법이 제일 좋은 것 같아서...
쉐프 : (파일을 덮으며 예의 바르게) 됐습니다. 저희는 보조를 구하고 있는데 경력이 너무 쎄네요, 연봉도 그렇구요.
이번 기회에는 안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삼순 : !
S#29. 동 호텔 주방
케잌 상자를 들고 사무실에서 나오는 삼순.
삼순 : 뭐야 이거. 어디선 경력이 너무 없다 그러구, 어디선 경력이 너무 많다 그러구, 무슨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 대체...
아~ 먹고 살기 힘들다 김삼순... (하다가 문득 뭔가를 보고 다가간다)
S#30. 베이커리실 앞
다가온 삼순, 멈추어 안을 들여다본다. 베이커리 실이다.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캡을 쓴 베이커리 쉐프들이 제각각 자기 일로 바쁘다.
오븐에서 갓 구어져 나오는 빵도 보인다.
외국인 쉐프는 결혼식에 쓸 3단 케잌 정성 들여 만들고 있다. 활력이 넘치고 달콤한 냄새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삼순, 넋을 잃고 바라본다. 저 안에 내가 있었으면... 케잌과 과자와 노동이 그립다.
뚜벅뚜벅 걸어와 삼순의 뒤에 서는 진헌. 삼순이 입구를 막고 있는 꼴이다.
삼순이 뭘 보고 있는지 자기도 힐끗 안을 들여다보고는 무뚝둑하게.
진헌 : 들어갈 겁니까, 말 겁니까.
삼순, 화들짝 놀라 돌아본다. 동시에 비명소리 악!
진헌, 당황해 한다. 넥타이 핀과 와이셔츠 단추에 삼순의 머리카락이 된통 걸렸다.
상체를 살짝 기울인 채 들여다보다가 뒤 돌면서 진헌의 가슴팍에 걸린 것이다.
삼순이 진헌의 노예가 된 것 같은, 꼴 사나운 모습으로 소리를 지른다.
삼순 : 아! 뭐야 이거! 아저씨 이거 뭐예요! 아, 아파...
진헌 : (아 참나, 짜증난다) 가만 있어봐요, 머리카락 걸렸잖아요. (풀려고 애쓴다)
삼순 : (그럴 수록 아프다) 아! 뭐하는 거예요, 지그음?!
진헌 : 가만 있으라구요. (잘 안풀린다. 짜증난다)
삼순 : 아! 아프잖아요!
진헌 : 가만 있어요 좀!
삼순 : 어머? 왜 소린 지르고 그래요?
진헌 : 입 닥치고 가만 있으라니까!
삼순 : 어머어머! 이 아저씨가 어따 대고 욕이야? 입 닥치라니, 입 닥치라니!
지나가며 킥킥대는 직원들.
진헌 : (열난다. 서늘하게) 입 닥쳐, 머릴 확 잘라버리기 전에?
삼순 : 어머어머! (아파 욕이 튀어나온다) 야, 이 말탱구리야!!! 너 지금 뭐라 그랬어? 뭐라 그랬어?!
진헌, 기막힌 듯 코웃음 한번 치더니 터억 삼순의 뒷덜미를 잡고 베이커리실로 들어간다.
삼순, 머리카락과 진헌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한손으로는 여전히 케잌 상자 든 채로 딸려 들어간다. 처참한 비명소리!
S#31. 베이커리실
진헌이 잔혹하게, 성큼성큼 들어온다.
너무 아픈 삼순, 끌려들어오며 온갖 욕을 해댄다.
삼순 : @#$@#$%#^
직원들과 외국인 쉐프가 황당하게 쳐다본다.
진헌 : 가위 좀 주세요.
삼순 : (가위? 헉!) 너... 너, 짜르기만 해봐? 그러기만 해봐?
진헌 : (직원들 쳐다보며) 가위 없어요?
한 여직원이 얼른 가위 찾아 건넨다.
삼순 : (위기를 느낀다) 야, 가만! 내가 풀게. 내가 풀면 되잖아! 손 대지마, 어?
진헌 : 죄송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난 욕 먹고는 못사는 체질이라서요. (가위를 들이댄다)
삼순 : 스탑!!! 스탑, 스탑!
진헌 : (멈칫)
삼순 : 너 이거 자르면 나 고소한다? 머리카락도 엄연히 신체의 일부거든? 상해죄로 고소할 테니까 알아서 해?
진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침없이, 무자비하게, 인정사정없이, 가위질을 한다! 가윗날에 머리카락이 싹둑 잘린다.
설마 하다가 놀라서 입 벌리고 쳐다보는 직원들.
삼순, 가위질 소리에 굳어버린다. 그 눈앞에서 장렬하게 낙하하는 머리카락 뭉치!
삼순 :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보며 몸서리를 친다) 으~~~~~
진헌 : 여기 직원 아니죠? 상해죄로 고소하세요. 전 산업스파이로 고발할 테니까.
(하고는 외국인 쉐프에게, 유창한 영어로) 전화 받으셨죠, 크리스?
쉐프 : (영어) 응. 그래도 오늘 당장은 안돼. 내일부터 해줄게.
진헌 : (영어) 안돼요. 런치타임도 간신히 넘겼어요. 어떻게 좀 해봐요, 크리스.
쉐프 : (영어) 안 된다니까. 그렇다고 우리 델리에 나갈 걸 미스터 현한테 줄 순 없잖아.
진헌 : (영어) 조금만 융통해줘요. 당장 디너에 나갈 것만요. 네?
그 순간 진헌의 뒤를 보면서 오우! 놀라는 쉐프의 표정과 여직원들의 비명소리에 휙 돌아보는 진헌.
그 얼굴에 정통으로 박히는 케잌.
쉐프 : 오 마이 갓!
삼순 : 나도 무례한 인간은 못 보는 체질이거든? (하고 손가락에 묻은 무스를 쪽 빨아먹는다)
진헌 : (케잌 받침이 떨어지면서 망고무스가 범벅이 된 얼굴이 드러난다)
삼순 : 내가 직접 만든 거라 비싼 거지만 돈은 안 받으마. 잘 처먹어라? (나간다)
쉐프 : (한국어) 미스터 현, 괜찮아?
진헌, 손가락으로 한쪽 눈에 묻은 걸 치워내고 다른쪽 눈에 붙은 것도 치워낸다. 꼭 밀대로 마당의 눈을 치워내는 것 같다.
직원들, 저 성질에 무슨 일을 벌일지 찌푸린 채 바라본다.
진헌, 손으로 입가를 스윽 닦아낸다. 그리고 무심하게 혓바닥으로 입술을 훔친다. 곧... 어? 맛있네? 하는 표정이 된다.
S#32. 호텔 직원화장실 (남자)
잘리워진 머리카락을 만지며 씩씩거리며 들어오는 삼순.
삼순 : 삼손의 머리카락은 건드려도 삼순이의 머리카락은 건드리면 안된다는 걸 아셔야지!
사이다에 밥 말아먹다 코 박고 죽을 놈! 또 걸렸단 봐라, 그냥 확! (앗!)
소변 보던 남자들(요리사복, 지배인복, 웨이터복 등등 다양한)이 좀 겁먹은 눈으로 삼순을 쳐다보고 있다.
삼순 : ! 아저씨들 말고 저기... 개의 자식이 있어서... 일들 보세요... (꾸벅 인사) 죄송합니다. (얼른 줄행랑)
S#33. 직원화장실 (여자)
자기 머리를 콩콩 박으며 뛰어들어오는 삼순.
삼순 : 아휴! 치매야 치매! 작년 크리스마스에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 또 그러고 싶니? (하다가 멈칫! 전광석화처럼 뭔가 떠오른다!)
S#34. 그 호텔 그 화장실 (#09)
진헌 : 뭡니까, 아줌마. 변태예요?
S#35. 베이커리실 (#31)
케잌 맞기 직전의 놀란 표정의 진헌!
S#36. 그 호텔 그 화장실 (S#09)
진헌 : (재빨리 삼순의 가슴을 훑더니) 아이면, 남자화장실에서 수유중입니까?
S#37. 현 화장실
어머낫 세상에! 삼순, 마치 그가 보는 것처럼 얼른 가슴을 가린다.
S#38. 호텔 베이커리실
진헌, 자기 얼굴에 묻은 무스를 맛보고 있다. 뺨에 묻은 것, 이마에 묻은 것, 콧등에 묻은 것...
받침과 함께 떨어져 바닥에 뒹구는 시트도 뜯어 먹어본다.
여직원, 머뭇거리며 수건을 건넨다.
진헌, 받아서 얼굴을 슥슥 닦고는 그 수건을 던지듯 건네고는 뛰어나간다.
S#39. 호텔 로비 일각
뛰어오는 진헌.
S#40. 호텔로비 일각
삼순, 툴툴대며 화장실에서 나와 현관으로 향한다. 그 놈이 이 놈이라는 게 영 개운치 않다.
삼순 : 뭐? 널린 게 남자라고? 남자만 널렸어? 여자도 널렸는데? 넋 놓고 있다간 내 차례가 안온다는 걸 아셔야지. (멈칫) 가만...
그러고보니까 어린놈이었잖아? 지가 연애를 해봤으면 얼마나 해봤다고 (돌아보며) 하여튼 선무당이 사람 (기함한다) 허?!
진헌 : (달려오다가 삼순을 발견한다) 저기요!
삼순 : 쟨 왜 따라오는 거야? (도망간다)
진헌 : (쫓아오며) 이봐요! 이봐요!
S#41. 호텔 앞
달려나오는 삼순, 마침 기다리고 있던 택시에 올라탄다.
삼순 : (급하다) 부암동이요, 아저씨.
기사 : 터널 위요, 아래요.
삼순 : 위요. 아, 빨리요! (그때 문이 벌컥 열리자 몸 사리며) 옴마야~
진헌 : 나랑 얘기 좀 합시다.
삼순 : 아저씨 안가고 뭐해요?
진헌 : 잠깐만 내려요. 얘기 좀 하자구요.
삼순 : 아저씨!
기사 : 거 탈거요, 말거요.
진헌 : (삼순을 밀며 폭풍처럼 들이닥친다)
삼순 : (황당!) 어머어머어머. 이 아저씨가 지금 뭐하자는 플레이야? 빨리 안내려요?
진헌 : (기사에게) 이 아줌마 어디 가요?
삼순 : 아줌마라뇨? (꽥) 아줌마라뇨?!
진헌 : (놀라는) ! (정말 이해 못하겠다) 아줌마든 아가씨든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삼순 : 중요하죠? 중요하구 말구요! 나이 먹고 주름 지는 것도 서러운데 어따 대고 아줌마예요?
진헌 : (기사에게) 아저씨. 이 아가씨 가는대로 갑시다.
삼순 : (기사에게) 아저씨, 저 합승 안해요.
진헌 : (기사에게) 합승이 아니고 동승입니다.
택시, 출발한다.
S#42. 달리는 택시 안
진헌 : 아까 그 케잌 직접 만들었다고 했죠?
삼순 : (뜬금없어서) 그거 물어볼려구 이러는 거예요, 지금?
진헌 : 정말 직접 만들었어요?
삼순 : (팩 얼굴 돌리며) 남이사?
진헌 : (정색한다) 나 지금 농담할 시간 없어요. 직접 만든 거예요, 아니예요.
삼순 : (뾰루퉁해서는) ...직접 만든 거예요.
진헌 : 케잌 만드는 게 취미예요?
삼순 : (건성) 아뇨. 직업이예요.
진헌 : 파티쉐?
삼순 : (놀라서 휙 쳐다보며)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일반일들은 잘 모르는데?
진헌 : 지금 어디서 일해요? 제과점? 호텔? 아니면 자기 샵?
삼순 : (사실대로 말하긴 좀 챙피하고) 큼... 몸이 워낙 약해서 잠깐 쉬고 있는 중이에요.
진헌 : (약간 상기되어 재빨리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건넨다) 받아요.
삼순 : 내가 왜요?
진헌 : 받아봐요. 손해 볼 거 없으니까.
삼순 : 싫어요.
진헌 : 안 받으면 후회할 텐데.
삼순 : 안 내리면 후회할 텐데.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이 아저씨 내린대요.
진헌 : (손을 뻗어 삼순의 손목을 확 휘어잡는다)
삼순 : 어머어머어머, 왜 이래요! (나머지 손으로 풀려고 애쓴다)
진헌 : (기어코 삼순의 손에 명함을 쥐어주고야 풀어준다)
삼순 : (아픈 손목을 문지르며) 기가 막혀 정말! 허! 허...
진헌 : 이왕 받은 거 한번 보시죠.
삼순 : 내가 왜요? 여자한테 머리카락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그걸 무자비하게 잘라대는 괴물한테
내가 왜 (그런 호의를 보여야 되는데요?)
진헌 : (명함 들린 삼순의 손목을 확 잡아 그녀의 눈앞에 갖다 댄다)
삼순 : (본의 아니게 바로 눈 앞에 있는 명함을 보게 된다. 표정 변한다) !
진헌 : (손 놓으며) 내일 세시까지 이력서 가지고 오세요. 케잌, 과자 종류 몇가지 만들어오구요. 많을수록 좋아요.
삼순 : (얼떨떨) 내, 내가 왜...요?
진헌 : 그럼 면접 보는데 빈 손으로 올 겁니까, 창작하는 사람이?
면접? 얼떨떨함과 놀라움이 뒤섞인 삼순의 표정!
S#43. 자하문 근처 도로
택시, 달려와 멈춘다.
진헌이 내리고 뒤이어 삼순도 내린다.
진헌 : 나 코리안타임 아주 싫어하니까 시간 맞춰 오세요. (택시에 오른다)
삼순 : (창을 두드린다. 차창 내려가자) 내일이면 너무 빠듯해요. 작업실도 빌려야 되고 재료도 구해야 돼요.
진헌 : 어디서 작업하는데요.
삼순 : 선배가 제과학원을 해요.
진헌 : 오늘내일 주말인데 주말에도 수업 있어요?
삼순 : 아... 그래도 재료는 구해야죠. 방산시장을 샅샅이 훑어도 당장 구할 수 없는 게 있다구요.
진헌 : 구할 수 있는 걸로만 하세요. 그게 진짜 실력이니까.
삼순 : (이치에는 맞는 말이라 얼결에) 예? 예... (그러나 올라가는 차창을 얼른 잡고) 저기...몇살이에요?
진헌 : (생뚱맞아서) ...?
삼순 : 너무 젊잖아요. 혹시, 취업사기군 아닐까요?
진헌 : (어이없다. 입고리에 슬몃 웃음이 묻어난다. 상대를 몹시 기분 나쁘게 하는 묘한 표정이다)
삼순 : 비웃는 거예요, 지금?
진헌 : 아뇨.
삼순 : 비웃었잖아요!
진헌 : ...............
차창 올라가면서 택시 떠난다.
삼순, 뚱해서 바라본다.
삼순 : 비웃어놓군, 씨... 사장이 맞긴 맞는 거 같은데... 대략 난감하네. 저런 싸가지한테 머리 숙이고 면접을 봐야돼?
잘난 척은? 이런 불경기에 감사한 줄 알아야지! (돌아서서 씩씩하게 걸어간다)
F.O
S#44. 출생신고서
F.I
출생신고서, <김삼순/(김삼순)/1976.6.25/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17/>에 쾅! 찍히는 담당공무원의 직인. 이력서로 오버랩된다.
삼순의 손이 나타나 사진을 붙인다.
진헌 : (E) 이력서부터 봅시다.
S#45. 보나뻬띠 사장실
찻잔을 두고 마주앉은 진헌과 삼순.
삼순 : 그 전에 할 말이 있습니다.
진헌 : 하세요.
삼순 : 흠흠... 어제 밤새 고민했어요. 면접을 보러 올까 말까.
진헌 : (무심하게 본다. 계속하라는 뜻이다)
삼순 : 왜냐하면... 전 맘이 안맞는 고용주하고는 일을 못하거든요? 그런데 댁처럼, 아니 사장님처럼 처음 보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리는 그런 싸가지. 아, 죄송합니다. 이해하세요. 저한테 싸가지는 욕이 아니니까. 어쨌든 사장님처럼
싸가지가 없으시고, 예의라고는 참새눈꼽만큼도 없으시고, 네로황제처럼 난폭하신 분과 일을 한다는 건
제 체질에 안맞는 일이거든요. 하지만 전 이렇게 면접을 보러 왔습니다. 그 이유는 딱 하나예요.
진헌 : (그저 본다)
삼순 : (반응 없자 뻘줌하다) 그 이유는, 제 일을 '창작'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어제 저더러 '창작하는 사람' 이라고 하셨죠?
진헌 : (시큰둥) 제가 그랬나요?
삼순 : (뭐야 이 인간) 어쨌든 뭐... 그렇게 아트적 감각이 있는 고용주라면 비록 싸가지가 없으시고, 예의라고는 참새눈꼽만큼도
없으시고, 네로황제처럼 난폭하신 분이라도 한번 해볼만하다, 그게 제 결론이었습니다.
진헌 : 이력서 봅시다.
삼순 : (에?)
진헌 : 이력서 안 가져 오셨어요?
삼순 : (맹해져서 이력서 내민다. 소 귀에 경 읽고 바보가 된 기분이다)
진헌 : (이력서 펼친다. 거기다 눈길 둔 채) ...포샵질 했어요?
삼순 : (귀신이닷!) ...네...
진헌 : 다신 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 같으니까.
삼순 : (뭐시라?)
진헌 : 이름은 김삼순... 나이가 꽤 있으시네요.
삼순 : (자격지심에 발끈) 그래서요!
진헌 : (? 해서 본다) ...............
삼순 : ! (뻘쭘) 아니에요, 아무것두... 계속 보시죠.
진헌 : (다시 이력서 보며) 최종학력은 숭의여고 졸업... 르 코르동 블루 제과과정 이수... 현지에서 2년동안 인턴사원...
(고개 들며) 프랑스까지 제과공부를 하러 가면서 왜 대학은 안가셨어요?
삼순 : (잠깐 망설이다가 스스럼없이) 공부를 못해서요.
진헌 : 그럼 그 머리로 언어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어요?
삼순 : (으~ 저걸 그냥! 하지만 참자) 세상에는 언어가 달라도 통하는 게 세 가지 있거든요? 음악. 미술. 음식.
진헌 : (아... 끄덕끄덕) 근데 왜 들어왔어요? 거기서 더 경력을 쌓을 수도 있었을 텐데.
삼순 : (좀 당황스럽다) ...............
진헌 : ...?
삼순 :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요. 심장에 이상이 생기셨거든요.
진헌 : (아... 다시 이력서 본다)
삼순 : (E 힐긋힐긋 그를 살피며, 마음의 소리) 분명해. 나를 기억 못하는게. 기억하면서 저렇게 시침 뗄 이유가 없잖아?
제발 기억하지 말아야 될텐데... 근데 이상하네. 내 이름 듣고 안 웃은 사람은 없었는데.
S#46. 동 홀
진헌을 사이에 두고 현무와 오지배인이 나란히 앉아 있다.
웨이츄리스 영자가 삼순이 준비해온 것들을 각각의 접시에 담아 세 사람에게 서빙하고 있다.
심플하다못해 초라해 보이는 클래식 초콜릿 케잌 마카롱과 마들렌. 그리고 각양각색의 초콜릿과자들.
초콜릿은 독특한 상자에 담겨져 있다.
영자, 삼순을 스윽 훑어보고 간다. 기선제압의 눈초리다.
삼순, 쟤 왜 저래? 하는 표정이다.
세 사람이 시식을 시작한다.
삼순, 잔뜩 긴장한다.
오지배인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현무, 역시 흡족해한다.
삼순, 으쓱한다.
진헌, 그만이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삼순, 삐죽거린다. 당신이란 인간이 그렇지 뭐...
현무 : 준비해 온 것들이 아주 심플하네요? 클래식 초콜릿 케잌, 마카롱, 마들렌, 봉봉...
삼순 : 재료를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걸로만 만들었습니다. (힐끔 진헌 보며, 힐난하듯) 어제 갑자기
주문을 받아서요. 시간이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현무 : 아녜요, 아주 좋아요. 요즘 데코레이션에 치중해서 기본을 안 지키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주 훌륭해요.
삼순 : (금세 환해져서) 감사합니다.
현무 : 근데 이 초콜릿상자 좀 특이한테 혹시 직접 만들었어요?
삼순 : 네. 제가 만든 초콜롯은 제가 만든 상자에 넣자는게 제 원칙이거든요.
현무 : 왜죠?
삼순 : 초콜릿상자는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거니까요.
진헌 : ?
삼순 : 포레스트 검프 라는 영화 있죠. 거기서 주인공 엄마가 그러잖아요.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은 거다.
네가 무엇을 집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헌 보면) 기억 안나세요?
진헌 : 안 봐서요.
삼순 : (하여튼 초 치기는!) ...시간날 때 한번 보세요. 어쨌든 제가 파티쉐과 된 건.
S#47. 헌책방
칙칙한 대입수험서들 사이에 쌩뚱맞게도 파스텔톤의 책 한 권이 꽂혀있다.
삼순(재수생)의 손이 그 책을 꺼내어 후르륵 넘겨본다. 오색찬란한 빵과 케잌 과자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삼순 : (E) 정말 우연이었어요. 헌책방에 들렀다가 별 생각없이 어떤 책을 집어들었는데 그게 바로 프랑스과자에 대한
책이었거든요. 그게 만약 병아리감별사에 대한 책이었다면.
S#48. 홀
삼순 : 전 지금 병아리를 감별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오지배인과 현무가 웃는다.
진헌만이 웃지 않고 빤히 본다.
삼순 : 어쨌든 제가 무얼 집느냐에 따라 많은 게 달라져요, 아주 많이.
오지배인 : 그럼 지금가지 집은 초콜릿들은 다 맛있었나요?
삼순, 씁슬한 미소를 짓는다. 30여년 동안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삼순 : 아뇨... 좋은 것도 있었고 나쁜 것도 있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그 상자는 제 꺼고 어차피 제가 다 먹어야 하는
거니까요. 언제 어느 걸 먹느냐, 그 차이뿐인걸요.
진헌 : !
삼순 : 음... 그치만 예전과 지금은 다를 거예요, 아마. 어릴 때는 겁도 없이 아무거나 쑥쑥 집어먹었는데
이젠 생각도 많이 하고 주저주저 하면서 고르겠죠. 어떤 건 쓴 럼주가 들어있다는 걸 이젠 알거든요.
진헌 : (빤히 본다. 그녀가 다르게 보인다)
삼순 : 바라는 게 있다면... 내가 가진 초콜릿상자에 더 이상 럼주가 든 게 없으면 좋겠다. 30년 동안 다 먹어치웠다. 그거예요.
(꾸밈없이 웃는다)
오지배인 : 그런 이치를 깨달았으니 럼주가 든 초콜릿은 이미 반으로 줄은 거나 마찬가지네요.
삼순 : (그녀가 좋아진다) 네에...
오지배인 : (진헌에게) 뭐 더 물어보실 거 있어요?
진헌 : (넋 놓고 있다가) 네? 아뇨... (금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좋아요. 같이 일해봅시다. 출근은 오전 10시,
퇴근은 밤 10시입니다. 베이커리는 출퇴근이 주방보다 빠른 것 같던데 (하며 현무 보면)
현무 : 베이커리는 일곱시 출근 여섯시 퇴근입니다. 때에 따라선 퇴근이 늦어질 수도 있구요.
삼순 : (백수탈출에 입이 찢어질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진헌 : 오후 3시부터 5시까지는 휴식 및 디너 준비시간이고, 정기휴일은 매달 세 번째 월요일. 다른 한번은 서로 돌아가면서
비번을 정합니다. 급여일은 25일이고 정식채용은 석달 후에 합니다.
삼순 : 잠깐만요!
진헌 : 네.
삼순 : 저도 조건이 있는데요?
진헌 : ...조건이요?
삼순 : (단호한) 네. 조건이 있습니다.
S#49. 사장실
들어오는 진헌과 삼순.
진헌, 들어와 앉으며 사무적으로 얘기한다.
진헌 : 임시직이라는 것 때문에 걸린다면 제가 설명하죠. 우리 레스토랑은 흉내만 내는 요리는 안합니다. 우리 이부장님,
한국인이긴 하지만 여기 스카웃되기 전까지 15년 동안 프랑스 본토랑 세계 각국의 특급호텔에서 일한 사람이에요.
파티쉐도 본토 사람이었는데 사정이 있어서 공석이죠. 물론 김삼순씨도 파리에서 공부하고 온 건 인정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삼순 : 다 끝났나요?
진헌 : 보수는 만족할 겁니다. 저흰 보수에 인색하지 않거든요.
삼순 : 이제 끝났나요?
진헌 : 일단 석 달만 일해보죠. 정규직이 될지 아닐지는 그때 판단합시다.
삼순 : (찌푸리며) 그건, 자를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진헌 : 실력이 안되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삼순 : (자신 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이제 제가 말해도 되나요?
진헌 : 당장 내일부터 일했으면 좋겠는데.
삼순 : 조건이 있다고 했잖아요!!!
S#50. 보나뻬띠 뜰 (다음 날 오전)
곳곳에 봄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있다.
진헌 : (E)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일할 새로운 가족을 소개합니다.
S#51. 홀
테이블마다 현무를 포함한 열댓명의 직원이 앉아있고,
무대 비슷한 중앙, 피아노 옆에 삼순과 진헌과 오지배인이 서 있다.
진헌 : 새로 온 파티쉐 김삼(순)...
삼순 : (뭐? 휙 쳐다본다!)
진헌 : (실수해도 태연하다) 김희진씨입니다.
삼순 : (속으로 휴-)
직원들이 박수를 친다. 어린 웨이터들이 휘파람도 불고 생기 넘치는 환영을 해준다.
미소를 함빡 머금은 채 인사하는 삼순, 주로 어린 웨이터들 쪽으로 인사하며.
삼순 : (E 마음의 소리) 이궁~ 귀여운 것들~~ 조금만 기다려라. 누나가 이뻐해줄게. 누난 밑으로 10년까지 접수하거든?
(인사 멈추고 멘트 날린다) 이렇게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김희진이라고 하구요, 같이 일하게 되서 정말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용~ (다시 한번 허리 굽혀 인사하는데)
영자 : 몇 살이에요?
머리 꼬리 다 잘라낸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 쏴~해진다.
인사하느라 허리 숙이고 있던 삼순, 고개 들고 사람들 속을 헤집는다. 어제 재수없게 굴던 그 여자를 발견한다.
삼순 : 글쎄요. 나이가 중요한가요?
영자 : 중요하죠. 그래야 호칭을 정하죠.
삼순 : (좀 괘씸하지만) 서른이에요.
영자 : (오버한다) 오오~ 꺾어진 육십? 나보다 두-살이나 많네에? 제일 연장자잖아?
삼순 : (쟤 왜 저래?)
영자 : 우리 모두 왕언니를 환영하는 뜻에서 박수~ (짝짝짝 박수친다)
그러나 대부분 웃음을 참으며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썰렁하기가 남극 같다.
S#52. 탈의실
<김희진>이라고 쓰인 이름표가 가슴에 달린다.
복장 모두 갖춰 입고 마지막으로 이름표를 다는 삼순. 자신만만하게 거울 향해!
삼순 : 니들 다 죽었어~ (살인윙크!)
S#53. 주방
각자 자기 일에 바쁜 현무와 요리사들.
(현무는 검은 띠. 요리사 1은 붉은 띠. 요리사 2는 푸른 띠. 나머지는 모두 노란 띠. 인혜와 삼순도 노란 띠)
인혜가 삼순을 데리고 들어온다.
인혜 : 여기가 주방이에요. 이쪽 라인은 HOT이고 저쪽 라인은 COOL. 이탤리 레스토랑은 파스타를 삶아야 된께로 (머리 흔들며)
아니, 삶아야 되니까 큰 솥이 많은데 여긴 좀 달라요. (의아해하는 삼순의 표정을 보고는) 지가 고향이 여순디
서울 올라온지 반년도 안됐어라.
삼순 : 아... 그럼 그냥 편하게 사투리 쓰지 그래요?
인혜 : 아녀라. 아니, 안돼요. 빨리 서울말 배워야 돼요. (현란하게 도마질 하는 현무를 눈짓하며) 우리 이부장님은 스무살 때
유럽으로 배낭여행 갔다가 아예 눌러앉음서 프랑스요리를 배웠대요. 우리 사장님이 여기 인수하면서 스카웃했구요.
S#54. 홀
한쪽에서 홀 안내하는 인혜. 따라다니는 삼순.
직원들, 부지런히 런치세팅한다.
오지배인은 대형화병에 꽂꽂이 하고 있다.
인혜 : 오지배인님은 환갑이 넘으셨는데 원래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대요. 요식업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고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지 몰라요. 꽂꽂이는 강사 자격증까지 있대요. 사장님하고는 무슨 특별한 관곈 거 같은데 확실한 건 잘 몰라요.
웨이츄리스 하나를 혼내고 있는 영자.
인혜 : 장캡틴 언니는 절대 이름 부르면 안돼요.
삼순 : 왜요?
인혜 : 이름이 장영자라 싫대요. 언닌 장영자 알아요?
삼순 : 장영자 몰라요?
인혜 : 네.
삼순 : (중얼중얼) 이런 걸로도 세대차이가 나냐.
인혜 : (데리고 나가며) 장캡틴 언닌 신참들한테 못되게 구는게 좀 밉긴 한데 속이 훤히 보이니까 어쩔 땐 귀여워요.
저도 처음 들어왔을 때 되게 괴롭혔는데 이젠 안그래요.
S#55. 주차장 또는 뜰
나오는 인혜와 삼순.
인혜 : 아마 언니한테도 그럴지 몰라요. 그럼 나이로 콱 눌러 버리세요.
삼순 : 신참들을 왜 괴롭히는데요?
인혜 : (낮게 속삭인다) 여자신참한테만 그래요. 사장님을 좋아하거든요.
삼순 : ?! 저렇게 사가지 없는 인간을 좋아한단 말예요?
인혜 : (눈 동그래진다) 싸가지가 없어라?
삼순 : (아차. 초면에 너무 심한 말을 했다) 아...니...그게 아니구...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죠...
인혜 : (갸웃) 아닌데? 예의 바르고 귀여운데?
삼순 : 에? 귀엽다구요? 귀여운 건 쉐프아저씨 같은 얼굴이 귀여운 거죠. 사장은 귀여운 게 아니라 음...음...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마지 못해서) 잘 생기긴 했다.
인혜 : (수줍게) 키고 크잖아요. 못하는 운동도 없구. 가끔은 좀 슬퍼보이기도 하구.
삼순 : (뚝 멈추어 본다) 인혜씨도 좋아해요, 우리 사장?
인혜 : (얼굴 확 붉어진다) !
삼순 : (얘가 왜 이래?)
인혜 : (울먹이는) 나만 그런 거 아녀라. 여그 가시나들 다 그려라. (뛰어간다)
삼순 : (황당하다! 어이없다! 기가 막힌다!) ...뭐야 이거. 레스토랑이 아니라 자기 팬까페잖아? 허! 요즘 날 웃기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하다가 뭔가 발견하고 어? 그리로 간다)
농구골대와 농구공이 있다.
삼순, 반가운 마음에 공을 집어들고 던진다. 몇 번 던지다가 제자리 점프! 공이 링을 맞고 튕겨져 나간다.
공이 쪼르르 굴러가더니 누군가의 발에 맞고 멈춘다. 누군가가 공을 주워든다. 진헌이다.
삼순 : !
진헌 : (두 손 안에서 공 굴리며) 농구만 하는 직원한텐 월급 안 나갑니다.
삼순 : 저두 그런 뻔뻔한 직원은 아닙니다. (팽 돌아서서 가고)
진헌 : (골대를 향해 슛!)
공이 링을 맞고 튕겨져나가고
씩씩하게 걸어오던 삼순, 어떤 느낌에 눈동자 굴리더니 돌아서서 날아오는 공을 잡는다. 내공이 만만치 않다.
진헌 : (좀 놀라서) 농구 좀 해요?
삼순 : (우쭐) 뭐... 학교 다닐 때 선수였으니까...
진헌 : 언제까지요.
삼순 : 고등학교 1학년이요.
진헌 : 근데 왜 관뒀어요?
삼순 : 정 궁금하시다면, 정직원으로 채용되면 그때 알려드리죠.
진헌 :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요?
삼순 : (무안) ! ...큼, 저 이제 일하러 가도 돼죠?
진헌 : 제가 언제 잡았습니까?
삼순, 민망해서 울그락불그락 하더니 공을 확 던지고 간다.
진헌, 날라온 공을 받고는 가는 삼순을 본다.
S#56. 사장실 (S#49)
삼순 : 조건이 있다고 했잖아요!!!
진헌 : (깜짝 놀란다)
삼순 : (너무 했나?) ...큼. 죄송합니다.
진헌 : ...말씀하세요, 조건.
삼순 : (좀 창피새어 긴장된다) 흠... 김삼순 말고 김희진으로 해주세요.
진헌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
삼순 : 제 이름을 김삼순 말고 김희진으로 해달라구요.
진헌 : (그래도 모르겠다. 이번엔 희진이라는 이름이 귀에 들어와 더 의아하다) ???
삼순 :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여기 직원들한테 그냥 김희진이라고만 소개하면 돼요. 사장님이시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진헌 : (이제야 알겠다) 요구조건이라는게 그겁니까? 보수를 많이 달라는 것도 아니고, 출퇴근 시간을 조정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김삼순을 김희진으로 불러달라?
삼순 : 네. 정확히 말하면 조건이 아니고 부탁입니다.
진헌 : (이해할 수가 없다) 왜 그래야 되죠?
삼순 : ...? 왜라뇨?
진헌 : 왜 김삼순을 김희진으로 불러야 되느냐구요.
삼순 : (놀리나?) 그럼 사장님을 삼식아- 이렇게 부르면 좋겠어요?
진헌 : 내 이름이 현진헌이 아니고 현삼식이라면 당연하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전 삼식이가 아닙니다.
삼순 : 그걸 누가 몰라요?
진헌 : 그럼 왜 그러죠?
삼순 : 지금 절 놀리시는 거죠?
진헌 : 제가 왜요?
삼순 : 허, 기가 막혀 정말!
진헌 : 이렇게 하죠. 삼순이란 이름이 정 싫다면 어느 것이든 좋습니다. 단, 희진이라는 이름만 빼구요.
삼순 : ...? ...희진이라는 이름을 빼다뇨?
진헌 : 김삼순과 김희진. 두 개를 뺀 나머지 이름에서 선택하시라구요.
삼순 : ? 그건 또 왜 그래야 되죠?
진헌 : 그것까진 알 필요 없습니다.
삼순 : (알 필요가 없어? 기분 팍 상한다) 싫어요. 난 꼭 김희진이어야돼요. 이유는, 마찬가지로 그것까진 사장님이 알필욘 없겠죠?
진헌 : (짜증이 인다) 나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싫거든요?
삼순 :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나를 김희진으로 부르든가, 다른 파티쉐를 구하든가 양자택일 하세요.
(자신만만하게 턱을 치켜든다)
진헌 : (본다)
삼순 : (본다. 기싸움이다)
진헌 : (본다. 서늘하다)
삼순 : (찌푸린다. 양보는커녕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올 것 같다)
진헌 :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그저 본다)
삼순 : (좋다. 마지막 수다) 됐어요. 관두죠, 제가. 임시직이든 정규직이든 다른 파티쉐 찾아보세요.
(홱 돌아서서 나오며 뒤통수로 눈치 살핀다. 초조하다)
진헌 : (마음은 다급하지만 나긋한 척) 김희진씨?
삼순 : (흥! 진작에 그럴 것이지! 승리의 미소가 번진다)
진헌 : 김희진씨?
삼순 : (멈춘다. 돌아서며 새초롬하게) 왜요, 사장님?
진헌 :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삼순 : (약 올리듯) 월급 탈려면 저 일해야 되는데요, 사장님?
진헌 : ...왜 하필이면...
삼순 : ...? 왜 하필이면 뭐요?
진헌 : (본다. 물어볼까 말까)
삼순 : (본다. 궁금하다)
진헌 : 왜 하필이면 김희진이죠?
삼순 : (좀 의외의 질문이라) ????
*출처 : 대본과시나리오사이*
첫댓글 감사함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