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점면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소나무 울창한 삼림욕장 길을 걷다보면 기분이 절로 상쾌해진다. 어울리지 않는 가로등을 산책로 끝까지 심어 놓아서 거치적거리는 걸 빼고는 소년처럼 싱싱한 소나무들과 호흡을 함께 하다 보면 어느덧 몸과 마음은 날아갈 듯 가볍고, 중턱 샘터에 이른다. 키 크고 묵은 나무가 많은 숲길은 그 깊고 어두운 그늘 덕분에 사색에 잠겨서 걸을 수 있는 반면, 젊은 나무로 이루어진 숲길은 간간이 비껴드는 햇살을 즐기면서 흡사 실내악을 듣는 것과도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어서 좋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봉천산 오르는 길이 바로 그런 즐거움을 선사하는 소나무 숲길이다.
제대로 된 샘터와 쉼터까지 있으니 봉천산은 비록 그 높이가 낮을 뿐이지 갖출 건 다 갖춘 산인 게 분명하다. 사철 마르지 않고 흐르는 봉천산 샘물은 그 물맛이 혈구산 동쪽 끝자락 ‘찬우물’, 고려궁지 옆의 ‘왕자우물’, 마니산 정수사의 ‘용우물’, 강화산성 북문 고개 아래 ‘오읍약수’와 같은 강화 명수(名水)에 비해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대체로 물이 귀한 게 섬 사정인 데 비해 강화는 이렇게 좋은 물이 풍부한 걸 보면 예로부터 문화와 산업이 발전했으며, 연개소문과 같은 뛰어난 인물이 배출된 것도 다 까닭이 있었던 셈이다.
샘터를 지나 능선 길로 접어들면 길은 뜻밖에도 가팔라지고 화강암 벼랑까지 펼쳐진다. 게으른 소처럼 길게 드러누운 형국의 봉천산을 절대 얕잡아 볼 수 없는 것은 이 산 구석구석, 오밀조밀하게 갖추고 있는 나름대로의 얕은 매력과 눈 맞추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말끔한 화강암 바윗길에 올라서 남쪽으로 고려산이며 혈구산, 연개소문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라는 시루메봉 일대, 서쪽으로 별립산과 멀리 석모도 삼산과 교동도 화개산을 둘러보는 조망의 즐거움이란 결코 높은 산에 오르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봉천산을 다시 찾게 만드는 행복에 다름아니다.
산행길잡이
봉천산은 반나절 산행하기 딱 알맞은 산이다. 세계문화유산인 부근리 고인돌과 봉가지, 오층석탑, 석조여래입상을 두루 돌아보고 나서 하점면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볍게 삼림욕을 겸한 원점회귀 산행을 즐길 수 있다. 문화유산답사를 겸하기 때문에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에도 적합한 곳이다. 정상에 오르면 북쪽으로 예성강 하구와 조강 건너 북한 개풍군 땅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 좋은 날이면 개성 송악산도 볼 수 있는데, 송악산까지 직선거리로 불과 20km밖에 안 되는 곳이 바로 봉천산이다.
※하점면사무소 주차장을 들머리로 한 원점회귀 산행이 편하다.
※봉천대에서 오층석탑으로 내려서는 길이 있으나 면사무소까지 30~40분 더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봉천산 정상에서 북동쪽 내리막길이 석조여래입상으로 내려서는 길이다.
하점면사무소 주차장~샘터(15분)
삼림욕장을 거쳐서 샘터까지는 걷기 편한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샘터~봉천산 정상(15분)
샘터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능선으로 올라서는 가파른 길, 오른쪽은 계곡길이다. 탁 트인 조망을 즐기려면 왼쪽 능선 길을 택한다. 가파른 구간에는 로프가 설치돼 있으며, 일단 바위 능선에 올라서면 길은 다시 완만해진다.
봉천산 정상~오층석탑(20분)
돌로 쌓아올린 봉천대에서 봉천산 정상까지 북쪽으로 100여m 거리다. 꼭대기에는 삼각점이 있으며, 산불감시초소와 ‘봉천정’이라는 정자가 나란히 서 있다.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이정표가 있는 내리막길을 따르면 석조여래입상으로 내려선다. 오층석탑은 다시 봉천대로 돌아와서 왼쪽 이정표가 있는 가파른 길로 내려간다.
오층석탑~하점면사무소 주차장(30분)
오층석탑 바로 아래 주차장과 화장실이 있다. 여기서 포장도로를 따라 7~8분쯤 내려가면 하점 천주교회와 믿음슈퍼 사잇길에 이른다. 믿음슈퍼 앞에는 오층석탑 700m, 석조여래입상 900m 이정표가 높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곧장 가면 48번 국도‘석조여래입상’ 버스 정류장이다. 국도를 따라서 하점면사무소까지는 20분쯤 걸린다.
봉천산 주변 명소
봉은사와 봉천대
봉천대는 고려 후기에 평장사(平章事)로서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진 봉천우(奉天佑)가 쌓았다는 설이 있다. 봉천우는 자신의 선조가 발상(發祥)한 은혜를 기념하고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산 정상에 대를 만들어 봉천대(奉天臺)라 했다. 고려사 등의 기록에는 1234년(고종 21년) 강화로 피난 온 고종이 개성의 봉은사를 대신해 세운 이 절에 행차해 연등회를 했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차척(車倜)의 집을 강화 봉은사에 귀속시켰으며, 민가를 철거해 왕이 행차하는 연로(輦路)를 넓혔다는 기록이 전한다. 인천시 기념물 18호인 봉천대는 고려 때에는 축리소(祝釐所)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인조(1633년) 때 이후 봉화대로 사용되었다. 봉은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오층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