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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7일 폐막된 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우리나라는 종합 전적 2위를 달성했다. 한국 선수들은 많은 경기에서 출중한 기량을 보여 주었지만, 특히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처음으로 채택된 바둑 종목에서 한국 기사들은 남자단체전, 여자단체전, 남녀혼성전 모두 금메달을 따내 한국 바둑이 아시아 최고, 즉 세계 최고임을 보여 주었다. 돌이켜보면 20세기의 마지막 20년은 한국 바둑이 욱일승천하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조치훈 9단은 일본 바둑계의 삼대 기전을 평정하고 본인방 10연패를 달성하였다. 특히, 1986년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몸으로 목숨을 걸고 기성전 타이틀전에 임해 분전했던 휠체어 대국은 잊혀지지 않는 감동으로 남아 있다. 국내의 기사들은 1989년 제1회 응창기배 세계바둑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수많은 세계대회를 석권하였고 한국을 명실상부한 바둑 강국으로 올려 세웠다. 새로운 현실은 새로운 전략을 필요로 하는 법. 이제 우리나라는 바둑 실력은 물론 바둑 문화에서도 크게 도약할 때가 왔다. 실천적인 대국은 물론 이론적인 학문의 견지에서도 바둑학을 수립할 때가 왔다. 이 점에서 조선시대에 산출된 다양한 바둑 관련 문헌들은 한국 바둑학의 기초적인 문화 콘텐츠로 주목된다. 과연 전통 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바둑에 관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바둑을 어떻게 즐기고 있었을까? 조선시대 삼대 천문학자이자 세도정치기 정치가였던 남병철(南秉哲, 1817~1863)의 글을 보도록 하자.
바둑의 길은 삼백 예순 한 곳인데, 한 곳에서 승패가 난다. 대개 바둑은 작은 기예이나 그 술법은 매우 심오하고 은미하니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천하의 고요한 자가 아니면 할 수 없다. 나는 바둑을 아주 좋아해서 때때로 잘 두는 사람에게 내기 바둑을 두게 시키고 구경한다. 포진에 성세가 있어 기진(箕陣)과 익진(翼陣)이 펼쳐진 것은 학정옥(郝廷玉)1)이 하나같이 이임회(李臨淮)2)의 유법(遺法)을 사용한 것과 같고, 법칙과 궤도를 따르지 않고 임기응변하는 것은 곽거병(霍去病)3)이 조박(糟粕)4)을 스승으로 삼지 않은 것과 같고, 보루와 참호를 지켜 적이 먼저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진의 양ㆍ육(羊陸)5), 명의 유ㆍ척(兪戚)6)이 혁혁한 공은 없으나 스스로 패배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나, 술수는 재주에서 나오고 품격은 성질에서 나온다. 세력을 넓히는 자는 간혹 자잘한 것을 빠뜨리고 약삭빠르게 따먹는 자는 대부분 대체를 모르니 커다란 것과 세세한 것을 모두 요구한다면 그런 사람은 드물 것이다. 설령 틀림없이 맨 윗자리에 있는 고수가 있어도 방금 바둑이 시작되면 눈이 지치고 마음이 타도록 공격하고 수비하고 위협하고 탈취하는 데 시달리느라 고아하고 청적한 취향이 대국 밖에 있는 사람에게 완전히 옮겨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한다. 더욱이 대국을 하는 사람은 착각에 빠지지 않음이 드물어 길은 가까운 곳에 있는데 멀리서 구하기 마련이다. 바둑판 밖에서 구경하는 저 사람들이 어째서 바둑돌을 집은 사람보다 모두 잘할 수 있을까? 가슴 속에 득실의 마음이 없어서 기미를 보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천하의 고요한 자가 아니면 지극한 데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일행(一行)7)은 “빈승이 말하는 승제어(乘除語) 사구(四句)8)를 외우면 사람들마다 국수(國手)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나에게도 작은 비결이 있다. “내가 스스로 다투지 않으면 남도 해를 끼치지 못한다. 마음이 편안한 곳을 구할진대 대국 바깥만한 곳이 없다.” 감히 지극하다고는 못하겠으나 수양하는 열 가지 요점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육씨(陸氏)는 옥을 다스려 가업을 이룩하였고 하씨(何氏)는 인장을 새겨 양생하였다. 천하의 이치는 하나이다. 이 때문에 작은 술법이라도 묘함에 진입하면 신통해져 이것을 미루어 저것에 더하고 비슷한 것을 유추해 풀리는 것이 있다. 하물며 바둑과 같이 심오하고 은미한 술법이랴! 고군(高君) 낙여(樂汝)는 바둑을 잘한다. 또 나와 사이가 좋다. 육씨와 하씨의 설을 주노니 원컨대 군은 이것으로 부유하고 창성하라. 나도 이것으로 장수하고 건강하겠다. 을사년(1845년) 9월 고진풍(高鎭豐) 군에게 써서 준다.
1) 학정옥(郝廷玉) : 당(唐) 나라 중기의 명장. 이광필(李光弼)의 막하에서 성장하여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자 전공을 세웠다. 이광필 사후 동돌궐(東突厥)의 부고부은(仆固怀恩)이 토번(吐藩)과 회흘(回紇)의 기병을 이끌고 장안(長安)을 침입하자 이를 막아냈다. 2) 이임회(李臨淮) : 임회군왕(臨淮郡王)에 봉해진 당(唐) 나라의 명장 이광필(李光弼)을 말한다. 곽자의(郭子儀)와 함께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하여 그 전공(戰功)으로 말미암아 중흥(中興) 제일(第一)로 일컬어졌으며, 뒤에 곽자의를 대신해 삭방(朔方)을 맡으면서 천하 병마도원수(天下兵馬都元帥)로 명성을 떨쳤다. 3) 곽거병(霍去病) : 한(漢) 나라 무제 때의 명장. 무제의 명을 받아 여러 차례 흉노와 싸워 막남(漠南)과 하서(河西)에서 무공을 세웠다. 4) 조박(糟粕) : 선인이 남긴 학문의 찌꺼기. 여기서는 용병과 관련된 병서나 병학을 가리킨다. 5) 양ㆍ육(羊陸) : 진(晉) 나라 장수 양호(羊祜)와 오(吳) 나라 장수 육항(陸抗). 양호와 육항이 서로 맞붙은 경계를 다스렸는데, 서로 믿어 육항이 양호에게 술을 보내면 양호가 마셔 의심치 않았고, 육항이 병이 있을 때 양호가 약을 보내면 육항이 고맙게 받아 마셨다. 두 사람이 임지(任地)에 있는 동안 변강(邊疆)이 끝내 무사했다고 한다. 6) 유ㆍ척(兪戚) : 명(明) 나라 장수 유대유(兪大猷)와 척계광(戚繼光). 명나라는 남왜북로(南倭北虜)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유대유와 척계광은 복건성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남방을 안정시켰다. 척계광은 병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저자로 유명하다. 7) 일행(一行) : 당(唐) 나라 중기의 승려, 천문학자. 선무외(善無外)로부터 밀교를 전수 받아 《대일경(大日經)》을 번역하였다. 현종의 부름을 받고 장안에 가서 역법을 개편하여 《대연력(大衍曆)》을 완성하였다. 8) 승제어(乘除語) 사구(四句) : 수학의 승제법에 관한 네 구의 비결. 여기서는 당 현종대의 명승이었던 일행(一行)의 일화와 연결되어 바둑을 잘 두는 네 구의 비결을 뜻한다.
- 남병철(南秉哲), 〈바둑에 관한 설[奕說]〉,《규재유고(圭齋遺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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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둑두기(圍碁圖)_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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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바둑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개로왕은 바둑을 몹시 좋아했는데 고구려에서 잠입해 온 승려 도림과 바둑 친구로 지내면서 도림의 말을 믿고 무리한 토목 공사를 감행하다 결국 장수왕에게 도성을 빼앗기고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적어도 A.D. 5세기 고구려와 백제에서 바둑에 능통한 불승들이 있었고 바둑을 매개로 국왕과 불승의 친밀한 인간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예화이다. 신라에도 바둑을 잘 두는 고수들이 많았다. 신라 성덕왕(聖德王)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당나라 현종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특별히 바둑에 능한 양계응(楊季膺)을 딸려보내 신라의 고수들과 바둑을 겨루게 하였다 하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고수들이 모두 그를 당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나라 현종은 바둑을 몹시 좋아한 임금이었다. 중국의 오랜 바둑책 《망우청락집(忘憂淸樂集)》에는 당 현종이 바둑을 두었다는 기록과 함께 기보가 전해 오고 있으며, 안사의 난이 일어나 서촉으로 피난을 가면서도 당시 최고의 바둑 고수였던 왕적신(王積薪)에게 자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왕적신보다 한 수 위였던 인물이 밀교 승려 일행(一行)이었던 것 같다. 어느날 현종이 왕적신과 바둑을 두고 있는데 일행이 현종을 찾아와 대국을 구경하였다. 일행은 본디 수학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지만 바둑은 둘 줄 몰랐는데, 현종과의 대국을 마친 왕적신에게 대국을 청하였고, 그 결과는 막상막하였다. 깜짝 놀란 현종에게 일행은 현종과 바둑을 두는 왕적신의 행마를 관찰하고 그 법칙을 깨달아 네 구로 구결을 만들어 마음에 두고 대국한 결과 성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후 왕적신은 일행에게 그 네 구의 구결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였고, 거기에 자기의 경험을 결합하여 그 유명한 ‘위기십결(圍棋十訣)’을 만들 수 있었다.
일행의 예화는 바둑을 두는 두 사람보다 그 옆에서 바둑을 구경하는 사람이 더 바둑을 잘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래서일까, 남병철이 직접 바둑을 두지는 않고 기객들에게 바둑을 두게 한 다음 구경하기를 즐긴 것도, 그렇게 바둑을 구경하면서 자기의 마음을 고요하게 정돈하여 바둑을 두는 자기만의 비결을 창안한 것도, 모두 그가 일행의 예화를 의식한 행동으로 해석되는 면이 있다. 그러고 보니, 일행과 남병철은 비록 불교의 승려와 유교의 사대부라는 차이점은 있으나 바둑도 좋아하고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조두순(趙斗淳, 1796~1870)은 남병철의 그러한 바둑관에 동의하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바둑을 두지는 않고 단지 대국을 구경하면서 자기 마음을 고요하게 정돈하여 바둑에 능통할 수 있다는 것이 과연 이치에 닿는 주장일까? 그는 남병철이 고진풍에게 준 위의 글을 입수해서 읽은 다음 곧장 이를 반박하는 글을 지었다. “마음의 고요함이 깨지면, 대국하는 사람도 바둑통에 손을 넣어 바둑알을 집고 행마하는 사이에 실착할 수 있지만, 구경하는 사람도 마치 한량처럼 승패에는 관심이 없이 단지 깔깔 웃으며 지나쳐 버릴 수 있다. 마음의 고요함에 도달한다면, 구경하는 사람도 팔짱 끼고 어깨 너머 승패의 귀착을 엿볼 수 있지만, 대국하는 사람도 착수의 선후를 연구하고 세밀한 수읽기를 할 수 있다. 남병철의 바둑관은 어쩌면 객관 세계에 대한 격물치지를 수행함이 없이 주관적인 마음의 수련만으로 이치에 도달하려는 육왕학(陸王學)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병철이나 조두순이나 19세기 중엽 조선의 걸출한 사대부 가문의 정치가들이었다. 이들의 저택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많은 문객들이 있었고, 그들 가운데 바둑을 잘하는 기객(棋客)들이 서울의 바둑 문화를 형성한 부분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남병철의 글과 이에 대한 조두순의 반응은 서울의 사대부와 그의 기객 사이의 애틋한 정이 담겨 있는 당시의 풍속세태, 또 서울의 사대부와 사대부 사이에 바둑에 관한 자기 주장을 주고받는 당시의 풍속세태를 읽을 수 있는 자료로도 의미가 있다. 남병철이 이 글을 지은 지 165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의 바둑 풍속, 우리사회의 바둑 철학은 어떻게 묘사될 수 있을까? 한국 바둑사와 한국 바둑 문화가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정리되어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바둑이 분명하게 평가될 그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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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노관범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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