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23-2 20040607 217P-1.zip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부처란 오직 깨달음(覺)이라 네가지 門으로 나누면 깨달음은 지견을 열게 되며, 깨달음은 지견을 보이게 되며, 깨달음은 지견을 깨달으며, 깨달음은 지견에 들어 가게 되는 것이니라.
만약 열어 보이심을 듣고 문득 능히 깨달아 들어 가면 곧 깨달음의 지견인 본래의 참 성품이 나타남을 증득하니라.
너는 삼가 경의 뜻을 잘못 알지 말아야 하니 '남이 열어 보임으로 깨달음에 들어 간다' 말한 것으로 알아서 스스로 "이것은(열어 보이시는) 부처님의 지견이라 내같은 무리는 분(몫: 해당됨)이 없다"고 만약 이렇게 알게 되면 이에 곧 경을 비방하는 것이고 부처님을 헐뜯는 것이 되니라.
저(본성)는 이미 佛이라 지견을 갖추었는데 어찌 다시 열어줄 것을 쓰리요.
너는 이제 마땅히 믿으라,
부처님의 지견이 다만 네 스스로의 마음이요 따로 부처가 없느니라,
대게 모든 중생들이 스스로 광명을 가리고 더러운(塵) 경계를 탐애하여 밖으로 반연(끄달림)하고 안으로 흔들려서(산란하여) 분주히 다님(윤회)을 받게 되느니라.
문득 수고로이 세존께서 삼매로 부터 일어 나시어(나투셔) 가지 가지로 고달프게 입(말씀)으로 이끌어 주시기에 자고 쉬는 것을 수고로이 하셨으니 밖을 향해 구하지 말면 부처와 더불어 둘이 없음이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부처의 지견을 연다'고 하신 것이니, 나도 또한 모든 사람에게 권하나니 스스로 마음 가운데의 부처의 지견을 항상 열라 하니라.
세상 사람들이 마음이 삿되어 어리석고 미한 탓으로 죄를 짓게 되며 입(말)으로는 선하지만 마음으로는 악하여, 탐내고 성내고 질투하고 아첨하고 아만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고 사물을 해롭히며 스스로 중생의 소견을 여느니라.
만일 능히 바른 마음으로 항상 지혜를 내어 자기 마음을 비춰 보며(회광반조하여) 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면 이것이 스스로 불지견을 여는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생각 생각 부처의 지견을 열고 중생의 소견을 열지 말도록 하라,
부처의 지견을 열면 곧 이것이 세간을 떠난 것이요 중생의 소견을 열면 곧 이것이 세간이니, 네가 만약 다만 수고로이 집착하는 생각으로 그것을 공부한 것으로 삼는다면 얼룩소가 꼬리를 애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강설:
부처는 本覺(법신)이며 이를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곧 始覺(보신)이니 깨쳐듦이나 깨달을 본성이 不二로 부처(佛)가 곧 깨달음(覺)과 같다 하신 것이다.
따라서 깨닫게(불지견에 들어 불지견을 증오하게) 됨으로써 불지견을 열어 보이게(교시) 되는 것이니, 이 법문을 듣고 문득 깨달아 들면 본래의 참면목인 실상을 증하게 되는 것이다.
"열어 보임으로 깨달아 들어간다"는 말에 국집하여 밖(남)으로 부터 깨닫게 해준다고 잘못 알아서는 그르치는 것이니 깨달음은 스스로 체달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원래 스스로 지견을 구족한 부처이거늘 어찌 밖으로 구함으로 찾고자 하며 밖으로 상에 끄달려 집착하고 안으로 번뇌, 망념으로 어지러워진 업행으로 인하여 六도윤회에 분주하게 생사 출몰함을 안타까이 생각하시어 자비심을 내셔서 삼매로부터 일어 나시어(문득 부처님이 출현하시어) 깨달음을 열어 보이시어 스스로 깨달아 들게 하심이 수고로우셨으니(빌어 드시고 노숙하시고 쉴 사이 조차 없이 東奔西走, 橫說竪說하심) 중생이 밖을 향해 구하지 않고 스스로 깨쳐 들어 계합하면 부처와 둘 아니니 六조께서도 같은 불지견으로 이와 같이 이끄신다는 것이다.
"상견으로 자기 소견을 짓고 법이라고 열어 보이는 허물은 삿된 아만이 원인이 됨이라, 항상 밝은 지혜로 스스로 반조하여 악한 생각과 행을 그치고 선한생각과 행을 함으로써 불지견을 열면 이것이 세간을 여읜 것이다"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다는 생각, 옳다는 생각을 집착하는 것은 얼룩소가 보잘 것 없는 꼬리(삿되거나 지말적인것)를 자랑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셨다.
어리석은 중생이 삿된 외도의 소견으로 잘못 되어, 모든 것은 무常하다 하여 사람도 죽으면 몸과 마음도 모두 멸한다는 생각으로 인과를 무시한 단견낙공의 소견을 짓거나, 상대적인 함이 있는 유위법인 상견에 집착하거나, 일체상을 여의어야 한다는 말에 떨어져 무위법이라는 법에 국집해서 오히려 법상에 걸리거나, 항상한다는 말에 집착하여 삶과 죽음은 항상 계속 되풀이 된다는 常견에 국집하게 되어, 중도의 因果 인연법을 모르게 되니, 본래 원만구족한 진여자성을 깨우쳐 이 모든 세속법에 물들지 않고 뛰어 넘는 것이 일대사이며 불지견이므로 밖에서(불조나 누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열게 하며, 스스로 보며, 스스로 깨치게 하며, 스스로 들게 한다 하시는 것이다.
이 일이 중생을 뛰어나 불지에 오르는 일대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