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 라고 베를렌느가 말했다. 나는 “내 가슴에 비가 내리듯 내 컴퓨터에 비가 내린다.”라고 말하겠다. - 백남준, "Video-Videa-Videology", Binghamtom Letter, 1972
근대의 감성을 노래한 시인 폴 베를렌느(Paul Verlaine, 1844-1896)는 넘치는 우울의 서정을 길가에 내리는 빗줄기에 기대어 은유하였다. 전자시대의 감성을 노래한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1932-2006)은 풍부한 위트의 감성을 테크놀러지에 기대어 은유한 예술가이다.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성이 침식당하리라는 우려는 근대 인간의 오래된 걱정이었다. 그러나 비디오 예술가의 깜찍한 상상력은 암울한 미래상을 불식시키는 전망들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기술인 비디오를 예술 표현의 매체로 이용한 백남준은 기술의 긍정적 가능성을 믿었던 인물이다.
TV 모니터와 비디오 테이프가 인간의 감성을 표현해 주리라는 백남준의 믿음은 1964년 [로봇 K 456]에서 시작된 로봇 시리즈에서 잘 드러난다. [로봇 K 456]은 일본 기술자 슈야 아베(Shuya Abe, 1932- )의 도움으로 텔레비전 카메라와 음향 오브제 등을 이용하여 인간의 형상을 빚어낸 미디어 작품이다. 사람 키와 맞먹는 등신대 사이즈로 제작된 이 로봇은 리모트 콘트롤을 이용하여 다이나믹하게 원격 조종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인간의 형상을 본뜬 별나고 익살맞은 인조인간은 인간처럼 노래하고 말하고 소리를 내며 길거리를 배회하였다. 백남준은 이 로봇을 마치 인간처럼 대하였다. 로봇을 구매하는 행위를 ‘입양’으로 표현하였고, 1982년 뉴욕에서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폐기될 때까지 일반인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캐릭터로 개인전마다 등장시켰다. 이후 [로봇 K 456]의 뒤를 이어 제작된 로봇 초상 작업들은 인간화 된 테크놀러지의 전형으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 행동을 은유하는’ 기계인간 시리즈의 연속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램프코어에 놓여있는 [최초의 디지털 작곡가 스콧 조플린](1999)은 이러한 초상 시리즈의 연속으로 초기 재즈 뮤지션이었던 스콧 조플린 (Scott Joplin, 1867-1917)을 로봇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스콧 조플린은 당김음의 효과를 이용하여 간결한 멜로디를 가진 경쾌한 엇박자의 피아노곡들을 작곡한 재즈 피아니스트이다. 또한 자신이 작곡한 곡들의 반복되는 단순한 멜로디를 이용하여 롤 피아노(홈이 있는 악보를 걸어두면 자동으로 연주하는 피아노)를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 최초의 디지털 작곡가라는 백남준의 애정 어린 호칭은 자동으로 연주되는 피아노곡을 만든 스콧 조플린의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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