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백제도의 유래
신라건국초기 6부족(경주이씨,최씨,손씨,정씨,배씨,순창설씨) 촌장들의 회의에서 유래했는데, 어떤 안건에 대해 100명이 지지하더라도 1명이 반대하면 그 안건을 아예 폐기해버리는 것으로 아무리 시간이 걸리고 비용이 들더라도 참석인원 전원의 지지 없이는 가결 하지 않는다는 철칙 –이것이 〈화백〉이다. 화백이란 말은 여러 사람이 ‘화합하여 아뢴다.’라는 뜻에서 취한 한자어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2. 귀족회의체 화백제도의 성격
화백제도가 정착된 것은 귀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 제도가 마련된 후부터이다.
상대등이란 진골, 왕족 즉 왕족 출신의 대신을 통칭하는 대등(귀족)의 의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화백회의는 곧 대등들의 합좌이다. 이 자리에서 왕위계승과 폐위, 전쟁, 선전포고, 그 외에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대사를 논의했다.
회의의 참석자는 일반 백성이 아니라 군관이며, 또한 한명의 반대자가 있어도 의안이 통과되지 않는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제를 원칙으로 하는 회의체제였다.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자 전원의 의견을 수렴해서 결정한다는 화백회의의 정신은 후일 고려시대의 도당회의인 도병마사회의에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국사를 의논할 때는 이른바 경주 주위의 4영지인 청송산(동), 오지산(남), 피전(서), 금강산(북)에서 모였다.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은 진골 중에서도 이벌찬 또는 이찬과 같이 높은 관등에 오른 인물이다. 때론 상대등이 맡고 있던 사람이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화백회의는 삼국통일 무렵까지 진골귀족들에의한 연합정치를 상징하고 있다. 실제로 이 회의체는 579년 진지왕을 품행이 나쁘다는 이유로 왕위에서 쫓아냈고, 647년에는 선덕여왕을 국가비상시에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폐위시키는 결정을 하는 등 왕권을 크게 견제했다.
그러나, 화백은 신라의 삼한통일 이후에는 그 영향력이 대폭 줄어들었다.
신문왕 이후 가속화된 중앙집권화와 행정을 총괄하는 집사부 설치로 말미암아 설 자리가 좁아졌다. 집사부 설치 이후에는 이곳의 장관인 시중이 실질적인 행정 수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중을 지낸 인물이 상대등에 오르는 관례가 있었던 만큼 화백은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귀족사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3. 고구려, 백제의 귀족회의
삼국 시대에는 부족장 회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귀족회의가 있었다.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회의 이다. 이러한 귀족회의는 왕권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제가회의는 5부체제가 유지되던 고구려 초기에는 왕권이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각부의 책임자인 가들이 모여 제가회의를 구성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였다.
백제의 정사암회의는 지금의 부여부근의 호암사에 있는 정사암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나라에서 장차 재상을 뽑을 때는 후보3,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해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가지고 와서 열어보고 그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 이런 이유로 정사암회의로 불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