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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역 1만여군중 [계엄만행]규탄
[시민 민주투쟁위] 결성시위 조직화
자체 무장 경비대 조직 시.외곽경계
관민 합동회의 평화집회등 의견모아.. 재야인사 "시민불안 해소" 총기 회수 나서
59 시위확산 <3> 목포 중
21일 광주에서 온 시위대는 목포항쟁을 촉발시키고 오후 7시게까지 모두 돌아간다. 이때 목포 청년들도 함께 차량에 탑승해 광주로 올라온다. 그러나 목포시민들은 시위를 멈추지 않고 철야 시위를 계속하면서 목포경찰서,중앙정보부 분실등 공공기관을 휘젓고 다닌다.
소수의 경찰병력은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자진해산하고 목포는 무정부 상태가 된다. 그리고 안철씨 등 재야인사와 목포대 목포실업전문데 학생들은 [오늘같은 무계획적인 시위를 해서는 안되고 시민과 학생을 조직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은다.
27일날이 새고 시내버스와 택시운행이 중단되나 시민과 학생들은 오전 7시부터 걸어서 목포역광장으로 모여 들기 시작한다.
오전 8시께 목포 역사에는 [계엄령을 철폐하라] [전두환은 물러나라 ] [김대중을 석방하라]등의 플래카드가 안철씨의 지휘로 동생인 안성.안신씨등이 작성해 설치된다. 이렇게 조직적인 움직임이 형성돼 가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들사이에 무장청년들의 공포소리와 무질서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된다.
안철씨와 양지문씨(당시 23세로 보충역 입대전,현민주당 권노갑의원 보좌)등은 시민들의 불안감해소와 질서회복을 위해서 총기회수가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총기회수에 나선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오전동안 총기회수 필요성이 홍보되고 정오 무렵 회수작업에 대해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동참했으나 반대하는 청년들의 반발도 거셌다.
대중교통수단 마비
회수된 무기는 대략 4백정쯤 됐고 LMG, 수류탄,다이너마이트 2상자,권총등 특수병기도 있었다.
총기 회수에 나선 50여명의 청년과 학생들은 거둬들인 총기를 목포역 대합실에 보관하고 시위를 조직화.체계화하기 위해 임시집행부를 구성한다. 이에 앞서 안철씨를 비롯한 재야 인사 그룹은 수습과 투쟁방향을 모색키위해 회동한다.
이에 대해 당시 계엄사 군법회의 안철씨 공소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80년 5월 22일 오전 9시께 목포시 중앙교회에서 상 피고인 명재용, 공소외 박광용 등 유기문 동 정권호, 동 이복일등과 만나 목포사태를 수습한다는 미명하에 목포시장 목포대학장 목포 경찰서장등과 함께 동일 13시에 피고인의 집에서 모이기로 합의한후 동일 11시께 목포시 명륜동 소재 통일당 당사에서 상피고인 강수복, 공소외 김길도등과 같이 목포시에서의 시위를 조직적.체계적으로 지휘,확대하기 위하여 [시민 민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하고 동일 13시께 위 피고인 명재용 동 강수복, 공소외 유기문, 동 김길호, 동 정권호,동 강영선등과 모여 목포역 앞에서 시민 궐기 대회를 개최함과 동시에 궐기대회는 [시민민주 투쟁위원회 (이하 [시민투])가 주도하기로 합의하고....] 공소장 기록대로 안철씨는 관민 합동회의를 위해 목포시장 경찰서장 목사 정당대표 목포대학장등에게 전화연락을 취한다.
안씨는 [목포시장과 경찰서장은 용당리와 고하도로 피신해 있었는데 상당히 불안해해 내가 신변을 보장할테니 나와달라고 했다.]고 당시 상황을 밝혔다.
회수 총기 목포역 보관
회의는 목포시장 목포대학장 재야인사 정당대표 목사 몇명 그리고 목포경찰서 정보계장(회의는 불참하고 밖에 있었다고 함)등이 참석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 무정부 상태 속에서도 치안유지는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민이 협력한다.
* 광주시민학살규탄과 군부및 유신 잔당의 정치적 음모 폭로 ,민주헌정수립을 위한 시민들의 의사결집 등을 위해 평화적인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위의 내용이 실행되기 위해 다음의 조건이 제시된다.
* 이시간 이후부터 사태개입에 대해 추후 정치적 보복이 없을것.
* 계엄군이 목포에 진입하면 엄청난 비극이 예상되므로 계엄군의 목포진입을 중지토록 요구할 것.
* 시장은 시위학생.청년들에게 대용식을 제공하고 역광장에 방송시설을 준비할것.
* 시위 장기화에 대비해 시내에 있는 식량의 외부방출을 중지하고 비축할것.
이회의 명칭은 [목포시민 민주화투쟁위원회]로 정해지고 안철씨가 위원장을 맡는다. 예정대로 오후 2시께부터 [시민투]주최로 [제 1차 민주헌정수립을 위한 시민 궐기 대회]가 역광장에서 1만여명의 군중이 환호한 가운데 장엄하게 개최된다.
첫연사로 오창원 목포대학장이 연단에 올라 [이런 식으로 사태가 진전되면 안된다]는 짤막한 연설을 한다.
시민들에 대한 설득이 부족하다고 느낀 안철씨가 연단에 올라 15분에 걸쳐 연설을 한다. 이날 대회는 내일 다시 오전 11시에 시민궐기대회가 열린다는 예고를 끝으로 폐회되고 이어 시가 행진이 시작된다.
시위대에 음식제공
시위대는 목포대학장이 앞장서고 재야인사와 목사 시민들이 뒤를 따랐다.
차량과 무장청년까지 합세된 시위대는 3시간여 동안이나 목포시내 곳곳을 누비며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다.
시민들은 시위대에게 도시락과 김밥 음료수등을 제공하고 일부 시민은 성금까지 기탁한다.
시가 행진이 끝나고 총기와 차량회수작업이 계속돼 어느 정도 마무리 됐으나 시민들은 밤늦은 시간까지 역앞으로 모여든다. 이때까지 몇몇 차량은 구호를 외치며 시내 질주를 계속한다.
이날 밤 11시께 목포역에서 방화사건이 발생한다.
머리가 짧은 건장한 청년이 이 목포역 청사에 방화했으나 타다 말고, 방화자는 시민들에게 체포돼 두들겨 맞고 병원으로 후송된다.
나중에 방화자는 군인신분이며 시민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불을 지른것으로 밝혀진다. 이날밤 청년 .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임시 집행부는 2백여명 규모로 시중심가와 외곽을 경비키 위해 경비대를 조직한다.
이들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40여정의 총이 지급되며 경비대는 야간에는 경계근무를 서고 낮에는 집회에 필요한 작업을 맡으며 23일부터 실시된 횃불시위때는 시위행렬을 보호하는등 눈부신 활약을 한다.
첫댓글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엇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