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4장 1절 -17절
찬송가 299장 ‘하나님 사랑은’
운동 경기에는 패자 부활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번 진 선수나 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가운데에도 이와 같은 패자 부활전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커다란 실패로 인해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새로운 기회를 주시며, 결코 짧지 않으신 하나님의 손으로 붙잡아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모세가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돌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모세가 내려오는 것을 진중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드는 커다란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셔서 모세에게 시내산으로 올라오라고 하시고 새로운 돌판에 말씀을 써서 주셨습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돌판 두 개를 준비하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께서 구름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6절과 7절을 보면“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모습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자비하심과 진노하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대까지 보응하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은혜는 최대한 많이 베푸시고 벌은 최소한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악용하여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속이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는 분이 아니심에도 불구하고 이런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에 얽매이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우상을 헐어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며 그들의 악한 문화에 물들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로서 세상의 악한 문화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즐기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것들을 배격하고 그 모든 것들을 사로잡아서 주님 아래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서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14절을 보면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질투라는 감정은 서로 비슷한 수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강아지를 무척 사랑해 주는데 그 강아지 주인이 강아지가 주인을 그만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주인이 그 강아지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같은 위치에 있어야 질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절대로 동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낱 먼지와 진흙 같은 존재이고 하나님은 토기장이 같으신 분입니다. 토기장이가 먼지와 진흙에 대해서 질투의 감정을 느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질투하신다는 것은 한낱 먼지와 진흙 같은 우리를 높여 주시고 동등한 위치로 바라보아 주시며 모든 사랑을 다 쏟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가진 우리들은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모두 내버려 두시고 하나님은 멀리서 보고만 있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시고 자녀 삼은 백성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말씀의 길로,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들어가서 살게 될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상낙원이 아니었습니다. 그 가나안 땅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어울려 자유분방하게 살고 싶은 유혹을 늘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롭게 살면서 이 세상의 많은 것을 누린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신앙이 없다면 실상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믿음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이자 백성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를 질투하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내어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주님을 드러내며 주님의 투명한 쇼윈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에게 속박이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은총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도 하나님이 우리를 질투하실 정도로 우리를 높여 주시고 사랑해 주심을 되새기면서 우리도 우리의 마음과 행동과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루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기도
우리를 질투하실 정도로 높여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바르게 깨달아 알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한낱 먼지와 진흙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께 늘 감사를 드리며, 우리도 그 사랑에 제대로 반응하며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날마다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