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이 제정된 지 백 년이 되도록 우리 나라 사람은 어떤 분야에서도 수상을 한 일이 없다.
그런데 백 년이 되는 금년에 노벨상 중에서도 가장 귀한 꽃이라고 하는
평화상을 우리 나라 대통령이 타게 된 것은 온 국민이 다 기뻐하고 축하할 일이다.
"유례가 없는 독재자 김대중 씨가 어떻게 노벨
평화상을 탄단 말인가? 노벨평화상 가치가 떨어졌다"고 헐뜯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국민들의 공감을 별로 얻지 못하는 것 같다.
모든
국민이 축하하고 기뻐하며 흥분으로 들떠 있는 것을 보면서 나도 함께 기뻐하며 흥분에 도취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희호 여사와 공동
수상을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신념, 억압하는
자에 대해서 가지는 분노, 억압받는 자에 대한 아픔 등은 그의 일생을 지배했고, 죽을 고비를 몇 번씩 겪으면서도 "사랑과 평화,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사회를 만듭시다" 하며 불굴의 의지로 싸우던 그에게 노벨 평화상이 주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김 대통령 못지 않게 평화와
정의를 위해 생을 바쳐온 이희호 여사, 김 대통령이 흔들림 없이 그 가시밭길을 갈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희생의 삶을 산 이희호 여사는
그늘에 가려 존재도 없는 취급을 받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물론 부부는 일심동체라 하니까 김 대통령의 영광이 곧 부인인 이희호
여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독립된 인격체인데'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래서 그늘에 가려진 이희호 여사의
삶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야겠다는 의무감에서 붓을 들었다.
남성중심문화, 남성지배문화 속에서 여자가 하면 얼마나 할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보조자 역할 밖에 더 했겠는가 하며 처음부터 과소평가하려는 남성들이 많다는 것을 알면서 이 글을 쓰기로
했다.
그늘에 가려져있는 자들도 이제는 존엄한, 독립된 인격체라는것을 외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희호
여사의 성품이나 삶을 내가 본대로 쓰기 전, 먼저 이희호 여사 자신이 쓴 글을 통해 그의 신앙심, 삶의 자세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1992년 10월 초순, 동교동 집 거실에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문득 창 밖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청명하고 아름다운 가을날의 아침이었다.
그 가을날의 아침처럼 청명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열망하는 마음에 휩싸여,
나는 조용히 뜨락으로 내려섰다.
온화한 기후, 눈부신 햇살, 그리고 그 결실의 대지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서 있는 나무들과 저마다
찬란한 빛깔을 뿜어내며 그 자태를 자랑하는 여러 가지 꽃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있게 하여 주신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에 깊은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참으로 숱한 일들이 힘겹게, 아니 숨쉬기조차 어렵게 격동의
역사 속에서 치루어졌다.
한 정치가의 아내로서, 그 남편과 민주의 역군들이 당해야 했던 그 부당한 대우들을 겪으면서, 종내는
울부짖기에도 지친 사연들을 다만 하나님께만 꿇어 엎드려 호소하며 버티어 온 그 질곡의 세월들, 그 왜곡된 어둠의 길목들에서 그래도 인권의
존엄성과 민주주의를 두 손 움켜쥐고 부르짖으며 감옥으로 감옥으로 끌려가던 그 잊지 못할 얼굴 얼굴들.
아, 끝내는 목숨 걸고 쓰러져
간 이 땅의 수많은 젊은 꽃들. 지금 생각해도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그러나 우리들의 가슴 속 깊이에서 새로이 피어나고 또 피어나는 그 거룩한
꽃들이여…….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저 팔레스타인의 한 모퉁이 음침한 해골 골짜기에서 일어난 그 십자가 사건은 모든 사람들의
오해에 둘러싸인, 심지어 사랑하는 열두 제자들에게까지도 버림을 받은 비극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속에는 이미 영생의 생명력이 약속된 승리의 노래가
그 멸시와 조롱과 고통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밀려오는 파도나 몰려오는 홍수 같아서 흑암과 불의의 세력이 제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 둑을 넘어뜨리거나 또는 흘러 넘어가고 마는 그런 불가항력적인 힘이 숨겨져 있다는 확신의 소망을 나는 늘 가지고
있었다". ([나의 사랑 나의 조국], pp. 17-18.).
이희호 여사는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절
비교적 부유했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했다.
왜정시대 때 겪은 일이나 6·25 때
겪은 고난은 누구나 비슷하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 미국 램버스 대학(Lambuth College, Jackson, Tenn.)에서
사회학과를 수학했고, 1958년에는 미국 스카렛 대학(Scarritt College, Nashville Tenn.) 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M. A.)를 취득했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대한YMCA 연합회 총무로 일했고, 1963년부터 1965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1964년부터 1970년까지는 여성문제연구회 제2대 회장, 1967년부터 1972년까지는 범 태평양 동남아시아
여성연합회 한국지회 부회장으로 일했다.
1950년대 이희호 여사가 감리교에서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갈 때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을 하면 감리교회에서 봉사하겠다는 각서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이희호 여사는 청와대로 들어갈 때까지 창천감리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성인 부인 반) 봉사했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인 김대중 씨와 결혼하고서도 서로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여 김대중 씨는
천주교회에, 이희호 여사는 감리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이희호 여사처럼 고지식하게 약속에 충실한 사람도 흔치 않을 것이다. 당시의
우리 나라 여성으로는 최고의 교육을 받고 여성 지도자로서 여성계에서는 명성을 날렸다.
그가 YMCA 총무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김대중 씨와 결혼을 했다. 당시 김대중 씨는 국회의원 출마에서 여러 번 낙선하고 부인과 사별한 후 두 아들과 전셋집에서 살고
있었다.
학력도 정식졸업은 목포상업고등학교이고, 해운업을 하다가 국회의원 출마를 하느라고 재산도 다 탕진한 상태이고,
무직상태였다. 따라서 이희호 여사의 집안에서 그와의 결혼을 강경하게 반대했고, 친구들, 선배들 모두가 반대했다.
그러나 이 여사는
사람을 보는 눈이 보통사람들과 달랐다. 왜 그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김대중 씨와 결혼을 했느냐고 물으면,
"그는 촌음을 아껴가며 많은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얻은 지식을 단지 관념이나 추상적인 상태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려는 실천적 의지와 성실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지니고 있는 꿈이 그저 꿈으로 끝나지 않으리란
신뢰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느꼈다.
나는 그의 신념과 관용과 멋에 이끌려, 그리고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라는 믿음으로 그와의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돕는다'는 말을 열등한 사람이 상전을 돕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생각지
않는다.
구약성경에 하느님이 하와를 아담을 돕는 자로 창조하셨다는 단어는 하나님이 사람을 돕는다는 단어와 동일하다.
즉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희호 여사가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이라고 느꼈다는
것은 그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이희호 여사의 이런 마음의 자세는 그의 삶의 태도에서도 항상
나타난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무서운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는 당국자들을 저주하거나 증오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들이 격분해서 당국자들, 당시 정보부 사람들이나 경찰에 대해서 심한 말을 해도 그냥 웃기만 했다.
그 사람들의
본심이라기보다는 위에서 시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이해하는 태도였다.
우리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복수하고 싶은 심정인데 이 여사는 항상 여유와 이해심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곤 했다.
이희호 여사는 남편인 김대중 씨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남편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이 좌절할까 두려워하면서 성경말씀으로 그를
격려하고 위로했다.
김대중 씨가 형무소 생활을 할 때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이 여사는 항상 성경말씀을 인용해서 용기를 북돋아주고
위로를 잊지 않았다.
또 내의를 차입할 때는 반드시 향수를 뿌렸는데 감방의 냄새가 그를 우울하게 할까 염려되어,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려고 향수를 뿌린다고 했다. 섬세하게 배려하는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또 김대중 씨가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보낸 편지
첫머리에는 항상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에게"라는 말이 있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는 많아도 존경받는 아내는 흔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동교동이나 일산에 살 때 그 집 대문 기둥에는 똑같은 크기의 두 사람의 문패가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경하고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는 마음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번 김 대통령이 받은 노벨
평화상은 두 분이 공동 수상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첫댓글 김대중 대통령은 말할것도 없지만 이희호 여사도 정말 인품이 훌륭한 분이군요..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진정한 친구님 감사합니다..마니마니 홍보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