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에 관한 좋은글 5가지
1. 청렴한 학자
어느 학자가 나무를 해다 파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산에서 시내로 나무를 날랐다.
오가는 시간을 될 수 있는 한 줄여
공부에 열중하겠다고 생각하여
당나귀를 사기로 했다.
제자들은 스승이 당나귀를 샀으므로
더 빠르게 마을과 시내 사이를
오갈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며
냇가에서 당나귀를 씻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당나귀의 목에서
다이아몬드가 나왔다.
제자들은 이것으로 스승이 가난한
나무꾼이 신세를 면하고 자기들에게
공부를 가르칠 시간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런데 스승은 곧 시내로 돌아가
당나귀를 판 상인에게 다이아몬드를
되돌려 주라고 제자들에게 명했다.
그러자 제자가,
"당신이 산 당나귀가 아닙니까?" 라고 하자
스승은 "나는 당나귀를 산 일은 있지만
다이아몬드를 산 일은 없다.
내가 산것만을 갖는게 옳지 않느냐?"고
말하며 그는 당나귀를 판 상인에게
다이아몬드를 되돌려 주었다.
출처 : 오쇼라즈니쉬 《배꼽》중에서
복생어청검
福生於淸儉 복은 청렴하고 검소한 데에서 생기고
덕생어비퇴
德生於卑退 덕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는 데에서 생긴다.
위부절이망가
爲不節而亡家 절약하지 아니하면 집안을 망치고
인불염이실위
因不廉而失位 청렴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관직을 잃는다
현명한자는 청렴한것이 자신의 장래에 이롭기 때문에 청렴하다
-다산 정약용
3. 최부(崔溥)와 송흠(宋欽)의 청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썩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약점을 지녔는가.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역사의 주체들이 부패와의 싸움을 계속했지만 싸움에서 승리보다는 오히려 처절한 패배로 끝났던 사례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인류사가 멸망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런 썩고 부패한 세상에서도 한줄기 청량제처럼 깨끗하고 청렴한 청백리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강력하게 부패의 둑을 막고 깨끗한 공직사회가 되도록 한없이 큰 노력을 경주했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관료들이 부패하고 타락했을 때, 몇몇 탁월한 청백리들은 강인한 인내와 절제력으로 부패의 사슬을 끊으려는 높은 청렴정신을 발휘해주었다. 여러 야사에 전해지고 있는 일화 중의 하나로 당대의 대표적 청백리이자 모범적인 공직자였던 금남(錦南) 최부(1454~1504)와 지지당(知止堂) 송흠(1459-1547)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많은 공직자들도 꼭 알아둘만한 내용이어서 소개하련다.
최부는 조선왕조 초기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나 처가 고을인 해남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뛰어난 학자이자, 문과에 급제하여 상당한 지위의 벼슬살이도 했던 관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24세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29세에 문과에 제3인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홍문관 부수찬, 수찬을 지내고 부교리에 올라 제주도 경차관(敬差官)으로 갔다. 제주도에서 아버지 상을 당하여 급히 귀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에까지 표류하여 해적으로 오인받아 억류되고 나중에는 조선의 벼슬아치로 인정되어 중국을 유람하고 돌아와 그 유명한 『표해록(漂海錄)』이라는 저서를 지은 큰 학자였다. 그는 서거정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편찬하고 『동국여지승람』도 공편했던 학자였다. 그의 외손자이자 당대의 석학이던 미암 유희춘이 기록한 「금남선생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에 의하면, 중국에서 돌아온 뒤에도 예문관 응교, 홍문관 교리, 사간원 사간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연산군의 패정을 통박하고 공경대부들의 비행까지 거침없이 꾸짖었던 이유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저 함경도의 단천(端川)으로 귀양 가고 유배지에서 갑자사화를 맞아 해배되지 못하고 51세를 일기로 끝내 세상을 떠난 강직하고 청렴한 벼슬아치였었다.
송흠은 신평 송씨로 전라도 영광(지금의 장성군 삼계면)에서 태어나 22세에 진사과에 급제하고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벼슬을 시작했으나 연산군 학정에 못 이겨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후학들이나 가르치는데 전념했었다. 기묘사화 때의 명현이던 학포 양팽손이나 면암정 송순 등이 바로 그때 송흠에게 배운 제자였다. 중종반정이후 벼슬길이 다시 열려 보성 순천 여산 등 전라도의 여러 수령을 역임하고, 나주 광주 등의 목사나 부사도 지냈으며 담양부사 전라감사 한성부좌윤 이조와 병조의 판서에 오르고 우참찬과 관중추부사 등의 고관대작을 역임하기도 했다. 같은 전라도의 이웃 고을 출신으로 같은 조정에서 벼슬했기에 최부와 송흠은 서로 가까이 지낸 사이였다.
나이야 5세의 차이이지만 최부는 29세에, 송흠은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의 시작은 10년 가까운 차이로 최부가 대선배의 위치에 있었다. 송흠이 벼슬살이 초년에 말을 타고 서울에서 고향으로 부모님을 뵈러왔었다. 마침 이웃 고을에 최부가 귀향해 있음을 안 송흠이 선배를 찾아 말을 타고 갔었다. 고향 선후배의 정을 나누려는 뜻이었다고 한다. 후배 송흠을 반갑게 맞이한 최부는 송흠에게 물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고향까지는 어떤 말을 타고 왔느냐고. 그랬더니 송흠은 나라에서 휴가차 오는 관리에게 내주는 말을 타고 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기 집에서 최부의 집까지는 어떤 말을 타고 왔느냐고 묻자, 같은 말을 타고 왔노라고 답했다. 그러자 최부는 와락 화를 내면서, 공무로 타고 왔으니 서울에서 고향까지는 괜찮으나, 고향집에서 자기집까지는 사무(私務)로 온 일인데 왜 나라의 말을 타고 왔느냐고 꾸짖으며 상경하면 나라에 고발하여 처벌받게 하겠노라고 했다는 것이다. 최부는 상경하여 고향 후배에 대한 정도 잊고 끝내 나라에 고발하여 송흠은 처벌을 받았지만, 송흠은 그 때의 충고가 거울이 되어 공사(公私)를 명확하게 구별하는 철저한 청백리가 되어 청백리의 대표적 인물로 후세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시작한 벼슬살이에 철저히 버릇을 들이도록 큰 훈계를 준 최부의 청백이나, 그 훈계를 받아 원망 않고 끝까지 모범으로 삼아 세상에 이름 높은 청백리가 된 송흠의 청렴정신은 오늘의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라 여겨진다.
4. 999칸 기와집의 진실
조선 시대 연산군 때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한양 남산에 999칸의 거대한 기와집이 있다는 것이다.
이 소문을 듣고 기와집을 보기 위해 전국 팔도에서 사람들이 남산으로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풍문을 믿고 찾아온 사람들이 아무리 남산을 이 잡듯이 뒤져도 999칸 기와집은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거대한 기와집이 있음 직한 자리에는 가로 세로 겨우 두걸음 정도의 단칸 오두막이 있을 뿐이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찾아왔던 사람들은 허탈해 하며 발길을 돌렸다.
어느 날 한 선비가 999칸 기와집 소문을 듣고 멀리서 찾아왔다.
그 역시 허름한 오두막을 보고 함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가만히 오두막을 살펴보던 그는 깜짝 놀랐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 허백당(虛白堂)이라는 어엿한 당호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이웃 사람에게 집주인이 누구인지 물어보니 놀랍게도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육판서를 두루 지낸 명재상 홍귀달이었다.
그는 오두막을 찾아가 홍귀달에게 절한 뒤 찾아온 까닭을 설명했다.
"항간에 한양 남산에 999칸의 기와집이 있다는 소리가 자자합니다. 그런데 기
와집은 없고 대감의 허백당이 있으니 이게 무슨 조화입니까?"
홍귀달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한 말이 잘못 전해진 모양이네. 비록 허름한 오두막이지만 내가 허백당에 누우면 999칸의 사색을 하고도 여분이 남는다는 말을 자주 했거든."
선비는 한 나라의 재상까지 지낸 이가 이토록 청빈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닐 수 있음에 크게 감탄했다.
5. 청렴의 세 등급
상산록(象山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청렴에는 세 등급이 있다. 최상의 등급은 나라에서 주는 봉급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설령 먹고 남는 것이 있어도 집으로 가져가지 않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한 필의 말을 타고 아무 것도 지닌 것 없이 숙연히 떠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옛날의 "염리(廉吏)"이다.
그 다음은 봉급 외에 명분이 바른 것은 먹고 바르지 않는 것은 먹지 않으며, 먹고 남은 것을 집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중고시대의 "염리"이다.
그리고 최하의 등급으로는 무릇 이미 규례(規例)가 된 것은 명분이 바르지 않더라도 먹되 아직 규례가 되지 않는 것은 자신이 먼저 전례를 만들지 않으며, 관직을 팔아 먹지 않고, 재감(災減)을 훔쳐 먹거나 곡식을 농간하지도 않고, 송사와 옥사를 팔아먹지 않으며, 세를 더 부과하여 남는 것을 중간에서 착복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오늘날의 "염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