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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집 제20권 / 행장(行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 겸 지춘추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領敦寧府事兼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공 준겸(韓公浚謙)의 행장(行狀)
공의 휘는 준겸(浚謙)이고 자는 익지(益之)이며, 성은 한씨(韓氏)이고 호는 유천(柳川)이다. 한씨의 족계는 청주에서 나왔다. 이름이 란(蘭)이란 분이 있어 고려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삼한을 통합해 태위(太尉)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었는데, 이분이 비조(鼻祖)가 된다.
그 뒤에 강(康)이란 분이 있어 유술(儒術)로 충렬왕(忠烈王)을 도와 두 차례 지공거(知貢擧)가 되었고 중찬(中贊)에 올랐는데, 시호가 문혜공(文惠公)이다. 이분이 사기(謝奇)를 낳았는데, 간의대부(諫議大夫)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에 지제고(知製誥)가 되었다.
이분이 악(渥)을 낳았는데, 이분은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을 지내고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사숙공(思肅公)이다. 이분이 공의(公義)란 분을 낳았는데,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평간공(平簡公)이다.
이분이 수(脩)란 분을 낳았는데,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를 지냈고,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에 올랐고, 청성군(淸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도덕과 문장이 뛰어나 한 세상의 사범(師範)이 되었다. 이분이 상경(尙敬)을 낳았는데, 본조(本朝)에 들어와 개국 공신(開國功臣)에 책훈(策勳)되었고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를 지내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이분이 혜(惠)라는 분을 낳았는데,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를 지냈다. 이분이 계희(繼禧)란 분을 낳았는데, 이분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지내고 익대 좌리 공신(翊戴佐理功臣)으로서 서평군(西平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이분이 사무(士武)란 분을 낳았는데, 이분은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을 지내고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승원(承元)으로 정선 군수(旌善郡守)를 지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조고의 휘는 여필(汝弼)로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선고의 휘는 효윤(孝胤)으로 학문에 힘쓰고 예법을 잘 지켜 사림(士林)에서 추중하는 바가 되었으나,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실 때의 관직은 경성부판관 겸 춘추관기주관(鏡城府判官兼春秋館記注官)이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인데, 고려조의 태사(太師)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예이며, 예빈시 정(禮賓寺正) 신건(申健)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정사년(1557, 명종 12) 8월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기걸했으며, 여섯 살 때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여덟 살 때 글을 읽어서 대의(大義)를 통하였으며, 한 번 보고서는 다 암송하였다.
열 살 때 외할아버지인 빈정공(賓正公)이 죽었는데, 능히 재물을 맡아 상을 치르는 데 있어서 한결같이 의정공의 명에 따라 하여 어기거나 잘못하는 바가 없었으며, 동자이면서도 예를 하는 데 참여하므로 보는 자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조금 자라서는 학문 공부가 날이 갈수록 더욱 넓어지고, 글솜씨가 날이 갈수록 더욱 진보되었으며, 덕기(德器)가 날이 갈수록 더욱더 이루어졌다.
상국(相國) 이항복(李恒福)이 어려서부터 우뚝하니 뛰어나 기상이 같은 또래들을 압도하였는데, 공을 한번 학사(學舍)에서 보고는 집으로 돌아간 뒤에 멍하니 있다가 한참 뒤에 말하기를, “참으로 재상이 될 그릇이다.” 하였다.
기묘년(1579, 선조 12)에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였고, 진사시(進士試)에도 7등으로 입격하였다. 경진년(1580)에 의정공(議政公)의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제(喪制)를 마쳤다. 을유년(1585, 선조 18)에 천거되어 태릉 참봉(泰陵參奉)에 제수되었다.
병술년(1586)에 과거에 급제하여 분관(分館)되기도 전에 한원(翰苑)에 선발되어 들어가서 검열(檢閱)에 제수되었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 변장(邊將)의 의론을 써 녹둔도(鹿屯島)에 진(鎭)을 설치해 경작을 하면서 방수(防戍)할 계책을 세웠는데, 호인(胡人)들이 갑자기 쳐들어와 사람들을 대부분 다 도륙하였다.
이에 선조(宣祖)가 불쌍하게 여겨 어제(御題)를 내 시종신(侍從臣)들로 하여금 글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공이 수석을 차지하니, 표피욕(豹皮褥)을 하사하였다. 그러자 대제학으로 있던 이산해(李山海)가 공이 지은 시를 몹시 칭찬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문형(文衡)의 솜씨이다.” 하였다.
무자년(1588, 선조 21) 가을에 봉교(奉敎)로부터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옮겨졌다. 기축년(1589)에 도로 봉교가 되었다가 6월에 전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였으며, 그날 바로 외직(外職)으로 나가 금천 현감(衿川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이는 집이 가난하고 부모님이 연로하여 편안하게 봉양하는 것이 급하였기 때문이었다.
망통(望筒)이 들어가자 선묘(宣廟)가 사알(司謁)을 시켜 정청(政廳)에 묻기를 “한준겸에게 노친이 있는가?” 하고는, 한참 뒤에야 낙점을 하였으며, 시의(時議)가 공사(公私)의 경중에 있어서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면서 전관(銓官)을 논핵(論劾)하였으니, 공이 물론(物論)에 중시됨이 이와 같았다.
가을에 호당(湖堂)의 선발에 뽑혔다.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의 모역(謀逆)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옥사(獄詞)가 만연하여 진신(搢紳)들이 많이 체포되었다. 공은 전에 당후(堂后)로 있을 적에 역적의 사위인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헌부(憲府)의 논핵을 받아 파직되고 옥에 갇혔다.
선묘가 그것이 실정(實情)이 없었던 것임을 살피고 석방하였다가 그다음 날 곧바로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헌부에서 다시 논집(論執)하자, 도로 명을 거두었다. 공은 광진(廣津)으로 나가 살면서 한 번도 발걸음이 성시(城市)에 미치지 아니하였다.
임진년(1592, 선조25) 봄에 원주(原州)의 율지촌(栗枝村)에 밭을 사서 부지런히 농사를 지을 계획을 하였다. 4월에 왜적들이 쳐들어와 도성을 핍박하였다. 이에 다시 서용되어 예조 정랑에 제수되었다가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를 거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승진되었다.
공은 길이 막힘으로 인하여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지 못하고 조정의 명령으로 인하여 호소사(號召使) 이기(李墍)의 막하(幕下)에 있으면서 종사하였다. 겨울에 원주 목사(原州牧使) 김제갑(金悌甲)이 영원성(鴒原城)을 지키면서 왜적들을 막았는데, 성이 함락되어 죽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공이 현재 그 지역에 있고 또 인망이 두텁다는 이유로 즉시 목사에 제수하고는 곧바로 임소(任所)로 부임하게 하였다. 공은 그곳에 도착하여서는 죽은 자를 조상하고 산 자를 위문한 다음, 유망(流亡)하는 자들을 불러모으고 굶주린 자들을 진휼해 살렸으며, 절의(節義)에 죽은 자들을 표창하고 강포하게 구는 자들을 금지시키니, 온 경내가 이에 힘입어 안정되었다.
을미년(1595, 선조28) 가을에 사헌부 지평으로 소명을 받았다. 겨울에 시강원필선 지제교(侍講院弼善知製敎)로 옮겨졌다가 다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겨졌으며, 얼마 뒤에 도로 필선이 되었다. 병신년(1596, 선조29) 봄에 홍문관부교리 겸필선(弘文館副校理兼弼善)에 제수되었으며, 도체찰사(都體察使) 서애(西厓) 유 상국(柳相國)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나가 양서(兩西) 지방을 순찰하였다.
공은 평소에 서애 선생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으므로 비록 나이와 직위가 현격하게 차이 났으나 칭허(稱許)함이 마치 평교(平交) 간과 같았으며, 큰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결정을 내리는 데 참여하게 하였다. 당시에 묘당(廟堂)에서는 바야흐로 공을 대우하기를 불차(不次)로써 대우하여, 일찍이 어느 날 정사에서 부수찬(副修撰)에 의망하였다가 다시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의망하였는데, 이는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검상(檢詳)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으며, 부응교(副應敎), 사간원사간 겸 승문원참교(司諫院司諫兼承文院參校)로 옮겨졌다. 다시 보덕(輔德)과 집의(執義)로 옮겨졌으며, 전한(典翰)으로서 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
가을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되었다. 공은 준직(准職)을 거치지 않아 규례에 있어서 의망될 수가 없었는데도 특별히 의망하라고 명하였는바, 이는 특별한 은혜였다. 겨울에 순서에 따라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다. 당시에 군사(軍事)에 관한 일이 많아 기무(機務)가 몰려들었는데, 공은 병방(兵房)을 아주 오랫동안 맡아 있으면서 도움을 준 바가 많았다.
또 중국의 제도와 같이 파발(擺撥)을 설치하도록 건의해 먼 변경에서 올리는 치계(馳啓)가 하룻저녁이면 도착할 수 있게 하니, 상이 몹시 기뻐하였다. 12월에 특별히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에 제수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나랏일이 몹시 어수선하고 부역이 매우 번거롭고 무거웠는데도 공은 능히 적절하게 잘 조절하여 기전(畿甸)이 이로 인해 다시 살아났다.
무술년(1598, 선조31) 겨울에 사임하여 체차되었다. 당시에 서애 선생이 여러 소인배들에 의해 조정에서 쫓겨나고 한때의 청류(淸流)들이 일망타진되었는데, 공까지 아울러 쫓아내고자 하여 핑곗거리를 찾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에 공은 드디어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양하고서 향리로 돌아간 것이다.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되었으나 또 사임하였다.
기해년(1599)에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공은 평소에 정인홍(鄭仁弘)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그 집 앞을 지나가면서도 안부를 묻지 않았다. 그러자 정인홍이 크게 감정을 품고 있다가 그의 일당을 사주하여 죄를 얽어서 파직시켰다.
경자년(1600, 선조 33) 6월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었다.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상(喪)에 산릉제조(山陵提調)로 차임되었는데, 본병(本兵)의 직임은 업무가 아주 많아 겸하여 살피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체차되고서 대호군(大護軍)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하였다.
신축년(1601, 선조34)에 동지중추부사 겸 사도도체찰부사(同知中樞府事兼四道都體察副使)로서 상국(相國) 이덕형(李德馨)을 따라 영남 지방을 순시하였다. 겨울에 조정으로 돌아와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었다. 임인년(1602) 봄에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계묘년(1603, 선조36) 가을에 사임하여 체차되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었다. 당시에는 나라가 난리를 겪은 지 얼마 안 되어 강역(疆埸)에 걱정스러운 일이 많았다. 이에 상이 영의정 이덕형에게 원수(元帥)로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한준겸이 직질(職秩)이 비록 낮기는 하지만 명망과 실제가 모두 높으니, 오늘날 변경을 지키는 일을 전담할 사람으로는 이 사람보다 더 적당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9월에 드디어 공을 사도 도원수(四道都元帥)로 삼았는데, 국조(國朝)이래로 가선대부로서 원수가 된 경우는 오직 공 한 사람뿐이었다. 상소를 올려 사임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대신들이 직질을 더 높여 주기를 청하였는데, 중간에서 저지하는 자가 있어 기각되어 시행되지 못하였다. 겨울에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겸하였다. 얼마 뒤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제수되었다.
갑진년(1604, 선조37) 봄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제수되었는데, 친혐(親嫌)으로 인해 체차되고서 대호군(大護軍)에 제수되어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여름에 부제학에 제수되고 가을에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서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임하였다.
겨울에 이조 참판으로 옮겨졌다. 을사년(1605)에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임하였다. 여름에 호남과 영남 지방에 가서 군사들을 살펴보았다. 당시에는 남쪽 변경에는 경보가 없었는데도 당시 재상으로 있던 자 중에 공이 전조(銓曹)의 직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수신(帥臣)으로 명을 받으면 순시하러 나가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므로 이 행차가 있었던 것이다.
장차 길을 떠나려 할 때에 본직에서 해임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9월에 소환되었는데, 여러 차례 사직하여 체차되고서 대사성에 제수되었다가 부제학으로 옮겨졌다. 얼마 뒤에 특별히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제수되었다.
병오년(1606, 선조39)에 두 천사(天使)가 나와서 조서를 반포하였다. 당시에 국가의 저축이 고갈된 상태에서 필요한 경비는 아주 많았는데, 공은 잘 주선하고 정도에 맞게 처리하여 사신을 접응(接應)함에 있어서 빠뜨려진 일이 없게 하였다. 이에 난리가 끝난 뒤에 탁지(度支)의 직임을 잘 수행한 자를 들 적에는 반드시 공을 첫 번째로 손꼽았다.
정미년(1607) 봄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여름에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는데, 친혐(親嫌)을 이유로 체차되고서 서추(西樞)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제수되었다. 그다음 해에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병이 들자, 공이 직접 탕약을 맡아서 달였는데, 옷을 벗지 않은 채 잠을 잔 것이 몇 달이나 되었다. 상을 당함에 미쳐서는 애통해하여 몸을 상함이 예를 뛰어넘어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상제(喪制)를 마치고서 서위(西衛)에 부직(付職)되었다. 얼마 뒤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가 대사헌으로 옮겨졌는데, 사임하고 서추로 나아갔다. 당시에 광해군의 정사가 혼란하여 여러 간인(奸人)들이 국정을 천단하고 있었다.
마침 이조 판서의 자리가 비었는데 대신이 가장 먼저 공을 천거하자, 좌복(左腹)이 되려고 엿보고 있던 자가 이를 시새워 유언비어를 날조해 상에게 아뢰었다. 공은 그런 낌새를 미리 알아채고는 온 힘을 다해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구해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로 나갔다.
북관(北關)은 궁벽지고 누추하여 문교(文敎)에 젖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공이 이르러서는 풍속을 교화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 나이가 많은 사람을 예우하고 특별한 행실이 있는 사람을 정표(旌表)하였으며, 사자(士子)들을 불러들여 이끌어 주면서 장려하였고, 정식(程式)을 마련하여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또한 먼저 《가례(家禮)》와 《소학(小學)》을 간행한 다음 이를 번역하여 공문서로 만들어 열읍(列邑)에 나누어 주고 강독을 일삼게 하였다. 그리고 또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 등을 행하였으며, 시골 사람들이 부르는 가곡(歌曲) 가운데에서 사람들의 성정(性情)을 감발(感發)시킬 수 있는 것들을 뽑아 모아 오륜(五倫)으로 만든 다음, 민간에 널리 배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노래하고 읊게 하였다.
이에 상서(庠序)에는 글을 읽는 풍속이 있게 되었고, 촌야(村野)에는 예모를 차리는 습속이 있게 되었다. 이 세상에 드문 황폐한 지역으로 하여금 완전히 변해 지금과 같이 되게 한 것은, 실로 공이 잘 교화한 덕분이다. 당시에 정릉(定陵)과 화릉(和陵) 두 능의 비(碑)가 왜구(倭寇)들의 손에 의해 훼손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중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계문하여 다시 세웠다.
또 성조(聖祖)가 잠저(潛邸) 때 계시던 옛 궁 역시 임진년(1592, 선조25)의 난리 때 불타 버렸으나, 성조가 손수 심은 소나무 여섯 그루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보는 사람들이 공경하였는데, 시골 마을에 있어서 시골 사람들이 마음대로 대하였으며 말을 타고 지나가는 자들이 힐끗 쳐다보고 가면서 말에서 내릴 줄을 몰랐다.
공은 그렇게 하는 것은 공경을 넓히는 방도가 전혀 아니라고 여겨, 그 앞에다가 비석을 세워 이 사실을 기록하고는 그 앞을 지나가는 대소(大小)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말에서 내리게 하였다. 그리고 전후에 걸쳐 감사로 왔던 사람들은 모두 토속(土俗)이 사납고 드세다는 이유로 대부분 형벌을 엄하게 하여 위엄을 세웠는데, 공은 태장(笞杖)을 가볍게 하고 관대하고 따스함을 위주로 해 다스렸다. 그러자 백성들이 비로소 삶을 즐기는 마음이 있어서 명령을 하면 제대로 행해져 금지되었다.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대임(代任)을 허락하지 않았다. 계축년(1613) 4월에 서양갑(徐羊甲)의 옥사가 일어났다. 처음에 이이첨이 선묘(宣廟)에게 죄를 얻어 삭출(削黜)되어 서용되지 못한 기간이 9년이나 되었는데, 밤낮으로 틈을 엿보다가 나라에 변고가 있음을 다행으로 여겨 독을 부렸다.
정미년(1607, 선조 40) 겨울에 선묘가 오랫동안 미령하자, 유영경(柳永慶)이 궁액(宮掖)에 빌붙으면서 당파를 만들어 정권을 천단하였는데, 이이첨이 이에 그 시기를 틈타 유영경이 세자를 바꿀 계획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는 몰래 문객(門客)을 보내어 정인홍(鄭仁弘)을 사주해 상소를 올려 유영경을 탄핵하게 하였다. 그러자 선묘가 진노하여 정인홍과 이이첨을 유배 보내니, 광해군의 의심과 두려움이 날로 깊어졌다.
선묘는 자신의 병이 몹시 위중해지자 광해군이 능히 골육을 보전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이이첨의 무리들이 장차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할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걱정하여, 직접 유교(遺敎)를 써서 이르기를, “어질지 못한 이 몸이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신민들에게 죄를 지었기에 마치 깊은 연못가에 임하고 깊은 골짜기에 떨어진 것과 같이 두렵게 여겨 오던 중 지금 갑작스레 중한 병이 들었다.
무릇 사람 목숨의 길고 짧음에는 운수가 있는 법이고, 살고 죽는 데에는 천명이 있는 법이어서, 밤이 오고 낮이 오는 것을 어길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현들께서도 면치 못했던 바이다. 그러나 다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다만 대군이 아직 어려 성장하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는바, 이 때문에 나의 마음이 항상 근심스럽다.
내가 죽은 뒤에는 인심을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만약 사특한 설이 나올 경우에는 제공들이 잘 보호해 주기 바란다.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부탁한다.”하였으며, 겉봉에는 유영경, 한응인(韓應寅), 신흠(申欽), 박동량(朴東亮), 허성(許筬), 서성(徐渻) 및 공의 이름을 써서 봉한 다음 궁중 안에 놓아두었는데, 제공들이 모두 알지 못하고 있었다. 선묘가 여러 군신들을 버려둔 채 돌아가시고 난 뒤에 왕대비(王大妃)께서 비로소 빈청(賓廳)에 이 유교를 내렸다가 곧바로 봉하여 안으로 들였다.
그 뒤 광해군이 왕위를 잇자 이이첨이 권병(權柄)을 잡고서 선왕에 대한 유감을 풀 생각을 하였으며, 또한 광해군이 반드시 영창대군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에 “유교(遺敎)는 선왕의 어필(御筆)이 아니라 바로 대비(大妃)가 내시(內侍) 민희건(閔希騫)을 시켜서 위조한 것이며, 일곱 신하들이 영창대군을 보호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갖가지 방법으로 거짓을 꾸며 내어 중외의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도적 박응서(朴應犀)를 체포해 옥에 가두고는 고문을 가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이이첨이 몰래 사람을 시켜 화복(禍福)의 설을 가지고 위협해 그로 하여금 옥중에서 상변(上變)하게 하였다. 이에 옥사가 뒤집혀서 역옥(逆獄)으로 되어 드디어 국구(國舅)인 김제남(金悌男)을 살해하고, 영창대군을 강화(江華)에 가두었다. 그러자 헌납(獻納) 유활(柳活)이 가장 먼저 유교 안에 이름이 들어 있던 자들을 탄핵하고는 이들 모두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였다.
역적 정협(鄭浹)이 이이첨의 뜻을 받들어 여러 사람들을 거짓으로 끌어들임에 미쳐서는 사방 사람들이 체포되었는데, 공 역시 덕원(德原)에서 체포되어 올라왔다. 이때는 화염(禍焰)이 몹시 혹독하여 사람들이 모두들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하였는데, 체포된 자들 가운데에는 혹 너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을 해명하는 자도 있었다.
공은 평소에 김제남(金悌男)과 서로 잘 지내지 못하였으며, 또한 일에 있어서도 증명할 만한 것이 있었다. 이에 친척들이 모두들 권하기를, “사실대로 공사(供辭)를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으나, 공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 것이다. 다른 사람을 팔아서 죄에서 벗어나기를 도모하는 짓을 나는 할 수가 없다.” 하면서 끝내 따르지 않았다.
광해군이 친히 국문하기를 마친 다음에 곧바로 석방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날 서호(西湖)의 덕근촌(德謹村)에 있는 전장(田庄)으로 돌아갔다. 공의 백씨(伯氏)인 참의공(參議公) 역시 관직을 버리고 문을 닫아건 채 지낸 지가 이미 몇 년이나 되었다.
서로 마주 대하여 몹시 즐거워하면서 날마다 자질(子姪)들과 더불어 경사(經史)를 토론하고 의리(義理)를 담론하였으며, 한가로운 틈이 나면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면서 조용하고 한적하게 지내서 사람들이 환난 중에 처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병진년(1616, 광해군 8)에 광해군이 대비를 폐하여 내쫓고자 해 김제남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해서 시장 바닥에 시신을 던져 놓았다. 그러자 윤인(尹訒), 정조(鄭造), 유숙(柳潚) 등이 다시 공에 대해 논해 멀리 유배를 보냈다. 정사년(1617)에 충원(忠原)에 부처(付處)되어 띳집을 얽어 짓고 살면서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신유년(1621, 광해군 13) 4월에 여주(驪州)로 양이(量移)되었다. 8월에 다시 서용되어 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오도 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심하(深河)의 전역(戰役)에서 두 장수가 오랑캐들에게 패하였으며, 요주(遼州)와 광주(廣州)가 잇달아 함락되었다. 오랑캐들의 형세가 더욱 불어나 동쪽으로 쳐들어가 노략질할 것이라고 크게 떠들어 대면서 날이 갈수록 더 심하게 공갈하였다. 이에 묘당(廟堂)에서는 도원수를 가려 뽑기를 의논하였는데, 모두들 공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였으므로 폐기된 가운데에서 다시 기용하는 명이 있었던 것이다.
공은 숙배하고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12월에 오랑캐들이 의주(義州)로 쳐들어왔다가 임반(林畔)에 이르러서 되돌아갔다. 이에 드디어 중화(中和)에 개부(開府)하였는데, 공은 비록 부득이하여 직에 나아가기는 하였으나 사태가 이미 어떻게 해 볼 수 없게 된 뒤였다.
계해년(1623, 인조 1) 3월에 우리 성상이 대궐로 들어가 대통(大統)을 되찾고 중궁전하(中宮殿下)가 곤극(坤極)의 자리에 바로 앉으매, 공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진 제수하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삼았으며,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하였다.
5월에 소환되었다. 당시에 조정의 의론이 ‘천조(天朝)에서 장차 중국 군사와 협력하여 오랑캐들을 토벌하라는 명이 있을 경우, 상이 친히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나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 겨울에 공으로써 유도 도체찰사(留都都體察使)를 겸하게 하였다. 공은 왕후(王后)의 집안으로서 군국(軍國)의 일에 간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여겨, 여러 차례 사임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 2) 정월에 역적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하였으므로 대가(大駕)가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2월에 이괄이 주살되어 대가가 경사(京師)로 돌아왔는데, 공은 항상 어가를 호위하였다. 6월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임하여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찬수하게 되었는데, 극력 사양하면서 숙배하지 않았다.
을축년(1625) 봄에 도체찰사의 직임을 사직하였다. 9월에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임하였으며, 얼마 뒤에 또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 5) 정월에 오랑캐들이 몰래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와 성읍(城邑)들이 잇달아 함락되었다.
공은 호위대장(扈衛大將)이 되어 자전(慈殿)과 중전(中殿)을 모시고 강화(江華)로 들어가던 도중에 조지(朝旨)가 내려져 배위대장(陪衛大將)으로 삼으라는 명이 있었다. 이에 왕세자(王世子)의 분조(分朝)를 따라 남하하여 전주에 이르러서 무군사(撫軍司)를 두었다.
공은 이원익(李元翼), 신흠(申欽)과 함께 당상(堂上)이 되었는데, 군사와 백성들이 공을 의지하여 안정되었다. 3월에 오랑캐들이 물러갔으므로 왕세자를 모시고 행재소(行在所)로 갔다가, 4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공은 평소에 풍비증(風痺症)을 앓고 있었는데 전란 중에 여기저기 쏘다닌 나머지 병이 더욱 심해졌다.
상이 태의(太醫)에게 명하여 곁에서 병을 지켜보게 하였으며, 병문안하는 이가 길에 이어졌다. 공은 병세가 위독해지자 자제들을 불러 계사(啓辭)의 초고를 쓰게 하였는데, 마치 나라를 위하여 일을 논하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이미 말을 할 수 없게 된 뒤였다. 7월 17일 신사에 회현방(會賢坊)의 살고 있던 집에서 고종(考終)하였다.
부음(訃音)을 아뢰자, 상이 몹시 애도하면서 3일간 조회를 철폐하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상사(喪事)를 돌보아 주게 하였으며, 부증(賻贈)을 규례보다 더하게 하였다. 왕세자도 그날 거애(擧哀)하였으며, 장사를 지내는 날에 미쳐서는 또 상차(喪次)에 임하여 조문하였다. 같은 조정에 있던 사대부들은 모두들 혀를 차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라에 복이 없다.” 하였으며, 와서 곡하는 자들은 반드시 몹시 애통해하였다.
장사 지낼 때에는 모여든 자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9월 19일에 원주(原州) 음지촌(陰枝村)에 있는 선영에서 서쪽으로 5리쯤 떨어져 있는 경향(庚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회산부부인(檜山府夫人) 황씨(黃氏)를 합부(合祔)하였다.
공은 자품이 충후하고 기상이 광명하였으며, 화합하면서도 휩쓸리지는 않았고, 관대하면서도 절제가 있었다. 그런 데다가 의표(儀表)가 웅위하였으며, 거조가 묵중하여 사람들이 바라만 보고서도 성대한 덕을 지닌 큰 그릇임을 알아보았다.
일찌감치 의정공(議政公)으로부터 가정에서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참의공(參議公)과 더불어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을 함에 따라 일취월장하였다. 특히 예(禮)를 좋아하여 모든 길흉의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옛 예에서 상고하면서 세속의 습속에 구애받지 않았다.
공은 또한 효성스럽고 우애스러우며 도타웁고 화목함은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의정공이 세상을 떠나신 뒤로는 집안이 더욱 가난해졌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참의공마저 또 먼 곳으로 유배되었으므로 공이 홀로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서 좌우에서 봉양하였는데,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또 여동생 가운데 계례(笄禮)를 올리지 않은 여동생이 여럿이 있었는데, 이들을 잘 보호하면서 가르쳤으며 제때에 출가를 시켰다. 공은 비록 화환(禍患)으로 인해 이리저리 떠돌거나 병란으로 인해 상란된 즈음에도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봉양하였으며, 철에 맞게 보살펴 드리는 예법을 일찍이 빠뜨린 적이 없었다.
공이 웅번(雄藩)의 여러 진(鎭)을 두루 역임함에 미쳐서는 대부인의 연세가 일흔 살이나 되었으며, 참의공이 또 여러 차례 큰 고을의 수령이 되었으므로 번갈아 가면서 서로 모시고 가 봉양하였는데, 영광과 봉양이 양쪽 다 지극하였다. 매번 대부인의 생신 잔치를 열 때마다 대부인은 문득 여러 악공(樂工)들을 물리치고 노래하는 자로 하여금 〈감군은곡(感君恩曲)〉을 노래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은 그 가사(歌詞)를 추연(推演)하여 속곡(續曲)을 지어 올렸다. 일찍이 조정 안의 경대부(卿大夫)들 가운데 노친(老親)이 있는 자들과 약속을 맺어 수친계(壽親禊)를 만들고는 좋은 시절의 길한 날짜를 잡아 술잔을 올리면서 축수(祝壽)하였다. 어느 날 예조에서 이를 아뢰자, 선조가 특별히 음악을 하사하여 영광스럽게 해 주었다.
공은 참의공과 50년간을 함께 살면서 재화(財貨)를 함께 썼는데, 당체(棠棣)의 즐거움이 늙음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도타웠다. 매양 중씨(仲氏)가 일찍 죽고 손위 누이와 손아래 누이가 대부분 오래 살지 못한 것을 애통해 하여 그들이 낳은 자식들을 자기가 낳은 친자식들 이상으로 돌보아 주면서 교육하고 성취시켜 그들 모두로 하여금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아침저녁으로 집안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밥을 먹었는데, 장유(長幼)가 자리에 그득하여 당무(堂廡) 안에 화락한 기운이 애연히 피어올랐다. 공은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중하게 여겨 궁핍한 자들을 진휼해 주고 외로운 사람들을 보살펴 주었으며, 길사와 흉사가 있을 경우에는 도와주어 각자로 하여금 마땅함을 얻게 하였다. 가까운 친족들과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들 다 공을 본받아 인(仁)에 귀의하였다.
공은 특히 조상을 사모하는 데에 더욱더 독실하여 평상시에 동종회(同宗會)를 만들어 놓았으며, 또 이를 위하여 보계(譜系)를 써서 인륜을 도타이 하는 근본을 후손들에게 보였다. 청주(淸州)의 방정리(方井里)는 바로 공의 선조인 태위공(太尉公)이 살던 옛 마을인데, 참의공이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있을 적에 공이 참의공과 상의하여 제단을 쌓고 제사 지냈으며,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공은 평상시 거처함에 있어서 화락하고 조용하게 지냈으며, 일찍이 사납고 게으른 기색을 드러내거나 비루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일에 있어서 비록 몹시 노여워할 만한 일이 있더라도 끝내 안색이나 말투에 이를 드러내지 않았으며, 곁에서 모시는 자들이 혹 일부러 격동시켜도 역시 빙그레 웃기만 할 뿐 화를 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관대하게 용서해 주었고, 다른 사람의 과실을 들으면 문득 즐거워하지 않았으며, 혹 누가 횡역(橫逆)을 가해 와도 일찍이 상대와 대놓고 따져 본 적이 없었다. 북관(北關)에서 체포되어 왔을 적에는 금오랑(金吾郞)이 권간(權奸)에게 잘 보이고자 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모욕을 주었는데도 태연하게 대처하면서 자제들에게 신칙하여 감히 원망하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뒤에 그자의 이름을 묻는 사람이 있자 이미 잊어버렸다고 답하였다.
공은 평생토록 푹 빠지도록 좋아하는 바가 없어 일체의 세미(世味)에 대해서 담박하기만 하였다. 직위가 경상(卿相)에 이르러서도 집안은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다. 영돈녕부사로 5년이나 있었는데도 집을 한 칸도 넓히지 않았고, 전지를 한 뙈기도 사들이지 않았으며, 마구간에는 곡식을 먹는 말이 없었고, 손님이 앉는 자리에는 겹방석을 깔지 않았으며, 팔로(八路)에는 한 명의 노비도 없었다. 이것이 비록 공에게 있어서야 자잘한 행실이지만, 역시 봉황새의 한 깃털이 되기에 충분하다.
공은 포의(布衣)로 있을 적부터 사람들이 재상감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세로(世路)가 험난하여 여러 차례 조정에 나아갔다가 여러 차례 쫓겨났다. 그러자 공보다 먼저 앞에 나아간 자들은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부끄럽게 여겼다. 공이 귀하게 됨에 미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종조(祖宗朝)의 한 상당군(韓上黨君)의 고사(故事)를 들어 말하였다.
그런데 영상(領相) 이원익(李元翼)만은 평소부터 공의 뜻을 알고 있었으므로 매복(枚卜)하지 않으니, 공이 그 말을 듣고는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완평(完平)이야말로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기를 덕으로써 한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공은 지위와 명망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지조를 지킴은 더욱더 확고하였다.
일찍이 일언반구도 시정(時政)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으며, 번잡하고 화려한 것과 세력과 이끗을 피하기를 마치 자신을 더럽히는 것처럼 하였다. 이것은 옛날 사람들로서도 하기 어려운 바인데 공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공은 젊어서부터 영화로운 길로 나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선영(先塋) 아래에 작은 서재를 하나 짓고서 귀래(歸來)라고 편액을 내걸었는데, 영상으로 있던 신흠(申欽)이 그 편액을 썼다. 공이 비록 일이 많은 세상을 만난 탓에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지는 못했으나, 평소에 어떠한 뜻을 품고 있었는가를 여기에서 잘 알 수가 있다.
공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 더불어 막역지우(莫逆之友)를 맺었다. 계축년(1613, 광해군5)의 화가 일어남에 미쳐서는 한때에 모두 죄를 받았는데, 한음은 용진(龍津)에서 대죄(待罪)하고 있다가 걱정과 울분 속에서 죽었고, 백사는 북청(北靑)에 유배되어 있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때 공은 모두 시를 지어 이들을 곡하였는데, 말뜻이 비통하고 간절해서 듣는 자들이 눈물을 떨구었다. 그러자 이이첨이 그것을 미워하여 더욱더 공을 사형에 처하려고 도모하였는데도 공은 끝내 괘념치 않았다. 공은 글을 지음에 있어서 평이하고 평탄하며 전아하고 아름답게 지었으며, 공교로운 말로 아름답게 꾸미기를 일삼지 않았다.
시 역시도 넉넉하고 여유로워 급박하지 않았으며, 올바른 성정(性情)에서 발하여 옛 시인다운 풍모가 있었다. 또 기억력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서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모두 다른 사람에게 또렷하게 말할 수 있었는데, 설명을 하면서 환하게 꿰뚫음이 마치 어제의 일을 말하는 것만 같았다.
공은 또 국가의 전고(典故)에 대해서도 환하여 조종조 이래의 문헌과 의궤(儀軌)에 나오는 연혁(沿革)과 손익(損益)에 대해 마치 손바닥 위에 놓고 바라보는 듯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물어서 결정하였다. 공은 지은 시문(詩文)을 스스로 기록하지 않았으며, 또 병란 중에 잃어버려 지금은 난고(亂藁) 몇 권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부인은 창원(昌原)의 망족(望族)으로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내고 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의금부사(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에 추증된 황성(黃珹)의 따님이다. 14세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따사롭고 부드럽고 아름답고 순하였으며, 단정하고 장중하고 착하고 어질어서 부도(婦道)를 능히 잘 닦았으며, 군자의 배필이 됨에 미쳐서는 덕을 어김이 없었다.
이에 규문(閨門) 안이 아주 반듯하여 법도가 있었으므로 시누이와 동서의 족속들이 모두들 부인의 현숙함을 칭찬하였다. 갑오년(1594, 선조27) 8월에 원주(原州)의 관아에서 졸하였는데, 향년이 겨우 34세였다. 그 뒤에 여러 차례 추증되어 정부인(貞夫人)에 이르렀다. 계해년(1623, 인조1)에 회산부부인(檜山府夫人)에 진봉(進封)되었다.
공은 모두 2남 4녀를 두었다. 중궁전하(中宮殿下)는 차서(次序)에 있어서 여섯째이다. 중궁전하는 원량(元良)을 생산하여 현재 세자(世子)의 자리에 있으며, 둘째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이름은 휘(諱)한다. - 이고, 셋째는 요(㴭)이고, 넷째는 곤(滾)인데, 모두 어리다.
장남 회일(會一)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부사(府使)이며, 2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이성(以成)이고 차남은 이평(以平)이며, 딸은 사인(士人) 신익륭(申翊隆)과 정하(鄭何)에게 시집갔으며, 한 딸은 아직 어리다. 차남 소일(昭一)은 명민하고 빼어났으나 요절하고 말았다.
장녀는 종부시 정(宗簿寺正) 이유연(李幼淵)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를 낳았다. 차녀는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 여이징(呂爾徵)에게 시집갔다. 삼녀는 예조 참의 정백창(鄭百昌)에게 시집가서 2남 1녀를 두었다. 또 측실(側室)에게서 딸 둘을 두었는데, 모두 허통(許通)되었으며, 이환(李煥)과 종실(宗室) 진원부수(珍原副守) 이세완(李世完)이 사위이다.
경세는 공과 더불어 마음을 논한 것이 대개 40여 년이나 되었는데, 취미(臭味)와 성기(聲氣)가 한 번도 서로 의기투합되지 않은 적이 없어 시종여일(始終如一)하였으며, 서로 기대하여 권면한 것이 도의(道義)에 있었지, 명리(名利)나 환달(宦達)의 사이에 있은 적이 없었다.
부사공(府使公)이 상복(喪服)을 입고 있는 중에 있으면서 지친 기색으로 나에게 말하기를, “선군(先君)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분으로는 공만 한 분이 없으니, 공의 글을 얻어서 이름을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삼고자 한다.” 하였다.
그러고는 참의공이 찬차(撰次)한 가전(家傳)을 가지고 와 보여 주었는데, 덕행에 대해 논하여 서술한 바가 한 글자도 실제보다 지나치게 칭찬한 것이 없이 모두가 내가 직접 보고서 깊이 찬탄하던 바였다. 이에 드디어 그 글에 의거하여 이상과 같이 서술해 태사씨(太史氏)가 채택하는 데에 대비하였다. 구관(具官) 정경세(鄭經世)는 삼가 행장(行狀)을 쓴다. <끝>
[註解]
[주01] 분관(分館) : 새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의 삼관(三館)에 나누어 소속시켜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를 익히게 하던 일을 말한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서 박사(博士) 세 사람으로 하여금 채점을 하게 한 다음, 3점을
맞은 사람은 승문원, 2점은 성균관, 1점은 교서관에 보낸다. 그러면 이를 다시 승문원 도제조가 검토해서 수정한 다음 이조에서 계
품하여 삼관에 입속(入屬)시켰다. 괴원분관(槐院分館)이라고도 한다.
[주02] 망통(望筒) : 어떤 직임에 합당한 자를 적은 문서로, 곧 후보 명단을 말한다. 망단자(望單子), 망기(望記)라고도 한다.
[주03] 당후(堂后) :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의 별칭이다. 주서의 집무실이 승정원의 뒤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다.
[주04] 불차(不次) : 불차탁용(不次擢用)으로, 관직을 제수함에 있어서 관계(官階)의 차례를 밟지 않고 뽑아 올려서 제수하는 것을 말한
다.
[주05] 좌복(左腹) : 《주역》 명이괘(明夷卦)에 나오는 말로 간사한 소인이 부정한 방법으로 임금의 마음을 얻어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
을 뜻한다.
[주06] 심하(深河)의 전역(戰役) : 광해군 10년(1618)에 건주(建州)의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명나라의 무순(撫順), 청하(淸河) 등의 보
(堡)를 침입하여 일으킨 전쟁을 말한다. 이때 우리나라에서는 명나라의 구원 요청으로 인해 강홍립(姜弘立)을 오도 도원수(五道都
元帥)로 삼고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삼아 군사 2만 명을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였는데, 광해군 11년에 명나라의 제독(提督)
유정(劉綎)의 군사와 합류하여 적을 협공하였으나 부차(富車)의 싸움에서 대패한 뒤 강홍립이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燃藜室記述
卷21 廢主光海君故事本末》
[주07] 감군은곡(感君恩曲) : 조선 초기의 악장(樂章)으로, 작자 및 제작 연대 미상의 곡이다. 임금에 대한 송축가(頌祝歌)이며, 향악(鄕
樂)의 곡명이기도 하다.
[주08] 당체(棠棣)의 즐거움 : 당체는 상체(常棣)와 같은 말로, 형제간에 우애롭게 지내는 즐거움을 말한다. 《시경》 〈상체(常棣)〉에, “상
체의 꽃이여, 환하게 빛나도다. 무릇 지금 사람들로서는, 형제만 한 이가 없느니라.〔常棣之華 卾不韡韡 凡今之人 莫如兄弟〕” 하
였다.
[주-D009] 봉황새의 한 깃털 : 아름다운 풍모와 걸출한 재주를 가진 인재임을 알 수 있는 작은 단서라는 뜻이다.
[주10] 한 상당군(韓上黨君)의 고사(故事) : 한 상당군은 한명회(韓明澮)를 가리킨다. 한명회는 예종(睿宗)의 비(妃)인 장순왕후(章順王
后)와 성종(成宗)의 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아버지로서, 세조 때 영의정 등을 거친 다음 세조가 죽은 뒤 원상(院相)이 되어 서
정(庶政)을 결재하였으며,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영중추부사가 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여기서는 인조의
국구(國舅)인 한준겸 역시 한명회처럼 재상이 되어 국정을 돌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주11] 매복(枚卜) : 고대에 관원을 임명할 적에 길한가 길하지 아니한가를 점을 쳐 뽑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복상(卜相), 즉 재상을 뽑
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끝>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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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兼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西平府院君韓公行狀。
公諱浚謙。字益之。姓韓氏。號柳川。韓之係出於淸。有名蘭。佐麗祖統合三韓。位太尉三重大匡。是鼻祖也。曰康。以儒術相忠烈王。再知貢擧爲中贊。諡文惠。是生謝奇。諫議大夫,寶文閣提學,知製誥。是生渥。都僉議右政丞,上黨府院君。諡思肅 。是生公義。政堂文學淸城君。諡平簡。是生修。判厚德府事。右文館大提學。淸城君。諡文敬。道德文章。師範一世。是生尙敬。入本朝策開國勳。領議政府事。西原府院君。諡文簡。是生惠。咸吉道觀察使。是生繼禧。議政府左贊成。以翼戴佐理功封西平君。諡文靖。是生諱士武。漢城府判官。贈左參贊。是於公爲高祖。曾祖諱承元。旌善郡守。贈左贊成。祖諱汝弼。中樞府經歷。贈領議政。考諱孝胤。力學服禮。爲士林所重。不幸早世。卒官鏡城府判官兼春秋館記注官。贈領議政。妣貞敬夫人平山申氏。麗朝太師壯節公崇謙之後。禮賓寺正健之女也。公以嘉靖丁巳八月生。幼而岐嶷。六歲。能屬文。八歲。讀書通大義。一覽輒誦。十歲。外祖考賓正公歿。能司貨治喪。一遵議政公命。無所違失。童子而與於禮。見者異之。稍長。學日益博。文日益進。德器日益就。李相國恒福自少卓犖。氣壓輩流。一日見公於學舍。歸家惝然自失。久之曰。眞公輔器也。己卯。爲生員壯元 。進士亦居第七名。庚辰。丁議政公憂。廬墓盡制。乙酉。以薦授泰陵參奉。丙戌登第。未分館。選入翰院爲檢閱。先是。朝廷用邊將議。設鎭於鹿屯島爲耕戍計。胡人猝入。屠略殆盡。宣祖愍之。出御題命從臣製進。公爲首。賜豹皮褥。大提學李山海亟稱公詩曰。此文衡手也。戊子秋。自奉敎遷承政院注書。己丑。還奉敎。六月。例陞成均館典籍。卽日出補衿川縣監。家貧親老 。急於便養故也。望筒入。宣廟使司謁問于政廳曰。韓某有老親乎。久乃點下。時議以公私輕重不當如是。論劾銓官。其見重於物論如此。秋。被湖堂選。十月。鄭汝立謀逆事發。獄詞蔓延。搢紳多被逮。公前在堂后。薦賊甥李震吉。至是爲憲府所論。罷繫獄。宣廟察其無情釋之。翌日。卽命敍。憲府復論執還收。公出寓廣津。足跡一不及城市。壬辰春。買田于原州栗枝村。以爲明農計。四月。倭寇逼京師。敍拜禮曹佐郞。移侍講院司書,江原道都事。尋陞禮曹正郞。公因路梗。不得赴行在。以朝命。在號召使李墍幕下爲從事。冬。原州牧使金悌甲守鴒原禦賊。城陷而死。朝廷以公方在其地。且有人望。卽拜牧使。令直赴任所。公至則弔死問生。招集流亡。賑活飢餓。褒節義戢獷猾。一境賴焉。乙未秋。以司憲府持平召。冬。遷侍講院弼善,知製敎。移司諫院正言。尋還弼善。丙申春。拜弘文館副校理兼弼善。以都體察使西厓柳相國從事。出巡兩西。公素爲西厓所器重。雖年位相遠。而稱許如平交。有大事。必與參決。時廟堂方以不次待公。嘗於一日政。擬副修撰。復擬嶺南伯。世所罕有也。丁酉。拜檢詳。旋陞舍人。遷副應敎,司諫院司諫。兼承文院參校。移輔德執義。以典翰兼輔德。秋陞拜同副承旨。公未經準職。於例不得擬。而特命擬。異數也。冬。序陞右承旨。時軍興多事。機務塡委。公爲兵房最久。贊襄弘多。建白依天朝設擺撥。邊遠駝啓 。一夕而至。上甚喜之。十二月。特拜京畿觀察使。進階嘉善。國事搶攘。賦役煩重。公能爲闊狹弛張之。甸服以蘇。戊戌冬。辭遞。時西厓爲群小所逐。一時淸流網打殆盡。欲竝及公。而捃摭無所得。公遂謝病歸。授大司成又辭。己亥。拜慶尙道觀察使 。公素惡鄭仁弘爲人。過其門不問。仁弘大憾恨。嗾其黨構罷之。庚子六月。敍拜兵曹參判。懿仁王后之喪。差山陵提調。以本兵務劇。難於兼察。遞授大護軍。冬兼同知春秋館事。辛丑。以同知中樞府事兼四道都體察副使。從李相國德馨巡嶺南。冬還拜兵曹參判。壬寅春。拜全羅道觀察使。癸卯秋。辭遞。授禮曹參判。國甫去亂。疆場多虞。上咨元帥於領議政李德馨。對曰。韓浚謙職秩雖卑。望實俱隆。今之專閫。無踰於此人者。九月。遂以公爲四道都元帥。國朝以來以嘉善爲元帥。惟公一人而已。上疏辭不允。大臣請加秩。有阻之者寢不施。冬兼五衛都摠府副摠管。尋拜弘文館副提學。甲辰春。拜吏曹參判。以親嫌遞授大護軍。兼同知義禁府事。夏拜副提學。秋以工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冬遷吏曹參判。乙巳。兼世子右副賓客。夏。視師于湖嶺 。時南徼無警。時相有不悅公在銓者。謂帥臣受命。不可不出巡。故有此行。將行。乞解本職不允。九月。召還 。累辭得遞。拜大司成。移副提學。尋特授戶曹判書。丙午。兩天使來頒詔。國儲罄竭而經費浩煩。公周旋調度。接應無闕事。亂後言善爲度支者。必推公爲首。丁未春。兼同知經筵事。夏拜大司憲。以親嫌遞授西樞。秋拜平安道觀察使。明年。貞敬寢疾 。公親執湯藥。衣不解者數月。及丁憂。哀毀踰禮。幾不能支。庚戌制終。付西衛。尋以漢城府判尹遷大司憲。辭就西樞。時光海政昏。諸奸擅國。會吏判缺。大臣首薦公。伺左腹者忌之。作飛語上聞。公見幾力求外。出爲咸鏡道觀察使。北關僻陋。不霑文敎。公至。以風化爲先。禮高年旌異行。延接士子。誘掖奬勵。設爲程式。親自提警。先刊家禮,小學。譯以方書。分授列邑。課其講讀。又行鄕飮酒,鄕射等禮。又選俚俗歌曲之可以感發人者。彙爲五倫。廣布閭巷。俾日夕歌詠之。於是庠序有絃誦之風。村野有揖讓之俗。使曠代天荒之域一變至此。寔公之化也。定,和兩陵碑毀於倭寇。歷數十年不克重建。公啓聞改立。聖祖潛龍舊宮亦爇於壬辰。而手植六松猶存。見者敬之。而在村閻中。民俗昵焉。牛馬而過者。睨而不知下。公以爲甚非廣敬之道。立石其前而記之 。使大小人過者皆下。前後按使以土俗勁悍。率嚴刑立威。公輕其笞杖。濟以寬和。民始有樂生之心。令行而禁止。壬子瓜滿。不許代。癸丑四月。徐羊甲之獄起。初。李爾瞻得罪宣廟。削黜不敍者九年。日夜覘伺。幸國家有變而逞其毒。丁未冬。宣廟久不豫。柳永慶倚附幽陰。植黨顓擅。爾瞻乃乘時謂永慶有易儲計。密遣門客。嗾鄭仁弘上疏劾永慶。宣廟震怒。竄仁弘及爾瞻。光海疑懼日深。宣廟大漸。慮光海不克保骨肉。爾瞻輩將甘心於永昌。手書遺敎曰。不穀忝位。負罪臣民。若隕淵谷。今忽得重病。夫修短有數。死生有命。晝夜之不能違。聖賢之所不免。夫復何言。但大君幼稚。未及見成長。以此耿耿耳。我不幸後人心難測。萬有邪說。願諸公愛護扶持。以此託之。外面書柳永慶,韓應寅,申欽,朴東亮,許筬,徐渻及公姓名。封置宮中。諸公皆莫之知也。及宣廟棄群臣。王大妃始下于賓廳。旋卽封入。光海嗣位。爾瞻驟柄用。思逞憾於先王。且知光海必欲除永昌。謂遺敎非先王御筆。乃大妃使內侍閔希騫僞造者。而七臣爲之保護。交構百端。熒惑中外。至是。劫盜朴應被繫。栲掠當死。爾瞻陰使人怵以禍福。使之從獄中上變。於是獄飜爲逆。遂殺國舅金悌男。囚永昌大君于江華。獻納柳活首劾名在遺敎者。竝削去仕版。及賊浹承爾瞻意旨。廣爲誣引。逮捕肆出。公亦自德原被收。是時禍焰甚酷。人不自保。被逮者或枝辭以自解。公素與悌男不相能。且有事可證。親戚皆勸之曰。宜以實置辭。公曰。死生命也。賣人以圖免。吾不爲也。競不從。光海親鞫問狀訖。卽放歸田里。是日出歸西湖德謹村莊。伯氏參議公。棄官杜門已數年矣。相對甚樂。日與子姪討閱經史。談說義理。暇則飮酒賦詩。從容閑適。人不知其爲處患難也。丙辰。光海欲遂廢大妃。追戮悌男屍四諸市。尹訒,鄭造,柳潚等復論公遠竄。丁巳。付處忠原。葺茅而居。不出戶庭。辛酉四月。量移驪州。八月。敍拜知中樞府事。爲五道都元帥。前此深河之役。兩帥沒於虜。遼,廣繼陷。寇勢益張。聲言東搶。恐喝日甚。廟堂謀擇帥。僉議皆以爲非公莫可。故有起廢之命。公拜疏辭不獲 。十二月。寇入義州 。至林畔而去。遂開府于中和。公雖不得已而起。事已無可爲者。癸亥三月。我聖上入纂大統。中宮殿下正位坤極。進拜公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西平府院君。五月。召還。時朝議以天朝有協討之命。則自上當親率三軍。故冬以公兼留都都體察使。公以后戚之家。不宜預軍國事。累辭不允。甲子正月。逆适稱兵。大駕南巡。二月适誅。駕還京師。公常扈衛焉。六月。兼知春秋館事。同修光海日記。力辭不拜。乙丑春。辭都體察。九月。兼五衛都摠府都摠管。未幾又辭遞。丁卯正月 。虜人潛師渡江。連陷城邑。公以扈衛大將。奉慈殿,中殿入江華。在途有朝旨。命公爲陪衛大將。從王世子分朝南下。至全州置撫軍司。公與李公元翼,申公欽同爲堂上。軍民恃以爲安。三月寇退。陪世子會行在。四月還京。公素患風痺。驅馳顚頓之餘 。病轉劇。上命大醫守視。問疾者相望於道。疾革。召子弟書啓草。若將爲國家論事者。而已不能言矣。以七月十七日辛巳。考終于會賢坊之寓第。訃聞。上震悼輟朝三日。遣中使尤喪事。賻贈有加。王世子卽日擧哀。比及葬。又臨弔。同朝士大夫莫不齎咨涕洟曰。國無祿矣 。其來哭者必甚哀。其葬也。會者三百餘人。卜九月十九日。窆于原州陰枝村先兆西五里許庚向之原。以檜山府夫人黃氏袝。公資稟忠厚。氣象光明。和而不流。寬而有制。加以儀表雄偉。擧止凝重。人望之知其爲盛德大器也。早受議政公庭訓。與參議公篤志爲學。日邁月征。尤好禮。凡吉凶有事。必稽于古。不爲俗習所拘。孝友敦睦。出於天性。議政公旣棄世。家益貧空。未幾 。參議公又遠謫。公獨侍大夫人。左右順適。以養志爲先。室妹未笄者數人。保護敎誨。婚嫁以時。雖在禍患顚沛兵戈喪亂之際。甘旨之供。溫凊之節。未嘗缺也。及公歷鎭雄藩。大夫人年登耆耋。參議公又屢守大邑。遞奉板輿。榮養備至。每壽席。大夫人輒却衆樂。使歌者歌感君恩曲。公推演其詞。撰續曲以進。嘗約朝中卿大夫有老親者作壽親禊。良辰吉日 。稱觴上壽。一日 。禮曹以聞。宣祖特賜樂以榮之。與參議公半世同居。通其貨財。棠棣之樂。至老彌篤。每痛仲氏早逝。姊妹多不壽。撫其所出不啻若己子。敎育成就。咸使得所。朝夕會食。長幼盈席。堂廡之內。和氣藹然。輕財重義。賑貧乏恤孤 寡。吉凶資助。各得其宜。族姻隣里皆歸仁焉。尤篤於追遠。常設同宗會。又爲之敍譜系。以示厚倫之本。淸州方井里。卽太尉公舊里也。參議公牧是州。公與之相議。築壇以祭。立石以記之。平居和易從容。未嘗有暴慢之容。鄙倍之言。事雖有甚可怒者。終不形色辭。侍側者或故激之。亦笑而不嗔。待人寬而恕。聞人過失輒不樂。或以橫逆相加。未嘗與之較。其逮自北關也。金吾郞希權奸意。窘辱百端。處之夷然。飭子弟毋敢有怨言。後有問其名者則曰。已忘之矣。平生無所嗜好。於一切世味。泊如也。位至卿相。家如寒士 。領敦寧五年。宅不廣一架。田不置一區。廏無粟馬。坐客無重席。八路無一口奴婢。此雖在公爲細行。而亦足爲鳳凰之一毛也。自在韋布。人以鼎軸期公。而世路崎嶥。屢起屢躓。先公進者自視歉然。及公貴。多以祖宗朝韓上黨故事爲言者。領相李公元翼雅知公志。不枚卜。公聞之喜曰。完平眞可謂愛人以德矣。位望愈隆而操守愈確。未嘗以一言半辭及於時政。避紛華勢利。若將浼焉。此則古人之所難。而公裕如焉。少不喜榮進。晩節築小齋於松楸下。顏之曰歸來。領相申公欽寔記其扁。雖遭世多故 。不克退閑。而雅志固可見也。與李白沙恒福,李漢陰德馨爲莫逆交。及癸丑之禍。一時俱被罪。漢陰待罪龍津。憂憤而卒。白沙竄配北靑。歿於謫所。公皆以詩哭之。語意悲切。聞者隕淚。爾瞻惡之。益謀所以置公死者。而公終不恤也。爲文。平鋪典瞻 。不事彫刻。詩亦優游不迫。發於情性。有古詩人之風。記性過人。自學語以後耳目所覩記。歷歷向人道。羅列貫穿如昨日事。通曉國家典故。祖宗以來文獻儀軌。沿革損益。若視諸掌。朝廷凡有所疑。必咨公以決焉。所爲詩文。不自收錄。又爲兵燹所失 。今有亂稿若干卷藏於家。夫人昌原望族。禮曹佐郞贈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義禁府事珹之女也。生十四歲而歸于公。溫柔嘉順 。端莊淑哲。克修婦道。配君子無違德。閨門之內。井井有法。娣姒族屬。咸稱其賢。甲午八月。卒于原州之寓衙。享年僅三十四。累贈至貞夫人。癸亥。進封檜山府夫人。擧二男四女。中宮殿下。於次爲第六。載誕元良。尊居儲貳。次曰鳳林大君諱。次曰㴭。曰滾。皆幼。男長曰會一。通政府使。有二男三女。男以成,以平。女適士人申翊隆,鄭何。一幼。季曰昭一。明秀而夭 。女長適宗簿寺正李幼淵。生一女。次適侍講院弼善呂爾徵。次適禮曹參議鄭百昌。生二男一女。側室有二女許通。李煥,宗室珍原副守世完其壻也。經世之與公論心。蓋四十年有餘矣。臭味聲氣。無一不相投合。始終如一日。其所以相期待勉勵者。在於道義。而不在於名利宦達之間也。府使公纍然在憂服之中告余曰。知先君者宜莫如公。願得公筆。請所以易其名者。乃以參議公所撰次家傳來示。其論述德行。無一字溢美。皆余所親知而深嘆者。遂依其文而歷敍之如右。以備太史氏擇焉。具官鄭經世。 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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