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3. 1. 7. 01:52
■ 민영익(閔泳翊)
1860(철종 11)∼1914. 조선 말기의 문신·개화사상가· 예술인.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우홍(遇鴻)·자상(子相), 호는 운미(芸楣)· 죽미(竹楣)· 원정(園丁)· 천심죽재(千尋竹齋), 사호(賜號)는 예정(禮庭)이며, 아호·당호 40여 개를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태호(台鎬)이며,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
187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 참의가 되었으며, 개화당 인사들이 그의 사랑에 자주 출입하였다.
1881년 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經理統理機務衙門軍務司堂上), 별기군(別技軍)의 교련소당상으로, 1882년 7월 임오군란 이전까지 윤웅렬(尹雄烈) 등과 별기군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자였다.
행서에 능하였으며, 많은 묵화 중 묵죽도(墨竹圖)·석죽도(石竹圖)가 전하며, 필세와 화품이 뛰어났다.
인영(印影)을 즐겨, 중국 문인화의 대가이며 전각(篆刻)으로 유명한 오창석(吳昌碩)과 30년의 교류 중 300여 개의 인장을 받아 썼으며, 그 가운데 213개가 『전황당인보(田黃堂印譜)』와 『오창석인보(吳昌碩印譜)』에서 확인된다.
▲로근 묵란도(露根 墨蘭圖)
●로근 묵란도(露根墨蘭圖)
민영익은 구한말 수구파의 대표적 인물로, 파란 많은 생애를 보낸 정치가인 동시에 묵란과 묵죽을 잘 그린 문인화의 명수(名手)로도 유명하다. 그는 45세때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당대(當代)의 명가(名家) 오창석(吳昌碩, 1844∼1927) 등과 친교하면서 한묵(翰墨)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난 그림은 당시 유행하던 대원군(大院君)의 석파란(石坡蘭)과는 달리, 짙은 먹을 써서 난 잎의 끝을 뭉툭하게 뽑아 내는 것이 가장 특징적이다. 이 작품은 특히 노근란(露根蘭)이라 하여 뿌리가 드러난 난초를 크게 두, 세무더기로 나누어 화면에 적당히 배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라를 잃으면 난을 그리되 뿌리가 묻혀 있어야 할땅은 그리지 않는다는 중국 남송말(南宋末)의 유민화가(遺民畵家) 정사초(鄭思肖, 1241∼1318)의 고사(故事)에서 따온 것으로, 당시 나라를 잃은 민영익의심경이 그대로 토로되어 있다.
화면 왼쪽 아래에 찍혀 있는 화가 자신의 백문방인(白文方印) 민영익인(閔泳翊印)」 외에도 화면 곳곳에 안중식,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이도영(李道榮, 1884∼1933),최린(崔麟, 1878∼1950以後)의 후기찬문(後記讚文)이 빽빽하게 씌어 있다.
▲로엽풍지도(芸楣 閔泳翊 露葉 風枝圖)
●로엽풍지도(露葉風枝圖)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자 중국으로 피신했던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은 그후에도 중국으로 왕래를거듭하다가 결국 망명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중국의 많은 서화가들과 깊은 교우를 하였으며, 그들 사이에서 운미의 묵란(墨蘭)과 묵죽(墨竹)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96년 이 작품에 제시(題詩)를 쓴 포화(蒲華, 1834∼1911) 역시 운미보다 한 세대 위의 연배지만 운미와는 친분이 깊었던 중국인 화가로, 운미의 그림 여러 폭에 제발(題跋)을 남겼다.
화면 중앙에 피어난 난초 한 포기와 그 위쪽에 쓰여진 초서체(草書體)의 제시가 운치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담묵으로 그린 꽃잎과 농묵점(濃墨點)을 찍어 나타낸 꽃술, 비수(肥瘦)의 변화가 거의 없이 고른 난잎의 흐름에서 운미난(芸楣蘭)의 특징을 쉽게 찾아볼 수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