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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02.6.26일 어머니께서 시골집에서 사고를 당하셔 진주경상대학 병원에서 2차에걸친 뇌 수술을 하시고 여의 도 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는 과정을 메모해둔 기록을 정리하여 금년 산수년(팔순) 기념으로 연재해 온 것을 취합한 것입니다.
(1회)
우리 어머니
2002년 6월26일(수)
아침에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에는 항시 긴장을 하고 가슴을 조여왔다. .
혹시 시골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 한테 무슨 변고라도 생기지 않았나 해서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우리집 아침식사는 언제나 이른 아침에 한다. 아마 6시30에서7시 이전에 아침식사를 하는 것 같다.
8시경 출근을 하려고 아파트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있는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연관 문을 잡은 손을 멈추고 머뭇거리면서 집사람의 통화에 귀를 곤두세워 엿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앞집 신기동 형수한테서 걸려온 전화 이다.
어머니가 새사맆 세면 길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쳐 119구급차를 불러서 진주 제일병원으로 갈 참 이라는 연락전화였다.
신기동 형수의 말에 의하면 머리가 조금 아프다고 하시기는해도 지금 상태로 봐서는 별 것 아닌 것 같으니 진주 병원에 가서 진찰 해보고 연락하겠다는 것 이였다..
그때 어머니는 넘어지신 후 구토를 한번 하셨고 병원 갈 소지품은 손수 챙기셨다고 들었다.
나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 앉았다.
병원 수속등 빨리 진주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뿐 병원의 진찰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집사람 보고는 형제들에게는 내가 병원에 가서 결과 보고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바로 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김포 공항으로 향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용케도 9시30분 출발 진주 가는 아시아나 항공 표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 비행기 표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좌석표로 기억된다.
마음속으로 “조상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몇 번이나 뇌까렸는지 모른다.
특별히 믿는 종교도 없고 조상 님 제사 잘 모시고 윗 어른 공경하고 가족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유교사상이 배여 있는 나는 급할 때는 부처님 예수님 제쳐놓고 조상님 먼저 찾고 부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급 할 때는 마음속으로 저 세상에 계시는 아버지와 할머니를 제일 많이 찾고 불렀다고나 할까? …..
제일병원 응급실입구에서 이곳 병원에서 일하고 계시는 외 오촌 호야 아저씨를 만났다.
호야 아저씨의 안내로 응급실에서 어머니를 뵈올 때는 앞집 재구 형 내외가 어머니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고 어머니는 지치고 피곤하신 기색이시긴 해도 말씀도 잘하셔 안도의 한숨을 놓기도 하였다.
호야 아저씨의 안내로 이미 촬영해 둔 CT 사진 봉투를 찾아 들고 신경외과 과장 실로 갔다 ,
신경외과 과장은 CT사진을 내가 도착하기 직전에 면밀히 검토하였던 터라 여유 있는 웃음을 곁들여 가면서 “넘어진 충격으로 오른쪽 머리 정맥이 터져 출혈이 있기는 해도 정도가 심하지 않으니 약물로 치료하면 될 것 같고 좀더 지켜보자”면서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하면서 안심을 시켰다.
아버지가 환갑도 되기 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대를 이어오는 절간 같은 종가 집 큰 집을 혼자 지키고 살아가시면서 명절 때는 손수 가꾸어 기른 나무새와 먹거리를 이삿짐 못지 않게 싸와서는 우리 형제들에게 봉지 봉지 골고루 나누어 주셨다.
그 덕에 큰 며느리인 집 사람은 물류센타의 배송자 못지 않게 봉지 싸고 분배하는 데는 이력이 나있다.
그런 연유가 아니더라도 우리 형제들은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서로 서로 연락을 하고 일사 분란하게 내일 같이 나서고 서로 도운다.
특히 어머니의 일에 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고 예민 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는 애도 많이 먹였지만 지금은 광고회사인 ㈜아트콤의 사장인 진우(규탁)동생 셋째가 효자 중에 효자이고 집안의 큰 일은 도맡아 한다.
무슨 일이던 어머님의 말씀이나 의견에는 무조건 “예스”다.
한 예로 어머니가 자주 다니시는 고향마을 가까이 있는 화정암 주지 보살이 절을 단장하면서 불상 목각좌대 장만하는 건으로 돈 걱정을 하자 어머니는 형제들 중에 그래도 여유가 있어 보이는 셋째와 걱정 반 의중 반으로 상의를 하시자 동생은 첫마디로 “어머니 뜻대로 하십시오 제가 지원하겠습니다 “ 하고 거금을 절 불사에 내어 놓기도 하였다.
셋째 진우는 자기 복 받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절과 특별한 개인적인 연고가 있어서도 아니고 오직 어머니의 말씀이기에 어머니가 기뻐하시고 좋아하실 것이기에 돈 많은 재벌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을 우리 가족 모두는 다 잘 알고 기억하고 있다.
돈 있고 돈 많다고 다 돈 잘쓰는 것은 아니다. 쓸수 있는 도량과 배포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내것을 챙기면 한푼도 아쉽고 쓸것이 없다. 그래서 옛말에도 아흔 아홉섬 가진 사람이 한섬 가진 것 넘본다고 하였다. 우리의 주변에는 그 몇 푼 갖고 온갖 거만과 추태는 다 부리고 스트레스 주는 졸부들이 너무 많다.
어머니의 사고 전일 까지만 해도 나는 거의 매일 시골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께 전화를 올렸고 다른 동생들도 마찬가지 였다.
어머니가 밖에서 일하시다 전화 받으러 급히 오시다가 넘어지시기라도 할까봐 우리 형제들은 시골전화는 시간을 정해 놓고 하자는 둥, 서로 돌아가면서 하자는 둥 하다가 무선 전화기도 안되어 핸드폰을 마련해 드리기도 하였다.
12시30분 출발 대한항공편으로 규인이 동생 내외와 진우 동생이 내려왔고 14시에는 규석 동생이 고속버스 편으로 도착하였다. 21시에는 천안에서 규옥이 동생이 도착하였다. 내가 어머니 상태를 지켜보고 연락하겠다고 하였으나 모두가 다 내려 왔다.
규옥이 동생이 도착한 무렵의 어머니의 상태는 사람을 알아보고 말씀은 하시기는 해도 상당히 힘들어 하셨고 머리가 많이 아프신 것 같았다.
우리형제들은 병원 현관의 환자대기실 벤치에 모여 앉아 이런 저런 향후 대책을 논의 하였다.
하룻밤 넘겨보고 별다른 병세가 없으면 민간 구급차 편으로 서울 병원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우고 규옥이 여동생이 병실에 남아 어머니의 경과를 지켜보면서 하룻밤 새기로 하였다.
자정 무렵에 진우 동생이 사천공항에서 빌린 렌터카 편으로 규인이 동생 부부 와 진우 동생 나는 시골 집으로 들어 갔다.
진우 동생과 나는 시골집에서 자고 규인이 동생내외는 승용차로 10분거리 인 옥종 처갓집에 가서 자고 일찍 집으로 와 우리와 함께 진주 병원으로 나가기로 하였다.
그런 후 나는 큰 방에서 진우 동생은 작은 방에서 불을 크고 잠자리에 들었다.
(2회)
2002.6.27(목)
새벽4시 내가 자고 있는 큰방의 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겨우 잠이든 순간이다. 나는 불현듯 스쳐가는 예감이 어머니 에게 무슨 탈이 있고나 ! 하면서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오빠 어머니가 갑자기 의식을 잃어 지금 경상대학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아야 하니 빨리 나와요 빨리.” 규옥이 동생이 다급한 몇 마디를 남기고는 끊었다. 얼마나 긴장되고 떨리던지 전등불을 켜는 스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더듬 거렸다.
옆방에서 자던 진우 동생도 전화벨 소리를 듣고 깨우기도 전에 큰 방으로 달려 왔고, 옥종 처갓댁에 가면서 자동차를 가져간 규인이 핸드폰으로 수 없이 신호를 보내는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자면서 전화기를 꺼 놓은 것 이였다.
어머니가 옥종 사돈댁 전화번호를 적어 놓은 것이 있을 것 같아 어머니 메모 수첩을 급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뒤적여 찾아 보았으나 긴장한 탓으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하는 수 없이 서울로 집사람 에게 전화를 걸어 신길동 조카 아이들에게 연락하여 규인이 동생이 차 가지고 빨리 오도록 연락을 취하라고 해 놓고는 진우 동생과 나는 발을 둥둥 굴리기만 했다.
그 순간부터 한마디로 우리 집은 완전히 비상사태이고 비상이 걸린 것이다.
우리가 경상대 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것은 5시가 되기 몇분 전이였다.
어머니는 수술을 받기 위해 머리를 깎고 계셨다.
규옥이 동생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돈지갑을 비롯한 모두를 제일 병원에 팽개쳐 둔 채 이곳 병원으로 어머니를 옮겼고 우리를 보자 다소 안심을 하면서도 계속 울먹이고 있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가슴 조이면서 울었다.
평소에 별로 감정을 들어내지 않는 규인이 동생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있고 붉게 충열되어 있었다,
응급실 당직 인턴이 와서 오늘 신경외과 당직 의사는 황수연 교수라고 하고 황교수의 집도로 7시에 수술 들어 갈 것이라 하면서 빨리 보호자 수술동의서를 써달라고 하고는 자리를 떴다.
나는 동생들을 모아놓고” 이제부터 모든 것은 운명이다. 수술이 잘되건 못되건 어머니의 운명이고 우리의 운명이다. 지금은 어머니가 바로 수술 들어 가야 한다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당직의사인 황교수에게 희망을 걸어보자.그리고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원망하지 말자” 라고 하였더니 동생들도 모두 동의해 주었다.
조금만 더 시간적 여유가 이었더라면 좀더 수술경험이 많은 의사나 병원을 알아 보기라도 했을터인데….. 하는 아쉬움도 컸었다.
예정대로 7시에 어머니가 수술실로 들어 가신후 11:시에 수술 완료등에 불이 들어 왔다.
11시30분에는 바로 수술결과에 대한 MRI 촬영이 실시 되었다.
작년 봄 강원도 한계령 계곡에서 타고 다니던 프린스 자동차가 추락 전소되고 진우동생의 주선으로 새로 구입한 소나타 승용차 편으로 집사람과 선호 선희 규석이 동생내외가 어머니 수술이 한창중인 9시30분 경에 병원에 도착하였다.
이 차는 어머니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병원 주차장에 대기 시켜놓고 보호자 소지품 보관 창고로 활용하였다.
선희는 오후4시 고속버스 편으로 서울 올라가고, 규석이 동생과 제수씨는 저녁 8시 비행기 편으로 서울로 올라갔다.
밤 10시 경에는 부산에서 태열 태영 당숙부님 내외분과 삼천포 당숙모와 순천종수, 서울에서 내려온 아트콤 이정기 고문이 병원에 당도하였다.
많은 식구들이 병원에서 모두 대기 할 수도 없고 하여 진우 동생이 진주 문화예술회관 건너편 남강가에 위치한 동방호텔에 방을 잡았다고 연락이 왔다.
(3회)
2002.6.28(금)
무슨 일이 일어나서 아는 사람이 없으면 가장 답답한 곳이 병원과 경찰서다. 우리 모두 다들 경험한 바가 있을 것이다.
환자가 넘쳐나는 종합병원 같은데서는 교수 특진이라도 받으려면 어떤 곳은 3개월은 기다려야 한다.
실제로 경험한 바가 있지만 신촌 세브란스 병원 같은 곳은 응급실 들어가는데 복도에서 3-4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는 날도 있다. 언젠가 성질이 좀 급한 진우동생이 머리가 아파 신촌세브란스 응급실로 간다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2시간이 되어도 응급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고 병원관계자에게 “환자가 머리 아파 다 죽어간다” 고 하면서 별 애원을 다해도 통하지 않자 진우동생은 신경질만 잔뜩 내다가 아무 말 없이 병원 밖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규인이 동생과 나는 찾는다고 애만 먹고 응급진료도 못 받은 경우도 있었다.
시급을 다투는 환자라도 별도리가 없는 것이 유명 종합병원인지 모른다. . 솔직히 말해 병원에 아는 사람 없고 줄 댈 수 없으면 수술 한번 못 받아 보고 죽어야 할 것 같다.
옛말에 “무전 유죄 유전 무죄”라는 말은 있는데 이 경우는 무어라 말해야 좋을까?
어머니의 경우도 갑자기 당한 일이라 경상대학 병원에 아는 사람이 없어 너무 답답하였다..
재경 산청군 향우회 회장을 맡고 있는 고종 하만장 형에게 연락을 하였더니 수소문 끝에 산청군 출신 수간호사 한 분을 소개해 주셨다.. 그 때는 정말 구세주를 만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08시30분에 중환자 실에 계시는 어머니를 면회하러 갔더니 중환자실 담당 의사 강선생이 어제 밤에 구토를 하시고 머리에 피가 고여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바로 재수술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정말 억척이 무너지는 소리다.
나는 강선생보고 “ 오늘 수술도 전신마취 하고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이였다.
젊은 사람도 마취 한번하고 나면 무척 힘들고 후유증이 큰데 75세 노인네가 이틀에 2번이나 마취를 한다는 것은 너무 큰 고통과 시련이고 희망보다는 절망이 앞을 가로 막았다.
수술을 집도 한 황교수는 어제 수술 한 후 수술부위를 봉합 하지 않아 크게 힘들지도 않고 간단하다는 말로 위안을 시키려 하였지만…., 뇌 수술의 경우에는 터진 혈관을 찾기 위해 뇌를 물로 씻는다고 하였다. 그런 관계로 뇌압이 생겨 뇌의 부위가 빠질 때까지 봉합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머니의 경우는 수술부위 근육혈관의 피가 안으로 흘러들어가 문제가 된 것이라고 하였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재 수술이였다..
동분서주 하고 뛰어 다니던 진우동생이 어머니가 2차 수술을 받고 계시는 중에 병원장과 연결이 되는 줄을 찾았다.
10시경 동생과 나는 병원장실을 방문하여 병원장을 만났고 병원장은 비서 겸 신경외과 과장인 박인성 교수를 어머니 수술에 즉시 투입시켰다..
2002.6.29(토)
중환자실의 면회는 엄격하고 시간이 한정적이다.
오전은 8시30분부터 9시30분까지 1시간이고 오후는 6시30분부터 7시30분 까지 1시간 2번 허용되었다. 최근에는 오전 면회시간이 11시에서 12시로 변경된 모양이다.
모든 일을 전폐하고 병원의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에 모여 있는 우리 가족은 면회 하는 시간만 기다리면서 온 종일 줄치고 앉아 있었다.
8시30분 우리는 소독된 까운을 돌려입고 번갈아가면서 어머니를 면회 하였다.
어머니 얼굴이나 보고 숨소리만 듣는 정도 였다.
어머니는 온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영양공급용 호스와 몇가지 약이 혼합하여 투여되는 주사 바늘을 손목에 꽂으시고 눈을 감고 가쁜 숨만 쉬고 계셨다.
담당 간호사와 중환자실 담당의사인 강선생의 말에 의하면 맥박이 빠르고 심장이 부은 것 같고 물이 차 있으나 위험 수치는 아니라고 하면서 정밀검사를 해 보자고 하였다.
오늘은 월드컵 축구경기 마지막 전날로 한국과 터키와 4강전 경기가 있었고 우리는 3:2로 졌다.
오전 10시 30분경에는 서해안 연평도 해상에서 NLL(북방해상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쾌속정과 우리측 함정간에 교전이 있었다. 약 30분간 계속된 교전이지만 북한 함정 1대가 침몰되고 우리 측은 윤영하 소령, 황도현중사, 조천형중사, 한상국중사, 서허운중사,박동혁병장 6명이 전사 하고 19명이 부상을 입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12시20분경 규인동생 내외 진우동생 내외와 원준이 집사람은 화정암 절에서 어머니 쾌유를 비는 불공을 드리고 시골 집에 들여 이부자리 등 몇 가지를 챙겨 나왔다.
14시 30분 경에는 시골 이웃 김 병권 군과 김시연씨 문주씨 부인이 다녀 갔고 20시경에는 진우동생 친구 권영균, 고윤진 군과 화정암 주지 보살이 병원에 당도 하였다.
저녁에는 작은 어머니와 같이 병원에 온 경님(남옥)이 동생 이 아구찜요리 저녁을 사 모두가 맛있게 먹었다. 그때 프랑스에 있는 희정이가 8월 달에 현지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이야기도 있었던 것 같다. 저녁을 먹으면서 TV로 한국대 터키 축구경기를 관람하기도 하다.
혹시 급한 비상연락이라도 있을 것을 대비하여 규석이 동생이 자청하여 병원에 남아 비상연락 당번을 서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식구들은 모두 동방호텔 631호로 이동 하였다. 그때가 22시30분 경이다.
(4회)
2002.7.1(월)
어제 밤 11시 규옥이 동생이 사정사정하여 중환자실에 들어가서 어머니를 뵈올 때는 경끼를 하셔 약물 투입을 하고 계셨다고 들었다. 오늘 08시30분 면회 시에는 눈은 뜨지는 않으셨지만 손을 잡고 말을 다 알아들으시는 듯 했다.
9시경 옥종에 사시는 어머니 이종 하호순 이모님이 전화를 주셨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경상대학 병원에 오셔서 뇌수술로 입원한 “정금순 환자”를 찾았지만 병원 측에서는 그런 환자는 없다고 하여 돌아 가셨다고 하였다. 어머니의 옛날 소녀 시절의 이름이 “정 점무” 가 아닌 “정 금순” 이란 것도 그때 사 알았다.
14시20분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외종 정석희 형 내외분이 병원에 당도 하셔 보호자들이 고생한다고 버섯전골 저녁식사를 사주시고 동방호텔에서 같이 잤다.
2002.7.2(화)
면회시간이 되기 전인 5시50경에는 규옥이 동생이 중환자실에 들려 어머니 주무시는 모습을 보고 왔고, 8시30분 면회시간에는 석희형님 내외분과 어머니를 보러 면회 갔다.
석희형님이 오셨다고 하니 한번씩 눈을 뜨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것 같았다.. 그때는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눈 뜨심으로 생각된다.
밖에는 이슬비가 내리고, 진우동생은 12시 비행기로 내려오고 규석이는 13시30분 비행기 로 서울로 올라 갔다.
화산골프장 박사장이 병원을 방문하는 때를 맞추어 서울에서 내려온 진우동생이 병원안으로 들어설 때는 바지 뒷 단이 찢어져 속옷과 속 살이 다 들어나 보여서 병원현관에 모여있던 가족들이 모두 한바탕 웃기도 했다.
그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가족이 어머니 한번 살려보자는 심정으로 정신 없이 뛰어 다녔다.
14시에는 진우동생과 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는 화산골프장 박 순백 사장이 병원장을 만나 병원 측 지원을 부탁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오셨다.
이곳 병원장 부인은 박사장 여동생과 경남여고 동기 동창이고 집안 끼리 서로 잘아는 사이라 들었다.
박사장이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내려와 병원장을 만나 주신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이 되고 빽(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병원장이 특별관리하는 VIP 환자 대우를 받게 된 것 이다.
병원장 비서겸 신경외과 과장인 박인성교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중환자실에 들려 어머니 상태를 체크하고 갔고 우리가족 특히 규옥이 동생은 정해진 면회시간 외에도 수시로 중환자실을 드나들면서 어머니 상태를 확인 하는 특권 비슷한 것도 누렸다.
나는 지금도 박사장에게 무한의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 진우 동생이 잘하고 있을 터이지만……..
7월3일 에는 지금 청와대 국장이로 근무하고 있는 진우동생 친구 한명선씨가 병원을 댜녀갔고 7월4일에는 어머니가 기운이 없으신지 눈을 거의 뜨지 않으셔서 우리를 무척 애태우게 하고 답답하게 하였다. 이날 점심때는 처녀 시절에 외갓집에 오셔서 규인이 동생을 엎어 키우고 우리 형제들을 돌봐주신 고종 필둘누님이 도시락을 푸짐하게 싸오셔서 오래간만에 병원에 모여 있는 식구들이 회식 한번 잘 하기도 하였다.
7월5일에는 어머니 경과가 좋지 않아 산소 호흡기를 다시 꽂았고,
7월6일은 어머니 기력이 많이 떨어지고 잘 잡으려 하시지도 않으려 하였다. 이날은 재종 재백이 부부와 후경이 조카,정구 도자 덕자 명도 등 재종 동생들이 병원을 다녀 갔고, 오전 10시경에 는 원준이가 미국간다고 인천공항에서 전화를 하였다.
7월 7일은 KBS서동식 차장과 장터골 당고종 이현숙, 혜숙, 혜자,행자, 행숙이 자매가 병원을 다녀 가고, 오후에는 어머니 가슴에 차있는 가래를 제거하기 위해 목에 호스투입구 수술을 하였다.
1983년 봄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저승에서 이 기막히는 현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애태워 하시면서 우리들을 지켜 보고 계실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뭉클해 진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한번 더듬어보자
아버지에 대해서는 시간이 나는 대로 다음에 별도로 한번 적어 보고 싶다.
모르기는 해도 경님이를 비롯한 몇몇 동생들은 아버지에 대해 섭섭했던 감정이 지금도 남아 있고 따뜻한 정을 아쉬워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아버지는 확신하는 철학이 계셨던 교육자이시라고 본다.
나는 학창시절에 방학 때가 되면 꼼짝없이 아버지에게 발목이 잡혀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었다.
7.8월 여름 방학 때는 들녘에는 물논에 푸른 벼가 자라는 시기와 맞물린다.
벼가 자라는 시기에 논에 물이 반나절이라도 빠져 마르면 벼는 뜨거운 태양 볕에 말라 비틀어지고 가을 수확에 현격한 차이가 난다,
마을 뒷산 원천에서 도랑을 타고 흐르는 물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논으로 흩어져 흘러 들어 간다. 웟 논에서는 조금이라도 물을 더 확보하기 위해 보를 만들고 재갈 틈으로 새는 물도 아까워 황토를 처바른다. 한마디로 물샐틈없게 만들어버린다.
아버지는 방학이 되어 대청마루에서 큰절로 인사 올리는 내보고 “너는 방학동안 논에 물빠지는지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2번 둘러보거라 “ 는 엄한 당부 였다. 하루에 논 2번 둘러 보라는 아버지 말씀 따르고 임무 수행하려면 가까운 이웃동네 친구 만나는 것도 부담이 되고, “여름에 친구들과 어울려 산에 가지마라 물가에 가지마라” 하는 별다른 잔소리가 필요 없는 것이였다.
요즈음 서울과 같은 도시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내가 하는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가고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 먹고 사는 쌀이 어떤 과정을 겪어서 생산이 되는지도 잘 모를 것이다.
논을 둘러 보려면 논두렁에 심어 둔 콩잎을 헤집고 다녀야 한다. 그때는 요즈음 같이 농약도 많이 치지 않아서 그런지 논두렁 콩잎 밑에는 왜 그리도 뱀이 많았는지….?
오전에 논물 상태 점검 차 논 둘러 보러 갔다가 마을 앞 들녘 덕신들 큰 도가리 논 중간지점에서 콩잎에 몸을 도사리고 있는 뱀을 밟고는 혼비백산하고 뒤돌아 나와서는 논을 둘러 보지 않았었다.
뱀 생각에 오후에도 논을 둘러 보지 않았었다.
우리 형제들의 모교인 대야 초등학교 교장이신 아버지는 학교에서 퇴근하시면 언제나 논을 둘러보고 오셨다. 어떤 날은 논에서 잡은 우렁(논고동)을 몇 마리 손에 들고 집에 들어 오실 때도 있었다.
이날은 집 마당에 들어 서시면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너 오늘 논 둘러 보았어?” “예” “ 그런데 덕신들 큰도가리 논에 물이 다 빠져 있어?” 단단히 혼이 났다. 옆에 계신 할머니가 “뱀 밟아 뒤돌아 왔다 안카나? 하고 변명해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더 혼이 났을 것이다.
내가 밟은 뱀이 논에 구멍을 내어 물이 다 빠져 버린 것 이다.
동생들에게는 그런 주문을 하시지 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5회)
2002.7.8(월)
어제밤 꿈에 시골집 사랑채가 무너지는 꿈을 꾸었다.
무너진 사랑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흰옷을 입고 계셨다.
시골집 사랑채는 6.25동란 직전에 화재로 불타서 임시 방편으로 셋째 종조부님(모단할아버지)이 논가에 있는 버드나무를 베어다 기둥을 세우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재목을 모아다 지은 것이라고 전해 들었다.
50여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고 보니 기둥은 썩어서 받쳐 고이고 함석은 낡아 비가 새기 일보 직전이라 태풍만 심하게 불어도 걱정만 하고 여유 돈이 없어 제대로 개보수를 못하고 지금 까지 방치해 왔다.
여러 가지 불길한 예감도 들고 하여 종일 긴장하고 조심한 하루다.
혹시 비워둔 시골집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집사람 규인이 동생과 나는 시골집으로 들어갔다.
사랑채 문짝이 떨어져 땅바닥에 내동댕이 처져있고 창호지는 다 떨어져 나가고 문 살은 부서져 엉망이 되어 있었다. 혹시 도둑이 들었나 하고 방안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그런 흔적 없었다.
대물림하여 내려오는 시골집에는 옛날에 쓰든 가구나 병풍 가재도구와 같은 세간사리 골동품이 몇 점 있기 마련인데 집을 비워두면 고물장수들이 다 집어가고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간신히 남아 있는 할머니가 시집오실 때 가져오신 반닫이와 맷돌이 있는데 그것마저 집어 갈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철사로 문 살을 얽어 세우고 창호지를 발라 문을 달고 방 보일러 드럼통이 바닥나 있어 석유 한드럼을 112,000원 주고 채워놓고 청소 대충 한 후에 병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배에는 가스가 차고 가래가 끌어 올라 호흡을 제대로 못 하시고 계셨다.
20시경에는 신경외과 박교수와 수술을 집도한 황교수가 이빈후과 가슴 전문의를 데리고 중환자실에 와서 어머니 상태를 세밀히 관찰하고 가래제거 문제를 집중적으로 협의 하였다. 폐렴증세가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
어머니와 같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11살 되는 성호군이 병원균에 감염 되어 죽었다.
병원 1층 약국 앞에서 영정을 가슴에 안고 보호자들이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중환자 실 통로 문을 막고 죽은 성호 어머니의 “내 아들 살려내라” 는 애절하고 절규에 가까운 통곡으로부터 시작된 농성이 규옥이 동생을 비롯한 환자 보호자들의 거센 항의로 아랫 층으로 내려온 것 이다.
규옥이 동생이 “생사가 오락 가락 하는 환자가 있는 중환자실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농성을 할려면 딴 데 가서 하소” 했다가 “네가 뭐냐? 죽은 내 자식 살려 낼래” 하고 거칠게 나오는 바람에 줄 행랑을 쳤고 하마터면 얻어 맞을 뻔 하기도 하였다.
성호는 초등학교 4학년 11살 짜리 소년이었다. 동네 비탈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다가 전신주에 부딪쳐 장파열이 되었고 경상대학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경과가 좋았으나 중환자실에서 MRSA(병원균)에 감염되어 갑자기 열이 오르고 혼수상태에 빠진 후 새벽녘에 숨을 거두었다고 하였다.
중환자 실은 한마디로 잡다한 병균이 득실거리는 곳이다.
위암으로 배째고 수술한 사람, 교통사고로 다리 부러져 수술한 사람, 뇌출혈로 머리 수술한 사람, 등등 별별 환자가 수술하고는 중환자 실에 모여 있다.
한마디로 저승의 문턱이나 다름 없는 곳이기도 하다.
하루에도 몇 사람이 죽어 지하 영안실 냉동창고로 내려 가는 날도 있다.
병 고치러 왔다가 잘못하면 항생제가 듣지 않는 신종 바이러스인 MRSA 같은 균에 감염되면 속수 무책으로 죽어야 하는 곳이 중환자실 이기도 하다.
어머니 옆 침대에는 건장한 20대 청년이 칼에 찔려 산소 마스크를 쓰고 눈 한번 뜨지도 않고 가쁜 숨 만 쉬고 있었다. 팔에는 이상 요란한 문신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조폭의 행동대장쯤 되어 보이기도 하고 싸움판에서 생긴 사고 였던 것 같았다.
우리가 어머니를 면회 할 때는 언제나 노모가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까지 자식 때문에 속 깨나 썩고 살아온 것 같아 보였다.
삶이란 무엇이고, 생명이란 무엇인가?
지구가 수 억만년 전 어느 싯 점에 생성된 것이라면 언젠가는 소멸 될 것이 아닌가?
우리의 인류는 영원히 이 지구에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어머니의 생명 줄을 타고 태어났다면 그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것 아닌가?
11살배기 성호의 어린 죽음은 무엇이고,
어머니의 생사를 오락 가락 하는 예기치 못한 사고와 모두를 전폐하고 어머니의 쾌유를 애타게 기다리면서 남아있는 우리의 이 현실은 다 무엇인가?
수없이 밀려오는 번뇌 속에서도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과 바램은 어머니가 조금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옛날의 모습과 위치로 돌아와 주면 좋겠다는 것 뿐이다
물리학에는 탄성의 원리라는 것이 있다.
고무줄이나 용수철을 잡아 당겼다가 놓으면 원래의 제 위치로 돌아가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호주에서는 원주민들이 사냥을 할 때 사용했다는 부베랑도 잘만 던지면 정확하게 제 위치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 탄성의 현상이 사람에게는 제대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마음을 바꾸어 원래의 제자리로 돌아 오면 만사가 해결 될 것인데도 그것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우리는 조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원래의 상태로만 돌아 올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젖먹이 어린 손주 둘이나 두고 집 나간 며느리를 기다리는 늙고 힘없고 허리 굽은 시어머니의 애타는 심정이 그러할 터이고,
주식투자에 있는 돈 없는 돈 몽땅 집어넣었다가 다 날려 버린 40대 중반에 명퇴한 무일푼 남정네가 그러 할 터이고,
지금은 어머니의 회복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심정이 그러하다.
모두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 오는 탄성의 현상과 같은 기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도를 해본다.
(6회)
2007.7.24(수)
우리 형제들은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모두 진주에서 다니고 졸업을 하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규인이 진우 동생과 셋이서 산청으로 가는 방향에 위치하고 있는 진주 교도소 앞 논 가운데 있는 동네에서 자취를 하기도 하였다.
기억을 더듬어가면 추억거리가 참으로 많다.
그리고 규옥이 남옥이 희정이 혜원이 여동생 4명은 모두 진주 여고 동창생 들이다. 4자매가 모두 진주 여고 출신이라는 것은 그 또한 가문의 영광이고 자랑거리다.
최씨 집안 딸들은 박경리가 쓴 토지의 주인공 최서희가 아니더라도 모두가 똑 소리 나는 똑 순이 들이다.
우리 형제들만 하더라도 아버지의 교육자 대물림은 여형제들이 다 차지 하였다. 본인이 선생님 아니면 남편이라도 교수다. 우리 집 똑 순이 들이 조금만 더 가문 발전을 위해 열의를 갖고 노력을 한다면 인구에 회자하는 그 어떤 가문보다도 더한 가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하룻밤 자고 나면 짐을 몽땅 싸 들고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간다
어머니가 진주경상대학 병원에서 뇌수술 받으시고 입원 하신지도 내일이면 꼭 한 달이 되는 것 같다.
한달 동안 우리 가족들은 동방호텔에 큼직한 방을 하나 마련해 놓고 새우잠을 자가면서 서로 교대로 어머니를 간호해 왔다.
중환자 실이라는 곳은 간병사를 들여 보낼 수도 없는 지라 정해진 면회 시간을 이용하여 어머니 손발도 닦아드리고 혈액순환이 되게 마사지 해 드리는 일은 제수씨,여동생, 집사람을 비롯한 안식구들이 도맡아 해왔다.
모두가 진주에서 서울이나 천안 오가기를 집 문지방 넘나들 듯 하면서 병원을 드나들었다.
그동안 어머니는 폐렴이 발생하여 기침을 심하게 하시고 가래를 제대로 밭아내지 못하셔 고통이 심하고 고생이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 가래가 차올라 기침을 하실 때는 호흡이 곧 정지 될 것 같았고 곧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박교수를 위시한 경상대학병원 의료진이 매일 폐렴 치료 방법을 논의하고 항생제 단위를 높여 보았으나 별 차도가 없었다.
며칠 전에는 어머니가 계시는 중환자실에서 성호가 병원균에 감염되어 죽어 나간 사고도 있고 하여 혹시 병원균에 감염되신 것이 아닌가 하여 우리를 무척 긴장시키고 초조하게 하였다.
7월12일에는 진우동생이 서울에서 건강기센타 안상대 원장을 데리고 와 어머니께 기를 넣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기를 받은 직후에는 차도가 있는 듯 하시다가 도로 심한 기침을 하시고 열이 올랐다.
보다 못한 진우 동생은 “여기서는 안되겠습니다.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갑시다. 제가 서울로 올라가서 여러가지 알아보고 연락하겠습니다.” 하고는 서울로 올라가서 여의도 성모병원에 근무하는 남해가 고향 이고 골수 분야 우리나라 최고 권위자인 김춘추 박사와 어머니 폐렴증세에 대한 특별 면담을 하였다.
그때 김박사의 이야기로는 경상대학 병원에는 세균전담 의사가 없지만 성모 병원에는 세균전담 의사가 있어서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올 수만 있으면 세균전담 의사도 붙여주고 자기가 적극 도와 주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가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대학병원의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옮긴다는 것은 문제점이 많고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어머니의 심각한 폐렴 상태를 지켜보고 병원 측 진료에만 의존하고 있을 수만 없는 절박한 현실이었다.
그 때 진우동생이 그렇게 서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는 경상대학 병원에서 폐렴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예기치 않은 사고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다.
가족이 한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못할 일이 하나도 없고 안 되는 일 또한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알았다.
병원장 특별 지시로 박인성 교수를 팀장으로 한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어머니 이송 병원대책회의가 하루 종일 있었다.
내과 신경외과 이빈후과 등 어머니를 진료한 전 의사들이 모여서 서울로 가실 수 있는지를 점검하고 우리측에서 제의한 병원소속 앰블런스 이용과 중환자실 어머니 주치의인 강선생과 3년 이상 중환자실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급 간호사가 서울까지 동행하는 문제와 만약에 가는 도중에 어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중간에 어느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을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논의 되었다.
밤 8시 박 인성교수 방에서 규옥이 동생과 같이 나온 진우 동생은 모든 것이 잘 결정이나 내일 아침 8시30분에 출발하니 서울로 갈 준비를 서둘러 달라고 하였다.
그런 후 , 우리는 그동안 고생한 병원관계자들에게 선물을 곁들이 인사를 하고 왔다.
병원장에게는 발레인타인 30년 양주 2병과 안주 값 백봉, 어머니 주치의 강선생과 수간호사에게는 이십만원에 해당하는 상품권을 주고, 간호원 들에게는 50,000에 상응하는 상품권 11장을 선물하였다.
2002.7.25(목)
병원 응급실 앞 주차장 중앙에서 임시로 마련한 성호 영정 앞에 모여 있는 유족들은 시간이 갈수록 수가 불어나고 격렬하고 난폭해 져 갔다.
성호 어머니는 반 미치광이가 되어 병원을 헤집고 다니면서 조그만 이라도 거슬리면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욕을 해 댔고, 어제는 소형차에 달걀을 한 차나 가져와서 병원 유리창이고 벽이고 할 것 없이 여기저기 던져 깨어놓는 바람에 비린내가 코를 진동하다 못해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병원 측에서는 저지할 어떤 대안도 없이 전전 긍긍하고 있기만 했다.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이 오죽하면 저러겠나! 하는 동정도 갔지만, 도가 지나치니 무척 짜증이 나고 심기가 불편해 졌다.
아침 8시40분경 어머니를 태운 병원 앰블런스는 성호 농성장을 비켜 병원 정 문을 나셨다.
앰블런스에는 중환자실 주치의 강선생과 간호사, 규옥이 동생이 동승을 하고 어제 아트콤 양기사가 서울에서 가져온 벤츠 승용차에는 진우동생이 동승하여 앰블런스를 뒤 따라 갔다..
어머니와 동행하는 강선생은 중환자실 전담 당직 의사로 거의 24시간 중환자실을 지키고 있어야 하고 조금도 병실을 비워둘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강선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을 다녀오는 동안 박인성 교수가 대신하여 중환자실 환자들을 돌보기로 하였다.
나와 집사람은 한달 이상 비워둔 시골집에 들어가서 정리하고 단도리 해 놓고 가야 할 일이 많아 서울로 뒤 따라 가지 못하고 중촌으로 들어갔다.
장기간 병원주차장에 대기해 놓은 소나타 승용차는 비 먼지 흙먼지에다 성호 유족들이 던져 깬 달걀이 튀긴 자국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서울로 옮기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아침 일찍 병원에 들린 화정암 주지 보살을 절에 내려다 주고 서골 집으로 들어 왔다.
집 주변에는 잡초가 자라 풀밭을 연상케 하였다..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이부자리를 몽땅 꺼내어 햇볕에 널고, 임시로 얽어 매어 둔 사랑채 문을 다시 고쳐달고 , 옥종 농협에서 국수 10봉지와 수박 3통을 사와서 동네 마을회관에 모여 있는 이웃 분들에게 갖다 드렸다.
모여 있는 동네 분들은 어머니 소식을 무척 궁금해 하고 계셨다.
11시 55분경 어머니는 여의도 성모병원에 잘 도착하시고 컨디션이 좋으시다는 진우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7회)
2002.7.27(금)
풀 벨 낫을 한 자루 들고 마을 뒤 선산에 성묘하러 갔다.
여름이라 풀이 많이 자라 걷기가 거북할 정도이다.
독사 같은 뱀이라도 밟을 것 같아 나무 막대기로 풀을 헤쳐 보기도 하면서 긴장을 하고 걸었다.
동생들이나 조카들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이 성묘 올 것을 생각하여 아버지 산소 길과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진입로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낫으로 베고 길을 내었다.
반팔 난방을 입고 풀을 베었더니 풀 독이 올라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가려워 저녁에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쓰시다 남긴 물파스를 자다 깨어 발라 보기도 하였다.
집사람은 지금 까지 어머니가 손수 사용한 그릇 등 세간사리를 손질하고 나도 거들었다.
LPG가스통에는 가스가 있는데도 가스 렌지가 잘 작동을 하지 않았다.
가스렌지와 연결된 환기 통에서는 부엌 안 의 공기를 밖으로 전혀 배출하지 못했다.
간신히 가스렌지를 점화 시켜 주전자의 물을 끓였더니 서린 김과 연기로 온 부엌이 자욱하여 아연판으로 된 원통 환기 통을 뜯어 보았더니 통 안에 새가 집을 지어 꽉 막혀 있었다.
새집을 걷어내고 연통입구에는 철사로 그물망을 만들어 새가 못 들어가게 손질을 한 후에 다시 설치해 달았다.
새집은 제법 오래 전에 지은 것 같았다. 그것도 모르고 그 동안 어머니는 불편해도 참으시면서 생활해 오신 것 같았다.
부엌 안 다용도실에는 어머니가 손수 담아 발효시켜 두신 매실주가 투명항아리에 반 이상 있어 물컵에 한잔 부어 마셨다.
어머니의 체취가 묻어 있는 이것 저것을 만져보면서 언제 여기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 먹어 볼 수 있을 까? 하는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고 어머니와 가졌던 추억들이 주마등 같이 맴돌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 큰 자리를 내가 제대로 메우고 대신해 갈수가 있을까? “하는 의무감과 걱정이 어깨를 짓눌러 왔다.
고향 집은 어머니의 품안과 같은 따뜻한 곳이다.
나이가 들고 객지 생활을 하면서도 항시 그립고 가고 싶은 곳이 고향 마을이고 고향 집일 것 이다.
요즈음은 도시로 떠난 사람들 중에는 고향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고향을 찾아가도 반겨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것이 바로 나그네의 설움이고 한이다.
그러나 앞으로 고향을 보존하고 지키는 데는 문제점이 많다.
객지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두메 산골도 아닌 그런대로 교통편이 좋은 시골 마을 같은 고향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같이 벗할 친구도 없고 적당한 일거리도 없다.
그리고 힘들고 돈 벌이 되지 않는 궂은 일,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한다.
그 보다 더 큰 문제점은 어머니와 같이 건강상의 긴급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만족할만한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점이다 .
그래서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일수록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다.
2002.7.28(일)
시골집을 대충 정리해 두고 11시 30분경 서울로 출발하였다.
오는 도중에 남사 고모님 댁에 들려 고모님을 잠깐 뵈옵고 오후 5시경에 서울에 도착하여 개봉동 집에 짐을 풀기 바쁘게 바로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어머니 면회 갔다.
중환자실 면회 허용시간은 19시에서 19시30분 까지 30분간이고, 성모병원에서는 중환자실 면회가 대단히 엄격하고 까다로웠다. 지방 병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였다.
면회시에 어머니는 폐렴으로 열이 많이 올라 얼음 팩으로 열을 내리고 계셨고 한기가 많이 드시는지 온 몸을 떨고 계셨다.
성모병원에서도 우리 형제들은 매일 면회 시간에는 모두가 병원에 모여 번갈아가면서 잠깐이라도 어머니를 면회하였다.
오늘도 어머니를 면회한 규인동생 부부, 진우동생 부부, 규석이 동생, 우리 부부와 선호 는 탤런트 김종걸씨가 운영하는 한식집 “신정”에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그동안 진주병원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때 아트콤 이정기 고문도 같이 있었던 것 같다.
7월29일에는 종원이 동생 종민이가 태어 났다. 03시43분에 태어났다.
이날 11시경 김춘추 박사를 면담하고 온 진우동생은 어머니가 경상대학 병원에서 세균에 감염되셨다고 하여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고 긴장하게 하였다.
7월30일은 어머니 병실을 4층 내과 중환자실로 옮겼고, 군에 입대한 재진이가 첫 휴가 나와 병원에 들렸다.
7월31일에는 산모인 막내 제수씨가 병원에서 퇴원 해 신정동에 있는 산후 조리원으로 옮겼고 우리 가족 모두가 애기(종민) 보러 갔다.
8월6일은 장마비가 세차게 내렸다 .
원준이가 미국에서 돌아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고, 어머니가 MRSA균에 감염되신 것 같다 하여 전 가족이 잔뜩 긴장하고 어찌 할 바를 몰라 애만 태우고 있었는데 세균 담당의사의 최종 검사 결과가 나와 MRSA균은 아니고 강력한 잡균에 감염되셨다 하여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놓았다.
8월7일은 밤새 비가 많이 와 노량진 수산시장 앞 샛강물 수위가 놓아져 도로가 침수 되는 바람에 병원과 대방 전철역 구간으로 운행되는 병원 서틀버스가 운행되지 않아 대방 전철역에서 병원까지 걸어서 다녔다. .
면회 시간에는 천안에서 박교수와 규옥이 동생이 와서 어머니를 면회 하였다. 어머니가 서울 성모병원으로 오신 후 오늘 컨디션이 최고로 좋으신 것 같다.
2002.8.8(목)
18시경에 어머니를 중환자 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다,
1인실 병실이 나지 않아 하루의 병실요금이 50만원 하는 912호 특실로 옮겼다.
특실은 여의도 성모병원에 2실이 있는 최고급 VIP용 병실이다.
특실에는 보호자 실과 주방 그리고 화장실이 딸린 샤워실이 별도로 있고 전용전화기와 팩스기가 있는 말 그대로 특실이었다.
8월12일 1인 실로 옮기시는 날까지 닷새 동안 특실에 계셨다.
성모 간병협회의 소개로 퇴계원에 사는 이 길자 여사가 첫 간병인으로 어머니를 간병하러 왔다,
산모인 규석이 동생 제수씨를 뺀 제수씨와 규옥이 동생, 집사람이 매일 밤 교대로 간병인과 같이 밤을 새우고 어머니를 간호 하였다.
8월12일은 어머니 병실을 1212호 1인실로 옮겼고 1일 병실 비는 280,000원으로 기억된다.
2002.8월13일(화)
이 길자 간병사의 딸이 가출하였다고 집에서 연락이 와 군산이 고향인 이옥희 여사가 와서 교대하였다.
간병사의 딸은 중학교 3학년이라고 하는데 공부는 뒷전이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말썽을 많이 부리는 모양이었다.
맞벌이 부부의 가장 큰 애로 사항은 자녀들 교육문제 다. 선진국이 되고 복지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맞벌이 부부가 자녀들 신경 쓰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사회적 보장이 급선무라 생각이 된다.
어머니는 오늘부터 항생제 투약을 중단하고 경과를 보기로 하였다. 어머니의 컨디션은 좋으신 편이고 내 손을 잡고는 놓으시지 않으려고 하시고 집에 가자고 계속 조르시고 세워서 앉혀 달라고 하셨다.
(8회)
2002.8.31(토)
태풍 루사가 한반도 전역을 강타하고 여러 곳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강릉시와 김천시가 물에 침수 되고 경부선, 전라선 영동선은 철도가 끊기고 경부 고속도로는 개통이래 처음으로 두절 되었으며 사망자와 실종자가 150명이나 되었다.
어머니는 가래가 차오르고 열이 나면 짝 깔아지고 눈도 잘 뜨시지 않으시고 어떤 날은 컨디션이 좋아 보이기도 하기를 수없이 반복해 갔다.
어머니의 컨디션이 좋으시면 우리 모두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이야기들도 많이 나누다가 어머니 상태가 좋지 않으시면 모두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도 잘 하지 않았다.
특히 그런 면에서는 진우 동생이 너무 예민한 반응을 보여 식구들 모두가 진우 동생의 눈치를 많이 보았다.
어머니는 컨디션이 좋으시면 손 바닥에 119를 쓰시면서 119를 불러 집에 가자고 하시기도 하고 어떤 날은 병실을 장터골 정기(종고모님댁)네 집이라 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강기터 달동 이모님 댁이라 하시기도 하여 우리 모두를 황당하게 하였다.
뇌 수술을 한 환자들은 대부분 한쪽에 마비가 오는 데 어머니는 그런 증세는 없어 보였다. 오른 손을 많이 떠시기는 해도 오른 손 왼손 모두 잡으시는 힘이 있고 아직 거동은 못하시지만 양쪽 다리도 모두 힘이 있어 보였다.
8월19일 부터는 병원 복도에 있는 휠체어에 어머니를 태우고 12층 복도를 한 바퀴 돌면서 바람도 씌어 드리기 시작하였다.
8월20일은 명일동 규진형 형수님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강동성심병원 816호에 입원하셔 동생들과 병문안 다녀 왔다. 몇 년 전에는 위암 수술을 하고 본인의 철저한 몸 관리로 건강이 많이 좋아 지셨다고 하였는데 또 교통사고라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규진 형님 형수와 나는 추억의 사연이 참으로 많다.
1970년 7월초 숭실대학 건너편 상도동 언덕배기 집 에서 외종 석희 형님과 자취를 하다가 여름 방학을 맞이 하였다. 8월30일 논산훈련소 입대 통지를 받아 3학년 1학기로 마감고 휴학 신청을 하였다.
이틀전에 합정동 규진형님 댁에 들렸더니 형수 께서 “데름(도련님의 경상도 사투리) 여름 방학때 뭐 할끼요? 옆집 6학년과 4학년 짜리 여학생 한 달만 과외 공부 좀 해주면 안될까요?” 하고 물었다.
군입대하는 날까지는 두 달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고 해서 “형수님, 듣고 보니 참 반가운 소리네요, 용돈 좀 벌어 봅시다. 내일 바로 이곳으로 짐 싸 들고 올기요 “ 하였더니 “방은 크지만 단칸 방이라 데름이 불편해 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좋소.” 해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그 때 규진 형님은 합정대교 밑에서 방카시 운반 유조차 운전을 하고 계셨고 기름탱크 저장고 옆 공터에다 블록을 쌓고 각기목으로 지붕 지지대를 만들고 그 위에 루핑을 덮어 큰방 하나와 그 옆에 달아낸 부엌이 있는 무허가 건물에서 생활하고 계셨다.
지금 아트콤에 근무하고 있는 영수조카가 젖먹이 였던 것 같다.
나는 석희 형님과 상의를 한 후 홍대 앞 누나댁에서 하숙하고 있는 상학과 친구 김신욱 군과 상도동에서 택시를 한대 잡아 짐을 챙겨 합정동 규진 형님 댁으로 출발하였다.
이삿짐이라 해야 이불 보따리와 앉은뱅이 책상과 책 몇 권이라 택시 한대로 충분하였고, 상도동 자취 집을 나설 때는 이슬비가 내리던 것이 점점 빗줄기가 굵어져 양화대교를 진입할 때 는 장대비로 변하였다.
합정동 로터리에서 유턴을 하여 대교 및 모래사장 야적장 내에 진입 하니 집이 보이지 않고 무너져 내려 앉은 블록 벽돌만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
나는 택시 기사에게 차를 잠시 멈춰 세우도록 하고 길을 잘못 들어 섰나 하고 차 안에서 주변을 두루 살펴 보았으나 그 당시 그곳에는 별다른 건물이 없었던 터라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고 홍두깨에 홀린 것만 같았다.
“그저께 왔다 갔는데 그사이 집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밖에는 장대같이 비가 내리고, 택시에서 내릴 엄두도 못하고 있다가 비맞을 각오를 하고 차에서 내려 무너져 내려 앉은 루핑 지붕을 들추고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안에서 얘기 우는 소리가 들렸고 형수님의 뒷 모습이 보였다. 정말 귀 막히는 하룻밤 사이의 변화 이다.
그때 형수님의 이야기로는 전날 마포구청 철거반에서 나와 무허가 건물이라고 다 두드려 부수어 놓고 갔다는 것이고, 규진형님은 지방에 내려가 안 계셔서 속수 무책으로 그곳에서 비를 피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나는 택시를 계속 세워 둘 수도 없고 하여 무너진 지붕 을 막대기로 친구와 솟구쳐 대충 고이고 차에서 짐을 내려 비를 맞지 않게 안에다 밀어 넣고는 신욱이 친구 하숙집으로 가서 잤다.
다음날 지방에서 돌아오신 규진형님과 나는 집을 손질하고 그 곳에서 시골로 내려 가기 전까지 한 달간 같이 생활하였다.
무허가로 임시로 지은 집은 보수하기도 쉬웠고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복잡하면 복잡한대로 단순하면 단순 한대로 장단점이 있고 있으면 있는대로 복잡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간편하고 편안할 때가 많다.
어떤 경우든 괜히 복잡하게 만들면서 살아 갈 필요는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림 감상에도 여백의 즐거움이란 것이 있다. 복잡하게 채워진 구도 보다는 텅빈 여백이 한없이 좋고 즐거을때가 많다. 그리고 현대는 “심플라이즈” 계속 단순화 해가고 있는 것이다 .
한 달간 과외공부 하고 용돈을 손에 쥐니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최우선으로 헌책방에서 영어 포켓사진 한 권 사고, 안 받으시겠다는 것을 억지로 아이들 과자나 사주라면서 형수 용돈 조금 드리고 8월 중순 시골로 내려 갈 때는 술 좋아하시는 아버지 드릴 백화 소주 됫병 한 병과 동생들 줄 종합선물셋트 과자도 한 상자 살수가 있었다.
그런후 시골에서 약 보름 동안 부모님 곁에서 지내다가 8월 30일 논산훈련소 30연대에 입소 하였다. 논산 훈련소 30연대는 잠자나 자나마나 하고 밥 먹으나 먹은 둥 만둥하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환경이 열악한 곳이었다.
(9회)
2002.9.8(일)
내가 시골에서 자랄 때만 해도 고향마을 중촌에는 일가 들이 많이 모여서 살았다.
새사맆 뒷문을 나서면 소나무 동산 아래 길가 집에는 갈티 아주머니 가족이 살았고, 동산 건너편 저수지 아래 편에는 흰 수염이 도인에 가까운 종조부님과 대포 당숙부님 가족이 살았고, 정골 초입에는 기동아저씨 가족이 사셨고, 안동네에는 재종 규일 형님 가족과 모단 종조모님 가족이 사셨다. 그리고 도문화재로 지정되어 지금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경현당 인천서원 옆에는 돌아가실 때 까지 상투머리를 하신 달천 아저씨 가족과 검은 코수염 트레이드마크 수반아저씨 가족이 사셨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객지로 떠나고 규필형님 내외분과 어머니 께서 고향 집을 지키고 계다가 어머니마저 사고를 당하여 고향 지킬 사람 없어질까 봐서 객지에 나가 있는 모두가 걱정이다.
고향은 한마디로 원천과 같은 곳이다.
원천의 물이 마르면 안 되듯이 고향은 영원히 있어야 하고 보존되어야 하는 곳이다.
알렉스 헤일리가 쓴 감명 깊은 영화, 뿌리(ROOT)에서 보듯이 미국에 뿌리를 내린 흑인의 역사는 영국의 노예상에 의한 먼 아프리카의 오지 마을의 쿤타킨테(헤일리의 7대조) 노예사냥으로 부터 시작이 된다.
헤일리는 끝없는 박애와 멸시가 대를 이어 계속된 조상의 역사를 더듬으면서 그곳을 찾고 확인하고 싶어 했고 자랑과 긍지를 갖고자 했던 것 아닌가?
같은 맥락으로, 원천의 샘물이 흐르는 과정에서 잡탕으로 범벅 된 바닷물로 변한다 하더라도 지리산 유덕 골의 정기와 미네랄은 그 어디엔가 배여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고향을 떠난 객지에서 나름대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건 간에 크게 자랑 할 것도 없는 것이고 부끄러워 할 것도 없는 것이다. 누구나 할것없이 모두에게는 고향의 동심이 있는 것이고 우리의 몸에는 언제나 고향의 정기가 배여 있음이다. 그런데 매우 안타깝고 애석한 일은 뒷동산의 고인돌은 누군가의 정 맞고 많이도 짤리어 나갔고, 들가운데 고인돌은 경지 정리 때 영원히 사라져 버렸고, 마을 동산의 노송은 어떤 사람의 끝다리 땔감 욕심으로 다 베어져 버렸다. 추억과 향수가 그립고 아쉬움이 가슴을 여미어오는 현실이다.
부산에 계시는 당숙부님을 위시한 집안 사람들과 상의를 한 끝에 추석 전 여름 산소 벌초 날과 가을 시제 때는 이유 불문하고 객지에 나가 사는 사람들이 시골에 다 모여 집안 의 대소사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친목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연례행사인 조상님 산소 벌초 모임 날이라 집사람과 같이 승용차 편으로 시골 내려 왔다.
몇 년 전부터 부산 마산 서울에 사는 최씨 집안 며느리들은 게를 모아 작년에는 남자들과 딸린 식구들은 다 떼놓고 며느리들끼리만 홍콩을 다녀왔고, 금년 봄에는 태국여행을 다녀온 후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좋아하고 만족해 하면서 매년 한번씩 해외 여행 하자는 둥 단단히 신바람이 들어 있다. 반면에 구경 한번 못 따라가고 용돈 챙겨주는 최씨 집 남자들은 그래도 입이 째져 좋아들 하니…….
이것이 바로 가정과 가문과 살아가는 의미와 즐거움이 아닐까?..... 예로부터 가정의 우애는 안으로 하는 것이라 하였다.
남자들이 아무리 잘 하려고 하여도 안식구가 반기를 들고 나오면 만사가 뒤 틀어지고 만다. .
지금은 옛날 같이 여자들이 남자 말 잘 듣고 무조건 따르는 것도 아니고, 어느 가정 할 것 없이 경제권과 의사 결정권은 여자들이 쥐고 앉아 잔소리와 생색은 다 내는 것이 현실이다.
한술 더 떠서 아이들 핑계대고 나오면 아무리 황우 장사 같은 남정네라도 꼬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 요즈음 세상이다.
경상도 속된 말로 쎄가 빠지게 돈 벌어서 조기 유학시킨다고 .보따리 싸 들고 외국 나가 사는 마누라 뒷바라지 하면서 혼자서 라면이나 끓여 먹고 사는 남자들 이야기도 종종 신문에서 보았다.
나도 직장 다닐 때 봉급과 보너스는 몽땅 온라인으로 은행 통장으로 들어가고 집사람 한테 돈이라도 좀 타 내려면 왜 그렇게 알고 싶어 하는 것도 많고 따지는 것도 많은지 !
그래서 지나간 에피소드지만,
년 말에 봉투로 주는 년 차 수당은 무조건 꼬불쳐 책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필요하면 야금 야금 몰래 꺼내 썼다.
그런데 어느 해 여름 태풍이 심하게 불고간 다음날인 일요일 밤 10시경 월세 로 대문 칸 방 에서 동거하는 새댁 시골 동생들이 놀러 와서 문닫고 자다가 4사람이나 연탄가스 마시고 뻗어 버리는 바람에 단단히 혼이 났다. 그때에는 자동지급기 같은 것도 없고 일요일인데다 늦은 밤이라 어디 가서 돈 구할 수도 없어 하는 수 없이 병원 수속비로 그 돈 다 털어 내놓고 말았다.
그 때 내가 꼬불쳐 둔 것이 없었다면 병원에서 산소 호흡기 바로 꽂지 못해 한 사람 죽었을 지도 모른다.
월세 내주면 연탄가스 사고 책임은 법적으로 주인이 다 진다고 하던데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잘 못 되었더라면 집이고 뭐 다 날려먹고 거지 안되었으면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
다른 이야기 이지만, 얼마 전에 사업을 제번 잘하는 친구 보고 “ 사업을 그렇게 많이 벌려놓고 얼마나 어렵고 힘드신가 ? “ 하였더니 그 친구 하는 말이 “마누라 비유 맞추기 보다 힘든 사업이 어데 있나?” 했다.
따지고 보면 그 말이 맞는 것도 같고 명언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 부부싸움이라도 하고 나면 그 누구와의 다툼 보다 고통스럽고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 아닌가?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이 중추신경을 건드릴 때는 치통 두통 보다 더 예민해지고 수 십 배의 아픈 고통을 느끼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가족이 상대방을 배려 해주고 자기 주장을 한 보 양보해 주는 데 있는 것이고, 인연은 서로 연락하고 챙겨주는 데서 오는 것이지 저절로 맺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본다 .
피를 나눈 형제 간이라 해도 서로 연락 안하고 무관심으로 지내다 세월 가면 남 되기 일쑤고 . 반대로 촌수를 댈 수 없는 먼 일가 친척이라도 서로 챙기고 자주 연락하고 지내면 부모형제 보다 더 가까워지는 것이 인지상정 일께다.
벌초를 마치고 산소에 두루 들러 성묘를 한 후 부산에서 오신 삼천포 당숙모, 순천 종수, 집사람과 내 차로 부산에 들려 둘이누님( 최 옥남) 병문안을 하고 상경하였다.
둘이 누님은 집안의 규(圭)자 항열에서는 가장 윗 전이시고 연세가 70 고희를 넘기셨지만 건강하시고 친정 대소사의 일을 손수 챙겨 오셨는데 취장암으로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시다가 2002.12.27(금) 오전 6시에 운명하시고 부산 영락공원 묘지 22실 4747호에 유골을 모셨다. 그때 우리 형제들은 모두 장지에 다녀왔다.
9월10일(화) 오전에 어머니 병실에 들렸더니 성모병원 12층 간호사실에서는 어머니께서 퇴원하셔도 되니 퇴원수속을 밟아 달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나 가래가 차 오를 때는 열이 있고 깔아지시기도 하여 며칠 후로 미루었다.
그런데 이틀 후인 9월12일은 간병사가 전화 받는다고 잠깐 틈을 비운 사이 화장실에서 용변보시다가 넘어지셔 머리 CT촬영과 종합 검진을 하는 사고로 퇴원을 못하시게 되었다.
9월29일 (일) 은 여의도 성모 병원에서 잠깐 외출 나오셔 개봉동 집을 다녀 가시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 하신 후 첫 나들이 인 셈이다.
9월14일(일)은 천안 박교수 매제 내외와 어머니 병실을 들린 후 인천 소래 어물전에 꽃게 사러 갔다.
박교수가 근무하고 있는 호서대학 안전공학부 대학원생 제자 부모님이 경영하는 가게에 들렸더니 특별 할인을 해주어 살아서 꿈틀거리는 싱싱한 꽃게 20KG를 박교수가 구입하여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덕분에 모두가 비싼 꽃게 맛 한번 보았다.
동생들은 어머니가 개봉동 집으로 바로 퇴원하는 것 보다 한방병원에서 한 두 달정도 물리치료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10월5일 경 어머니는 이옥희 간병사와 같이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합정동 해당 한방병원으로 옮기셨다.
7월25일 진주 경상대학 병원에서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옮기신 후 2달 10일 만에 해당 한방병원으로 옮기시게 되는 셈이다.
한방 병원에서도 가래가 차오를 때는 목에 뚫린 호스투입구를 통해 샥션을 해야 하지만 천만 다행인 것은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폐렴을 유발시킨 바이러스를 잡은 것이었다..
해당한방 병원에서는 물리치료를 병행하여 침해 예방과 원기를 돋구는 종합 한방치료가 실시되었다.
어머니는 물리 치료 받는 시간에는 잘 안 받으시려 하시고 짜증을 많이 내셔 어머니와 간병사 간에 승강이와 신경전이 계속되었고 간병사가 많이 힘들어 했다. 그리고 병원에 찾아오는 식구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간병사 편을 들어 “운동도 많이 하시고 물리치료를 잘 받아 빨리 걸어야 할 것 아니냐 ” 고 해서 어머니는 심기가 불편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는 것 같기도 했다.. .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가 한방병원으로 옳기신 후에도 여의도 성모병원에서와 마찬가지로 번갈아 가면서 매일 병실을 드나들었고 어머니의 경과를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11월27일은 종합검사를 받기위해서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다시 옮기셨다.
12월6일은 미국에서 교환교수로 나갔다가 돌아온 이빈후과 김형태교수 특진을 받은 후 12월13일 목에 꽂힌 프라스틱 보조물을 뽑고 레이저로 봉합수술을 받았다.
그땐 봉합수술을 한후 입으로 가래를 뱉어내고 음식물을 목으로 삼킬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고민들을 많이 하였다.
의사의 손끝은 정말 천 차별 만 차별인 것 같다.
인턴이나 다른 의사가 어머니 목에 손을 댈 때는 그렇게 아파 하셨는데 김형태 교수가 손을 댈 때는 전혀 아픈 느낌이 없으신 듯 하여 역시 의사 손은 약손 이었다.
(10회)
2002년 12월19일(금) 은 16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선거 총 유권자 수는 3천4백99만1천5백29명이고, 선거는 70.2%에 해당하는 2천4백 49만명이 투표에 참여 하였다.
개표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노무현 후보가 48.9%인 1천2백1만2천 표를 얻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얻은 46.6%인 1천1백4십3만 9천표 보다 2.3%(5십7만3천표)를 더 얻어 16대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진우 동생의 절친한 친구 한명선씨는 대선 기간동안 노무현 후보의 경호책임자로 선임 되어 노무현 후보를 적극 도왔고 바쁜 와중에서도 틈만 나면 여의도 성모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어머니 병실에 들리곤 하였다.
이번 선거는 인생역전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한나라 당의 이회창 후보는 조직면으로 보나 경력면으로 보나 여러측면서 유리하고 우세한 위치에 있었고 여론 조사에서도 이회창 후보는 30%로 노무현 후보 20% 정몽준 후보20% 보다 10%차나 앞서 있었다.
선거 막판에는 위기를 의식한 노무현 후보가 최후의 승부수로 국민통합 21의 정몽준 후보와 후보 단일화 제의를 하였고 통합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다가 선거 하루 전에 정몽준 후보의 돌변으로 통합은 실패하고 대선의 승리는 한나라당 이회창 쪽으로 기울어 진 것으로 언론과 여론은 모두 점치기도 하였다.. . 그러나 개표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노무현 후보가 승리를 하여 16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정몽준 후보와 통합이 실패한 선거 바로 전날 밤에는 노사모의 네티즌들이 사이브의 공간을 점거하고 맹활약을 하는 바람에 한때 인터넷의 접촉이 마비되는 대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때 프로 복싱 세계 참피온이기도 한 홍수환 선수는 1977년 남아공의 떠오르는 별이고 11전 11KO승 전적을 가진 지옥의 악마라 불리는 카라스키야와 세계타이틀 매치 에서 4전5기라는 역전의 신화를 창조 한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다.
위기의 고비를 넘기면 바로 성공의 문 턱인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인생의 벼랑 끝과 같은 시련이 온다고 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차원에서 극복하는 마음 과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도 불운으로 큰 승리의 영광이 안겨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떤 면에서 그 노력과 의지는 대단히 값진 것이고 위대한 것이다. 신은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시련도 더 많이 준다고 했다.
선거결과에 대해 기자들이 노무현 당선자에게 당선 소감을 묻자 “참 좋습니다”라고 한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는다.
승리의 결과는 한마디로 참 좋은 것이다.
승자와 패자의 차이는 참 좋은 것과 참 좋지 않은 차이이다.
그리고 정치인의 승리는 막강한 권력이 주어진다.
권력은 좋은 것 중에서도 최고로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돈 많기로 유명한 현대그룹의 정주영씨도 죽기전까지 권력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욕심으로 대통령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 말년에는 대선에 출마하여 많은 돈 날리고 많은 사람들 쌩 고생 시키고 명예에 오점을 남긴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 학자의 말 같이 권력은 불과 같은 것이라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춥고 너무 가까이 있으면 화상을 입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것 저것 이득만 따지고 손해보지 않고 불만 찌려고 하면 중도가 되고 마는 것인가?
대통령은 하늘이 내려 준다고 했다. 이회창후보는 15대 선거에서는 이인제의 경선불복 파동으로 다 된밥에 재 뿌린 격이 되었고 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본인과 참모들의 안이한 자세와 자만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운명적으로 대통령 될 팔자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어머니는 12월23일 성모병원에서 개봉동 집으로 퇴원을 하셨다.
어머니가 진주 경상대학병원에서 뇌 수술을 받으시고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옮겨 폐렴치료를 받으신 후 5개월 28일 만에 개봉동 집으로 퇴원하신 셈이다. .
선희는 며칠 전부터 할머니 퇴원 환영 준비에 밤 늦도록 바빴다.. 종이를 오려 환영 카드를 멋지게 만들어 색칠을 한 후 벽에 붙여 달고 , 앞 벼란다 쪽 거실의 넓고 큰 창에는 금색 은색 반짝이 종이로 사랑의 심볼마크인 하트 문양과 “MERRY CRISTMAS”라는 글자도 모양을 내어 오려 붙였고 사랑의 종도 문방구에서 사서 달았으며 반딧불 네온불도 휘감아 장식하고 꾸며 놓으니 집안 분위기가 한층 돋보였다.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에는 서울 사는 모든 기족들이 개봉동 집에 모여 어머니를 모시고 영덕게 파티를 크게 벌렸다. 영덕에 사시는 종원이 이모님이 어머니 병원 퇴원 시점에 맞추어 가족들 모임에 먹으라고 특별히 영덕게를 푸짐하게 보내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봉동 제과점에 있는 것 중에서는 제일 큰 케익을 사와 촛불을 켜고 어머니께서 빨리 회복되시기를 기원하면서 지난날의 이야기와 그동안 병원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자정이 넘도록 하였다.
밤10시경에는 캐나다 빅토리아 대학에서 어학연수 중인 선호가 전화를 하여 어머니와 통화를 한 후 다른 식구들은 돌아가면서 간단하게 한마디씩 통화 하기도 하였다.
며칠 있으면 한해가 마감 되고 계미년(癸未年) 새해가 된다. 시련의 끝이 희망이듯이 내년에는 어머니의 건강이 크게 호전될 것으로 믿는다.
***다음에 계속****
(11회)
2003년 은 양띠해인 계미년이다.
양같이 온순하고 평화로운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지나간 몇 년은 걷잡을 수 없는 크고 작은 시련이 내게 있었다.
죽고 싶은 충동이 있도 록 힘들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랬다고 할 정도였다.
1998년은 IMF(외환위기) 사태로 주거래처인 해태유통을 비롯한 많은 거래선이 부도가 나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에는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에서도 설비 투자계획을 중단하고 간단한 비품 구입마저 유보하고 있어서 물류기자재를 납품하고 있는 나로서는 2년 넘게 손 놓고 놀기만 했다.
여의도에서 광고사업을 하는 진우 동생이 경제적인 도움을 많이 주어 회사 문은 닫지 않았고 밥을 굶는 지경은 되지는 않았다.
돈이란 주는 사람에 있어서는 큰 돈 이겠지만 일정한 벌이 없이 받아 쓰는 사람은 항시 부족하고 갈증 나는 것이었다.
2001년4월8일(일) 14시30분에는 강원도 인제 46번 국도에서 집사람이 운전을하고 내가 옆 좌석에 탄 프린스 승용차(서울 4저 8233)가 강변쪽으로 추락하여 전소되는 사고를 당하였다.
차 안에서 10분만 늦게 탈출 했어도 우리 부부는 불에 타 죽었을 것이다.
그 당시 돈 벌이가 변변 찮은 나를 보다 못한 집사람은 강원도 한계령에 가서 황태나 떼와서 동네 장사나 한번 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제의를 하였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자존심도 상하고 하여 “그런 쓸데 없는 소리는 앞으로 다시는 하지말어” 하고 역정만 내고 무시해 버렸지만, 바람이라도 쏘이러 가자면서 계속 부추기는 바람에 별로 마음 내키지 않는 강원도 한계령 나들이를 나서게 되었던 것이었다. .
이른 아침 개봉동 집을 나설 때는 날씨가 잔뜩 흐려 있었고 양평을 지날 때는 비가 내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때 규인이 동생네 현진와 국진이가 진부령에 주둔해 있는 군 부대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국진이는 진부령 한계령 갈림길 삼거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현진이는 국진이 부대에서 자동차로 7-8분거리 정도인 진부령 고개 오르기 직전에 위치한 부대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현진이는 상병이고 국진이는 훈련 받고 자대에 온지 100일도 안된 신참이었다.
한계령 설악황태집에서 시제품으로 최상품 황태 오징어 100만원치 이상을 사서 차에 실으니 뒷 트렁크 와 뒷 의자 공간은 모두 꽉 차 메워졌다.
주변에 상가가 없어 백담사로 들어 가는 초입에서 통닭과 먹거리를 산후 국진이 부대를 방문하여 면회 신청을 하였으나 신병은 100일 안되면 면회를 할 수 없다는 군 복무 지침에 따라 면회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일요일 당직을 서고 있는 일직하사에게 통사정을 하여 일직하사가 비상전화로 일직사령관인 부사관에게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고 면회 해 줄 것을 건의하였으나 거절 당했고 일직사령은 나의 전화 통화 요구에도 응해 주지 않아서 서운하다 못해 화가 치밀러 올랐다.
아무리 군 복무 규정이 그렇다고 치더라도 서울에서 멀리 강원도 까지 면회간 큰 아버지가 조카 얼굴이라도 잠깐 보고 가겠다는데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그 부대 일직사령은 정말 융통성이 없는 꽉 막힌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밑에 있는 병사들이나 국진이가 고생깨나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면회하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때마침 국진이와 같은 내무반에 있는 고참사병이 정문 보초 근무를 서고 돌아가는 길이라 그 편에 국진이와 같이 먹으라면서 통닭과 먹거를 들려 보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국진이는 얼굴도 못 본채 바로 현진이 부대를 방문하여 면회신청을 하였더니 30분정도 기다리니 현진이가 나왔다.
부대 정문 큰 길 건너편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하면서 “현진이 맥주라도 한잔 할래?’하고 물었더니 한잔 하고 싶어 하는 눈치라 나는 집사람 보고” 당신 운전할수 있어?” 하였더니 그러겠다고 하여 맥주를 한 병 시켜 둘이서 한잔씩 나누어 마셨다. 그래서 집사람이 운전을 하게 되었다.
현진이를 들여 보내고 삼거리를 지나 백담사 진입 표지판을 벗어나 그렇게 멀지 않은 지점에서 갑자기 추월하는 차를 피하려다 집사람이 당황하여 핸들을 잘못 조작하는 바람에 자동차가 반대편 강변 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약 10m 높이서 추락한 것이다.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소나무 위에 떨어져 1차 충격을 완화하는 행운이 없었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순간이었다.
바위틈에 꺼꾸로 떨어져 있는 차 안에서 밖으로 탈출하기란 정말 용이치가 않았고 집사람과 내가 차 밖으로 탈출하여 나오고 나서 10분도 안되어 자동차는 앞 엔진 쪽에서부터 불이 붙었고 소방차 2대가 와서 물을 계속 뿌려 대었지만 한번 붙은 불은 꺼지지 않고 완전히 전소 되고 말았다.
황태 오징어 한 차 불 태워 고사 한번 잘 지낸 셈이다.
사고는 정말 예측 할 수 없는 것이고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 운명의 장난질 같은 것이다.
어떤 작가가 이야기 했듯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천사의 손을 잡을 수도 있고 악마의 손을 잡을 수도 있다. 악마의 손은 잡지 않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면 잡게 되는 것이다. 재수 없다고 아무리 발버둥 처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현자는 악마의 손은 완전히 잡히지 않는 예지와 빠져 나오는 지혜가 필요 한 것이다.
그리고 항시 선한 마음 착한 마음을 갖고 보시하면서 살 아가야 하는 것이다.
교통사고 중에서도 추락사고는 동승자가 부부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되는 것이 아니었다. 보험사고 등 별별 사고가 있어서 그랬겠지만, 사고 현장에는 내려 와볼 생각 조차 안 하고 먼 발치에서 구경만 하던 교통순경이 자동차가 완전히 전소되어 뼈대만 남고 불길이 잡히자 우리를 불러 올려 북면 파출소로 데리고 가서 사고 경위에 대한 조사를 3시간이상 하였다.”부부 사이가 어떻느냐 ?” 가족관계 재산등등 별별 것을 다 물어보면서 조서를 작성하였다.
불 붙기 시작하는 차 안에서 어렵게 끄집어낸 핸드폰으로 서울에 있는 진우동생에게 연락을 하였더니 규석이 동생과 같이 19시30분경에 북면 파출소에 도착하였고, 우리를 서울로 데리고 와 고척동 성모병원에 입원 시켰다.
병원에서 하룻밤 자고 나니 온 몸이 아프고 꼼작을 할수가 없었고 집사람은 온전신에 피멍이 많이 들어 있었다. 천만 다행인 것은 멍이 들고 찰과상은 있었지만 집사람과 나는 골절상이 전혀 없었어서 1주 후에는 퇴원을 할수가 있었다. 그리고 3일후 어머니와 약속한대로 시골 경헌당 봄 행사에 참석하였다.
1월4일(토)은 서울에 사는 초등학교 동기 하평근 이자야 최갑님 정설자 김이녀가 어머니 문안차 개봉동 집을 방문하였다. 이자야 동기는 녹두죽을 끓여 오기도 하였다.
어머니 곁에는 이 옥희 간병사가 24시간 붙어 있었으며 어머니는 기침을 한번 하시기 시작 하면 잘 멈추지를 않고 얼굴이 충혈되시고 고통이 심하시기는 해도 조금씩 회복이 되시는 듯 했다.
2월1일(토) 구정 명절을 쉬고, 2월15일(토)은 축촌연친회 모임을 분당에 사는 고종 인열이가 주관하여 하남시에 있는 지인의 한식집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그 때가 고모님과는 최후의 만찬 이었던 것 같다.
2월16일(일) 어머니 생신 모임을 인천 송도 아리랑 식당에서 하였다.
서울에 사는 우리형제들과 조카들 과 천안 규옥동생네 식구들도 모두 오고 개봉동에 사는 고종 하금자 동생도 참석하였고, 외숙모님도 같이 모셨다.
고종 하만장 형님에게 전화 연락하였더니 청계산에 등산 갔다가 내려오는 중이라면서 같이 등산간 산청군 향우회 회원12명과 같이 와서 합류하였다. 그리고 어머니 생신 축하금으로 산청군 향후회 일동이 20만원 만장형이 20만원 담은 봉투를 어머니께 드리기도 하였다.
---- 다음에 계속----
(12회 )
폐렴에 대한 급한 불을 끄기는 했으나 자주 열이 오르고 기침을 한번 하시면 멎지를 않아 간병사와 집사람은 늘 긴장하고 애를 많이 태웠다.
급할 때는 119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요즈음 들어서는 여러 방면에서 119의 역할이 크다. 화재를 진압하는 일 이상으로 인명 구조 활동과 응급환자 병원 이송등 광범위하게 대민 지원을 하고 있고 위급 시에는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어머니가 시골집에서 맨 처음 사고를 당하셔 병원으로 이송하신 것도 119에 연락 하여 도움을 받았고, 병원에서 개봉동 집으로 퇴원하신 이후에도 여러 번 119를 이용하여 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가기도 하였다.
미래 사회를 위한 정부의 역할은 적극적인 대민지원과 복지 정책에 주력해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와중에 우리의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2003년2월 22일 (토) 밤8시50분에는 천안 호서대학 안전공학부 소방안전 주임교수인 박용환 매제가 EBS방송에 출연하여 대구 지하철 화재에 대한 특별 좌담을 하였다.
박교수는 소방안전에 대한 우리나라 최고 전문가이다.
대구 지하철화재 참사는2003년 2월18일 9시53분에 대구 광역시 중앙로역 구내에서 정신지체장애인 50대 남자가 플라스틱통에 들어 있는 휘발유에 불을 붙인 뒤 지하철 객실 바닥에 던져 발생한 화재로 12량의 객차가 완전히 불타 전소되고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한 정말 어처구니 없는 화재 사건이다. .
한 사람의 광기 있는 무모한 행동이 너무나 엄청나고 어처구니 없는 대 참사를 야기 시킨 것이다.
옛말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 는 격언 같이 언론에서는 화재와 안전에 대한 특집을 많이 내어 놓았고 정부에서도 대대적인 진단과 대책 마련에 동분 서주 하고 있는 듯 했다.
사고는 모두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일어나고 거의 대부부분이 조금만 신경을 쓰면 예방할 수 있는 인재에 의한 것들이다.
화재와 같은 재해를 예방하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이 생활 습관이다.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외출 할 때는 가스불도 끄고 수도물도 잠그고 전등불도 끄는 완벽함이 몸에 배여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 집 할 것 없이 모든 식구가 외출한 가정에는 화장실 전등 하나쯤은 켜져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 나이가 60이 넘으면 하루 아침에 양치질 2번 하는 사람도 많다고 하였다. 나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2003.2.28(금) 에는 집안 여동생 현숙이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동생들과 수원 아주대학병원 영안실에 들려 규설 형님을 위로 하고 문상 다녀 왔다.
현숙이에 대해서는 나와 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 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던 때의 기억과 주변사람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자랄때 기억으로는 현숙이는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재능이 뛰어난 아이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용기술을 배워 돈도 많이 모았다 했으며 신랑이 미국에서 공부 할 때 경제적인 뒷받침을 다 했다고 하였고, 그 덕분에 신랑은 미국 유명대학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세계 과학의 심장부인 나사에 취업이 되어 오산 미군 비행장에 기술고문으로 파견 나와 한국에서 잘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규설형님을 통해 들은 이야기로는 수년 전에 이혼을 하고 형제간에도 연락을 끊고 살았다고 하며, 현숙이와 알고 지내는 동네 부동산 주인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초상 치러 왔다는 정말 어처구니 없고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병원 영안실에 도착하니 현숙이 한테 영어회화를 배워왔다는 중년 부인 5-6명이 영정앞에서 선경을 펼쳐 놓고 찬송과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미국생활을 하면서 익힌 영어 과외를 하면서 생활해 왔던 것 같았다.,
현숙이의 짧은 삶에서 유행가 가사의 “있을 때 잘해” 가 생각난다. 나중에 잘하겠다는 것은 아무것도 못하고 말지도 모른다. 지금 잘하고 살아있을 때 잘해야 할 것 같다. 나와 인연을 맺은 모두를 위해서……
고생의 끝은 희망이고, 고민의 끝은 고통이다… 고민을 하면 스트레스가 발동하고 즐거우면 앤돌핀이 솟아 난다. 가능한 고생은 할지라도 고민으로 스트레스는 받지 말아야 할 것 같다.
현대의 가장무서운 병은 스트레스다.
고생은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가 있지만 절망과 번뇌와 마음속 고통은 참아내고 극복하기가 정말 어렵다. .
내 초등학교 박옥순 여자 동기는 100개도 넘는 벌통을 옮겨 가면서 전국을 돌면서 1년을 보낸다.
힘은 들어도 벌이는 제법 짭짤한 모양이다. “여자 벌이 치고는 그만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환갑 지난 나인인데도 불구하고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억순이 중에 그런 억순이는 없을 것이다.
남쪽지방 진주에서 겨울을 나고 봄에는 경기도 화성에서 아까시아 꿀을 수확하고, 양평을 거쳐 강원도 평창에서 밤 꿀을 수확한 후 강원도 고성에서 늦가을 싸리 꿀을 수확한다고 하였다. .
지나간 동창회 모임에서 나 는 그 친구 별명을 벌순이 엄마라 지어 주었다.
기분에 따라 벌식이 엄마라 불렀다가 벌순이 엄마라 마음 내키는 대로 불러 준다.
경기도 화성에 벌통을 옮겨 놓았을 때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 동창친구들과 위로 차 방문하여 목격한 것이지만, 수만 마리의 벌들이 꿀을 따 물고는 벌통을 들랑거리면서 공중을 날아다니지만 서로 부딪치는 교통사고 한번 없고 정확하게 제집에 꿀을 따 모우는 것 이었다. . 어떻게 그렇게 제집을 잘 찾아가는 지 모르겠다.
곤충에게도 자기 임무와 일이 있음을 알았다.
지구상에 생명을 부여 받은 모두에게는 자기 존재가치와 임무와 일이 주어지는 것이다.
인간도 여기에서 예외 일수는 없는 데도 실업자도 많고 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왜 그럴까?
인간을 제외한 모두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자기 본연의 일만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본연의 일 외 남의 일 까지 빼앗아 한다. 그래서 일이 많은 사람은 너무 많고 일이 없는 사람들은 너무 없다. 이러한 현상은 빈부의 격차를 유발시키고 끝 없이 대물림 하게 한다. .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순이고 비극인 셈이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지능이 뛰어나고 지혜가 있는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생활의 질서는 벌과 같은 곤충보다 못한 면이 너무 많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이고 진실이 없는 바람 앞의 갈 때 같이 오락가락한다.
어머니는 살아오신 시골집이 궁금하신지 자주 이야기하시고 가시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지난 주말 아버님 제사 때 모인 동생들과 상의를 한끝에 3월21일(금)에 진우 동생이 승용차편으로 어머니를 시골로 모시고 내려 오기로 하고 나와 집사람은 하루 전에 내려 가서 집 청소도 좀 해 놓고 동네 분들에게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우리가 계획한대로 집사람과 나는 3월20일(목) 이른 아침에 승용차로 서울을 출발하여 옥종 할인 마트에서 술과 음료수, 음식 만들 재료를 사서 잔뜩 차에 싣고 시골집에 도착한 후 부지런히 대청소를 하였다. 그리고 시골에서 살고 계시는 규필형님과 상의를 하여 내일은 돼지라도 한 마리 잡아 동네 분들에게 대접할 계획 까지 세워두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7시경 어머니가 몇 시에 출발 하시나 싶어 개봉동 집으로 전화를 하였더니 규석이 동생이 전화를 받았다.
규석이 동생은 “어머니 시골 가시기는 다 틀렸어요 지금 꼼짝도 못하시고 병원으로 모시고가서 검사부터 받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는 것 이었다.
너무 뜻밖의 소리에 정신이 멍해졌을 뿐이다.
규석이 동생의 이야기로는 이옥희 간병사가 화장실 간 사이 어머니가 혼자 일어나 보시려 하다가 침대에서 떨어져 꼼짝도 못하고 아파 하신다고 하였다.
진우동생이 삼성동 집에서 출발하여 어머니를 모시러 개봉동으로 오고 있는 중에 이런 사고가 난 것이다.
이런 일을 두고 , 좋은 일에는 마가 끼인다는 “호사다라” 했던가?
어머니는 여의도 성모병원 910호에 입원을 하셨고, 곧 바로 정형외과에서 절단된 고관절 뼈를 인공뼈로 교체하는 수술을 받으시게 되었다.
나와 집사람은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대충 집을 정리한 후 바로 서울로 되돌아 갔다.
*다음에 계속.
14회
중국의 유명한 시인 도연명은 歸去來辭(귀거래사)에서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새가 날다 지치면 둥지로 돌아온다는 은유적 표현으로 고향을 챙겼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 사는 누구에게나 고향은 항시 따뜻한 어머니의 품 안 같고 마음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는 추억과 향수가 서려 있는 곳이다. . 그리고 고향의 시골 집은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토담집 오두막집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고 언제나 가고 싶은 보금자리인 것이다.
뇌수술을 받으신 어머니도 또 다른 고관절수술의 후유증과 쉽게 회복이 되지 않는 폐렴의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한시도 시골집을 잊지 못하셨다. 그때는 정신이 오락 가락 하시기도 하였지만 정신이 돌아 오시면 시골 집에 가자고 졸으시고 시골 이야기만 꺼내셨다.
지난 세월, 한때는 완고한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가 있었고, 한시도 쉴 틈이 없는 농사일과 이웃과 더불어 약주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술시중이 하루에도 몇 차례인지 손꼽아 세어 보지 않으면 헷갈릴 정도로 빈번하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에는 절간 같은 큰 집을 혼자서 지켜야 한다는 종부(宗婦)의 의무감과 공허와 고독으로 깊은 잠을 한번도 제대로 못 주무셨겠지만, 그래도 살아오신 시골집이 그립고 좋으셨던 것 같다.
어머니가 시골집으로 다시 돌아 오신 것은 1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이후이다.
세월은 정말 눈 깜작 할 순간에 지나간다.
어떤 사람은 유수 같다고 하기도 하고, 화살같이 빠르다고 하기도 하였다.
요즈음에는 세월 가는 것을 자동차 속도에 비유하기도 하는 것 같다, 50살 먹은 사람은 50km속도로 가고 60살은 60km 70살은 70km 속도로 간다고 한다.
환갑지낸 나이가 되고 보니, 젊을 때가 좋고 나름대로 꿈과 희망을 갖고 열심히 일할 때가 좋았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한시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
“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己秋聲( 소년이노 학난성 일촌광음 불가경 미학지당춘초몽 계전오엽기추성) 뜻은 대충 이러하다. 소년은 늙기쉽고 배움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연못가에 봄풀이 돋아나는 것을 알기도 전에 뜰 앞의 오동잎이 벌써 가을 소리를 전하는 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월가는 것은 아쉽고 초조하기는 마찬가지 였던 것 같다.
어머니가 고향에 내려오신 때를 맞추어 시골에 내려와 모여있는 가족들과 같이 2003년7월31일(목) 어머니를 모시고 사천 비토섬에 가서 생선회도 먹고 매운탕으로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원준네 식구들은 그길로 바로 사천공항으로 나가 4시 비행기로 서울로 올라 간 것으로 기억이 된다.
남해안의 바다는 군데 군데 솟구쳐 있는 바위섬과 어울려 정말 아름답다.
파란 바다물길에 마음을 풀어 놓으면 답답한 가슴도 확 트이는 것 같고 물빠진 갯벌에서 조개잡이 하는 꿈 많은 10살 박이 소년 소녀 같이 천진해지고 센티멘털해진다.
평화롭고 자유롭게 바다위를 날아 다니는 갈매기가 부럽고, 갈매기가 되어 바다위 저 푸른 창공을 한없이 날아 보고 싶어 진다.
아버지가 노량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근무하실 때 여름 방학때면 동생들과 노량 앞 바다에서 조개 잡고 게도 잡으면서 이은상씨가 작곡한 “내고향 남쪽 바다”를 등대불 반짝이는 바위에 올라 신바람나게 노래 불렀던 기억이 생생해진다.
그때가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일 것으로 기억 된다.
그런데 나는 금년이 환갑 나이 이고, 규인이 동생과 진우 동생은 50중반을 넘어 섰다.
세월가는 것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요즈음은 남은 인생을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지 고민이 많이 된다.
어머니와 같이 시골집에서 나흘을 보내고 8월1일(금) 아트콤 승용차 편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규옥여동생, 노수란 간병사, 내가 동승하여 서울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시골집을 나섰다.
옥종을 지나 두양마을 초입에 다달았을 때 어머니는 갑자기 은사 외가 먼당집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하시면서 차를 돌려 은사로 가자고 하셨다.
어머니는 은사 친정이 많이 그리우신 것 같았다.
은사 정골마을에는 외조부님 외조모님 산소가 있고, 어머니 당숙모이신 먼당집 할머니(그때연세가 88세)와 재종동생이신 병도 아재가 살고 계셨다.
외갓댁은 외 조부님이 돌아가신후 모두가 서울과 부산으로 이사를 가셨고, 나도 그곳 가본 것이 20년도 훨씬 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차를 돌려 은사로 향하였다.
학교다닐때 욋갓집에 다니던 기억으로 가는 길은 대충 알 것 같았지만, 동네 진입로를 잘 못 들어서 밤나무 산길 다니는 협소한 경운기길로 들어 서서 차를 돌리지 못해 김기사가 진땀을 빼기도 하였다.
간신히 돌아나와 자동차는 새로 건축한 병도 아재 집앞에 세워두었지만, 먼당집 할머니를 보러가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대나무밭 뒤 언덕 비탈길로 나있는 먼당집 올라가는 길은 어머니의 휠체어도 갈수 없는 옛날 길 그대로 였다.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한사람이 겨우 걸어서 다닐수 있는 옛날 오솔길 그대로이고 조금도 넓이거나 손본 것이 없었다.
나는 궁여지책으로 먼당집으로 올라가 할머니를 엎고 병도 아재집으로 내려와 어머니와 만나게 해드렸다.
두 노인네가 얼마나 반가워 하고 기뻐하시는지 모른다. 정말 여기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의 이산가족의 재회의 기분을 알 것만 같았다.
먼당집 할머니를 100M거리나 되는 내리막길을 엎고 단순에 내려 왔더니 온몸엔 땀이 흔근히 배였다. 할머니는 젊은이 못지않게 육중하셔 단단히 혼이 났다.
어머니는 휠체어에 앉아 바라만 보시고, 규옥이 동생과 나는 외조부님과 외할머니 산소에 들려 성묘를 하였다. 산소의 잔디는 잡 풀 한점 없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염창동 석희 형님이 산소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고 계셔서 그런 것 같았다.
병도 아재집에서 참으로 내어온 라면을 먹은후 점심식사 하고 가라는 만류를 뿌리치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약없는 하직을 하고 은사 정골 마을을 나왔다.
천안에 들려 규옥이 동생을 내려 놓고 오후8시경 개봉동 집에 당도하였다
9월10-12일 추석연휴를 보내고 9월15일(월) 어머니는 성모병원 이빈후과 주치의 김형태 과장이 새로 오픈한 압구정동 김형태 이빈후과에서 진료를 받으시고 가까이 사는 원준네에서 주무시고 다음날인 9월16일 천안 재홍이 네로 노수란 간병사와 같이 내려 가셨다.
추석명절 마지막휴무날인 12일에는 태풍매미가 남해안을 통과하는 바람에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시골에는 아버지 산소 옆 큰 소나무도 뿌리채 뽑혀 넘어졌고 여기저기 도로도 많이 파손 되었다..
9월24일 집사람과 나는 승용차를 운전하고 천안재홍이네에 들려 어머니를 모시고 노수란 간병사와 같이 시골로 내려갔다.
어머니와 노수란 간병사는 시골에 남으시고 나와 집사람은 태풍매미 피 해를 대충 수습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0월14일(토) 신길동 제사에 때맞추어 규석이 동생이 시골내려가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왔다.
어머니는 개봉동 집에서 여의도 성모병원에 수시로 들려 진료를 받으시다가 시제도 가까워지고 하여 10월17일(금)아트콤 김기사가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 내려 가셨다.
11월9일(일) 시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시골 내려가 진주 도립병원에 들려 재종 매제 김병오군의 영전에 문상하고,경운기에 손가락을 절단하여 경상대학병원 612호에 입원해 있는 김백수형을 병문안 하였다. 김병오매제는 중대는 틀리지만 문산에서 같은 대대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너무 빨리 세상을 하직한 것 같아 무척 서운하고 마음이 편치가 않았고, 백수형은 우리 논농사와 밤나무 산을 관리하고 있는데 이렇게 사고를 당하여 앞으로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노수란 간병사로 부터 어머니 목에서 피가 나온다고는 전화연락을 받은 11월17일 아트콤 김기사가 시골로 내려가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왔다.
서울에 도착한 즉시 어머니는 여의도성모병원 1014호에 입원하셨고, 여러가지 종합검사를 받으셨다.
혹시 폐에 무슨 이상이라도 생겼나 해서 걱정들을 많이 하였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고,
11월23일(일) 노수란 간병사와 이청송씨가 병원에서 교대를 하였다.
** 다음에 계속***
첫댓글 질문요~~~~~~~~~~~~반다지...가 머지요?
반닫이를 잘못 썼군요 바로 고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경황이 없었는데 그때그때 상황들을 기록을 잘 해 주셔 5년전 일들이 어제 일어난 것 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5년전 이때쯤에는 어머니께서 사경을 헤매고 계실 시간입니다, 지금도 옆에 도움이 필요하시지만 온전하게 예전처럼 대화 하실 수 있어 천만댜행입니다,, 모두들 수고 많으십니다, 큰오빠도 이젠 건강을 챙겨야 할 연세가 됐으니 체중조절에 각별히 신경 쓰세요....^^ 이참에 문필가로 데뷔 함 해 보시지요??? ㅎㅎㅎ
반닫이라고 해도 먼지 모르겠는데요??????? 무지한 죄입니다!!!-.-
반닫이가 뭔고 하니 ... 세대차이 느끼게 하구마~~ㅎㅎㅎ 말그대로 반쪽만 닫히는 게 반닫이지.... 궤짝 같은 거 말이야.... 맞지요?? 일심님??
반닫이가 시골 사랑채에 2개 있습니다. 카페지기 설명 맞아요
ㅎㅎㅎㅎㅎㅎㅎ참나~ 정구띠한테 그걸 반닫이라고 그러나???라고 물었더니...정구띠왈~~"그럼 오온~닫이라그러나?" ㅎㅎㅎ
반닫이란,,,지금은 시집갈때 장농을해가는데 옛날엔지금 장농같이 문이활짝열리는게아니고 문이반쪽만열리는 궤짝(옷을넣을수있는 네모난나무박스에 국화꽃이나 여러종류의문양으로된 장식을박은것, 오래된 좋은장식으로된것은제법비쌈)이정도면 알긋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