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다 망한 동네” 가슴 아픈 역사…화성 제암교회는 어떻게 부활했나
‘예수 믿다 망한 동네’서 독립정신 기리는 사적, 기념관, 기념공원
김한수 / 조선일보 종교전문기자
제암교회 강신범 원로목사가 3.1운동 순국 기념탑 앞에서 제암리 교회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한수 기자
1919년 4월 15일 경기 화성 향남면 제암리에 일본 육군 보병 제79연대 아리타 중위는 보병 11명과 순사 1명을 인솔해 들어왔다. 그는 마을의 15세 이상 성인 남성들은 제암리 감리교회로 모이라고 지시했다.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모이지 않는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남성 21명이 모이자 교회를 둘러싸고 있던 일본군은 일제히 창문을 통해 사격을 시작했다. 문으로 탈출하는 이들에게도 총탄세례를 퍼부었다. 총성에 놀라 교회로 달려온 부녀자 2명도 변을 당했다. 사격 후 일본군은 짚더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일본군은 이어 건너편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을 총살했다. 1919년 3월 31일 화성 발안장날 시위 등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일본군이 벌인 만행, ‘제암리 사건’이다.
제암리 학살 사건 때 희생된 교인들의 무덤이 있는 언덕으로 향하는 길엔 '지금 바로 독립을 외칠 때요' '태극기를 들어올리라!'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김한수 기자
‘제암리 학살’ 이후 수원지역의 만세시위는 급격히 줄었다. 그러나 일제는 세계 여론 악화라는 더 큰 문제를 직면하게 됐다. 교회에서 교인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은 선교사들에 의해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석호필 박사’로 잘 알려진 스코필드 선교사는 사건 후 현장을 찾았고, 폐허가 된 현장 사진까지 직접 촬영해 ‘제암리/수촌리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세계에 알렸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일제히 움직이자 부담을 느낀 조선 총독은 4월 20일 제암리 현장을 찾아 복구비로 1500원을 내놓기도 했다고 한다.
경기 화성 제암교회 앞 기념공원에 있는 석호필 선교사 동상. 자전거를 타고 와서 카메라를 든 모습이다. 석호필 선교사는 제암리 학살의 진상을 세계에 알렸다. /김한수 기자
제암리 사건 직후 참상을 세계에 알린 이가 석호필 선교사였다면, 현대에 와서 사건이 잊혀지지 않고 기억될 수 있도록 노력한 이는 제암교회 강신범(81) 원로 목사이다. 1980년 담임목사로 부임해 2021년 정년퇴임한 강 목사는 유해 발굴과 기념관·기념공원 조성 등에 앞장섰다.
한교총 순례단이 지난 5일 찾았을 때 제암교회 일대는 ‘잘 정리된 공원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강 목사가 담임목사를 맡던 시절 이 일대를 선조들의 독립정신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든 덕분이었다.
“1980년 담임목사로 부임해서 제가 31대 담임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3,1이란 숫자가 3·1운동과 운명처럼 묶였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