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동은 독보적인 시사만화가다. 한국 시사만화는 박재동 이전과 박재동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박재동이 시사만화계에서 `독보' 자리를 얻은 계기는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시사만평 `한겨레 그림판' 덕분이다. 박재동은 1988년 창간호부터 근 8년이나 만평을 연재하면서 세상을 촌철살인했고 세상의 환호를 자아냈다.
"박재동 아버지가 전포동에서 만화방 했다 아인교." 한국 시사만화를 양분하는 박재동인데도 그가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서면과 맞닿은 전포동 사람임을 아는 이는 더욱 드물다. 전포동 성북초등학교 인근 만화방 아들임을 아는 이는 더더욱 드물다. 국제신문 남차우 선임기자와 만화가 고우영 이야기를 하다가 박재동 이야기가 나왔고 전포동 시절 이야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저녁 먹는 자리에서였다.
박재동은 1952년 울산 태생이다. 울산에서 초등학교 교편을 잡던 부친이 격무로 각혈하다 폐결핵으로 악화되면서 교단을 떠나 1959년 부산 전포동로 터전을 옮긴다. 박재동은 성북초등 3학년으로 편입한다. 형제는 각각 4년 터울인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 사모님 소리를 듣던 모친과 병약한 부친은 가게를 내어 생계를 꾸린다. 풀빵과 오뎅, 팥빙수, 떡볶이, 연탄배달, 그리고 만화방 겸업이었다.
"저에게 그 곳은 보물섬 같은 곳이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 하루에 20여 권의 만화책을 읽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작년 2월 7일 박재동은 모교 성북초등에서 강연 겸 사인회를 가졌다. 한참 후배인 62회 졸업생 대상 강연이었다. 그는 15회다. 이 날 강연에서도 그랬지만 어느 자리에서든 박재동은 선친이 만홧가게를 했으며 거기서 본 만화들이 삶의 자양분이 되었음을 감추지 않는다.
`아버지의 일기장'에도 그런 내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부친이 생전에 적은 수십 권 일기장을 작년 5월 단행본으로 펴낸 게 `아버지의 일기장'이다. 부산에 와서 가게를 연 지 10여 년이 지난 1971년부터 타계한 1989년까지 일기를 망라한 이 책에서도 박재동 삶의 속살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책 곳곳에서 굳은살 박인 삶의 속살을 접한다. 한 대목이다.
`빵을 굽다가도 연탄 주문이 오면 배달을 해야 했다. 풀빵 팔다 주문 오면 연탄 배달을 가고, 돌아와 풀빵을 팔았다. (중략) 그런데 장사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집주인 아주머니가 이사를 간다고 우리에게 자기가 경영하던 만홧가게를 인수받으라고 했다. 우리는 `만'자도 모른 채 만홧가게를 인수받아 칸막이를 헐고 가게를 넓혀서 장사를 시작했다. 가게 이름은 문예당이었다.'
공부는 잘 했다. 초등학교 전교 수석을 차지한 적도 있고 중학교는 일류였던 부산중학교로 갔다. 가게 봐 준 삯이려니 여기고 서랍에서 약간의 돈을 꺼내 극장을 거의 매일 들락거리기도 했다. 서면에 있던 동보, 태화극장이 단골이었다. 미술부장을 맡은 3학년에는 그림에 전념하느라 전교 꼴찌를 경험하기도 했다. 꼴찌를 하자 아버지 말씀이 걸작이다. "1등이 있으면 꼴찌도 있는 법이지."
이후 박재동은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 재수해서 부산고교에 들어갔고 1972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부산 고교생 유일하게 합격한다. 한겨레신문 시사만평 8년 연재, 2009년 한국만화 100주년위원회 공동위원장과 부천국제만화축제 운영위원장을 지냈다.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로 재직한다. 박재동 이름으로 나온 책과 애니메이션을 찾아보는 즐거움은 꽤 크다. 박재동 손때가 묻고 눈때가 묻은 전포동 거리를 찾아보는 즐거움도 꽤 크지 싶다. dgs11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