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국사는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건축 초인 1395년(태조 4), 조선 왕조의 개창에 큰 역할을 했던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 자초(自超)가 전각을 지어 약사여래를 봉안하고 약사사(藥師寺)라 한 것이 창건의 시작이다. 절이 창건된 후 왕실의 지원과 협조가 계속 이어져 1468년(세조 14)에는 왕의 시주로 절을 중창하였다. 약사사가 지금의 이름인 봉국사로 불리게 된 것은 조선시대 중기의 일이다. 1669년(현종 10) 태조의 두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1398) 강씨(康氏)의 묘를 능묘로 복원하면서 바뀌게 되었다. 신덕 왕후의 묘소 정릉(貞陵)은 본래 지금의 서울시 중구 정동 부근에 있었으나 태조가 제8왕자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복형인 방원(芳違)이 이에 앙심을 품고 있다가 왕위에 올라 1409년(태종 9)에 정릉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버렸다. 태종은 능을 옳긴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정자각을 허물고 능묘의 시설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이렇게 해서 정릉은 왕비의 능이라기보다는 주인 없는 묘지처럼 수백 년간 황폐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이 정릉을 복원하면서 정자각․안향청․전례청 등을 새로 세웠는데, 이때 신덕 왕후의 명복을 비는 왕실의 원당으로서 약사사를 지정하고 나라를 받든다는 뜻에서 봉국사라 고쳐 불렀던 것이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의 와중에서 절이 불에 타고, 이듬해(1883)에 한계(漢溪)·덕운(德雲) 두 스님이 힘을 모아 중건하였다. 1885년 3월 명부전에 지장탱화를 조성하였는데 금어는 금곡(金谷)이고 증명은 대응(大應) 스님이었다. 1898년에는 운담(雲潭)·영암(永庵)·취봉(翠峰) 스님 등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시왕도를 함께 봉안하였다. 계속해서 1913년에는 주지 종능(宗能) 스님과 화주 월하봉연(月荷奉蓮) 스님이 칠성각을 중건하였다. 1938년에는 화주 금파(錦坡) 스님이 조인섭(趙寅燮)의 시주를 받아 염불당을 새로 지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1979년 10월에 주지 현근(玄根) 스님이 절 입구에 일음루(一音樓)를 지었다. 1986년 산신각을 중수하였고, 만월보전에 신중탱을 봉안하고, 1991년 천불전에 신중탱을 모셨다. 1994년 3월 천불전 아래에 안심당을 새로 마련하여 스님들의 수행정진과 신도들의 신행처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같은 해에는 주지 선관 스님과 신도회 등 봉국사 전 대중이 힘을 모아 경내에 천여 그루의 나무와 꽃을 심어 도량을 일신하였다.
|
첫댓글 좋은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