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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벗 500호
월간 교사의벗이 9월호로 지령 500호를 맞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리고, 감사는 한국교회와 독자가 되어 주신 교사 여러분, 본지를 후원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지령(誌齡) 500호의 역사
한국교회 교사들의 벗이 되어 온 교사의벗
월간 교사의벗이 9월호로 지령(誌齡) 500호를 맞았다. “창간호가 폐간호가 된다.”는 속설(俗說)까지 등장하는 잡지계에 500호는 일반 출판에도 흔치 않는 일이다.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과 한국교회에 드리며 지난 세월의 역사를 여기에 정리해 본다.
1. ‘주일학교 교지’ 시대
대한예수교 장로회 전국주일학교연합회 제7회 정기총회에서 동(同) 연합회의 회지로 <주일학교 교지>를 발행하기로 가결하였다. 이 회의는 1961년 9월에 부산의 중앙교회당에서 회집 되었는데 전국에 있는 주일학교 교사들의 자질 향상과 교육 자료의 제공으로서 1년에 세 번 발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결과, 이듬해인 1962년에 <주일학교 교지>가 탄생되었다. 이 잡지는 팸플릿 형태로 총 8쪽(표지 포함)의 크기였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월간 <교사의벗>의 전신(前身)이라 하겠다.
전국주일학교연합회에서는 4개월에 한 번 꼴로 주일학교 교지(校誌)를 발행하고자 계획하였으나 발행에 대한 호응이 의외로 열렬해서 당초의 계획보다 호수를 늘렸다. 그러므로 해를 넘긴 1963년 4월에는 여덟 번째의 호수를 내게 되었다.
이에 고무된 전국주일학교연합회에서는 1963년도의 사업계획을 확정할 때는 연 6회의 발행으로 결정을 보았다. 이때는 1회 발행에 1,000부씩 인쇄하였다. 전국주일학교연합회의 총무였던 장영해 장로가 회지의 발행인이었고, 장영춘 목사가 당시에 음영분과위원으로서 편집을 맡았었다.
그런데 <주일학교 교지>는 의욕대로 발행되지 못하였다. 제7호를 낸 1963년 4월호 이후부터는 7개월이 지나도록 내지 못하였다. 정기간행물은 열정만으로 계속될 수는 없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2월에 가서야 제8호가 세상에 나왔다. 전국주일학교연합회 9대 회장이던 이인구 장로가 회장 재임(在任)의 마지막 사업으로 펴낸 것이다. <주일학교 교지>를 발행하자는 의도만큼 재정적인 뒷받침이 마련되지 않아서 순조롭게 펴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2. ‘주일학교 교사’ 시대
총회신학교 기독교교육과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기독교교육연구회가 조직되었다. 명신홍, 차남진, 김득룡 교수 등이 일선에 서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 산하 기독교교육연구에 박차를 가하기로 하고 연구회를 조직 운영하게 된 것이다. 한국기독교교육연구회에서는 동 연구회의 연구 결과가 “교회교육의 새 원리로 정리되고, 교과과정으로 발전되고, 프로그램화되고 교재가 출판되어 교육현장에 제공되어야”할 필요성을 느껴 교사양성 통신강좌를 출판하였다.
이어서 한국기독교교육연구회는 전국주일학교연합회가 순조롭지 못하게 발행하고 있는 <주일학교 교지>를 인수, 발행하기로 하고 제9호를 <주일학교 교사>라는 제호로 발행하게 되었다. 결국 전국주일학교연합회가 의욕적 사업으로 내놓은 월간지의 꿈은 제8호로 마감하고 편집권을 한국기독교교육연구회에 위임하게 된 것이다. 이때가 1964년 2월이었다. 한국기독교교육연구회는 결성된 지 두 달 만에 두 가지의 출판물을 한국교회에 내놓게 되었다.
그 후, 제호가 바뀐 <주일학교 교사>가 두 번째 발행되던 동년 3월에는 전국주일학교연합회가 아예 이 일에서 손을 떼었다. 한국기독교교육연구회에서 발행의 업무를 맡고, 전국주일학교연합회에서는 ‘사용해’주는(보급하는 일) 역할만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주일학교 교사>는 발행처가 바뀌게 되었다. 타블로이드판에 총 8쪽의 <주일학교 교사>는 매월 발행되어 4호까지 내었다.
제호가 바뀌었으므로 발행 호수도 달리 하였다. 한국기독교교육연구회에서는 팸플릿의 형태보다는 교육 잡지로 출판하기 위하여 공보부에 정기간행물 등록을 신청하였다. 동 연구회에서는 <주일학교 교사>를 잡지로 만들어 잡지사의 형태로 운영하면서 출판할 계획을 세웠다. <주일학교 교사>는 제4호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3. ‘주일학교 교사의벗’
<주일학교 교지>에서 시작된 본지는 1964년 6월 22일 <주일학교 교사의벗>이라는 제호로 공보부로부터 등록을 받았다. 이때부터 오늘의 <교사의벗>이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사실, <교사의벗> 지령 1호는 13번째의 호수를 기록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기독교교육연구회의 회장이었던 명신홍 박사의 말처럼 “상업적인 면에서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사업 속에서 <주일학교 교사의벗>은 발행되었다. 그렇게 되자 자연히 말할 수 없는 경제적인 타격으로 월간이면서도 제 달에 제 호수를 내놓지 못하는 처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어느 달에는 ‘합병호’를 내어서 겨우 체면치레를 하였다. 기실 합병호는 본지의 생명을 이어가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륙배판, 16쪽의 크기를 가진 잡지였으나 턱없이 부족한 재원이 종사자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최초에는 사무실 한 평과 전화기 한 대가 없어서” 총회사무실이 있는 건물 한편에 억지로 사무실을 만들 정도였다. 그러던 중 1966년 9월에 공보부로부터 폐간조처가 내려졌다. 석 달이 지난 후, 다시 공보부로부터 출판인가를 받기까지의 그 기간은 동공의 시간이었다. 당시, 발행에 종사했던 이들은 암울한 시대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1966년 12월호는 새로 태어나는 본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만성적인 적자에서는 헤어날 수가 없었다. 조판을 해놓고도 종이를 넣지 못해서 인쇄를 하지 못하는가 하면, 제본한 것을 찾지 못하여 제때에 잡지가 발송되지 않아 애태우던 때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인쇄소를 운영하던 옥병구 집사가 무료로 인쇄를 맡아 주었고, 동 연구회에서는 그를 사장으로 위촉하였다. 이 당시 사무실은 서울시 중구 장충동에 있는 장충교회당 하층에 있었다.
본지는 누적되는 부채와 매달 초래하는 결손을 견디다 못하여 당시의 발행인이었던 김득룡 목사는 발행권을 임승원 목사에게 양도하였다. 김득룡 목사는 9년 동안 본지를 발행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임승원 목사는 본지를 인수하여 잡지의 내용도 향상시키고, 디자인을 비롯하여 외양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교사의벗>이 월간지로 자리매김을 한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임승원 목사가 십오 년 가까이 본지를 발행해 오다가 건강상의 문제로 최승국 장로․강정훈 목사에게 발행권을 넘기게 되었다. 이때가 1985년 4월이었다. 두 사람은 ‘혁신 창간호’의 기치 아래 본지를 발행하였다. 74쪽이었던 <주일학교 교사의벗>은 점점 증면이 되어 200쪽 가까운 책으로 발간되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4. 한국기독교교육대상과 교사의벗
본지에서는 한국교회의 교육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다는 사명감에서 1987년 1월에 한국기독교교육
대상(大賞)을 제정하였다. 본지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무릅쓰고 본 상(賞)을 제정한 것은 바람직한 교사상(像)을 정립하자는 취지에서였다.
다음 해 1월에 한국기독교교육대상의 제1회 수상자를 발표하였다. 본지에서는 그 이후 해마다 본 상의 수상자들을 발표하고 시상하였다. 본상 및 모범상의 수상자를 발표해 그동안 묵묵히 교회교육을 위해 일해오던 교사들의 선행이 전국 교회에 알려지게 되었고 다른 교사들에게는 도전이 되기도 했다.
큰 기대와 함께 출발했던 교육대상은 운영상의 문제점과 타천(他薦)보다는 자천(自薦)의 응모방법의 문제 때문에 본래의 취지가 퇴색됨으로 제5회를 끝으로 일시 중단되었고 지금까지 부활되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1989년 4월호. 최승국 장로와 함께 운영에 참여하고 있던 강정훈 목사가 발행의 책임을 지고 전면에 나섰고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다. 동자동에서 신월동으로⋯, 다시 화곡동 개인주택으로 이어지는 사무실의 이전은 본지가 아이엠에프의 체제 하에서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실례가 될 것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적자가 쌓여갔지만 하나님께서는 본지를 버리지 않으셨다. 1997년 11월에 평서노회를 중심으로 하는 목회자들이 <교사의벗> 후원회를 결성하고 본지를 돕기 시작한 것이다. 후원회는 회장에 조종제 목사(성문교회)를, 상임총무에 김재호 목사(동산교회)를 선출하고 오늘까지 본지를 적극적으로 후원해 오고 있다. 그분들의 협력과 지원이 없었다면 본지는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그분들의 고마움을 여기에 기록해 둔다.
5.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교사의벗>. 1962년 <주일학교교지>로 발행되기 시작하여 50여 년에 이르고 있는 본지는 1992년 5월호로 지령 300호, 2001년 7월호로 지령 400호, 2010년 9월호로 지령 500호를 내게 된 것이다. 온라인 시대에 맞게 2006년 9월에는 <교사의벗> 카페를 개설했다. 하지만 <교사의벗> 카페는 본지를 운영하는데 오히려 재정적인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기에 활발하게 운영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장차는 유료 온라인오프라인 <교사의벗>으로 더욱 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월간 <교사의벗> 지령 500호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역대 발행인들의 희생과 열정이 있었고 그동안 본지를 위해 애쓰고 수고한 편집장들과 직원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분들에 대한 고마움도 여기에 기록해 둔다.
<교사의벗>. 이제 통권 500호를 새로운 시작으로 새로운 또 50년을 1,000호를 향하여 재출발을 다짐해 본다.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들도 많고 어려운 고비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지금까지 도와주신 ‘여호와 이레’의 믿음으로 다시 앞날을 위해 재출발하기로 한다.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면 <교사의벗>은 한국교회와 함께 했던 날들이었다. 한국교회의 부흥의 한 귀퉁이에 <교사의벗>은 남아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교사들의 마음속에 좋은 교육의 ‘벗’으로 남겨지기를 기대한다.
비록 인터넷시대를 맞아 종이잡지들이 고전하고 독자들이 편리한 인터넷시장으로 이동하고 있지만 그래도 종이잡지가 감당해야할 부분은 분명 있다. 종이신문이 활성화될 때 인터넷신문이 더욱 다양화되고 풍부한 자료들로 독자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 종이신문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면 인터넷신문 역시 그 기사와 자료들이 빈약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문명의 후퇴가 된다. 마찬가지로, 종이잡지가 활성화될 때 인터넷 자료들도 풍부해 진다.
월간 <교사의벗>은 지금 개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지만 <교사의벗>은 한국교회의 것이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교사의벗>을 더욱 활성화시키고 발전시키고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잡지로 만들어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월간 <교사의벗>의 지난 50년을 여기에 정리해 둔다.
한국교회에 드리는 발행인의 편지
신앙적 세대교체, 한국교회의 책임입니다.
강정훈 목사 / 발행인
본지가 이번 호로 지령(誌齡) 500호를 맞았습니다. 제가 전임 발행자 임승원 목사님으로부터 교사의벗 발행권을 넘겨받은 것은 1985년 3월이었고, 사전에 별 준비도 없이 4월호부터 발행했습니다. 직원은 여직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여직원이 지금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고마움을 여기에 기록해 둡니다. 그가 없었으면 교사의벗도 이미 제 손에서 멀리 떠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인수할 때의 당시 통권 호수는 221호입니다. 김득룡 목사님, 임승원 목사님을 비롯한 몇 분이 220권을 만들었고 제가 지금까지 280권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600호까지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500호를 발간하면서 그동안 왜 제가 이 일에 매달려왔는가? 하는 장문(長文)의 이야기로 기념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400호의 기념사에서 했던 이야기입니다. 피치 못하게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하도록 하겠습니다.
임승원 목사님을 만나다
저는 서귀포의 바닷가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었습니다. 시골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책이 좋았고 회지를 만드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문서선교의 꿈을 안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총신대학교 대학부 3학년이었을 때 교사의벗 발행인이던 임승원 목사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강의가 끝난 어느 날 목사님을 찾아뵙고 저의 비전을 말씀드렸습니다. 문서선교 지망생이다, 교사의벗 편집부에서 일하게 해 달라…, 뭐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목사님께서 지금은 편집부원들이 있으니 교회를 출석하다가 기회가 주어지면 일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현대교회로 나가게 되었는데 유․초등부 교역자가 갑자기 사임하는 바람에 제가 그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출애굽사건을 통해 비전을 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여 년의 포로생활을 마감하고 애굽을 탈출하게 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40여 년을 헤매었습니다. 40여 년을 걸려야 건널 수 있는 광야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루에 10km만 걸어도 1년이면 넉넉히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40여 년이 걸렸습니다. 왜? 그것이 오늘 저에게 교사의벗이 있게 된 축복의 물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건너는 데 40여 년의 세월이 소용되었다는 것이 마음에서 영 떠나지 않았습니다. 40여 년 걸리는 길을 사흘에 건넜다는 것도 기적이라면, 사흘이면 갈 수 있는 길을 40여 년이나 걸렸다는 것은 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출애굽 사건을 대하는데 이것이 항상 의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했기에 40여 년이나 소요되었을까?’
사람들은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라고만 간단히 말합니다. 이것은 해답은 될 수 있어도 나를 이해시키는 데에는 부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40년을 허락하셨을까? 어느 날 나름대로 해석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광야의 방황과 재앙, 한 세대의 전멸(全滅)을 가져온 광야의 죽음은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로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세대교체라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광야는 세대교체를 위한 장소
가나안 일곱 원주민들은 당시 인류 가운데 가장 부도덕한 민족이었습니다. 레위기 18장에서 20장은 이들의 풍속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근친상간(近親相姦. 6-21절), 동성애(同性愛 22절), 짐승과의 성행위(23절), 인신제사(21절), 신접한 무당들이 많았습니다(레 20:6).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혀 훈련되지 않고 며칠 혹은 몇 달 만에 가나안에 입성했다면 그들은 원주민들에게 먹히고, 흡수되고, 가나안의 제8민족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가나안의 제 8원주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가나안의 일개 부족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수혜자들이고, 세상을 구원하고자 세우신 제사장 나라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구별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구원 사업은 그들을 통해서 성취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광야 40년의 고된 연단과 훈련을 통해서 연령의 세대교체는 물론 신앙의 세대교체를 통해서 새 민족을 만드셨고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세울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광야 40년의 훈련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는, 홍해 앞에서 보여준 부모 세대의 불신앙적 모습과 요단강 앞에서 보여준 자식 세대의 신앙적인 모습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통한 한국교회 개혁
우리나라는 선교 1백년 만에 대(大)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부흥의 이면에는 어두움도 많았습니다. 샤머니즘, 유교주의적 사고, 분파주의, 배금주의 사상, 잘못된 은사운동, 교회의 율법적인 면, 신앙과 삶의 괴리현상… 이런 등등은 한국교회를 중증(重症) 환자로 만들어 갔습니다.
기성세대 갖고는 아무리 개혁을 외친다 해도 개혁은 힘들다고 판단했습니다. 다음세대를 키우고 그들로 인해 서서히 개혁이 되어야 진짜 개혁이 되는 것이지 아무리 위에서 개혁을 외쳐보아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습니다.
‘아이들을 키우자. 아이들을 통한 세대교체를 이루자!’
그때부터 저는 어린이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을 키우는 일은 교사교육을 수단으로 하는 것입니다. 임승원 목사님이 담임하는 현대교회에 있으면서 열심히 교사강습회의 강사로 나갔고, 틈만 있으면 지면에 글을 발표했습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당선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달아주신 날개였습니다. 동화작가가 되면서 많은 책들을 집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1985년 3월에 교사의벗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늘빛교회를 개척한 지 반 년도 못되었습니다. 32세. 교회 개척과 교사의벗 운영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지만 한국교회가 개혁되고 새로워질 수 있는 길은 신앙을 통한 세대교체 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로부터 2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저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단순히 ‘잡지쟁이’가 아닙니다. 문서선교의 일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한국교회를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스스로를 개혁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개혁되기를 원하는 ‘생각’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사의벗을 통하여 저와 같은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 한 분씩 늘어나고 다음세대를 키우는 일들을 나름대로 감당하고 있으면 한국교회의 내일은 미래가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때까지, 주님께서 이 소임(所任)을 거두어 가실 때까지는 지금처럼 묵묵히 이 사명을 감당하고 싶습니다.
물론 교사의벗은 앞으로 50년, 100년을 바라보며 달려가지만 완주(完走)를 기약할 수는 없습니다. 매월 한 권을 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필자들에게 원고에 빚지고 인쇄소나 여러 거래처에 본의 아니게 외상들이 누적되기도 합니다.
고맙습니다.
주일학교의 산 증인 표재환 목사님. 1년에 한 차례씩 꼭 교사의벗을 방문하시고 격려해 주신 다음… 식사라도 대접해 드린다면 손사래를 치고 나가십니다. 지금은 건강이 좋지 못해 거동을 못하시면 서도 연말이면 꼭 격려금을 보내주십니다. 너무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또 한 사람…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내 친구 최덕훈 목사님이 계십니다. 우리 교사의벗에 찾아와서 직원들에게(지금은 직원들이라고 말할 직원도 없지만….) 점심을 사주셨습니다. 매월마다 일정액을 도와주시며 사무실이 없던 우리들에게 교회의 내부시설에 교사의벗 사무실까지 장만해 주려던 동창입니다.
그분이 훌쩍 서울을 떠나 울산으로 가지만 아니했다면…, 그분이 훌쩍 울산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지만 않았어도 저는 든든한 후원자를 옆에 두면서 외롭지만 외로움을 덜 타면서 교사의벗을 발행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심광섭(박명주) 안수집사님. 남대문에 있는 굿모닝․크리스털안경원의 대표입니다. 교회를 개척하며 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남대문에서 열심히 사업을 했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0년의 세월을 우리 교사의벗 발간을 위해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번 돕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10년을 돕는다는 것은 특별한 우정과 사랑이 없으면 힘든 일입니다. 고마움을 여기에 기록해 둡니다.
우리교회의 박효민⋅박성민 집사님 형제. 그들은 정치컨설팅회사 <민기획>을 운영하면서 표지(表紙)와 목차(目次)를 꾸며주었습니다. 그분들이 바쁠 때 표지와 목차를 해달라고 주문하면서 정말 입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단 한 번이라도 뚱한 기색 없이 만들어서 보내 주었습니다. 교사의벗이 이 정도라도 깔끔한 표지의 옷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은교회 라도재 장로님. 오랜 세월동안 교회는 물론 개인으로도 후원해 오십니다. <성신기업사>를 운영하는 장로님은 교사의벗에 큰 관심을 가져주시면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전국주일학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했고 전국장로회 회장으로 이번에 당선된 것으로 그나마 축하하며 고마움을 마음을 전합니다.
교회교육문서선교회. 평서노회 중심으로 이루어진 본지 후원회입니다. 사실 그분들의 경제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본지는 여기까지 오는데 더 비굴해지고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도와주시는 여러 후원교회와 목사님 장로님들이 있어 교사의벗은 한번도 결호 없이 발행될 수 있었습니다.
늘빛교회 성도님들이 보여준 사랑과 도움, 개인후원회원들의 사랑도 감사합니다. 늘빛교회는 교사의벗과 함께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축복의 양(兩) 날개입니다.
쓰다보니, 참 두서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그만큼 500호가 너무 감격스러워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것들을 풀어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주절주절 늘어놓았으니 양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변함없는 기도와 애독을 기대합니다.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은 늘 저의 힘이요 사랑입니다. 그리고 자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덧붙이며 감사의 인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느헤미야 13:22).
500호 기념 전문가 좌담
“교사의벗은 교사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일시:2010년 8월 5일 오전 11시
장소:늘빛교회 회의실
참석자
한치호 목사/한국기독교문화 선교회 대표
정춘석 목사/신월 그리스도교회 담임. 그리스도대학교 강사
고상범 목사/주일학교사역자연구소 소장
강정훈 목사/사회. 본지 발행인
사회:우리 교사의벗이 지령 500호를 맞았습니다. 지령 500호를 맞으면서 본지 집필진이면서도 독자이셨던 목사님들을 모셨습니다. 오늘 교사의벗과 관계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한국교회의 교육전반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지령 500호를 위한 축하 한 마디를 듣고 싶은데요⋯ 본지 편집실장을 지냈던 한 목사님부터 먼저 말씀해 주세요.
한치호:의지(意志)보다는 감동에 의해 시작되는 기독교출판 풍토에서 500번째로 펴내게 되었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춘석:많은 잡지들이 시작은 하지만 계속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시대와 함께 역사를 기록하며 교회교육을 깨우는 사명을 감당해 오심을 축하드립니다.
고상범: 한국교회 주일학교를 염려하며 교사들을 위해 지금까지 이끌어 오늘날 500호를 맞음에 축하드립니다. (모두 다시 한 번 축하의 덕담을 나누다.)
사회: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목사님들은 언제 교사의벗을 만났나요?
고상범:제가 기억하기론 1980년부터 교사의벗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엔 주일학교 교사들이 볼만한 책들도 많지 않아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한치호:기억도 아스라한데, 1972년경이었을까. 주일학교 교사는 못 되고, 보조 교사로 임명을 받고, 기독교책방이란 곳을 처음으로 가보았는데(아마, 종로서적 정도로 기억되는데), 판매대에 누워있는 교사의벗을 보았지요. 그때는 일반학교의 교사 잡지로 보았었고, 그해 12월에 우편으로 발송되어 온 교사의벗을 보고, 주일학교 교사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춘석:저는 71년 즈음해서 만났던 것 같아요. 한 40년이 되었네요. 교사의벗을 발견하고 종이가 닳도록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회자:그랬군요. 저보다 오래된 독자들 같아요. 교사의벗이 한국교회에 끼친 공헌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한치호:지난 세월 한국교회의 전통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만 올라가도 학생반사, 보조반사라는 이름으로 주일학교를 섬기도록 하였고, 고등학생이 되면 정(正)교사로 임명을 받는 경우가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에서는 교사라고 임명만 해 놓고, 교사의 역할을 감당해내야 하는 것은 교사 자신의 몫이었습니다.
사실, 교사로서의 기본적인 신앙도 갖추어지지 않았고, 교사의 역할을 단지 공과의 내용을 가르치는 것으로 겨우 이해할 정도인 교사들에게 교사의 역할을 배우게 하는 잡지였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교사의벗은 한 달에 한 번씩 교사를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정춘석:교사의벗이 매월마다 발간되었던 것은 한국교회에 교회 교사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봅니다. 또한 교사들을 위해 오랜 세월 방대한 자료를 제공했고 교회교육의 방향을 제시, 선도(先導)했다고 봅니다.
고상범:교사의벗은 주일학교 사역을 하는 교사들의 나침판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한국교회와 주일학교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 해 주었습니다.
사회자:감사합니다. 사실 교사의벗을 발간하는 것은 매달마다 갈등입니다. 그럼에도 오늘 목사님들의 말씀을 들으니 힘이 납니다. (모두 웃음)
그러면, 이제부터는 교사의벗 밖의 교육이야기들을 나눠볼까요? 오늘날 주일학교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정춘석:아무래도 교사의 열정부족과 주변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점, 그리고 영적 관심의 부재(不在)가 아닐까요?
한치호:확실히 눈에 띠도록 교육환경은 발달했는데, 교사가 어린이, 또는 청소년들을 개인적으로 섬기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교육환경은 디지털 화되어 있지만, 교사와 어린이, 청소년의 섬김은 디지털 화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가슴과 가슴을 이어주는 것을 아날로그적이라고 보는데, 그것이 부족한 것을 느껴요.
고상범:많은 교사들이 흥미위주의 프로그램에 매달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눈, 귀, 입을 즐겁게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합니다. 물론 재미도 갖추어야 하지만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프로그램이 있어야겠고, 여기에 말씀과 기도가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보다는 너무 인간적인 방법들에 연연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회자:조금 전에 정 목사님께서 교육의 문제점은 교사의 열정 부족이라고 지적했는데 요즘 교사들의 헌신도(度)를 어떻게 보시나요?
고상범:주일학교 교사 가운데 과연 몇 %가 교사직을 본업(本業)이라고 생각할까요? 일부 교사는 주일 하루 나와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 시간짜리 강사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또 예전에 비해 교사의 열정이 많이 식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치호:아무래도 옛날 같지 않습니다. 교사강습회가 거의 사라지고 있고 참석자들도 억지로 끌려온 교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정춘석:제가 19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왔습니다. 옛날 교사들만 생각하고 왔는데 강습회나 세미나에 가보고 깜짝 놀랐어요. 20년 만에 교사들이 너무 달라진 거예요. 교사라는 자부심도 부족하고 교사들이 연구하지 않고 그냥 시키는 것만 하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적극적이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사회자:교사들을 보는 걱정의 마음은 동감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주일학교는 어떻게 가야한다고 생각합니까? 대안(代案) 같은 것⋯
한치호:교회를 경험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지금의 사역은 주일학교에 초점을 두고 있어요. 여기에는 당연히 공급자와 수요자에 대하여 집착하게 되는데, 우리가 경험해야 될 것은 하나님입니다. 어린이, 청소년들이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것으로 주일의 첫 시간을 시작하고, 교회공동체를 누리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정춘석:어린이세계에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어린이 자체가 변화되지 않으면 주일학교는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어린이 영적 각성운동을 위해 어린이 제자훈련, 품성훈련, 그리고 예배회복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고상범:교사가 살아야 주일학교가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교사의 영성과 전문성교육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또한 프로그램으로 승부를 걸기보다는 말씀과 기도로 승부를 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교사들에게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사회자:교육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한치호:대가를 지불하려는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 주일 오전 한 시간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교사들도 알아요. 그런데 주일 이외의 시간을 아이들에게 주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고, 그들과 같이 놀아주기도 하는 시간의 지불을 즐겁게 여겨야 합니다. 아이들을 만나서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가슴으로 안아주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섬김의 리더십이 요구됩니다. 우리가 언제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듯이.
고상범:지도자는 말씀과 삶이 같이 가야합니다. 학생들에게 늘 본(本)이 되고 영향력을 끼치는 교사가 되어야 하며 여기에 하나님이 나를 교사로 세워주셨다는 소명의식과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정춘석: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 및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낮은 자리에 서보는 것도 좋은 일이지요. 요즘 같은 시대에 교사를 하려면 변화에 대응하는 교육과정들을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자:교사들이 학생관리에서 힘써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요?
정춘석:목양(牧羊)과 기록 관리, 학생과 교사들 간에 좋은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고상범:학생관리 차원에서는 심방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가정심방, 학교심방, 전화심방, 편지심방 등은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이어 줄 수 있는 매개체입니다. 아무리 전도를 많이 해도 심방해서 관리하지 않으면 또 다시 학생들이 교회를 멀리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자:담임 목사님들에 대한 교육적 주문(主文)이 있다면⋯.
정춘석:저는 처음에는 학생들이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학생이 아니라 교사들이 문제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번 귀국이후의 생활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자:그럼, 지금은 누가 문제입니까?(모두 웃음)
정춘석:담임 목사입니다. 아무리 교사들이 교회교육에 헌신해도 담임 목사들의 시각이 변하지 않으면 참 힘듭니다. 목사님들이 앞장 서야 합니다. 교육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씨를 뿌리는 만큼 거두는 것이지요. 남들이 열심히 키워놓은 아이들을 예배당이나 근사하게 지어놓고 남의 양(羊)이나 훔쳐 올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 손으로 키워야 합니다.
고상범:담임 목사님은 주일학교 교장으로, 주일학교 교사와 교육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교사들이 열정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격려가 필요하고, 주일학교에 대한 투자는 미래를 위한 투자임을 깨닫고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한치호:당연하신 말씀들입니다. 교회교육은 결국 담임목사님입니다. 담임이 교육마인드가 없으면 아무리 교사들이 힘을 써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지요.
사회자:장차 주일학교에 대한 전망, 소위 21세기의 주일학교는 어디로 갈까요?
정춘석:우선 여름행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지금 여름성경학교는 수련회나 캠프로 많이 갔습니다. 한국교회가 튼튼한 재정적인 뒷받침들이 있기에 선교여행으로 여름행사가 바뀌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또한 앞으로의 주일학교는 소그룹중심의 어린이교회로 나가면서 내실을 기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봅니다.
고상범:지난 번 지방에 어린이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주일학생이 200명 정도 모이는데 올 봄에 유아세례를 받는 아기가 한 명도 없었다고 교육위원장 장로님이 걱정하시더라고요. 주일학교는 갈수록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기에 프로그램 중심으로 가는 것보다는 어린이 하나를 잘 키워서 제대로 된 크리스천을 만들어 가는 어린이제자 운동으로 주일학교가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치호:이런 상태로 있다면 주일학교 전망은 그리 밝지 않습니다. 주일학교에 소위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겠지요. 부흥하는 주일학교와 문을 닫는 주일학교⋯ 문제는 교육목회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입니다. 교육을 통해 세속화, 이단들의 미혹, 신앙의 내실화를 이루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사회자:장시간 감사합니다. 오늘 참석하신 목사님들을 통해 제가 크게 위로를 받았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이런 자리를 만들어 교회교육의 발전과 교사의벗의 성장을 위해 힘써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