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법하려면 모름지기 대장부라야 한다 / 종광 스님
경계가 수만 가지로 차별되지만 사람은 한사람
천강에 비친 달 여럿이나 본래 달 하나인 이치
쓸데없는 생각 멈추고 밖에서 구하지 않는다면
가는 곳마다 주인되고 서 있는 곳이 진리 된다
▲중국 천수 맥적산 석굴 13호굴 삼존불.
15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은 자비롭고 인자한 상호가 미려하기 그지없다.
却見乘境底人하니 是諸佛之玄旨라 佛境이 不能自稱我是佛境이요
還是這箇無依道人이 乘境出來니라 若有人이 出來하야 問我求佛하면
我卽應淸淨境出하고 有人이 問我菩薩하면 我卽應慈悲境出하며
有人이 問我菩提하면 我卽應淨妙境出하고 有人이 問我涅槃하면
我卽應寂靜境出하야 境卽萬般差別이나 人卽不別이라
所以로 應物現形은 如水中月이니라
해석) “오히려 경계를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이 부처님의 깊은 뜻을 체득한 사람이다.
부처님의 경계는 ‘내가 부처의 경계다’라고 스스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도리어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무의도인(無依道人)이 경계를 마음대로 쓰며 나타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나에게 부처를 구한다고 묻는다면
나는 즉시 청정한 경지를 들어내어 대해 준다.
또 어떤 사람이 보살에 대해서 묻는다면 나는 즉시 자비의 경지를 들어내어 대해 준다.
또 어떤 사람이 보리를 묻는다면 나는 즉시 깨끗하고 오묘한 경지에 들어내어 대해준다.
또 어떤 사람이 열반을 묻는다면 나는 즉시 고요한 경지에 들어내어 대해 준다.
경계가 수만 가지로 차별되지만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응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마치 물에 비친 달과 같다.”
강의) 승경저인(乘境底人)은 풀이 그대로 경계를 타고 가는 사람입니다.
경계가 와도 이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의 경계, 혹은 경지라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언설(言說)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또 부처님의 경지라는 것이
고정불변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은 무의도인(無依道人)의 모습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임제 스님은 사람이 묻는 바에 따라 경계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무의도인의 모습입니다.
청정함을 물으면 청정한 경지를 드러내 보여주고, 보살을 물으면 자비의 경지를 들어 보여줍니다.
이렇게 수만 가지 경계가 드러나지만 보여주는 이는 임제 스님 단 한사람입니다.
마치 달이 천강(千江)에 비춰 달이 천개로 보이지만 본래의 달은 하나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부처와 중생, 성인과 마구니가 서로 다른 경계로 드러내지만
이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차별적인 경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달이 각기 다른 강에 비치듯 마음이 부처와 중생으로 달리 드러나는 것뿐입니다.
道流야 儞若欲得如法하면 直須是大丈夫兒라사 始得다
若萎萎隨隨地하면 則不得也니라 夫如㽄嗄(上音西下所嫁切)之器는
不堪貯醍醐니 如大器者는 直要不受人惑이라 隨處作主하야 立處皆眞이니라
但有來者어든 皆不得受니 儞一念疑하면 卽魔入心이라
如菩薩이 疑時에 生死魔得便이니라 但能息念이요 更莫外求하고 物來卽照하라
해석) “여러분! 그대들이 만약 여법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대장부라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어디에 기대고 줏대 없이 살아서는 결코 얻지 못한다.
금이 간 그릇에는 제호(醍醐)같은 좋은 음식을 담을 수 없으니
큰 그릇의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곳이 항상 진리가 되는 것이다.
다가오는 어떤 것이든 다 받아들이지 마라.
한 생각이라도 의심을 갖게 되면 곧 마음에 마구니가 침입한다.
비록 보살이라도 의심을 내게 되면 생사의 마구니가 틈을 얻게 된다.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고 다시는 밖에서 구하지 말라.
어떤 것이 오든 지혜로 본질을 비춰보아야 한다.”
강의) 위위수수(萎萎隨隨)에서 넝쿨들이 나무를 감아 의지해 살아가듯이
주체성이 없이 다른 것에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을 뜻합니다.
또 배추를 소금에 절여놓은 것처럼 시들시들한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참된 불자로, 부처님처럼 살아가려면 스스로 우뚝 선 대장부가 돼야 합니다.
금이 간 그릇에 우유를 담을 수 없듯이 흠이 없는 큰 그릇이라야 합니다.
그래야 유혹(人惑)에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래야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 있는 바로 그 곳이 참된 진리의 장이 되게 됩니다.
사람의 유혹, 즉 인혹(人惑)은 ‘임제록’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인혹은 사람의 유혹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부처든 조사든 나를 미혹케 하면 모두 인혹입니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경계를 모두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만약 스스로가 바로 부처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지 않고, 조사의 말이나,
경전의 자구에 얽매이게 되면 의심이 일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의심이라도 드는 순간 마구니가 바로 마음으로 침투합니다.
보살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사가 없는 경지에 있다가도 한순간 의심이 일게 되면
바로 생사의 마구니가 비집고 들어올 틈을 내주게 됩니다.
쓸데없는 망념을 쉬어야 합니다. 밖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경계가 오면 그저 지혜로 조용히 관조하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가 구족된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경계는 바로 내 마음에 의지해 나타난 환영일 뿐입니다.
거울 속 모습을 진짜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儞但信現今用底하면 一箇事也無니라 儞一念心生三界하야
隨緣被境하야 分爲六塵하니 儞如今應用處가 欠少什麽오
一刹那間에 便入淨入穢하며 入彌勒樓閣하며 入三眼國土하야
處處游履하야 唯見空名이니라
해석) “그대가 지금 현재 작용하고 이것을 믿기만 하면 그 외에 다른 일은 없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삼계를 만들어내고 인연을 따라 경계에 사로잡혀 육진으로 나눠진다.
그대들이 지금 응하여 지금 쓰고 있는 그곳에서 무슨 부족함이 있겠는가?
한 찰나 사이에 깨끗한 국토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국토에도 들어가며,
미륵누각에도 들어가고 삼안국토(三眼國土)에도 들어가서 곳곳을 돌아다니지만
오직 헛된 이름뿐임을 보게 된다.”
강의) 현재 나를 통해 작용하는 그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이것만 확고부동하게 알면 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얻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한 생각에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가 만들어집니다.
인연에 끌려 경계에 사로잡히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六塵)으로 나눠집니다.
우리가 부처임을 알 때 바깥의 경계가 모두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의 현현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전혀 부족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안에 모든 것이 갖춰져 있습니다. 한 찰나에 깨끗한 곳에도 더러운 곳에도
미륵누각에도 삼안국토에 들어가더라도 집착함이 없기에 텅 비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問, 如何是三眼國土오 師云, 我共儞入淨妙國土中하야 著淸淨衣하고
說法身佛하며 又入無差別國土中하야 著無差別衣하고 說報身佛하며
又入解脫國土中하야 著光明衣하고 說化身佛하나니 此三眼國土는
皆是依變이니라 約經論家하면 取法身爲根本하고 報化二身爲用하나
山僧見處는 法身卽不解說法이라 所以로 古人이 云, 身依義立이요
土據體論이라하니 法性身 法性土는 明知是建立之法이요 依通國土니
空拳黃葉으로 用誑小兒니라 蒺藜菱刺와 枯骨上에 覓什麽汁고 心外無法이요
內亦不可得이니 求什麽物고
해석) 물었다. “무엇이 삼안국토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했다. “나는 그대들과 함께 청정하고 미묘한 국토에 들어가
청정한 옷을 입으면 법신불로서 법을 설하고 차별 없는 국토에 들어가
차별 없는 옷을 입으면 보신불로서 법을 설하고 해탈국토에 들어가
광명의 옷을 입으면 화신불로서 법을 설한다.
이 삼안국토라는 것은 모두가 무엇인가를 의지해 변한 것이다.
경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법신을 근본으로 하고 보신과 화신을 작용으로 본다.
그러나 산승이 보는 바에 따르면 법신도 법을 이해하거나 설법을 할 줄 모른다.
이런 까닭으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몸이라고 하는 것은 뜻에 의지해 세운 것이고
국토란 본체에 근거해서 논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법성신과 법성토는 건립된 법이고
무엇에 의지해야만 통할 수 있는 국토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빈주먹에 누런 잎사귀를 들고 황금이라고 어린아이들을 속이는 것이다.
말라비틀어진 뼈다귀 같은 나무에서 무슨 국물을 찾을 수 있겠는가?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고 마음 안에서도 얻을 수 없는데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가?”
강의) 임제 스님은 삼안국토(三眼國土)를 법신, 보신, 화신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신 또한 무언가에 의지해서 변화한 것입니다.
교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법신은 근본으로 보고 보신과 화신을 쓰임으로 보지만
법신도 보신, 화신도 이름으로만 있을 뿐 설법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설법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임제 스님 앞에 있는 그 사람입니다.
법성신이든 법성토든 모두 어디엔가 의지해서 드러날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손에 노란 잎사귀를 쥐고
아이들에게 황금이라고 속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바깥에 따로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마음 안에 법이 있다고 해도 틀립니다. 그러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드러나고 나타납니다. 다만 지금 현재 작용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스스로 부처임을 확연하게 믿어야 합니다. 조작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일상의 마음과 모습 그대로가 진리입니다.
2012. 09. 12
* 종광 스님
종광스님은 1968년 법주사에서 월산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1971년 해인사에서 고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각각 수지했다.
“인재 양성만이 조계종의 미래”라는 신념으로 교학 홍포에
매진해 오신 스님은
1991년 법주사 불교전문강원 강주,
1995년 남원 실상사 화엄학림 강주 등을 역임하면서
4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행과 교학 전수에 진력해 왔다.
출처 :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