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라면 정조처럼
김준혁
검소함을 실천하다
▣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16일, 정조는 자신이 등극하지 언에 궁중에 있던 내시와 액정서 소속의 인원 108명과 궁녀들을 줄이라는 뜻밖의 하교를 내렸다. 정조가 이렇게 내시와 궁녀들을 많이 내보낸 것은 다름 아닌 국가 재정 때문이었다.
▣ 정조는 국왕으로 즉위한 지 얼마 뒤에 하루에 두 끼, 그리고 한 끼 당 반찬을 다섯 가지만 먹겠다고 선언했다. 국왕의 아침과 저녁 수라는 고기와 반찬 11가지 이상이 들어가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국왕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최고의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 당연한데, 정조는 이를 거절하고 최소한의 식사만을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정조가 국왕으로 있는 24년간 변함없이 지켜왔다.
▣ 정조는 여기에 더해 비단옷을 입지 않기로 했다. 고급 비단옷 대신에 그는 무명옷을 입었다. 정조는 자신이 무명옷을 입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대체로 사람은 일용하는 의복이 한번 화려하게 되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쉽게 생기므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이는 재물을 축내는 것일 뿐 아니라 실로 끝없는 폐해와 연관된다. 나는 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밭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
금난전권을 혁파하여 경제를 개혁하다
▣ 채제공은 시전상인들이 가지고 있는 금난전권을 혁파하고 상인이 되고자 원하는 백성들이 자유롭게 상업행위를 한다면 상인들은 서로 매매하는 이익이 있을 것이고 백성들도 곤궁한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전상인들의 원망은 스스로 감당하겠다고 다부진 결의를 했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다
▣ “나는 감영에서 올라 온 판결문을 경전 대하듯 읽었다.” 정조가 재판을 해야 할 때가 되면 매번 8도에서 올라온 재판 기록인 옥안이 정조의 책상과 대에 가득 쌓였다. 정조는 이 기록들을 직접 살펴보고 조사하였는데, 종종 밤을 새워 아침까지 이어질 때도 있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걱정하고 염려했으나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정조는 “옥이란 사람의 생명과 관계되는 바이다. 옛날의 성인은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이를 죽이고서는 천하를 얻는 것도 오히려 하지 않을 것이라 했는데, 내 어찌 한때의 수고로움을 꺼려 심리의 방도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겠는가.”했다.
신분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다
▣ 정조는 서얼 출신들을 자신의 개혁 근거지인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임명했다. 검서관은 규장각 초계문신과 달리 규장각의 모든 서적을 정리하고 연구하는 자리였다. 규장각 초계문신이 집중적인 학문 훈련을 위해 선발되었다면 규장각 검서관들은 이들보다 뛰어난 학문의 소유자로서 초계문신의 공부를 도와주며, 독자적인 서적 연구와 도서 발간에 중심을 두었다.
정치적 조율을 위한 핵심 인물을 발탁하다.
▣ 채제공은 화성유수로 임명받은 뒤부터 아예 수원으로 이주하여 살았고 축성 시에도 이곳에 거주했다. 화성에 거처하면서 화성을 정조의 친위도시로 삼아 정국 운영의 중심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채제공은 화성을 쌓을 때 중요한 3대 원칙을 제시했다. “빨리 서두르지 말 것. 화려하게 하지 말 것. 기초를 단단히 쌓을 것.” 이에 대하여 정조는 채제공의 축성에 대한 제안에 대하여 먼저 대강을 세우고, 다음에 규모를 정하여 일을 추진하라고 했다. 채제공에게 화성으로 내려가서 축성 현장을 정확히 살피되 둥글게도 하지 말고 네모나게도 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외관은 신경 쓰지 말고 되도록 이로움을 좇고 형세를 이용하는 방책을 따르도록 하라고 강조했다.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를 양성하다
▣ ‘풍운지회(風雲之會)’ 바람과 구름이 만나 백성을 위한 비를 내리는 것이니 참으로 귀한 만남이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정조와 다산의 만남을 ‘풍운지회’라고 규정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백성을 위한 운명적 만남이다.
▣ 이에 조정에서는 민란을 일으키고 산으로 도주한 이계심을 잡기 위해 훈련도감을 포함한 오군영의 군사들까지 파견했지만 번번이 그를 잡는 데 실패했다. 그랬던 그가 제 발로 정약용이 곡산부 내로 들어가는 길 앞에 나타났다. 정약용은 이계심을 포박하거나 목에 칼을 채우지 않고 관아로 데려가 갑자기 나타난 연유를 물었다. 이계심은 정약용에게 백성들의 고통을 낱낱이 적은 12조목을 건냈다. 거기에는 정약용 부임 직전 서리들이 포보포(포군에게 내는 군표) 대금으로 200전을 걷어야 하는데 백성들에게 무려 900전이나 걷어 빼돌린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에 백성들이 원성이 이어졌고 이계심이 우두머리가 돼 1000여 명을 모아 관에 들어와 호소한 것인데, 오히려 죄인으로 몰려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정약용은 여러 정황을 파악하고 곧바로 이계심을 무죄방면했다. 그러면서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은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은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고 말했다.
시골 유생의 의견도 깊이 새겨 듣다
▣ 다산 정약용 선생은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훈련이 바로 ‘청람(聽覽)’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본시 날 때부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이들도 있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흔하지 않다. 청람을 하는 것은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리더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차별을 철폐하여 인재를 키우다
▣ 정조는 북쪽 지역에 대한 차별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말했다. “북관은 곧 왕업이 비롯된 지역으로, 조종조 이래로 매양 깊이 염두에 두고 수습해서 조용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서로 보고 들을 수 없어서 다른 도에 비하여 소외되었다는 탄식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인재는 반드시 장려하고 쓰려고 해야 권면되고, 인심은 반드시 위로하여 기쁘게 해 주어야 견고히 단결된다. 마천령 이북에 이르러서는 왕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고 이역과 서로 접하고 있으니 무마하여 편안히 살도록 할 방도에 있어서 더욱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도신과 수령된 자들이 과연 나의 뜻을 알아 체득해서 행하여 북쪽을 뒤돌아보는 근심을 하지 않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끊임없이 함양하고 성찰하여 분노를 통제하다
▣ 정조는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크거나 작거나 간에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작은 일에 함부로 하게 되면 큰일도 함부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큰일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은 작은 일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하면서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정조는 일에 대해 시작을 하면 반드시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다. 심지어 글씨를 쓰거나 오락하는 것까지도 시작만 있고 끝마무리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군주가 이렇게 해야만 신하들이 따라 하기 때문이다.
▣ 정조는 경연 시간에 절대 어려운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신하들에게 무리하게 일을 하게 하지도 않았다. 정조는 이 문장을 자신의 침실 벽에다 써 놓고 늘 가슴에 새겼다. “일은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고, 말은 다 하려고 하지 말라.”
9가지 좌우명으로 자신의 뜻을 명확히 밝히다
▣ 좌우명이란 무엇인가? 좌우(座右)란 바로 자신이 앉은 자리의 옆이란 뜻이다. 명(銘)이란 자신이 반드시 새겨야 할 중요한 말씀이다. 그러니 ‘좌우명’이란 자신의 옆자리에 평생의 마음을 가다듬고 하고자 하는 뜻을 비에 새겨놓은 격언을 말하는 것이다.
▣ 정조의 좌우명의 첫째는 입지(立志)이다. 뜻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목표를 정하여 나아가는 것이고 기를 통솔하는 것으로, 모든 근간이 되는 것이다. 둘째는 이치를 밝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만물에 대한 이치를 밝히는 것이 바로 군주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다. 셋째는 거경(居敬)이다. 정조는 학문과 역사, 즉 세상에 대한 공경을 높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넷째는 하늘을 본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섯째는 학교를 일으키는 것이다. 일곱째는 인재를 기용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검소를 숭상하는 것이다.
호방함과 유머를 보여주다
▣ 1793년(정조 17)에 제주도민들이 계속되는 재해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조정에서 보낸 구휼미가 풍랑에 침몰하는 불상사까지 겹쳐 굶주려 죽을 위기에 처하자, 제주 여인 김만덕은 유통업으로 모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쌀을 구입하여 제주 백성들을 살려내었다. 김만덕의 선행이 정조에게까지 알려졌다. 정조는 제주목사 이우현을 통해 김만덕의 소원을 물어보라고 지시하였다. 정조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진짜 들어주고자 했다. 아마 정조 생각은 관직이거나 재물이거나 신분 상승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만덕은 뜻밖의 소원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바로 한양에서 임금님을 뵙고,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김만덕은 당시 여성은 육지에 갈 수 없다는 법과 집안에 갇혀야 했던 여성의 현실을 단숨에 뛰어넘으면서 여성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이동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또한 금강산 구경은 당시 보통 여성으로서는 꿈꿀 수조차 없었던 성공한 남성의 영역이었다. 김만덕의 요구를 들은 정조는 “관의 허락 없이 제주도민은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라는 법률을 깨고 김만덕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조선시대 제주도 여인들은 육지로 나오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것을 깨고 육지로 나오게 하려면 특단의 결정이 필요했다. 법도 지키고 김만덕도 육지로 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정조는 그녀를 내의원의 ‘수의녀’로 임명하였다. 또한 내의원 ‘의녀반수’ 벼슬을 제수하여 그녀의 선행에 대한 보답을 하였다. 정조는 김만덕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었고,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그리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모든 관공서가 김만덕에게 편의를 제공하도록 지시하였다. 김만덕이 가는 길목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구경하고 그녀를 칭송하였다. 김만덕은 서울 장안에서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켜, 사대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직접 만나보고 싶어 했던 인기 있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형조판서를 지낸 이가환은 시를 지어 헌정하였고 영의정 채제공은 <만덕전>이라는 전기가지 썼다.
국왕의 행사를 백성과 함께하다
▣ 국왕의 능행차가 사전에 알려지면 수도권뿐만이 아닌 전국의 억울한 백성들이 국왕을 만나기 위해 능행차길에 참여했고 억울함이 풀리는 행복을 맛보았다. 그래서 정조의 말대로 능행차는 선대왕에 대한 참배를 위한 단순한 행차가 아닌 백성들에게 행복을 주는 행차였던 것이다.
-----------------------------------------------------------------------------정조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다. 백성에 대한 사랑, 신하에 대한 사랑, 나라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사랑.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자세히 들여다본다. 탐구하고 그 본질을 찾으려 한다. 정조와 같은 마음으로 학생을 대한다고 생각해본다. 학생들의 고민과 어려움에 귀 기울이고,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고, 모범을 보이는 교사의 모습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