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매쟁이 : (심각하게) 자네 딸내미 그 양반한테 시집보내면 어떨로! 아버지 : (걱정스럽게) 우리같이 미천한 것들이! 양반 댁에! 택도 없는 소리 하지도 말게! 딸 : (의미심장하게) 아부지요. 허락해 주시더! 아버지 : 야가! 그런 집에 가갔꼬 어애 배길라꼬! 그러노! - 아버지와 딸 - |
옛날 안동의 어느 고을에 까다로운 양반이 살았다. 양반이랍시고 집안 식구들의 행동거지行動擧止를 하나에서 열까지 예의禮儀와 범절凡節을 내세워 단속을 하니 아랫사람들은 늘 조심스러웠다. 특히 며느리의 시집살이는 곤하기 그지없었다.
이 양반의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서 과년한 딸이 있어도 그 집에 시집을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 혼인길이 막힌 양반은 둘째아들을 늦도록 장가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백방으로 중매를 놓아 봤으나 번번이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 마을에 사는 친구가 찾아와서
“십리 밖 산골 마을에 김가네 집이 있는데, 가난하고 미천해도 좋은 처자이니 혼인해 보겠나?”
“야! 이 사람아! 자식 장가 못 보내 집안 망신인데 좋고 나쁘고가 어디 있는가? 혼인만 되게 해주게!”
구세주를 만난 듯이 매달리는 것이었다.
친구는 또 김가네 집에 가서 혼인을 권해 보았다.
김가네는
“우리같이 미천한 것들이 양반 댁과 혼인 지내는 것도 가당치 않고, 배운 것이 없는 딸년이 그 집 예절을 어이 맞추겠으며, 평생 고된 시집살이를 견딜 수 있겠나? 차라리 굶주리는 한이 있더라도 미천한 것들끼리 어울리게 해야지!”
하고 거절을 했다.
중매하러 갔던 양반의 친구는 허탈해서 돌아서려는데 당사자인 김가네 딸이 안에서 엿듣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나오더니,
“아버지! 저 어르신 말씀대로 그 집에서 청혼하거든 허락하시지요.”
그때 친구가 딸을 보고,
“양반집에 시집살이를 어찌 하려느냐?”
“양반의 집에 법도 사람의 법이옵고, 양반 예절도 사람의 예절이며, 세상살이도 사람의 세상살이온데, 함께 살아가면서 천하다면 천한 것을 버리고, 귀하다면 귀한 것을 취하면서 살아갈까 하옵니다.”
“허어! 자네 참한 딸을 두었군 그래! 됐네! 됐어! 혼인을 지내게!”
사주단자를 받고 좋은 날에 혼례를 치르고 시집을 가게 되었다.
새 며느리를 데려다 놓고 보니 집안은 미천해도 하는 모양이 한없이 기특했다.
한번은 사당에 제사가 드는 날인데 시아버지는 목욕 재개하고 두건頭巾을 쓰고 아침부터 집안사람들이 하는 양을 보면서 제사 지낼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느리 둘과 아래 종년들이 떡방아를 찧고 다른 식구들도 준비를 하느라 부산했다.
시아버지는 혼자 뒷짐 지고 어리대다가 변소에 가는데 마침 며느리들이 떡방아 찧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새로 온 며느리가 어둔하게 한쪽 손으로만 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 이상하다. 새아기가 왜 저러노! 팔 한쪽이 탈이 났나?”
변소 갔다 오다가 봐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었다.
사랑에 들어와 한참 기다리는데 두 며느리가 떡방아를 다 찧어 안채로 들어가고 있었다.
“얘. 새아가! 아까 지나가다 보니 네가 채질을 하는데 한쪽 손으로 하더구나! 팔 한 쪽이 어디 아프냐?”
“아니옵니다. 아버님!”
“그럼 무슨 까닭이냐?”
다그치니 머뭇머뭇하고 대답이 없다.
“어허! 그러지 말고 대답을 해 보그라!”
“예! 실은 제사에 쓸 음식을 장만하는데 방앗간에 가다가 까닭 없이 콧물이 나와 서 한쪽 손으로 코를 풀었습니다. 그러니 비록 씻고 닦았다 한들 그 손으로 어떻게 조상님 제사에 올릴 제수를 장만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한 손으로 채질을 했사옵니다.”
시아버지가 들어보니 기특하고 흐뭇했다.
제물 준비가 다된 참에 새 며느리가 동서에게
“형님! 제사에 쓸 간장은 어디 있지요?”
“간장은 늘 먹던 단지에 있잖은가?”
“제사에 쓸 걸 따로 봉해놓지 않았는지요?”
“아. 우린 늘 먹든 간장을 그대로 썼는데.”
“사당 제사에 쓸 간장을 보통 때 먹던 간장 그대로 써서야 되나요?”
그러더니 계집종을 불러 친정으로 보내 따로 봉해놓은 간장을 가져와 나물을 무치고 제사상을 진설했다.
집안이 모두 모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시아버지가 곧장 앞에 나가 잔을 올리려 드는데 새 며느리가
“아. 아버님! 오늘 제사는 아버님께서 헌작을 못하시옵니다.”
시아버지가 깜짝 놀라
“얘. 그럼 내가 안하고 뉘가 한단 말이냐?”
“아주버님이 대리로 하셔야 하옵니다. 오늘은 아버님께서는 못하십니다.”
그래! 꼼작 못하고 맏아들이 대행을 하였다. 제사를 지내면서 내내 기분이 언짢았으나 제사 도중이라 따질 수도 없고, 제사를 마치고 음복을 한 연후에 조용히 새 며느리를 불렀다.
“얘야, 오늘은 조상님 사당 제사인데 내가 반드시 잔을 올려야 되는데 어찌 네 시숙이 해야만 했느냐? 까닭을 알 수 없구나!”
“죄송하옵니다. 아버님! 제가 아까 제사 지내기 전에 부엌에 있노라니까 아버님께서 변소에 가셨다가 손도 씻지 않으시고 제사에 임하시기에 그래서 못 하시게 말렸사옵니다.”
시아버지가 듣고 보니 새 며느리의 말이 지당하기 짝이 없었다.
“허! 인제 집안에 큰 어른을 데려다 놨구나!”
그 후 새 며느리 말이라면 꼼짝 못하고
“그래! 그래! 네 말이 옳다 옳아!”
하며 며느리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사람의 자격이란 미천한 것이 따로 없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자기 행실行實하기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