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0:36-48
찬송가 277장 양떼를 떠나서
비극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향해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이만 이천 명이 죽었습니다. 또 그 이튿날에 일만 팔천 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날에 이만 오천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한 사건을 발단으로 자그마치 육만 오천 명의 호흡이 끊어졌습니다. 이는 교회가 위치한 마포구의 합정동(약 이만 일천)과 망원동(약 사만 육천)의 모든 사람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더 큰 비극은 이것입니다.
불과 며칠 만에 육만 오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육만 오천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읽히지 않고, 활자로 기록된 숫자로만 읽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사기 19장의 사건을 발단으로 시작된 참혹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현장을 소개합니다.
베냐민의 패배(36-48)
(36-38) 이에 베냐민 자손이 자기가 패한 것을 깨달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 기브아에 매복한 군사를 믿고 잠깐 베냐민 사람 앞을 피하매 복병이 급히 나와 기브아로 돌격하고 나아가며 칼날로 온 성읍을 쳤음이더라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과 복병 사이에 약속하기를 성읍에서 큰 연기가 치솟는 것으로 군호를 삼자 하고
앞선 두 번의 전투에서 패한 이스라엘 총회군은 새로운 작전을 세웠습니다. 이는 베냐민 군대를 유인해 성 밖으로 불러내고 이 틈에 매복해있던 총회군이 기브아를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전에 없던 새로운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군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전술이었습니다. 베냐민 자손 역시 이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성 안에 자리한 군사들은 성 밖에 주둔한 군사들을 향해 경솔히 달려들지 않습니다. 성 밖에 주둔한 병사들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성 안의 군사들은 마실 물과 먹을 양식만 풍족하다면 좀처럼 성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오랜 기간 쌓아 올린 성벽이야말로 그들의 수적 열세를 만회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방어막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총회군의 작전이 성공하려면 성 밖으로 베냐민 군대를 유인해 내야만 했습니다.
(39) 이스라엘 사람은 싸우다가 물러가고 베냐민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 삼십 명 가량을 쳐죽이기를 시작하며 이르기를 이들이 틀림없이 처음 싸움 같이 우리에게 패한다 하다가
앞선 두 번의 전투에서 패한 이스라엘 총회군이 새로운 작전을 세운 것과는 달리 앞선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한 베냐민 군대는 자신만만했습니다. 이전과 같이 이스라엘 총회군이 물러서자 그들은 승리를 속단했습니다. 하나, 둘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보며 그들은 성을 등진 채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40-41) 연기 구름이 기둥 같이 성읍 가운데에서 치솟을 때에 베냐민 사람이 뒤를 돌아보매 온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았고 이스라엘 사람은 돌아서는지라 베냐민 사람들이 화가 자기들에게 미친 것을 보고 심히 놀라
베냐민 군사들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을 때, 성 앞에 매복해있던 이스라엘 총회군은 기브아를 손쉽게 점령했습니다.
곧 그 성읍의 연기가 피어오르자 이스라엘 총회군은 후퇴를 멈추고 돌아서서 베냐민 군대를 향해 매섭게 달려들었습니다.
(42-44) 이스라엘 사람 앞에서 몸을 돌려 광야 길로 향하였으나 군사가 급히 추격하며 각 성읍에서 나온 자를 그 가운데에서 진멸하니라 그들이 베냐민 사람을 에워싸고 기브아 앞 동쪽까지 추격하며 그 쉬는 곳에서 짓밟으매 베냐민 중에서 엎드러진 자가 만 팔천 명이니 다 용사더라
돌아선 이스라엘 총회군의 공격에 화들짝 놀란 베냐민 사람들은 그제야 눈앞의 상황을 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이미 불타기 시작한 성을 버리고 광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러나 앞뒤에서, 양옆에서 추격해 오는 이스라엘 총회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일순간에 베냐민의 용사 일만 팔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43절에 ‘그 쉬는 곳에서 짓밟으매’로 번역된 원어는 해석학적으로 의견이 나뉩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처럼 장소의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새번역 성경과 공동번역 성경처럼 상태의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새번역 43)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들을 포위하고, 쉬지 않고 동쪽으로 기브아 맞은쪽에 이르기까지 추격하며 쳐부수었다.
(공동번역 43) 그들은 베냐민 군을 포위하여 틈을 주지 않고 동쪽으로 기브아 맞은편에 이르기까지 추격하며 짓부수었다.
이보다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 총회군 앞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삿 20:28)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
이어지는 내용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45-46) 그들이 몸을 돌려 광야로 도망하였으나 림몬 바위에 이르는 큰 길에서 이스라엘이 또 오천 명을 이삭 줍듯 하고 또 급히 그 뒤를 따라 기돔에 이르러 또 이천 명을 죽였으니 이 날에 베냐민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가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 명이니 다 용사였더라
앞서 기브아 앞 동쪽에서 죽은 일만 팔천 명에 이어,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는 큰길에서 오천 명, 그 후에 기돔에서 이천 명이 죽었습니다. 이날 베냐민 장정 이만 오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만 팔천 명, 오천 명, 이천 명. 총 이만 오천 명이 그날 남편을 아버지를 자녀를 다시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여전히 우리는 별 감흥이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아버지도 우리와 같은 마음이실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자녀들이 서로 칼을 겨누고 서로를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그 현장을 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은 결코 덤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자녀들을 더는 볼 수 없어 독생자를 보내신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이 와중에 살아남은 자도 있었습니다.
(47-48) 베냐민 사람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에서 넉 달 동안을 지냈더라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광야로 도망쳐 림몬 바위에서 숨어 넉 달을 지낸 육백 명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성읍의 사람들과 가축을 향한 이스라엘 총회군의 칼날을 그들만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오늘 본문은 매우 씁쓸합니다. 사사기의 결론과도 같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그때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함께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까?
이스라엘 총회군 사만 명(이만 이천, 21절 + 일만 팔천, 25절), 베냐민 군인 이만 오천 명(일만 팔천, 44절 + 오천, 45절 + 이천, 45절)이 왜 생명을 잃어야 했습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레위인, 성읍의 불량배들,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지도자들 때문입니다. 이들 중 어느 사람에게서도 예수님의 향기가 맡아지질 않습니다.
만약 레위인이 그 순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다면, 만약 성읍의 불량배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베냐민의 지도자들이 그제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했다면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국 교회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흥의 사건이 있는데, 하나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입니다. 이 두 사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한결같이 지도자의 진정성 어린 공(개)적 회개로 촉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올해 2023년은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이 12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곳곳에서 이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양화진에는 이 사건의 중심인물이었던 의료선교사 하디(Hardie)의 두 딸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 묘역을 지날 때면 인종적 우월감과 의사로서의 신분적 교만을 회개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느새 교만해진 제 모습을 잠잠히 돌아보며 회개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어제와 오늘 저희 모습은 누구와 더 닮아있습니까?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비극을 촉발한 레위인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의 모습입니까?
만인 앞에 자신의 교만을 진솔하게 고백하며 회개한 하디와 같은 이의 모습입니까?
어쩌면 오늘 우리의 선택에 따라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수백 수천 만명이 복음의 기쁨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 하루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잠잠히 회개하는 시간과 자리로 가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비로소 멀리 계신 것만 같았던 내가 이기었노라 선언하신 주님과의 진정한 연합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만 명을 죽였다는 본문을 살피며 미동조차 없던 제 모습에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형제끼리 서로 칼을 겨누고, 거침없이 서로를 찌르는 모습을 보시며 아버지 마음이 어떠하셨을지를 헤아려 보니 가슴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습니다.
부르신 자리에서, 세우신 자리에서 저희 모습이 그 레위인과 다를 바 없었음을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면서도 정착 그리스도의 향기는 풍기지 못했던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영원한 승리를 선언하신 주님과 연합된 삶의 비결이 회개에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을 회개의 시간과 자리로 가꾸어 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베냐민 자손이 자기가 패한 것을 깨닫게 된 상황을 정리해 보시겠습니까?
2. 베냐민 자손이 패한 결정적인 원인(내적)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3. 일만 팔천 명, 오천 명, 이천 명의 죽음 앞에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4. 오늘 저희 모습은 누구(레위인, 하디 등)의 모습에 더 가깝게 느껴지십니까?
(작성: 박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