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정
김희선
뿌리와
이파리와
꽃까지 내어주고
더 줄 것 없을까
연밥마저 지으셨네.
아직도
끊이지 않는
물 밑 저 태동소리
교단 일기
김희선
밤하늘 잔별로 뜬 풀벌레 노랫소리
아롱아롱 여울지며 온밤을 밝히는데
행여나 이슬 젖을라 잎 드리운 푸성귀
저마다의 빛깔로 내 곁에 온 아이들아
내미는 손길 따라 오색 빛 물이 드니
이 밤도 잠 못 이루며 그려보는 수채화
부부
김희선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내릴 줄
알고 있어
곰삭은 그 향기가
갈수록 그윽하다
속앓이
재가 될 즈음
피어나는 은매화
대문
김희선
삐그덕,
육중한
한 세기가 닫힌다.
뭇 손길
스쳐오며
피 돌던
투박한 결
오가며
피어나던 정
기억마저 향기롭다.
외면
김희선
두 눈을 껌벅이며 실려 가는 소 한 마리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 힘 쓰고 있다.
버티며 살아가는 자가 어찌 너뿐이랴
우직하게 앞만 보며 걸어온 워낭 소리
목덜미 쓰다듬던 그 손길이 그리워
유순한 두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든다.
저울
김희선
참
편안하구나
양팔 나란히
펼쳐서면
짓궂은
시선으로
가벼운
입술로
멋대로
오르내리는
그 무게만
아니라면
사死
김희선
검은 씨앗 품은 채
하얗게 바래져 간
물기 없는 꽃잎이
고요히 잦아든다
머잖아
떠나신 자리
사랑으로 돋으리
가는 길
김희선
그때는 몰랐어요 되돌아 아플 줄을
질긴 이 타래도 업이라 하시나요
감으며 풀어갈 줄을 이제야 알겠어요
새기면 떠오르고 돌아서면 가라앉는
우매한 반복 위에 세워진 초라한 집
두드려 채워가면서 고이 안고 가겠어요.
자수刺繡
김희선
올올이 마음 실어
고운 수 놓아가리
날실 씨실 정성으로
빼곡히 엮어가리
한세상
채우고 엮어
피워낼 인연의 꽃
길
김희선
순백의 시간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걷고 또 걸으며 마름질한 시간들
오는 길 이 가벼움 속에 잠시 발길 멈춘다.
이제 다시 저 길 위에 서 있을 수 있다면
쉬이 오는 이 길처럼 숨 가쁘지 않으리
다정한 벌 나비 되어 너에게도 앉으리.
여행
김희선
떠남은
남김의 존재를 헤아린다.
채색된 일상이며
술렁이던 손길들
되돌아
마음 뉘일 곳 있음에
이 발길 가벼웁다.
詩作 노트
김희선
삶, 그 자체가 시라면,
내면 깊숙이 자리한 시어들을 길어 올려
지치고 메마른 삶을 어루만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좀더 풍요롭고 윤기 나는 삶의 길로 인도할 수 있기를
그러나,
내 삶이 빈약하고
길어 올릴 두레박조차 변변치 못하여
나의 시어가 자신조차 어루만질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시의 길 안에서 외려 더 지쳐버리는 것이 아닐까
부족하고 또 부족한 자신이지만
동행하는 분들이 옆에서 힘이 되어 주시기에
한 번 더 스스로를 채찍질해 본다.
내 시가 초라한 자신의 샘만이라도 가득 채워 주기를
내면 깊숙이 좀더 튼실한 두레박을 드리울 수 있기를
그리하여 시인의 길은 행복하다고 속삭일 수 있기를.
<약력>
��� 대구 출생
��� <시조세계> 신인상 당선 (2006년 가을호)
��� <문학세계> 시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2005년 8월호)
���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여성시조 회원, 시조 동인 『오늘』회원
��� 현, 소천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