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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보령 60코스 역방향 제2부
대천천노둣길 입구-쇳개포구-왕대사 입구-남서마을 입구
군헌갯벌체험장-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대천해수욕장
20230809
1.대천해수욕장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인가?
대천천 노둣길이 밀려오는 바닷물에 잠겨 노둣길로 건너지 못하여 대천방조제 제방길을 따라 보령시 중심 시가지, 예전의 한내읍 방향으로 올라간다. 정면에 옥마산(玉馬山)이 늠름하고 그 아래 보령시 중심 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옥마산은 보령의 지붕이라 일컫는 성주산(聖住山) 산줄기로, 성주산과 함께 보령 시가지 동남쪽을 둘러싸고 있다. 이 옥마산(玉馬山)의 유래가 흥미롭다. 보령의 수호신은, 고려 말 보령 지역이 왜구의 침략으로 황폐화되었을 때 왜구를 소탕하고 보령을 지킨 김성우(金成雨, 1327~1392) 장군이라고 한다. 김성우 장군은 전라우도 도만호(都萬戶)로, 고려 우왕의 명령을 받고 보령 지역의 왜구를 소탕한 뒤 보령에 정착한 광산(光山) 김씨의 입향조이다. 그가 왜구을 소탕할 때 홀연히 신마(神馬)와 보검이 나와 그를 보필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신마가 나온 봉우리는 옥마봉(玉馬蜂), 보검이 나온 동리는 비도(飛刀라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전설이지만, 대천해수욕장 북쪽 흑포, 대천해수욕장 남쪽 갓바위, 현재 남포방조제가 있는 남포 지역 등에서 김성우 장군이 왜구를 소탕하고 보령을 지켜낸 사실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 있다.
6km를 우회하여, 대천해수욕장 머드광장까지 11시 20분 이전에 도착하여야 한다. 그래야 그곳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서해랑길 탐방팀 버스가 대기하는 곳에 출발 시각 11시 30분 전에 이를 수 있다. 속도를 내지만 풍경들이 유혹한다. 대천천이 유유히 서해로 흘러가고, 방조제 안쪽에는 간척농지 푸르른 들녘이 드넓게 펼쳐져 싱그럽다. 북동쪽 끝으로 홍성군 장곡면과 경계를 이루는 보령의 최고봉 오서산이 길손을 부른다. 여름날의 이 한가한 풍경에 취할 시간적 여유가 없이 길손은 바삐 내닫는다. 대천천을 가로지르는 장항선 철로가 눈 앞에 보인다. 열차가 장항과 군산 방향으로 장항선 철교를 건너고 있다. 장항선 철교 아래를 통과하니 왼쪽에 아파트 빌딩들이 솟아 있는 지역이 확실하게 보인다. 그 오른쪽 봉황봉 아래가 대천2동 관촌(冠村, 갈머리)마을일 것이라 가늠한다. 이문구(李文求, 1941~2003) 작가가 태어난 곳이며, 그의 자전적 연작소설 <관촌수필(冠村隨筆)>의 배경지가 되는 곳이다. 그가 고향 관촌마을을 찾아가 느끼는 마음을 읽어본다.
"한내읍에 닿았을 때는 이미 세 시도 겨워 머잖아 해거름을 만나게 될 그런 어름이었다. 열차가 한내읍 머리맡이기도 한 갈머리[冠村部落] 모퉁이를 돌아설 즈음엔 차창에 빗방울까지 그어지고 있었다. 예년에 없던 푹한 날씨기에 눈을 비로 뿌리던 모양이었다. 겨울비를 맞으며 고향을 찾아보기도 난생 처음인데다 정 두고 떠났던 옛 산천들이 돌아보이자, 나는 설레기 시작한 가슴을 부접할 길이 없었다./ 나는 한동안 두 눈을 지릅뜨고 빗발 무늬가 잦아 가던 창가에 서서, 뒷동산 부엉재를 감싸며 돌아가는 갈머리 부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음이 들뜬 것과는 별도로 정말 썰렁하고 울적한 기분이었다. 내 살과 뼈가 여문 마을이었건만, 옛 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옛 모습으로 남아난 것이 저토록 귀할 수 있을까./ 그중에서도 맨 먼저 가슴을 후려친 것은 왕소나무가 사라져 버린 사실이었다. 분명 왕소나무가 서 있던 자리엔 외양간만한 슬레이트 지붕의 구멍가게 굴뚝만이 꼴불견으로 뻗질러 서 있던 것이다. (중략) 실향민. 나는 어느덧 실향민이 돼 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덜어 버릴 수가 없었다. 고향이랬자 무덤(墓)들밖에 남겨 둔 게 없던 터라 어차피 무심하게 여겨 온 셈이긴 했지만, 막상 퇴락해 버린 고향 풍경을 대하니, 나 자신이 그토록 처연하고 헙헙하며 외로울 수가 없던 것이다." ”(<관촌수필> 제1편 '일락서산(日落西山)'에서>) 변해 버린 고향마을에서 작가가 감각한 마음은 실향민, 옛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고향마을에서 작가는 고향을 잃어 버린 슬픈 사람이 되고 말았다.
조정래(1943~) 작가가 전라도 방언을, 김원일(1942~) 작가가 경상도 방언을 표현해 내는 대표 작가라면, 이문구 작가는 충청남도 토속적 방언을 맛갈스럽게 잘 형상화한 대표 작가이다. 그 경향을 대표하는 <관촌수필(冠村隨筆)>은 그의 고향에 바치는 헌사이며 근대화 과정에서 해체되는 농촌 사회의 아픔을 그려낸 역작이다. 작가의 할아버지는 충청남도 토속적 방언을 이렇게 사용한다. “이 애야, 이 왕솔은 토정(土亭, 李之菡) 할아버지께서 짚고 가시던 지팽이를 꽂아 놓셨는디 이냥 자란 게란다. 그쩍에 그 할아버지 말씜은, 요 지팽이 앞으루 철마가 지나가거들랑 우리 한산 이씨 자손들은 이 고을에서 뜨야 허리라구 허셨다는 게여....... 그 말씜을 새겨 들어 진작 타관살이를 했더라면 요로큼 모진 시상은 안 만났을지두 모르는 것을.......”(<관촌수필> 제1편 '일락서산(日落西山)'에서>)
세월의 흐름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시간의 흐름에서 필멸의 존재인 인간은 그 흐름 속에 자연과 풍속의 변화에 환희하고 가슴아파한다. 그러나 그 변화 속에서 인간은 필멸한다. 세월의 변화에 대하여 이문구 작가의 생각을 엿들어 본다.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날로 새로워진 것을 볼 때마다 내가 그만큼 낡아졌음을 터득하고 때로는 서글퍼하기도 했으나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가는 크게 여기지 않는다. 무엇이 왜 안 변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겠기 때문이다."(<관촌수필> 제6편 '관산추정(關山芻丁)'에서> 작가는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과 그 이유에 관심이 더 크다. 주체성이란 옛것의 수호와 변화 사이의 작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옛것을 지켜야 하는 이유와 그 사라지지 않는 까닭이 있을 것이며, 옛것이 변화하는 이유와 변화시켜야 하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 둘은 모두 주체성의 몫이고, 그 상호 작용에 의해 문화는 창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침 7시가 안 된 시각부터 따라온 대천방조제길과 드디어 헤어져 쇳개포구 인도교로 진입한다. 쇳개포구는 대천천 하구(河口)로, 대천장의 관문이었는데, 대천항과 장항선이 열리면서 그 관문 역할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도 장날이면 주변 섬에서서 많은 장배들이 쇳개포구로 들어와 대천장이 크게 번성하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포구의 흔적도 없는 것 같다. 왜 쇳개포구일까? 옛 문헌에는 해소포(蟹所浦) 또는 금포(金浦)라고 기록되어 있다는데, 왜 쇳개라고 불렀을까? 금포(金浦)는 갯벌을 이용한 전통적인 자염(煮鹽) 생산지를 이르며, '하얀 소금(素金)이 만들어지는 금포(金浦)'에서 쇳개라는 말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쇳개포구 인도교 하얀 주탑이 로켓포처럼 하늘로 치솟아 있다. 단순한 모양이지만 상징적 의미는 거창하다. "쇳개포구는 보령시의 삶의 가치와 애환을 담고 있다. 인도교 주탑은 물의 파동과 돛 그리고 물의 길을 상징화하였다. 포구의 물길 속 오고가는 배들의 돛의 모양과 보도교 아래에 흐르는 물이 갈라지는 형태를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쇳개포구 인도교를 건너 대천1동에서 대천4동으로 넘어왔다. 이제 대천천 남쪽 도로인 해안로를 따라 대천항까지 이어가는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방금 걸어온 북쪽의 대천방조제 제방길과 그 풍경을, 해안로 남쪽의 푸른 들녘을 감상하며 쉼없이 해안로를 따라갔다. 드디어 대천천 노둣길 입구에 이르렀다. 노둣길로 건너왔더라면 금방 이르렀을 것을 노둣길로 건너지 못하고 우회하여 1시간이 걸려 오전 9시 6분, 대천천천 노둣길 북쪽에 힘겹게 도착했다. 이곳에서 서해랑길 60코스 시점까지 7.5km, 그렇다면 길손의 걷는 속도로 11시 10분 이전에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버스 출발 시각을 지켜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남은 거리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장담할 수 없기에 완전히 안도할 수는 없다.
보령시의 행정구역명이 복잡하다. 행정동 아래 법정동, 그 아래는 통으로, 그 아래 마을로 구별된다. 해안로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행정동은 대천1동~5동, 대천5동 아래 여러 법정동이 있으며, 그 중 내항동은 다시 통으로 구분되며 통 아래에 여러 마을들이 독자적으로 있다. 즉 보령시 대천5동 남곡3통 남서마을, 밤골마을... 이렇게 구별되는 것을 버스정류소 이름을 통하여 확인하였다.
대천항까지의 해안로를 따라가는 최고의 기쁨은, 1.활짝 열린 파란 바다, 2.삽시도와 원산도, 안면도 섬들, 3.남쪽 보령시 주교면 고성리와 송학리 일대와 고정국가산업단지 송학도 신보령화력발전본부와 보령화력발전소, 이들 풍경을 감상하는 일이다. 이들 풍경을 감상하며 가슴은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몸은 바다를 날아간다. 대천항에서 원산도로 이어지는 해저터널을 가늠하고, 북쪽에서 내려온 태안군 안면도와 북쪽으로 올라간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가 이어지는 원산안면대교 흰 주탑 2개를 끊임없이 보게 된다. 새벽 어둠 속에 살피지 못한 안면도를 볼 수 있음에 감격한다. 기쁨을 안고 해안로를 따라가면 해망산 아래 군헌갯벌체험장에 이른다. 해망산에는 군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해망산(海望山,114.3m)은 고려 말 전라우도 도만호(都萬戶) 김성우 장군이 병사로 하여금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게 한 산이었다고 하여 산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대천항 동쪽 해안이 물양장 신설 및 확장 등으로 공사가 분주하다. 보령시가 대천항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모양이다. 대천항 중심지로 들어서 연안여객선터미널 앞을 통과한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대천항 해안으로 나가서 풍경을 조망하고 대천항수산시장에서 회를 떠서 소주를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대천천 노둣길로 대천천을 건넜더라면 1시간의 여유가 생겨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0시 20분이 지났다. 여전히 시간에 쫓기며 대천항을 벗어나 대천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해안산책로 뎈길 입구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번 장맛비에 뎈길이 위험하게 되었다고 해안산책로 뎈길을 통제한다. 허~ 참~ 이번 탐방길을 두 번씩이나 우회하게 된다. 거리와 시간이 늘어나 더더욱 힘겹다. 해안산책로 입구가 고려 말 김성우 장군이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도착한 흑포일 것이며 그 위 언덕이 상주막일 것이라 추정한다. 흑포(黑浦)는 왜구들이 죽으면서 흘린 검붉은 피가 내를 이루었다고 하여, 상주막(常住幕)은 고려군이 왜구들의 침략에 대비하여 소부대로 파견되어 항상 주둔하였던 곳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현재의 이곳 지명 대천5동 신흑동(新黑洞)은 흑포(黑浦)에서 기인한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투덜투덜, 우회하는 언덕으로 올라간다. 이게 무슨 꼴인가? 그런데, 언덕에서 뜻하지 않게도, 오늘 최고의 풍경을 감상하게 되었다. 보령 앞 바다, 원산도와 안면도, 천수만 입구의 여러 섬들, 보령 고정국가산업단지, 주교면 봉대산 산줄기와 송학리 일대, 고정리의 고만(高巒), 아! 최고의 감격은 이렇게 우연하게 오는가? 첫 번째 힘겨운 우회 코스에서 보령을 대표하는 소설가 이문구의 고향 마을 관촌을 조망하며 가슴 뜨거웠고, 두 번째 투덜거리는 우회 코스에서 원산도와 안면도가 이어지고 천수만이 펼쳐지는 풍경을 감상하며 길손은 언덕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이런 대목에서는 목청껏 울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감격의 순간에 들떠 대천해수욕장 가는 우회로를 따라간다.
우회하여 얻은 또 하나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대천항1길 산길을 내려가면 대천항로와 만난다. 그곳에서는 서해랑길과 재회하는 짚트랙 승강장과 해상레일바이크 탑승장, 그리고 바다에 떠있는 섬 다보도가 보인다. 대천항1길과 대천항길에 둘러싸인 빈 터는 넓은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그곳에 고려 말 전라우도 도만호(都萬戶) 김성우(金成雨)(1327~1392) 장군의 전첩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우회하하지 않았다면 확인하지 못했을 전첩사적비를 만나니 이 또한 얼마나 큰 기쁨인지. 지난번 59코스에서 대천해수욕장 광장에 세워진 김성우 장군 관암사적비(冠巖史蹟碑)를 못 보아서 아쉬움이 컸다. 그날 지칠 대로 지쳐 탈진 상태였기에 관심조차 없었는데 탐방 후 김성우 장군이 갓바위에서 왜구를 물리친 사실과 갓바위사적비가 세워져 있음을 알고서 그곳을 찾아가지 못했음을 아쉬워만 했다. 이번에도 우회하지 않았더라면 이 전첩사적비를 확인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투덜투덜 우회한 노고에 큰 보람을 안긴 김성우 장군 전첩사적비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풍선처럼 둥실둥실 떠오른다. 대천해수욕장은 외면만 화려한 게 아니라 뿌리 깊은 역사적 영광의 유적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보령 지역과 대천해수욕장의 새로운 발견에 길손의 가슴에서는 이곳이 더욱 더 아름답게 빛난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3.5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11분
대천천 위쪽으로 우회하기 서해안고속도로 대천2교 아래 제방길을 지나다가 밀물에 잠긴 대천천 노둣길을 내려보았다.
대천방조제 제방길을 따라 대천천 상류로 올라간다. 오른쪽에 옥마산, 왼쪽에 성주산 왕자봉, 성주산 상봉은 왼쪽 뒤에 있다.
보령시 대천2동 간척농지 푸른 들녘이 펼쳐지고 위쪽에 장항선 철도가 지나간다. 오른쪽에 봉황산, 중앙에 배재산, 그 왼쪽에 진당산, 그 뒤에 오서산이 가늠된다.
대천천을 가로지르는 장항선 철교를 열차가 달린다. 중앙에 옥마산, 왼쪽에 성주산 왕자봉이 형제처럼 다정하다.
보령시 중심지 대천동 일대가 옥마산 아래 대천천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오른쪽은 장항선 대천천 철교이다.
보령시 대천2동 동부아파트 건물 뒷산은 봉황봉, 그 오른쪽 지역이 관촌마을로 이문구 작가의 소설 <관촌수필> 배경지이다.
대천2동은 봉황산 아래 갈머리, 갯뻘모탱이, 관촌, 소미 등 자연부락을 묶어 1914년 보령군 대천면(大川面) 10개 리로 출발하여, 1986년 대천시 대관동(大冠洞)으로, 1995년 보령시 대관동으로 변경되었다가 1999년 대천 지명 복원 차원에서 ‘대천2동’으로 변경된 데에서 유래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천방조제로 왼쪽에 구세군대천교회, 맨 뒤에 옥마산이 보인다. 중앙로를 가로질러 대천방조제로를 따라간다.
대천2동에서 대천1동으로 넘어왔다. 대천방조제로에서 쇳개포구 인도교 입구로 진입한다.
쇳개는 대천천 하구(河口)로, 서해의 포구이자, 대천장 관문이었다. 대천항과 장항선이 열리면서 그 관문 역할을 잃고 말았지만, 한때 군산-인천을 오가는 정기 여객선 한천환(漢川丸), 대천환(大川丸)이 통행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장날이면 주변 섬에서 장배가 들어와 해산물을 공급하고 생활필수품을 가져 가기도 하여 대천장이 크게 번성하였다고 한다. 옛 문헌에는 해소포(蟹所浦) 또는 금포(金浦)라고 씌어 있지만, 흔히 쇳개라고 더 많이 불려졌다. 금포는 갯벌을 이용한 전통적인 자염을 만드는 곳을 말하는데, 이렇게 '하얀 소금(素金)이 만들어지는 포구'에서 쇳개라는 말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쇳개포구'라는 지역의 유산을 활용하여 시민의 휴식공간인 역세권광장, 대천역과 구시가지를 연결하는 인도교가 조성되어 걸어서 쇳개를 가까이 볼 수 있게 되었다.(설명안내판)
대천1동에서 쇳개포구 인도교를 건너 대천4동으로 넘어간다.
쇳개포구 인도교 주탑은 물의 파동과 돛 그리고 물의 길을 상징화한 것이다. 쇳개포구는 보령시의 삶의 가치와 애환을 담고 있다. 구시가지와 대천역사를 연결하는 인도교의 주탑부는 포구의 물길 속 오고가는 배들의 돛의 모양과 보도교 아래에 흐르는 물이 갈라지는 형태를 형상화하여 상징하는 조형물을 설치하였다. 쇳개포구는 과거에 대천시장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많은 장배들이 들어와 해산물과 생필품을 공급했다.(설명안내판)
대천동 중심시가지를 흐르는 대천천(한내)을 남대천교가 가로지르고 중앙 뒤에 옥마산이 솟아 있다. 건너편 위쪽은 명천동이다.
1986년 대천시 승격과 더불어 법정동인 명천동(鳴川洞)과 궁촌동(宮村洞)을 합하여 행정동인 흥덕동(興德洞) 관할에 두었다. 행정동인 ‘흥덕동’의 명칭은 흥덕굴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후 1999년 7월 20일 지명도가 높았던 대천의 지명을 살리기 위해 흥덕동을 ‘대천4동’으로 변경된 데서 유래하였다. 대천4동의 2개 법정동은 명천동과 궁촌동이다. 명천동은 수청사거리에서 너분내[동대동과 명천동의 경계를 이루는 내]로 동대동과 경계한다. 남쪽으로는 궁촌동으로 흘러드는 궁촌내로 남포면과 경계한다. 자연마을은 명암·흥덕굴·느랏·으름내[이천]·맷독거리·수청거리 등이 있다. 궁촌동은 궁들[굼들] 가운데 형성된 마을이므로, 굼마을 또는 궁말·궁촌(宮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흥동(興洞) 일부를 병합하여 ‘궁촌리’라 해서 대천면에 속하였다. 북쪽 경계는 대천천(大川川)이며, 동쪽 경계는 옛 수청삼거리로 통하는 도로이다. 따라서 옛 철도 서쪽으로 궁촌동과 이어지는 취락 중에도 일부는 명천동에 속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쇳개포구 인도교에서 대천천 하구를 바라본다. 장항선 철교가 대천천을 가로지르고, 왼쪽에 궁촌천 내항교가 보인다.
보령시 대천4동 궁촌동 '해안로'로 넘어왔다. 해안로 건너편에 보령시 공공급식센터가 있다.
대천4동 궁촌동에서 궁촌천의 내항교를 건너 대천5동 내항동으로 넘어간다. 해안로 건너편에 대천역전장례식장이 있다.
대천5동 내항동 해안로에서 대천천 건너 대천2동 시가지를 바라본다. 구세군대천교회가 왼쪽에 보이고 중앙 뒤에 봉황산, 그 왼쪽에 봉황봉, 봉황봉 아래 이문구의 소설 <관촌수필>의 배경지 관촌마을이 보인다.
대천천 하구가 넓다. 장항선 철도가 대천천을 가로지르고, 대천천 건너편 구세군대천교회와 관촌마을 동부아파트가 보인다.
해안로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니 대천5동 내항동 푸른 들녘이 펼쳐져 있다. 들녘 뒤쪽을 서산골 안터마을이라 이르는 듯.
해안로를 따라 대천농협자동화육묘장 입구를 지나 노둣길 입구를 향하여 계속 서진한다.
해안로 내송마을 입구에 통계청 보령사무소가 있다.
충청지방통계청 보령사무소는 보령 지역의 통계 생산 및 통계자료 제공을 통해 국가 기본 통계의 작성, 국내외 주요 통계 정보 및 통계 데이터베이스 구축, 간행물 보급 및 자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1963년 1월 보령군청에 통계요원을 배치하여 통계조사 업무를 수행하도록 한 것을 시작으로, 1975년 8월에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통계사무소를 설치하여 보령·부여·홍성에 각 1명, 서천에 2명을 위탁 근무하도록 하였다. 1991년 1월에는 통계국이 통계청으로 승격함에 따라 통계청 충남통계사무소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1998년 7월 통계청 충남통계사무소 보령출장소를 설치하였으며, 2006년 7월 대전충남지방통계청 보령출장소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2009년 2월 충청지방통계청 보령사무소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보령시, 부여군, 서천군 3개 지역을 관할하고 있다. 조직은 소장 아래 경제사회팀, 어업팀, 농업팀 등 3개 팀으로 구성되어 있다.(디지털보령문화대전)
서해안고속도로 대천2교 위쪽에 보령대교 건설을 위한 가교 공사가 한창이다.
보령대교 건설을 위한 가교 공사가 한창이다. 대천천 건너 맨 오른쪽은 배재산, 중앙은 진당산, 맨 뒤쪽에 오서산이 보인다.
서해안고속도로 대천2교 아래 대천천 노둣길이 바닷물에 잠겨 있다.
뒤쪽의 산은 왕대산이며 중턱에 위치한 사찰 왕대사가 보인다. 행정동은 대천1동~5동, 대천5동 아래 여러 법정동이 있으며, 그 중 내항동은 다시 통으로 구분된다. 이곳은 내항3통 지역이다.
노둣길이 잠겨서 대천천 북쪽에서 쇳개포구까지 올라가 대천천을 건너 대천천 남쪽으로 넘어와서 이곳으로 내려왔다.
오른쪽 뒤에 보령시 주교면 송학도의 신보령발전본부 흰 건물, 바다에는 원산도가 북쪽으로 길게 누워서 북쪽에서 내려온 태안군 안면도와 원산안면대교로 이어져 있다. 원산안면대교 흰 주탑이 보인다. 원산도 왼쪽의 섬은 삽시도이다.
서해랑길 60코스 시점까지 7.5km가 남아 있다.
왕대산이 누에처럼 길게 누워 있다. 정상 오른쪽 중턱에 위치한 왕대사가 보인다. 이곳에서 1km 지점이다.
왕대사(王臺寺)는 보령 시내를 관통하는 대천천과 서해가 만나는 지점에 얕게 솟아난 높이 123.9m의 왕대산(王臺山) 정상부 능선 바로 아래에 있다. 왕대사는 근래 새롭게 조성된 대웅전과 요사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신라의 천년 사직을 넘기고 돌아오다 머물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대천왕대사마애불(大川王臺寺磨崖佛)은 왕대사의 서쪽 화강암 암벽에 음각으로 새겨진 마애불 입상이다. 마애불은 심하게 풍화되어 있어 불상을 선명하게 관찰하기는 어럽다. 1990년 9월 2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노둣길을 건너지 못한 것이 아쉬워 자꾸 뒤돌아본다. 서해안고속도로 대천2교 너머로 보령시 동쪽의 산줄기가 보인다.
대천방조제가 길게 이어져 있다. 중앙의 봉대산을 중심으로 주교면 송학리와 은포리가 펼쳐져 있으며, 중앙 오른쪽의 태봉산 아래는 주포면 연지리 일대이다. 맨 왼쪽 송학도에 신보령화력발전본부 흰 건물이 호텔처럼 솟아서 기준점이 되어 준다.
생선구이 전문 음식점 해안도로와 해물탕 전문 음식점 장벌집 앞을 돌아 버니프렌즈 호텔로 이어진다.
버니프렌즈(BUNNY FRIENDS) 호텔 앞 가무락양식장 입구를 거쳐 해안로를 계속 따라간다.
맨 왼쪽에 삽시도, 그 오른쪽에 원산도, 중앙 뒤에 원산도와 안면도를 잇는 원산안면대교 주탑, 그 오른쪽 앞에 송학도의 신보령화력발전본부, 오른쪽에 송학3리 송학선착장과 대천방조제 주교배수갑문이 어림된다.
맨 왼쪽 뒤에 원산안면대교 흰 주탑 2개, 송학도의 신보령화력발전본부는 위치 확인의 기준이 된다. 대천방조제가 왼쪽 주교배수갑문으로부터 오른쪽 대천배수갑문으로 길게 이어진다. 산줄기는 중앙에 우뚝한 봉대산이 오른쪽 태봉산으로 이어진다.
버섯 모양 지붕의 357카페 앞에 천국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저녁노을을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인 것 같다.
보령시 지역을 탐방하며 대천동의 지명이 혼란스럽다. 법정동, 행정동, 마을 이름 등이 혼동스럽다.
충청남도 보령시에는 대천1동, 대천2동, 대천3동, 대천4동, 대천5동 등 5개 행정동이 있다. 보령시의 경우 인구가 적은 여러 법정동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행정동을 설치했거나, 하나의 법정동이 그대로 하나의 행정동이 되고 있다. 대천5동은 신흑동·요암동·남곡동 및 내항동을 법정동으로 구성하고 있다. 1986년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면서 법정동인 신흑동(新黑洞)을 신설된 행정동인 현포동(玄浦洞) 관할에, 법정동인 남곡동(藍谷洞)·내항동(內項洞)·요암동(蓼庵洞)을 합하여 신설된 행정동인 왕대동 관할에 두었다. 행정동인 현포동은 대천해수욕장의 옛 이름인 ‘현포’를 딴 것이고, 왕대동(王臺洞)은 동의 중앙에 있는 왕대산(王臺山)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98년 10월 28일 왕대동이 현포동으로 통합되었다. ‘대천5동’ 명칭은 1999년 현포동이 대천5동으로 변경된 데서 유래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 대천항에서 오른쪽 원산도는 여객선으로 또 해저터널을 이용한 자동차로 이동할 수 있다. 중앙 뒤에 삽시도가 보인다.
삽시도(揷矢島)는 화살이 꽂힌 활을 닮은 섬이라고 하여 ‘삽지’라고 불렸던 섬이다. 대천항에서 하루에 세 번 운행되는 여객선으로 약 40분 거리에 있다. 충청남도에서 세 번째로 크며, 해안선을 따라 보이는 기암괴석과 울창한 소나무숲이 인상적이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물망터와 면삽지를 비롯하여 백사장과 청정해역으로 유명한 거멀너머해수욕장과 진너머해수욕장이 있어 피서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특히 최고의 명품 머드 바지락이 생산되고, 봄과 여름에 제주난류의 북상으로 주변 연안 일대에서 까나리, 새우, 멸치잡이가 성하고, 해삼과 전복도 많이 산출된다. 5㎞의 삽시도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하루 두 번 삽시도에서 떨어져 면(免)한다는 ‘면삽지’, 밀물 때는 바닷물 속에 잠겨 있다가 썰물이 되면 시원한 생수가 나온다는 ‘물망터’, 그리고 솔방울을 맺지 못하는 외로운 소나무 ‘황금곰솔’을 둘러보면서 트레킹하기에 적합한 길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뜨거운 여름철에 식수가 부족하다. 이곳에서 보충하거나 끼니를 때울 수 있다.
남곡3통 밤골마을 입구에 숙박촌과 식당가가 조성되어 있다. 해안로가 오른쪽 끝 해망산 아래 갯벌체험장을 돌아간다.
남곡3통 밤골마을 입구의 숙박촌과 식당가를 통과한다. 서해랑길은 대천항까지 계속 해안로를 따라간다.
남곡3동이 아니라 남곡3통이다. 행정동 대천5동은 법정동 남곡동을 포함하는데, 법정동의 하위 구분은 통으로 하는 것 같다.
해안로 크로바농원 입구에 선진냉동(주)와 성원냉동(주)가 자리하고 있다.
보령 잎 비다기 사랑스럽디. 중앙에 고정국가산업단지 신보령화력발전본부, 그 오른쪽 뒤에 보령화력발전소, 오른쪽 산봉은 주교면 고정리 국수봉과 고만 지역이고 맨 오른쪽은 주교면 송학리 지역이다. 맨 왼쪽에 원산도, 그 오른쪽에 원산안면대교, 그 위쪽에 안면도가 북으로 이어지며 그 안쪽에 천수만을 형성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왼쪽은 대천방조제, 오른쪽은 해안로, 그 사이로 대천천이 서해 바다로 흘러든다. 중앙 맨 뒤에 오서산, 그 앞에 진당산, 그 오른쪽에 배재산, 맨 오른쪽 뒤에 봉황산이 가늠된다. 오른쪽 뒤 해안로의 건물 지역은 숙박촌 및 식당가 거리이다.
해안로 해망산 오른쪽 아래 갯벌에 군헌갯벌체험학습장이 조성되어 있다. 해망산에 군사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고려 말 김성우 장군이 고려 병사로 하여금 왜구의 침입을 망보도록 하였다고 하여 해망산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해망산갯벌은 갯벌이 있는 남곡동 해망산(海望山,114.3m)의 지명을 따라 부른 것이다. 해망산갯벌은 해망산 앞에 있는 갯벌인데, 대천천의 하구에서 은포리갯벌과 연결되어 있다. 해망산은 요암동과 남곡동 사이의 산이다. 동서로 두 봉우리를 이루고 있으며 바다에 면해 있는 산으로, 주변에서 가장 높아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라서 군부대가 들어서 있다. 바다를 지켜본다는 의미로 ‘해망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해망산갯벌은 지형이 완만하여 해안으로부터 육지쪽으로 수 ㎞에 걸쳐 있다. 그러나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갯골[갯고랑]을 건너는 경우가 있어 안개가 발생하면 위험하다. 해망산갯벌은 바지락, 맛 등의 해산물이 풍부하다. 해망산갯벌 앞에 군헌어촌계 갯벌체험장이 있는데, 갯벌체험장에서는 조개를 직접 채취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디지털보령문화대전)
해망산은 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산봉은 해망산 북봉이며 남봉에 군사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전망대의 조형물은 얼굴 모습이다. 원산도, 원산안면대교, 안면도, 고정국가산업단지의 신보령화력발전본부와 보령화력발전소가 모두 조망된다. 토정 이지함 묘가 있는 고만산소가 오른쪽 국수봉 아래 있을 것이다.
대천항 동북쪽 끝에 돌제물양장을 신설하고 확장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공사장 출입구 앞을 통과한다.
행정동 대천5동에 속하는 법정동 신흑동(新黑洞)의 1통 강당마을이다. 버스정류소가 왼쪽에 있고 앞쪽 언덕은 펜션촌이다.
대천5동 신흑1통 강당마을 노인회관 앞을 거쳐 계속 해안로를 따라간다.
언덕에 펜션촌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을 통나무마을이라 이르는 것 같다.
펜션들이 모두 통나무로 지어진 것일까? 이 펜션촌 마을을 통나무마을이라 이르는 것 같다.
어구수선장 입구 오른쪽 지역은 대천항 개발을 위한 준설토 투기장이다.
생앵산 북쪽 산자락에 기계 유씨 진사공파 신흑종중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여객선터미널이 있는 대천항은 남쪽에 있으며, 그 북쪽 해안에 어선선착장이 자리한다.
대천연안여객선 터미널 북쪽 해안에 어선선착장이 있다. 바다 건너는 주교면 송학리 지역으로 오른쪽에 봉대산이 보인다.
오른쪽은 대천항중앙길, 서해랑길은 횡단보도를 건너 왼쪽 대천항4길로 이어가다가 바로 오른쪽으로 꺾어간다.
대천항4길로 들어오면 충청남도 수자원연구소&귀어학교 건물이 오른쪽에 있다.
대천항4길을 따라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 방향으로 이어간다.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 오른쪽 해안에 대천항 여객선선착장이 있다.
대천항은 연안에서 조업하는 어선이 정박하고, 출어 준비와 어획물을 양륙하는 어항으로서의 기능, 보령시 인근의 주요 섬들을 운항하는 선박이 입항·출항하는 연안항 등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다. 대천항의 여러 기능 중 인근의 주요 섬들을 대상으로 한 연안항으로서의 기능은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을 통하여 보령시 관내 육지와 주요 섬들 간에 화물 및 여객이 출입하고 있다.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은 1990년 당시 대천시 신흑동 연안의 여러 섬들을 오가는 주민 및 관광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의 건립 이후 터미널이 들어선 대천항에는 터미널 옆에 유람선터미널이 들어서고, 터미널 인근에는 크고 작은 수산물 판매시설들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일반 서비스 시설들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는 원산도, 효자도, 삽시도, 장고도, 고대도, 호도, 녹도, 외연도로 가는 여객선을 탈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천항4길을 따라가다 뒤돌아 보니 높이 93.5m 생앵산이 아담하다. 생앵산 남쪽 구릉지에 조선 시대 주거지와 분묘 유적인 신흑동 유적이 있으며, 발굴 조사 후 보령스포츠파크가 조성되었다고 한다.
언덕에 대천5동 신흑8통 지역에 시영아파트가 자리한다.
왼쪽 언덕에 오션브리즈텔, 순천모텔 등 숙박시설이 있고, 중앙에 영우 바다마을아파트가 있다.
'대천항로'에 대천항꽃게 조형물, 건너편 대천항수산시장 입구에 국도36호기점 대천항 표석이 세워져 있다.
보령 앞 바다가 꽃게 주산지인 듯 꽃게 조형물을 조성하고, 달빛등대로라고 명명하였다.
국도제36호선의 기점이 대천항으로 보령, 청양, 공주, 세종, 청주, 증평, 음성, 충주, 단양, 영주, 울진으로 이어진다.
대천항 연안여객선터미널 왼쪽에 조성되어 있다. 건어물, 수산물, 횟집(회타운‧회센터) 등이 있다.
보령수협 앞쪽에 대천5동 신흑7통 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은 일반적으로 대천항마을이라 이르는 것 같다.
'대천항로' 끝에서 서해랑길은 왼쪽 골목 대천항2길로 진입하여 언덕을 올라간다.
옥상에 조성된 조형물 '푸른바다의 전설'이 밤에 빛날 것이다. 앞쪽 서해종합천막상사 앞에서 왼쪽 언덕길로 올라간다.
대천항2길 언덕을 올라 대천항1길과 만나는 지점까지 직진한다.
대천항2길에서 대천항1길로 나가 오른쪽으로 꺾어 해안으로 나간다.
대천항1길을 따라 해안으로 내려간다. 이 포구가 흑포가 아닐까? 고려 말 김성우 장군이 처음 도착한 곳으로, 고려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한 왜구들의 피가 검붉게 내를 이루었다고 하여 흑포라는 지명을 얻게 된 포구가 이곳일 것이며, 위 언덕이 고려 병사들이 항상 주둔하여 상주막이라고 불리게 된 곳이라고 추정한다.
해안에 스카이바이크 레일이 설치되어 해상스카이레일바이크가 운행되고 있다. 서해랑길은 해안뎈길을 따라 대천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데 장맛비에 뎈길이 위험하다고 폐쇄하여 우회하라고 한다. 바로 앞서 간 일행은 통과하였는데, 어쩔 수 없다.
대천항2길과 만난 지점으로 올라와 우회로를 올려보았다. 대천항1길을 따라 '환상의바다' 리조트 앞을 통과하여 오른쪽 언덕으로 올라 산길을 돌아간다.
해안산책로 입구에서 대천항1길을 따라 올라와 뒤돌아본다. 맨 왼쪽에 삽시도, 중앙에 원산도, 오른쪽에 안면도가 보인다.
'환상의바다' 리조트 C동 옆의 리조트 부속건물은 1층 세미나실, 2층 영화관, 3층 공연장으로 운영되는 것 같다.
이 언덕 지하에 원산도를 잇는 해저터널 원산대로가 지나가고 있다. 대천항 바다 건너편에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와 송학리 일대가 분명하게 확인된다. 맨 오른쪽에 봉대산과 태봉산, 중앙에 송학리 해변, 중앙 뒤 죽도 뒤의 고정리 해안, 그 왼쪽에 솟은 국소봉과 이지함 묘가 있는 고만산소, 맨 왼쪽 송학도의 신보령화력발전본부, 그 오른쪽 뒤 보령화력발전소가 확인된다.
맨 왼쪽에 원산도, 그 오른쪽에 효자도, 그 뒤에 안면도, 원산도와 안면도를 잇는 원산안면대교, 오른쪽 뒤 보령항 앞쪽 천수만 입구의 오천면 소속의 여러 섬들, 고정국가산업단지의 시설물들이 모두 확인된다. 보령해저터널은 이 언덕 지하를 통과한다.
대천항1길 언덕을 올라와 대천항1길 산길을 따라 대천해수욕장 방향으로 내려간다.
대천항1길에서 대천항로로 내려와 서해랑길 재회 지점을 바라본다. 바다에는 다보도가 보이며, 오른쪽 높은 곳이 짚트랙 승강장이고, 그 왼쪽 낮은 건물이 해상레일바이크 매표소와 탑승장이다. 저곳이 서해랑길 정코스 해안산책로 뎈길 출입구이다.
대천항로 오른쪽에는 넓은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다. 그곳에 김성우장군 전첩사적비, 그 오른쪽에 김성우장군 전첩사적부비, 왼쪽에 이 지역 연대장 최학수 대령이 쓴 김성우장군 전첩추모사비가 세워져 있다.
김성우(金成雨)[1327~1392]는 고려 말 전라우도 도만호(都萬戶)로, 보령을 황폐화시킨 왜구를 소탕하고 보령에 정착한 광산(光山) 김씨의 입향조이다. 조선 건국 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신념으로 자결하였다. 김성우가 고려 말 전라우도 도만호 초토사(招討使)로서 왜구를 토벌하라는 명을 받아 충청도 서해안을 지날 때, 보령 지역이 왜구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것을 보고 왜구를 소탕하고자 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따르면, 이때 홀연히 신마(神馬)와 보검이 나와 김성우를 보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신마가 나온 봉우리는 옥마봉, 보검이 나온 동리는 비도라 한다. 뿐만 아니라 김성우의 군사가 들어온 곳을 군입포, 김성우가 병사를 매복시킨 곳은 매복, 김성우가 소탕한 왜구의 시체가 개미처럼 운집한 곳은 의평리라 하였는데 이렇듯 김성우의 행적이 곧 충청남도 보령 곳곳의 지명이 되었다. 김성우는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충청남도 보령에 사패지(賜牌地)를 하사 받았다. 김성우는 황해도 개경 출신이었지만, 좋은 땅이 황폐화된 것을 안타깝게 여겨 보령 청라동에 집을 마련하여 정착하였다. 그리고 초토영전사로서 황폐화된 충청남도 보령 지역의 땅을 영전하며 뿔뿔이 흩어졌던 백성들이 들어와 살 수 있도록 하였다. 김성우는 발산(鉢山), 마산(馬山), 청소(靑所)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땅을 소유했으며, 상당한 재산을 형성하였다. 이들 광산 김씨들은 ‘청라 김씨’라고도 불렸으며, 조선 초기 보령 지역의 가장 유력한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던 중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건국 세력들이 김성우를 불러들이고자 하였다. 이에 김성우는 불사이군의 충절로 그 청을 끝까지 거절하고 자결하였다. 생전에 김성우는 ‘재물을 탐하지 말 것’과 ‘비록 적군이라 하나 왜군을 많이 죽인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니, 후손들은 덕을 많이 베풀라’는 당부를 남겼다. 그에 따라 후손들은 보령에 세거하며 재물에 뜻을 두지 않고, 주변에 덕을 베풀었고, 사람들은 김성우의 후손 광산 김씨를 충청남도 보령 땅의 주인이라 일컬었다. 김성우의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산1-1번지에 있다. 보령문화원 주관으로 해마다 제향을 올리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천항로에서 대천항10길로 들어와 짚트랙 승강장 입구에서 서해랑길과 재회하여 이제부터는 서해랑길을 따라간다.
해수욕장10길은 짚트랙 승강장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진다. 해안산책로 뎈길은 짚트랙 승강장 입구 앞에서 해안으로 나간다.
서해랑길은 바로 앞 대천해수욕장 분수광장을 거쳐 머드광장까지 해수욕장10길을 따라 이어진다.
해수욕장10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다. 바로 앞 왼쪽에 해상레일바이크 매표소와 탑승장, 그 뒤에 짚트랙 승강장이 있으며, 오른쪽에 공주대학교 수련원 건물이 있다.
서해랑길은 분수광장을 가로질러 해수욕장10길을 따라간다. 왼쪽에 윤형주 가수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분수광장 입구에 분수광장 표석이 세워져 있다.
사랑의 의자 조형물 하트 모양 안으로 바다의 다보도(多寶島) 섬이 들어온다.
대천해수욕장의 '대천'과 'BEACH' 문자 조형물과 갈매기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고, 맨 오른쪽에 삽시도가 가늠된다.
분수광장 남쪽에 윤형주 가수의 '조개껍질 묶어(라라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불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저멀리 달그림자 시원한 파도소리/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오질 않네// 아침이 늦어져서 모두들 배고파도/ 함께 웃어가며 식사를 기다리네/ 반찬은 한두 가지 집생각 나지만은/ 시큼한 김치만 있어주어도 내게는 진수성찬// 밥이 새까맣게 타버려 못 먹어도/ 모기가 밤새 물어도 모두들 웃는 얼굴/ 암만 생각해도 집에는 가얄텐데/ 바다가좋고 그녀가 있는데 어쩔 수가 없네// 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라라/ 라라 라라 라라라 라라 라라라라라라
노래비 뒷면에는 '조개껍질 묶어(라라라) 작사·작곡의 배경'과 윤형주 가수의 약력이 적혀 있다.
1970년 8월 초 당시 의대생이었던 학생 가수 윤형주(尹亨柱)는 의대생 친구들과 함께 이곳 대천해수욕장에 있었던 친구네 별장에 놀러왔다. 여기에서 만난 여대생 네 명과 시간을 보내던 중 자신들의 노래를 만들어 보고 싶었던 윤형주는 친구들이 급히 만들어준 오선지에 떠오르는 악상과 가사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불과 30분 만에 이 곡이 완성되었고 이때부터 이들이 부르기 시작한 이 노래는 큰 인기 속에 그 시대의 모든 젊은이들이 함께 불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즐겨 부르는 국민의 애창곡이 되었다.
윤형주 : 1947년 11월 19일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의예과, 경희대학교 의과대학을 다니던 중 1967년 서울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친구 송창식을 만나 한국 통기타 문화의 효시가 된 듀엣 팀 「트윈 폴리오」를 결성하여 청년문화의 개척자들이 되었다. 「하얀 손수건」, 「웨딩 케잌」, 「축제의 노래」 등에 이어 「어제 내린 비」, 「우리들의 이야기」, 「바보」 등 30여 곡의 히트 곡을 발표했다. KBS-TV 「젊음의 행진」, 「열린 음악회」, MBC-TV 「청소년 음악회」의 MC로도 활약했고, 「새우깡」, 「오란씨」, 「롯데껌」 등 1400여 곡의 CM SONG을 작곡했으며 서울올림픽 국제청소년 본부의 모든 행사를 감독하기도 했다. 현재 (주)한빛기획의 대표이사이며 한국 헤비타트, 한국 백혈병소아암협회, 인터내셔널 에이드 등의 홍보이사로 사회활동을 열심히 펼치고 있다. 2003년 7월에는 미국 카네기 홀 역사상 처음으로 한 가족이 무대에 오르는 「윤형주 패밀리 콘서트」를 가진 바 있으며 그는 시인 윤동주의 6촌 동생익리도 하다. 저서 「또 하나의 아름다움」, 「아버지와 아들」. 상훈 「동아광고대상」, 「KBS 가요 대상」, 카톨릭 「불우한 이웃 도운 연예인 상」 등 수상.
청주대학교 수련원과 충청남도교육청 해양수련원별관 앞을 거쳐 해수욕장10길을 계속 따라간다.
솟구치는 파도와 부서지는 물방울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바다에 다보도(多寶島) 섬이 떠 있다.
다보도(多寶島)는 대천해수욕장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無人島)로 기암괴석과 파도에 씻긴 하얀 차돌 해변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대천해수욕장 해변가에서 쉽게 육안으로 볼 수 있다. 오래 살던 주민들이나 옛 보령군 웅천면 주민들이 ‘다슬기암’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다보도(多寶島)’가 되었다고 한다. 보령시 신흑동에 있는 대천해수욕장 앞바다 4㎞ 지점에 있는 바위섬이다. 섬 밑에는 흰 자갈이 깔려 있어 경치가 아름다우며, 폭이 매우 좁은 섬이다. 기암괴석이 멋을 더하고 있으며 한쪽에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조약돌이 깔려 있고, 섬 전체가 해안사빈(海岸沙濱)[파랑 등의 작용으로 바닷가에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해안 지형] 없이 전부 돌과 자갈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인어 조각상이 날렵하게 하늘을 날고 있다.
대천해수욕장 모래밭이 길게 펼쳐져 있다. 건너편에 무창포해수욕장과 석대도, 그 오른쪽 뒤에 서천군 부사방조제, 그 오른쪽 끝에 춘장대해수욕장과 홍원항이 가늠된다. 고려 말 김성우 장군이 왜구를 섬멸할 때 머리에 쓰던 갓을 걸어 놓고 전투에 임하여 갓바위라고 불리는 곳은 해수욕장 끝에 있다고 한다.
'대천해수욕장' 한글 문자 조형물 뒤쪽 대천 바다에 다보도(多寶島) 섬이 떠 있다.
대천해수욕장은 1932년에 공식 개장하여 기반 시설과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1998년부터 개최된 보령머드축제는 ‘문화관광축제’로 지정되었으며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2022년에는 보령해양머드박람회가 7~8월 중 한 달여에 걸쳐 대천해수욕장 일원에서 개최된 바 있다. 천연적으로 빼어난 해수욕장의 조건에 걸맞게 각종 휴양 편의시설, 문화 예술 공간도 서해안에서는 으뜸으로 갖추고 있다. 대천해수욕장은 무창포해수욕장, 죽도 관광지와 함께 ‘보령 해수욕장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있다. 대천해수욕장은 서해안 최고의 휴양지이자 국제적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디지털보령문화대전)
사자 한 쌍을 거느린 여인이 환호하고 있다. 왼쪽 머드광장 남쪽 구석에 서해랑길 이정목과 60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있다.
서해랑길 60코스 시작점 표지판은 이곳에 있는데 서해랑길 60코스 안내도는 어디에 세워져 있을까?
대천해수욕장 머드광장 남쪽 끝 서해랑길 이정목과 60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서해랑길 60코스 역방향 탐방을 마친다. 오른쪽 뒤에 바다의 여인 조각상이 환호하고 있다. 왼쪽 뒤의 섬은 삽시도일 것이다.
서해랑길 60코스 역방향 탐방을 마치며 서해랑길 60코스 시작점 표지판과 함께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