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불교는 이상주의 세계관 아님
모든 색계가 자리이타적 마음의 표상
자연 모습 떠나 부처님 법성 볼수 없어
“이미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여 다함이 없도다.
강엔 달 비치고 소나무엔 바람부니, 긴 밤 맑은 하늘 무슨 할일 있을 손가?
불성계의 구슬은 마음의 인(印)이요,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은 몸에 있는 옷이로다.”
화엄사상에 의하면, 이 우주의 모든 것은 법성의 나툼이다.
부처님의 법이 아닌 것은 이 우주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라만상의 모든 것은 모두 부처님 법성의 몸이기 때문에
우주 자연계의 일체가 다 법당이다.
물질의 색과 달리, 눈에 안 보이는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으로서 여의주와 같고,
그 마음은 자리이타하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이익의 보배를 온 세상에 뿌리는 비와 같고,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의 자연계가 다 이익의 법칙을 나누어주려고 한다.
그러한 것은 모두 부처님의 법력 때문이다.
자연계의 본성이 이미 불성이니,
자연계의 모든 물질적 현상이 부처님의 자리이타적인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눈에 보이는 자연의 모든 색계가 이미 자리이타적인 부처님의 마음의 표상인데.
이 자연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떠나서 어디 가서 부처님의 법성을 볼 것인가?
마음의 구슬만 중요하지 몸에 있는 옷이나, 물질적 장식들은
별로 부처님의 진리와 무관한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부처님의 법은 중중무진하다.
조그만 한 개의 먼지도 다 부처님의 귀한 법을 담고 있기에
영가대사는 은연중에 이 세상에 귀하지 않는 것이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천명하려 한다.
결단코 얄팍한 이상주의를 천명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식자들은 그간 조선조 오백년 유행되어 온
한국 유교의 밑도 끝도 없는 이상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현실참여적인 관료출세주의를 버리고,
재야의 고매한 이상주의를 숭상하는 유학사상에 경도되어 왔었다.
유교는, 특히 한국 유교는 내 가문의 이기주의의 틀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공자의 유교가 그런 가문주의적 이기주의를 권장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의 유교가 특히 한국적 유교가
그런 혈연적 가문의 이기주의를 뿌리내리는 계기를 낳았다.
우리는 시급히 폐쇄적 가문주의와 혈연주의적 폐쇄사회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
불교는 이상주의적인 냄새를 다행히 지우려한다.
이상주의는 오히려 유교적 잔재가 남긴 표어일 뿐이다.
안으로는 엄청난 혈연주의를 낳으면서
겉으로는 명분적 이상주의를 내세우는 이중적 생각놀이가
오늘날 한국의 정신문화를 병들게 한 가장 큰 요인이다.
오늘날 한국의 대외적 명분주의가 속으로 곪아터진 이기심을 호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정치를 망쳐 놓고 우리의 현실적 실상을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사회에 이상주의적 신념에 속아 넘어간 어리석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어리석음을 경계하라는 부처님의 말은 참으로 우리시대에 적중한 말이다.
이상주의적 신념은 불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주관적 망상이다.
이상을 말하므로 그것은 늘 도덕적으로 정당해 보이는 것만을 골라 진술한다.
민주주의적인 권력은 대다수 국민의 지지로부터 오기에
다수 국민의 표를 얻기 위해 온갖 망상을 다 동원한다.
우리는 공자의 유교를 단순히 탓하지 않는다.
그 유교를 허울 좋은 명분의 망상으로 몰아간 선조의 유교문화를 거부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우리의 탐심(貪心)과 진심(嗔心)을 자극하는
선동의 어리석음에 속아 넘어가는 것을 경계할 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을 지혜스런 사람으로 착각하는 기현상이 아직도 한국엔 너무 많다.
여기에서 우리의 슬픈 비극의 미래가 생길 것이리라.
2012. 08. 14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