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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89)
하나님의 어린양
본문 : 요 1:29, 요1:35-36
요즘은 시들해졌지만....
한때 프로 권투가 남자들의 인기를
끌었을 때가 있습니다.
큰 타이틀이 걸린 경기는
공중파 방송에서 중계해 주었습니다.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홍수환, 박종팔, 장정구, 유명우....
아직도 마음을 아프게 하는 김득구 등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타이틀 매치가 열리면
꼭 먼저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타이틀 매치를 시작하지는 않습니다.
앞 서 소위 ‘오픈 경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 막 프로 무대로
첫발을 내딛은 사람들이나 ......
오늘 타이틀 매치를 치르는 주인공보다
한 수 아래의 선수들이 나와
오픈 경기를 치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환호하고
응원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
세례 요한은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400년 동안 선지자의 명맥이 끊어진
이스라엘 땅에 단비와 같이(혜성과 같이)
나타난 그 시대의 존경받는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기에....
헤롯왕도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복음서 기자들도 그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주인공으로
보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마치 ‘타이틀 매치(메인 경기)’에 앞서.....
‘오픈 경기’를 치르는 사람처럼 보도합니다.
앞서도 요한은 세례 요한에 대해
한 번 소개할 때에......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라고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 자신도
“나는 그 분의 신발 끈을
풀 수 없는 자”라고 고백함으로 .....
예수님의 길을 앞서 준비하기 위해
왔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가 곧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증거하러 오셨습니다.
그 분의 증거를 들어보십시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35-36
35절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절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이틀 연속 같은 말씀으로
증언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어린 양’.....,
그것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에 비유합니다.
보다 적절하고 훌륭하게 여겨지는
표현도 있었을 텐데요?
예를 들면.....
- “보라, 이스라엘의 왕이로다!”라든지,...
- “보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다!”라는
보다 훌륭한 표현들.........
예수님을 보다 영광스럽게 보이게
할 수 있는 표현들이 많이 있었는데,.......
굳이 예수님을 ‘어린 양’,
그것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에 비유한 것일까 ?
도대체 ‘어린 양’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린 양이 의미하는 것>.....
어떤 이는 “예수님이 어린양”이라고 하니까....,
단순히 어린 양은 순진하고 착하니까.....
예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예수가 어린양이다”이라는
이 한마디 정의를 위해서 .....
구약의 그 많은 사건이 이루어지고.....
그 많은 역사가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이 말의 뜻 하나를 설명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이 기록된 것입니다.
이 한마디 말을 증거하고자
수많은 제사와 피 흘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한마디 문장에
기독교의 모든 진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한마디 문장에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있고,
이 한마디 비유에 우리의 신앙고백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한 비유는 ....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가장 적적하게 나타내어 줄 수 있는 상징입니다.
즉 예수님이 ‘속제물’로 오셨음을.......
즉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오셨음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언어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는 낯선 상징이지만
그들에게는 익숙한 상징입니다.
수세기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희생제사로 드려진 어린 양에 대해서
다 압니다.
★ 아브라함 이야기 ...
그들이 그것에 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자기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모리아산으로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삭이 자기 아버지에게 ...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 양이 이삭을
대신하여 죽은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 출애굽 이야기 ...
출애굽 경험은 그들에게 어린양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져왔습니다.
그 때 문설주에 바른 어린 양의 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건너뛰게 하는
구원의 상징이었습니다.
★ 성전 제사 전통
그 후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희생 제사는
그들에게 어린 양의 의미를
분명하게 해주었습니다.
어린 양은 번제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
죽는 무죄한 대속물이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
어떤 다른 말로 그분을 표현하기보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갈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의 이 소개를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이해하게 됩니다.
첫째,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속죄양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하신 대속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성현들은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타인의 죄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가 ...
타인의 죄를 위해서 그 목숨을 버리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 땅 위에 있는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너의 죄를 위해 내가 죽는다”고
말한 이는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그 어느 누구도
타인의 죄를 위해 단 한 방울의 피를
흘린 이는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라고 말하시면서....
온 몸으로(머리와 손과 발과 허리)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대신 죽는다고
‘대속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형수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다고 합시다.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할 아들이
너무 측은해서 아버지가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대신 죽기로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 아들의 죄 값을
내가 대신 치르니 나의 아들을 살려 달라’는....
탄원서를 재판장에게 보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칩시다.
그것은 참으로 가슴 뭉클한
부정(父情)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식을 위해
목숨을 수백 번 버린다 해도 ....
그 대가로 자식의 죄가
탕감되거나 벗겨지지는 않습니다.
그 아버지의 대속의 죽음이
그 아들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세상을 향해
“나는 너희 죄를 지고 죽는다”고
외치며 죽었다고 한들,.....
그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구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속죄양이 아니므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를 능력도
자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속죄양이십니다.
마치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행사를
할 때에 공식 지정 식당이나
상품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신 '속죄 양‘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식적으로 지정하신
대속 양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내 죄를 치를
자격과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오직 그 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세상 죄를 지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어린 양
- 예수, 그 분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말씀의 사건화>....
우리는 항상 말씀을 내 안에 일어난
사건으로 사건화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수많은
상징과 비유와 이야기와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지식으로 알아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1세기의 예수 이야기가 21세기의
오늘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수 천 년 전의 이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말씀은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사건화되어야 합니다.
내 삶의 사건으로 만나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내 생애를 지배하는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오늘 나를 위한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건이 오늘 나의 죄를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씻기는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한
대속주로 오신 것을 믿고....
내 생애에 일어난 가장 위대한
축복과 사건으로 받아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의 이 소개를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이해하게 됩니다.
첫째,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속죄양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하신 대속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둘째, 그 분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죽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기 죄 값을 지고 죽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자기 죄 값을 지고
죽은 분이 아니십니다.
마치 어린 양이 죄 없이 인간들의
죄 값을 지고 죽었듯이
예수님도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나
인간의 성(性)을 매개로 삼지 않으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죄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원죄,
다시 말해 본질적인 죄가 없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태어나신 후에도 하나님이신 고로
육체를 갖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
죄를 범치 않는 완전한 삶을
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죄를 혼자 짊어지시고.....
죄 많은 인간들(좌우편의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대속 제물이 되려면 자기 죄가
있으면 안 됩니다.
자기 죄가 있으면 자기 죄 값을
치르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의 죄를 뒤집어 쓸고 죽으려면
자기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물이 될 짐승을 고를 때에도
흠 없는 것으로 골랐던 것입니다.
왜 그 분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까?
죄가 없으면서도 죄 값을 지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능히 대속자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이 소개를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이해하게 됩니다.
첫째,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속죄양입니다.
예수님은 유일하신 대속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둘째, 그 분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셋째, 그분은 완전하신 대속물이십니다.
그분의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신 까닭에
결코 죄를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뒤따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범했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히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나 그와 같은 제사는
완전한 제사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제물이 짐승인지라 불완전한
제물일 수밖에 없었고....
그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 역시
죄인인 불완전한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를 범할 때마다 쉬임 없이
반복하여 양을 잡아 피를 뿌리면서도 .....
본질적인 죄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본질적인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
친히 영원한 제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완전한 제물, 다시는 반복할 필요가 없는
유일회적인 완벽한 제물을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흠 없고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려짐으로서...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히10:10-14절 읽어라>
10절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절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절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절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의 효력이
언제나 일회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제물로 바쳐진 짐승이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나버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새로운 제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제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깨뜨리시고 영원히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분이 드린 제사의 효력 또한
영원해졌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제물이 되신
십자가의 제사는
‘완전한 제사’였음과 동시에
‘영원한 제사’였습니다.
<히10:17-18 읽어라>
17절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나아가 그 분은 완전한 제물이자
완전한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속죄 제물을 드리는 제사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는
세례 요한의 증언은....
오늘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하여 줍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성인군자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윤리나 도덕을
가르치시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세상을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당신을 위하여 죽으러 오셨습니다.
죄를 뒤집어쓰시러 오셨습니다.
죽음으로써 우리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죽기로 작정하고 ...
‘속죄(화목) 제물’로 땅에 오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결코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사랑)의 성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아니 흠 없이 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 은혜와 그 사랑을
오늘 나를 위해 주신 ......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축복으로
받아들이시고 감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